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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야권단일화 했으면 박정희 정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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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야권단일화 했으면 박정희 정권 없었다

[김재홍의 '박정희 권력의 DNA']<25> 민의는 쿠데타세력 반대

역대 대통령선거를 보면 제도가 불비하거나 정치권 잘못으로 국민 의사와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역사 방향이 틀어졌다. 그것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정치권의 책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사례가 1963년 10월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선거였다. 이 대선에서 박정희가 당선돼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한 제3공화정이 출범했다. 그것은 그 후 30여년에 이르는 군부독재의 기나긴 터널을 구축한 불행한 정치사의 씨앗이었다. 69년 3선개헌과 72년 유신 쿠데타, 그리고 박정희가 키워놓은 친위대 하나회 집단에 의한 12.12 군사반란과 5.17 광주시민학살의 뿌리가 닿아 있는 역사의 갈림길, 그것이 63년 대통령선거였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당초 군대로 복귀하겠다는 공약을 식언하고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 온 권력의지 실현에 나섰다. 쿠데타 주체세력 내부에서도 군대 복귀파와 정치참여파로 나뉘어 대립했으나 실권은 정치참여파 쪽에 있었다.

63년 허구적 민정이양이 이루어지기 전에 박정희와 육사8기의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오치성 옥창호 신윤창 등은 이미 정치공작과 권력의 도구를 갖추었다. 그들이 조직한 권력의 도구는 중앙정보부와 공화당이었다. 우선 중앙정보부는 정보통치와 정치공작을 맡는 일종의 비밀경찰에 해당한다. 나치독일 히틀러 정권의 게슈타포와 똑같았다.

쿠데타 세력도 정치에 나서기 위해서는 선거와 국회를 운영할 수 있는 정당이 필요했다. 그들은 쿠데타 포고령으로 다른 정당과 정치인들의 활동을 정지시켜 놓은 채 자신들의 정치적 도구인 공화당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양심불량이며 불공정 게임으로 기록된 공화당 사전조직 사건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들은 처음부터 군대 복귀를 생각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또한 공화당을 조직하기 위해 비밀자금을 만든 것이 이른바 4대의혹 사건이다. 권력을 장악한 그들은 이권을 나눠주면서 커미션을 챙겼고 그 검은 돈을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투입했다. 증권시장 조작, 도박기계인 파친코 수입허가, 일제 시발택시 수입허가, 워커힐호텔 건설허가가 그것이다. 권력형 부패비리의 원조도 그들이었다.

이렇게 정치일선에 나설 만반의 준비를 끝낸 뒤 이들은 63년 대통령선거에 임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그들은 정치에 초보 운전자였다. 수완있는 공작정치가 자리잡기 전이었다. 민간 정치인들로 구성된 야권이 잘만 했으면 박정희와 정치군인들의 집권은 첫 단계에서 봉쇄할 수 있었다.

박정희 반대표가 다수…후보단일화 잘 했으면 쿠데타정권 무산

63년 대통령선거 후보는 모두 6명. 이 중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외에 윤보선, 오재영, 변영태, 장이석은 모두 민간인 출신 야권 후보였다. 선거 결과 후보들의 득표수는, △박정희 4,702,640 (46.64%) △윤보선 4,546,614 (45.10%) △오재영 408,664 (4.05%) △변영태 224,443 (2.23%) △장이석 198,837표 (1.97%)로 나타났다.

이 득표 분포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5.16 쿠데타 주모자인 박정희에 대한 반대가 다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를 반대하는 후보들의 연합정치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때 지금처럼 야권 후보의 단일화가 이루어졌다면 당선자는 박정희가 아니라 야권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1963년 10월15일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투표하는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부인 육영수,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와 부인 공덕귀.

야권후보가 모두 하나로 단일화되지 않는다 해도 윤보선이 오재영이나 변영태의 표만 흡수하는 연합정치만 했어도 박정희 당선은 막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둘째로 선거과정에서 후보단일화나 연합정치보다도 제도적으로 민의를 정밀하게 반영할 수 있는 장치가 바로 결선투표다. 63년 대선 당시 만일 결선투표제가 있었다면 2차투표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이 맞붙게 된다. 거기서 나머지 후보들에 대한 지지표의 대부분은 같은 야권후보인 윤보선에게 옮겨졌을 것이 명확하다.

그러나 당시는 야권후보 단일화 같은 연합정치도 없었고 더구나 결선투표제가 알려지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선거사에서 이렇게 민의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경험하고도 지금껏 결선투표제가 도입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63년에 비해 역사적 의미는 덜하지만 87년 12월 치러진 대선도 똑같은 경우였다. 당시 후보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었다. 박정희의 후예로 민정당 후보인 노태우와 그에 반대하는 야권의 민간인 출신 두 후보가 대결했다. 군정이 연장되는 위기를 느낀 야권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단일화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양김은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87년 대선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 실패로 군정 연장돼

87년 대선에서 주요 후보의 득표 결과를 보면, △노태우 8,282,738 (36.64%) △김영삼 6,337,581 (28.04%) △김대중 6,113,375 (27.05%) △김종필 1,823,067표 (8.07%) 등이었다.
▲ 1987년 12월 대선에서 단일화에 실패한 야권의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 3김씨가 89년 10월 회동하고 있다. 이로부터 석달 후 김영삼 김종필 씨는 노태우의 민정당과 3당합당을 단행하여 여당으로 흡수됐다.

결과는 뻔히 예상한대로 노태우의 승리, 어부지리 정권이 탄생했다. 불과 36.64% 짜리 대통령, 그것은 정통성의 취약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군정 반대노선인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의 지지표만 합해도 과반선을 넘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당시 민의는 더 이상의 군부정권 연장을 거부했으나 야권이 연합정치에 실패함으로써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정통성 취약을 해결하지 않으면 국정 수행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회는 이미 집권 민정당이 평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으로 구성된 3야당을 제어하기 불가능했다.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김씨가 합의하지 않고서는 정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소야대 구조였고 그것이 국민의사였다.

노태우 정권은 이같은 여소야대 국회를 어떻게든 구조 변경시키기 위한 정치공학에 골몰했다. 그 결과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통합하여 민자당을 창당한 3당합당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정치적 상상력을 초월한 기상천외의 구조변경이었다. 총선거에서 국민이 만들어 준 국회 구조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공작정치였다.

노태우와 민정당,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은 가치와 정책에서 상반될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국가권력을 이용한 체제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국민의사에도 반하고 정치적 정당성도 갖지 못한 3당합당은 그 다음 대선에서 또 다시 민의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도출한다.

92년 대선도 국민의사에 반하는 3당합당 결과가 결정지어

다음은 1992년 12월18일 실시된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주요 후보의 득표수.
△김영삼 9,977,332 (41.96%) △김대중 8,041,284 (33.82%) △정주영 3,880,067 (16.32%) △박찬종 1,516,047 (6.38%) △백기완 238,648 (1.00%)

이때도 3당 야합이라고 비난받았던 민자당 후보가 당선됐지만 야권 후보단일화나 결선투표제가 성사됐더라면 선거 결과는 바뀌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정주영이나 박찬종 후보가 김영삼의 표를 잠식했다고 평가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저런 분석보다도 민의를 정밀하게 반영하는 선거제도와 함께 후보들 간의 연합정치가 정립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계에서 정권의 향배를 단 1회의 투표로 결정짓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다. 미국은 일반 국민이 대통령선거인단을 선출하고 선거인단이 2차투표를 실시한다. 프랑스는 대표적으로 결선투표제를 확립하여 1차투표에서 과반선 득표를 얻는 후보가 없을 경우 2차투표를 실시한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대통령은 2차 결선투표로 확정된다.

의원내각제의 경우도 일반 유권자가 뽑아놓은 원내 의석분포로 과반선에 가까운 정당이 없어서 정치적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2단계의 연합정치가 정치권에서 전개된다. 2~3개의 정당이 연정을 구성해서 전체 의석 중 최소한 40% 이상을 넘겨야 내각 구성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선거사로 보아도 이번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는 매우 의미있는 정치과정이었다. 남은 문제는 경선 결과에 따라 승복한 것이 아니라 단일화 협상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사퇴한 안철수 후보가 자신의 지지자들을 얼마나 문재인 후보에게 견인해 주느냐로 모아진다. 그러나 그런 조건을 만들어 줄 책임은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돌아간다. 모두가 역사와 국민 앞에 무거운 소명을 다해야 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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