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전 장관은 지난 12일 서울 정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당에서 연속 강연에서 오는 10월 2~4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를 평화, 번영, 통일로 꼽았다.
임동원 전 장관(현 세종재단 이사장)은 또 "한반도 평화 문제를 논의하는 남-북-미-중 4자회담이 실무급 차원에서 열리기에 앞서 민족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통일 지향적인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북 정상이 미리 입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 기사 : "남북미중 4자회담 전에 남북이 먼저 입 맞춰야")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한 이날 강연회에는 김형기 전 통일부 차관과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가 임 전 장관과 토론을 벌였다.
임 전 장관은 아래 링크된 발제문을 요약·발표했다.
☞임동원 장관 발표문 "민주화 이후 남북관계 20년,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의 확립"
다음은 발표 후 벌어진 토론 내용 전문이다. <편집자>
남북관계 측면에서 본 1987년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사회) : 임동원 전 장관 발표에서 여러 가지 과제가 제시됐다. 이제부터는 구체적인 과제를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특히 국내에서 논의되는 것을 보면 남북관계가 개선돼야 한다는 원론적 얘기는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반대하지 않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항상 다르다. 임동원 전 장관이 경제공동체를 위해 군비통제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예를 들어 북방한계선(NLL) 문제 하면 보수 측에서 한결같이 반대하고 있다. 한나라당 정책위원장 이한구 의원과 인터뷰를 했는데 "비핵화가 안 된 마당에 본격적인 경제협력은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김형기 전 차관과 고유환 교수가 임 전 장관의 발제를 바탕으로 지금부터 어떤 일을 하는 게 좋을지 구체적인 제안이나 문제점을 지적해 주기 바란다.
김형기 전 통일부 차관 : 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임 전 장관과 토론회를 하게 돼서 감회가 깊다. 잘 아시다시피 임동원 (세종재단) 이사장께서는 바로 우리가 다루고 있는 남북관계 20년의 한복판에서 이론도 정립하고 직접 전략도 지휘하고 어떨 땐 현장에서 대표로, 특사로 뛰어다닌 분이다. 지난 20년간의 흐름을 핵심만 짚어내 잘 정리해 주셔서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말씀하신 대로 20년은 남북이 불신과 대결의 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평화공존 단계로 바꾸어 나가고 변화발전시킨 과정이었다. 이제 세 번째 기회를 맞게 됐지만, 향후 10년간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또 발전시켜야 하는 시기에 도달한 것 같다. 단순히 평화상태를 유지하거나 전쟁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평화체제가 아니라, 자칫 분단 고착화로 흘러가거나 현상유지 차원에 머물게 되는 평화체제를 회피하기 위한 분명한 방향 설정,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나는 우선 민주항쟁 20년을 맞이하며 그 20년은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포커스를 맞춰 이야기를 할까 한다.
1987년 민주항쟁 이전의 남북관계나 대북정책은 통치권 차원의 문제였다. 그랬기 때문에 안보 차원서만 이 문제를 다뤄왔고, 공안기관이나 몇몇 특수요원들이 다뤘다. 국민의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통일은 명분과 구호로만 충분했었다. 체제 우위 경쟁이 지배했었고, 무엇이든 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회담을 하면 성과를 낸다, 합의를 한다는 측면보다는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궁색하게 만들까, 어떻게 하면 받지 못할 제의를 할까, 상대방 제의를 어떤 명분을 내걸어 잘 거부할까를 우선 생각하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었다.
남북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우리의 헌법 3조, 북으로 보면 조선노동당 규약의 '전 조선의 공산화' 즉 하나의 조선 논리에 근거했다. 7.4공동성명은 서명의 주체가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라고 돼 있는데 상부가 누군지 나와 있지 않다. 그리고 단순히 이름만 이후락, 김영주로 돼있다. 그러다가 남북관계가 발전함에 따라 회담체가 굴러가게 되니까 '무슨 무슨 회담 남측 수석대표, 무슨 무슨 회담 북측 대표단장'으로 변화가 있었다. 서명 주체의 변화는 남북관계사를 말해준다.
1992년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에 비로소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 연형묵 명의로 서명을 하게 됐다. 남북이 각각의 국호를 정식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상대방을 실체로 인정하기 시작됐다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두 개의 국가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특히 기본합의서 1조에는 서로 상대방 인정한다는 조항이 들어간다. 상대방 인정, 실체 인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전문에는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지만 그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함으로서 남북관계사에 새로운 획이 그어졌다.
이런 상황이 가능하게 된 씨앗을 언제 뿌렸나. 바로 1987년이다. 그래서 87년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다. 87년은 독일 통일, 동구권 민주화, 냉전체제 해체로 이어지는 거대한 세계질서의 전환을 예고하는 전단이 마련된 해였다. 고르바초프가 85년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얘기했지만, 그것이 내면화되고 전세계적으로 탈이데올로기와 탈군사화를 촉발시킨 것은 87년 무렵이었다. 화해와 긴장완화가 세계사의 추세가 됐다.
두 번째는 북한의 심각한 경제부진, 그리고 군사비 부담으로 인한 고통이 드러나기 시작한 해였다. 물론 73~74년 경부터 남북의 GNP가 같아지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했던 북이 이제 스스로 인정하는 단계에 왔고, 북으로 하여금 남조선 해방이라는 공세적인 전략논리를 끌어내리면서 체제 생존전략, 즉 수세적 논리로 전환시킨 시발점이 87년이었다.
세 번째는 6월 민주항쟁으로 인해 우리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통일논의가 개방되고 북한 관련된 정보의 독점이 해소되고, 북한에 대한 인식의 전환 이뤄졌다. 화해협력 시대로 나아가는 세계사와, 아직도 대결과 갈등에 머무는 민족사의 갭(차이)을 메워야겠다는 노력이 분출됐다. 이러한 거대한 요구에 의해 88~89년 통일정책의 기조가 전환됐다.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성원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경쟁과 대결의 상대라는 시각에서 탈피해 동반자로 인식하자는 게 7.7선언과 89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으로 구현되어 후대 정부에 계승됐다. 한마디로 민주화의 힘이 남북한 대결 시대를 청산하고 민족공동체 의식 기반을 확대시키고 회복시킨 밑거름이 됐다.
뿐만 아니라 87년은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지게 된 고위급회담, 즉 총리회담을 만들어 내는 분기점이었다. 80년대 중반 제2의 대화 시대가 있었다. 적십자회담, 경제회담, 국회 예비접촉이 돌아갔지만 86년 북한이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그러다 87년에 들어오자 북한이 방송을 통해 남북 고위급정치군사회담 갖자고 공개서한으로 제의했다. 무력축소, 군비경쟁 중지, 대규모 군사연습 중단 같은 군사적 측면의 사안을 의제로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는 당시만 해도 정치군사문제 논의를 회피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쌍방이 제기하는 전반적인 문제를 포괄적으로 협의하자고 총리회담을 역제의했지만, 이건 여러 회담을 먼저 한 뒤에 총리회담을 하자고 조건을 걸었기 때문에 사실 북의 제의를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어 북한이 7월 다국적군 군축협상을 하자고 제의하니까 다시 우리 쪽에서 외무부 성명을 내서 남북 외무장관회담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런데 이 외무장관회담을 제의할 때 그 의제 속에 불가침 협정 문제가 포함됐고,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에 필요한 군축을 등 제반 문제를 협의하자고 했다. 이처럼 남측이 군사문제를 협의 대상으로 적극 의제화하기 시작한 것이 87년이다.
이어 북한은 88년 11월 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제의하고 포괄적인 평화방안을 가지고 나왔다. 우리가 이 제안을 받아서 고위당국자회담을 하자는 식으로 총리가 수석대표로 한 회담체를 제의하면서 끈이 연결됐고, 결국 고위급회담, 총리회담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이때 그간 제의하지 않았던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즉 교류협력과 군사문제를 병행해 토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렇게 87년은 민주화 힘으로 남북관계사를 새롭게 발화시키는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임동원 이사장께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독일의 경우 서독이 1민족 1국가 2체제론으로 정치군사 문제를 다루자는 입장을 취했는데, 동독은 오히려 2민족 2국가를 얘기했었다. 같은 게르만 민족이지만 자본주의 민족과 사회주의 민족으로 구분해서 2민족이라고 말했다. 동독에는 교류협력이나 하자, 올림픽에 단일기 들고 가는 것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국제사회에서 두 개의 국가로 안주하려는 입장이 분명 있었다. 이렇게 대개 국제사회에서 분단국가라고 하면 힘이 있는 쪽이 정치군사 문제를 다루자고 하고, 힘이 약한 쪽이 온전한 독립체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남북은 오히려 우리 쪽에서 정치군사 문제 회피하는 입장이었고, 북한은 '조선은 하나' 논리에 입각해 위장 평화공세일망정 정치군사 문제 해결에 역점을 뒀다. 그 과정에 북은 명분을 선점하는 효과를 얻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쪽에서 군사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뤄야 할 때가 됐고, 군비통제를 추진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확실히 전환했고, 교류협력과 병행하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국방장관회담 한 번 하고 2000년 이후 별다른 협의체 운영에 호응하고 있지 않다. 경제협력에 필요한 몇 가지 군사실무접촉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군사적 신뢰를 구축하는 조치들은 진전되지 않았다. 그런 북한이 군비통제를 얘기하자는 우리의 제의에 호응하도록 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북한의 태도는 변할 수 있을 것인가가 궁금하다.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발표문을 보면 고위급회담 당시 핵문제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과 연계하지 않고 병행한다는 전략을 통해 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병행전략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이런 말도 가능하지 않나 싶다. 당시 기본합의서에 사인하고 우리는 비핵화선언의 통시 타결을 원했지만 북한이 미국 핵무기 철수 확인,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주장해서 같이 타결되지 못하고, 그해 12월 말에 실무대표 접촉을 가졌지만, 결국 12월 18일 핵 부재선언을 하면서 해결됐다. 우리로서는 어떻게 하든 비핵화공동선언을 만들어 내고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 안전조치 협정에 서명하게 하기 위해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시킴으로써 타결했다. 남북기본합의서 마지막 조항에 '이 합의서는 각기 발효에 필요한 절차를 거쳐 그 문본을 교환한 날부터 효력 발생한다'고 했기 때문에, 북한이 IAEA 핵 안전조치 협정에 서명을 안 했다면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효시키지 않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지 않았나 싶다. 즉, 그 때 역시 병행전략이 아니라 핵과 남북관계를 어느 정도 연계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北, '혁명전략'에서 '생존전략'으로 바꾼 20년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임동원 이사장은 과거 통일부 장관 등 주요 직책을 맡으면서 오늘 발표한 내용과 관련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고, 발표 내용도 충실하기 토론자로서 문제삼거나 부연할 내용은 거의 없다. 임동원 이사장께서 통일부 장관으로 있을 때 일이 있을 때마다 전문가들을 모아서 의견을 듣고 정보를 주고, 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간의 사정을 소상히 설명해서, 연구자들이 연구를 하고 정책자문 활동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됐었다. 워낙 일을 열심히 탁월하게 했기 때문에 남북관계를 일관성 있게 잘 관리하려면 임 장관 이후 그런 역할 할 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아쉬운 점을 갖고 있기도 했다.
나는 북한 연구자로서 북한의 입장에서 지난 20년을 생각해보겠다. 남측에 87년 체제가 들어서면서 민주화가 진행되고 88년 7.7선언이 만들어졌는데 그게 북에도 큰 영향 준 것 같다. 83년에는 아웅산 사건 있었고 87년에는 KAL기 폭파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북에는 혁명전략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어떻게 하든 남조선을 해방시키겠다는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87년 KAL기 사건을 계기로 88년부터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라갔고, 지금까지도 북한이 국제사회 일원으로 나오는데 족쇄가 됐다. 그때부터 북한도 더 이상 혁명전략으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한 것 같고, 그래서 남측의 7.7선언에 호응하면서 연방전략으로 수정했다고 본다. 사회주의권에서는 체제개혁이 85년 들어 본격화되고 89년부터는 친자본주의 혁명이 시작되어 91년 완성된다. 소련과 동구가 해체되고 독일이 90년 통일되면서 북한은 이제 생존전략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북한은 '먹고 먹히는 통일을 하지 말고 서로 공존하자'는 생각으로 91년 유엔 동시가입을 받아들였다. 유엔 가입은 남측에서 먼저 추진했지만 동시가입으로 실현된 것은 한국전쟁 때 남한이 유엔을 통해 구호를 받았던 것처럼, 북에서도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유엔을 통해 체제안전을 담보받겠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한다.
북한은 다음으로 연방제를 '낮은 단계의 연방제' 즉, 1민족 2국가의 체제 연합적 성격을 갖는 느슨한 연방제로 수정했고, 남북기본합의서의 불가침합의를 이끌어 냈다. 정원식 당시 총리가 기본합의서 체결 기념 세미나에서 '서명을 하긴 했지만 참 이상했다. 북이 우리 안을 90% 이상 수용하는 것을 봤다. 왜 그랬을까 궁금하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남측에 흡수당하는데 강한 우려를 하고 있던 북이었는데, 남측에서 침략하지 않겠다는 합의문을 제시했기 때문에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북측이 그 후 기본합의서를 그다지 탐탁찮게 생각하고 잘 이행하지 않는 것은 당시의 그런 배경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그 후 생존전략을 추진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사상통제를 했고, 대량살상무기 즉, 핵과 미사일을 개발했다. 대량살상무기는 미국으로부터 체제를 지키는 것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이 이 문제에 가장 관심이 있기 때문에 협상카드로 사용하려는 의도일 수 있었다. 그러다가 1차 북핵위기가 불거졌고 북측 의도대로 미국이 양자접촉을 시작했다. 이전에는 북미간의 양자접촉 자체가 쉽지 않았는데, 핵·미사일 카드로 북미 양자협상의 장이 열리면서 남측을 다소 등한시하면서까지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매진했던 게 아닌가 싶다. 동시에 사회주의 시장이 붕괴되고 더 이상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어렵다고 판단해 자본주의 사회로의 조심스러운 편입을 모색한 것 같다. 물론 그때 북미 적대관계가 제대로 풀렸으면 우리식 사회주의를 사상이론적으로 수정하고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햇볕정책을 통한 포용정책의 결과 남북정상회담 이뤄졌다. 정상회담 전에 북한이 미사일 카드를 내밀어 한반도의 긴장이 조성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페리 프로세스가 만들어졌는데, 윌리엄 페리 당시 대북정책조정관은 '페리 프로세스는 사실상 임동원 프로세스'라고 했다. 한국이 기본구상을 다 내고, 당시 임동원 장관이 구상을 구체화해서 미국을 설득하고, 그것을 미국이 받아들여 페리 프로세스가 만들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페리 프로세스는 북한의 생존전략과 한국의 햇볕정책, 그리고 미국의 개입확대 정책 사이에 이익의 조화점을 찾은 것이었다. 미국은 그런 조화점이 있어야 움직이는데 우리가 절묘하게 그걸 찾아냈다.
북한에게 기회는 두 번 있었다. 정상회담에 합의하고 제네바합의를 만든 94년이었는데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연기됐다. 다음으로 페리 프로세스를 만들고 2000년 10월 북미 공동코뮈니케를 만들었을 때인데 그 역시도 무산됐다. 그러나 조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후 어려운 과정을 겪어 왔는데 부시 대통령도 결국 신포용정책으로 돌아왔다. 부시 대통령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북한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방법이 핵실험이었다. 자기들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나 말이 계속 무시되면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핵실험이 아닌가 한다. 충격요법을 통해서 국면을 전환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의미로 보자면 북한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거의 다 내놨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해결의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부시 행정부도 이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오히려 수세적으로 몰리게 됐다. 이라크의 수렁에 빠진 것도 물론이지만 9.11 이후 반테러 비확산이라는 국가 목표에 북한이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에 임기 중에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11월 한미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이라는 것을 들고 나온 것 같다. 우리는 대체로 평화선언을 얘기했는데, 더 나아갈 수도 있겠지만 종전선언을 할 용의가 있다고 함으로써 올 1월 베를린 양자접촉 이뤄지고, 2.13합의와 함께 불능화 조치가 합의되고, 최근 양자접촉에서 또 한 번 약속했다. 이런 속도라면 2.13합의는 연내에 달성할 계기가 마련될 것 같다. 9월 시드니 APEC에서 한미정상이 만나 평화협정을 논의하고 부시가 협정 체결 의지를 확인한 것은 북핵 폐기와 비핵화를 겨냥한 유인이 아닌가 싶다.
물론 북한도 전제를 달 것이다.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을 철회하고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와 적성국교역법 적용 해제 같을 것을 요구하면서 김일성 주석의 유훈에 따라 비핵화를 하겠다 큰 틀의 그림그리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은 서방과 타협할 수 있는 세 번째 기회인데,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큰 틀의 것을 해보겠다는 그림을 갖고 있지 않은가 싶다. 북도 더 이상 카드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고, 체제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도 바뀌고, 미국도 이 기회에 그런 정세에 들어가지 않으면 또 수년 간 지체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큰 것도 그런 배경이다.
"김정일, '30만 병력 감축해 개성공단에 대주겠다'"
박인규 : 정상회담의 과제 중에 군비통제를 많이 말하는데, 실제로 군비통제를 한다면 오히려 남쪽이 소극적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보수 쪽에서. 군비통제가 중요하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나갈 수 있을까. 또 임 장관이 말하는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라는 개념에서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무엇을 이뤄야 하고 무엇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지 질문하겠다.
임동원 : 좋은 토론 감사하다. 김형기 전 차관은 20년 동안의 거의 모든 과정을 나와 함께 일했기 때문에 나보다 더 자세히 아는 부분이 있다. 남북관계에서 87년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한 정리도 흥미로웠다. 87~88년은 남과 북에 있어 전환기적 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김 전 차관께서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 과연 북한이 앞으로 평화문제와 관련해 군사 문제, 군비통제 문제를 협의하려고 할 것인가. 김 전 차관 지적대로 기본합의서 협상 과정에서 북한은 정치군사 해결 우선론을 들고 나왔고, 우리는 교류협력 우선론 들고 나와서 서로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북한은 어떻게든 불가침합의라도 이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건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는데, 고유환 교수께서 정리해 줬듯이, 이 무렵 냉전이 끝나고, 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시장을 공유하고 있던 상황이 무너져 경제난에 허덕이면서 북한은 어떻게든 체제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것이 바로 정치군사 문제를 우선 해결하자는 주장의 배경이었다. 우리가 북한을 붕괴시키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닌데도 불구하고, 북한은 흡수통일과 북침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군비통제 문제를 기본합의서에 넣은 후에도 실제로 그 논의를 할 때면 북한이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양상을 보였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의 과정을 보면 세상이 크게 달라졌다. 북한이 정치군사 우선 해결론을 들고 나온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런 입장이었고, 북한은 교류협력을 많이 하고 지원만 받으려고 했다. 그런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과연 북한이 군사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려고 할 것인가. 나는 그러리라 보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면 북한이 원하는 것은 파탄된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측과 국제사회, 미국의 지원을 받아 경제를 회복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군사문제 해결을 병행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담을 하나 소개하겠다. 개성공단을 맨 처음 추진할 때 얘기다.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안 지역에 공단을 만들자고 합의했는데 장소가 어디냐가 문제였다. 우리는 현대와 더불어 해주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해주는 군사요충지이기 때문에 북한 군부가 반대해서 안 된다고 했다. 정상회담 때도 해주로 하자고 제의했는데, 놀랍게도 2000년 6월 30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만났을 때 김정일 위원장이 해주 대신 개성을 내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일생일대의 큰 오판을 했다. 나는 현대에게 '개성이 어떤 덴데 개성을 내주겠냐, 전쟁이 일어나면 주공이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축선인데 거길 왜 내주냐, 개성 앞에는 서울을 겨냥한 장거리포들이 많이 배치돼 있는데 그런 전략적 요충지를 어떻게 내주겠냐'며 현대측에게 '당신들이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고 했다. 그런데 그게 내가 잘못 본 것이었다. 나는 군인 출신이라 그렇게 판단했는데 잘못된 것이었다. 그해 8월 말에 현대가 개성공단 마스터플랜 만들어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브리핑을 하러 갔다. 가기 전에 나도 설명을 들었는데 훌륭한 3단계 계획이었다. 김 위원장이 보고 받고 만족해하며 즉시 승인했다고 한다.
그런데 현대측에서 '이대로 완성되면 노동력 수요가 30만인데 그걸 공급할 수 있겠냐'고 했더니 김정일 위원장이 한참 있다가 '그거 8개년 계획이랬죠? 8년 후면 세상 변합니다. 남과 북이 엄청난 군사력을 갖고 있는데 서로 군대 감축 안 하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는 군축 합니다. 군인들을 제대시켜 젊은 사람 30만을 대주겠으니 안심하세요'라고 했다는 거다. 이 얘기를 보고 받고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닐 수 없다.
북측 고위층하고 여러 번 얘기를 나눠봤는데 군축을 바라는 건 오히려 북쪽이다. 박인규 대표가 지적했듯 남측이 오히려 문제가 아닌가 싶다. 국내외의 군산복합체가 상당히 반대할 것이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군비감축에 대한 해답을 예단하지는 못하겠지만, 남과 북이 모두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되지 않겠느냐, 또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답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기본합의서 채택 마지막 단계 얘기인데, 몇 개의 고비를 넘겨야 겪긴 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한반도비핵화선언'과 관련이 있었는데, 91년 9월말에 미국 대통령이 전술핵무기 철수선언을 했다. 사실 그건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려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될 것 같은데 해체 전에 15개 가맹 공화국에 산재된 전술핵무기를 폐기해야지 잘못하면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핵 확산 문제에 봉착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먼저 전세계 전술핵무기를 모두다 철수 폐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한 주 후에 고르바초프도 전술핵무기를 러시아로 철수시켜 폐기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도 철수하게 된 것이다. 제일 많을 때는 700기 이상이 있었고 철수할 때는 100여기가 있다고 알려졌는데, 12월 18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대한민국 영토 내에 핵무기 없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렇게 해서 기본합의서 채택의 걸림돌이 제거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매년 실시하는 팀스피리트 한미연합기동훈련이 문제가 됐다. 북한이 군대를 많이 갖고 있고, 몇 개 사단은 후방에서 건설사업에 투입돼 있는데 팀스피리트 훈련을 하면 1~2달 전부터 훈련이 끝날 때까지 전부 전방에 배치된다. 그러면 3~4달 동안 건설공사가 중단된다. 이게 큰 부담이 되어온 북한은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계속 요구해왔는데, 다행히 미국이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단하기로 했다. 이런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되면서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 협상이 마무리된 것이다.
북한은 이미 80년대 중반에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했다. 그러나 NPT에 가입하면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국제 핵사찰을 받아야 하는데 그걸 거부해왔다. 그러면서 남한 내 모든 미국 핵무기 철수,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한반도 비핵지대화 설치 등을 요구했는데 이 문제들이 연말에 해결되면서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이 타결된 것이다. 그 외에도 어려운 고비가 많았다.
기본합의서를 채택할 때 끝까지 합의 못한 게 두 대목 있었다. 결국은 내가 심야접촉으로 마무리했는데, 하나는 평화체제에 관한 것이었다.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한다'(제5조)라는 대목에서 '남북 사이'란 말을 북이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였다. 남측이 작전지휘권도 없는데 그런 권능이 있느냐는 게 북한의 논리였다. 미국과 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북이 양보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군비통제 문제였다. 북측 안에는 군비감축을 협의해 나간다는 정도로 돼 있었는데 우리는 그렇게 막연한 표현은 곤란하다면서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 즉,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사전 통보, 군 인사 교류 및 정보교환 등을 명시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비롯한 군비감축 문제도 넣기를 바랐다. 그 역시도 최종 합의 전날밤 북측이 동의해줬다.(제12조) 우리측 안을 북측이 받아들인 거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고유환 교수가 설명한 것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91년 김일성 방중과 노동당 정치국 회의
고 교수가 남북관계 20년을 북한의 입장에서 살펴봤는데 그 분석에 동의한다. 북한이 입장을 변화시키는 결정적 계기는 91년 10월 김일성 주석의 중국방문이었다고 본다. 방문을 통해 개방경제지역을 시찰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들을 만나 조언을 듣고 돌아와 11월 조선노동당 정치국 회의에서 중요한 결정을 했다. 북한은 이것을 전략적 결단, 전략적 결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국 지도자는 북한도 중국처럼 개방 및 경제개혁을 하라고 권고했다, 중국이 1당 독재 체제에서 개혁개방을 하는데 북한도 할 수 있다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김일성주석이 나진선봉 경제특구를 설치하게 된다. 두 번째는 북한이 경제발전을 하면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야 하는데 남북관계 개선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을 서들게 된 것이다. 세 번째는 미국이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 할 예정이니 북한도 핵개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비핵화선언에 합의하고 국제 핵사찰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넷째,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북한의 지상 목표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듬해 초에 김용순 국제담당 비서를 미국에 보내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위한 고위급 회담을 제의했다. 그러면서 한반도에 주한미군이 계속 남아 있는 것에 반대하지 않고, 다만 북에 대해 적대적인 군대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는 군대로 남아있는 데 찬성한다는 걸 통보한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진전이 없으니까 핵 카드를 활용해 그 과정을 촉진하려는 전술을 채택했다. 그게 여태까지 유지되는 것이다. 핵문제를 가지고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전쟁에 대비해 억제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체제보전을 위한 수단도 될 수 있지만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의미가 더 크다고 본다. 이것이 91년 노동당 정치국 회의에서 김일성 방중 이후 이뤄진 전략적 결정이라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2차 정상회담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이냐의 문제다. 의제는 1차 때와 같다. 첫째, 한반도 평화 둘째, 민족공동번영 셋째, 조국의 통일이다. 1차 때는 번영이라는 말 대신 교류협력이라는 말을 썼다. 1차 회담은 암중모색을 하던 때였다면 그 후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이미 교류협력이 7년간 많은 성과를 냈고 상황이 달라졌다. 더군다나 핵문제 해결과 북미 관계정상화 전망이 밝아지는 때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1차 정상회담의 키워드는 교류협력이었는데 2차 정상회담에서는 평화가 아닌가 한다.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뭘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우선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남북이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6자회담 프로세스를 진척시키자는 얘기가 어떻게든 들어갈 것이라고 본다. 둘째, 평화와 경협 확대발전을 위해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 나아가 군비감축 문제를 논의할 때가 되지 않았나에 대한 의견을 교환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이 NLL 문제도 제기할 수 있을 것이고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하라고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구체적인 내용이 합의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정상회담은 그런 세부적인 문제를 합의하는 자리가 아니라 방향만 제시하는 자리다. 그런 것들은 다 장관급 회담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방장관 회의를 개최하자는데 합의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셋째, 남북미중 4자회담이 곧 열리게 되는데, 여기서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협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4자회담 안에서 남북이 충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남북이 먼저 입을 맞춰야 한다. 아마 빠르면 12월 이전에 개최될 4자 실무회담에서 나올 여러 문제에 대해 어떤 방향으로 임할 건지 사전에 협의하고 민족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분단 고착이 아니라 통일 지향의 평화체제가 되기 위해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 하는 논의가 있을 것이고, 있어야 한다.
민족공동번영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나왔다. 경협을 확대발전시키는 것이다. 개성공단은 3단계 사업인데 지금은 시범단지를 겨우 해놨고 1단계는 대지만 조성하고 거기 들어갈 기업만 선정했다. 2~3단계까지 대지를 넓혀 수백 개의 공장이 들어가면 개성공단 하나만 해도 어마어마한 사업이다. 개성공단 2~3단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자는 문제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제2, 3의 개성공단도 만들자는 게, 물론 정상회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합의되지는 않겠지만, 경제회담에서 논의하게 한다든가 할 것이다. 그 외에 지하자원, 경공업, 농업, 비료공장 협력 같은 것도 있다. 이것은 기존의 경협을 확대발전 시키는 문제들 것이다
노 대통령이 몇 번 암시한 건데, 북한의 경제 개발을 촉진시키기 위해 북한의 SOC(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 문제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철도, 항만, 도로, 통신시설 등 이런 것들을 해나가겠다는데, 할 수 있다고 본다. 핵문제가 해결됨에 따라 북이 금년 내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은데, 그렇게 되려면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해야한다. 이는 북이 국제금융기구에 접근하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 지금은 국제금융기구가 북한을 지원할 수 없게 돼 있는데, 테러지원국만 풀면 남한이나 제3국 기업이 국제금융기구에서 대출받아 북한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은 통일문제다. 1차 회담에서는 통일은 갑자기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단계적으로 해야 하고 남과 북이 힘을 합치는 기구가 필요하며, 그게 연합이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합의를 했다. 이걸 발전시켜야 한다. 통일의 과정을 공동으로 관리할 남북 협력기구를 어떻게 제도화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할 때가 됐다. 그 방향을 합의한다면 큰 진전이다. 그래서 이번 회담에 대한 기대가 크고 많은 성과를 거두리라고 본다.
우리 일부에서 핵문제 해결에 대한 끝장을 내야한다는 말도 있는데 그건 잘못된 주장이다. 핵문제는 북미 적대관계의 산물로서 북미관계가 정상화될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우리가 어떻게 끝장내나. 도와주긴 하겠지만 해결하고 돌아오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평화협정, 최소 5년 걸린다"
전태운(청중) : 5년 전부터 내부적인 남남갈등과 북남갈등으로 통일이 자꾸 지연되고 비용만 들고 시간은 자꾸 가고, 절박한 6자회담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도 기회비용으로 천문학적인 숫자가 들어갔다. 그런데 통일은 10년도 넘어야 될 것 같다. 우선 남남갈등을 해소하는 조건, 북남갈등 해소 조건, 그래서 평화통일체제의 모형을 제시할 때가 왔다. 그런 생각이 들어 홍보물 보여줬다. 5년 전부터 주장하던 것이다. 우리 한반도의 생존 전략은 한반도 영세 중립 통일로 가는 가닥을 잡아갈 때 빠른 걸음을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임동원 : 한반도 영세중립통일로 가야한다는 유인물 줬는데 좋은 내용이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나. 통일이 언제 되느냐는 것에 대해 법적인 통일과 사실상의 통일을 구분해 얘기했다. 법적인 통일이 되려면 시간이 정말 많이 걸릴 것이다.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예측 못 하겠다. 1차 정상회담 때 두 정상이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김 대통령께서는 남북이 법적으로 통일되려면 20년 걸린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우리 노력 여하에 따라 더 빨라질 수도 있고 더 늦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김 위원장이 "어떻게 10~20년에 법적인 통일이 되겠습니까, 훨씬 더 걸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법적인 국가통일에 앞서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는 화해협력을 통해 '사실상의 통일 상황'부터 실현하자는 정책을 쓰고 있다. 법적인 통일은 안 됐지만 통일된 것과 비슷한 상황을 먼저 만들자는 것이다. 남북이 서로 자유롭게 오가고 돕고 나누면서 교류 협력하는 상황을 실현하여, 법적 통일이 되기 이전이라도 남북에 사는 동포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평화롭게 잘 살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이제 통일은 논쟁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남북에서 이미 통일을 만들어가고 있는 거다. 북을 도와주고 서로 오고가고, 사업하고, 이게 다 통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지금 도대체 통일이 몇 % 된 상태냐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최소한 15% 이상 진행됐다고 답할 것이다. 이걸 20%, 30%로 늘려가는 거다. 갑자기 통일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전쟁으로 통일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유럽의 경우도 50년대 유럽경제공동체 건설부터 시작해서 유럽국가연합으로 왔다. 앞으로 유럽합중국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이렇게 경제통합 과정을 거쳐 정치통합으로 가는 게 우리도 바람직하지 않겠나. 우리의 통일방안은 그런 사고에 입각해서 나온 것이다.
이미숙(문화일보 기자) : 종전선언은 연내에 되겠지만 평화협정은 10년 쯤 걸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비핵화, 군비통제, 적대적 관계 해소 등을 통해 북미관계의 개선, 북미수교가 이뤄지고 남북미중 4개국과 유엔이 참여하는 평화협정은 언제쯤 될 것으로 보나.
임동원 : 몇 년이라고 딱 꼬집어 얘기 못하겠지만 5년에서 10년 정도는 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 그 과정에서 북미 적대관계 해소가 가장 중요하다. 현재 북한의 핵시설을 해체하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 핵물질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핵물질이나 핵무기를 없애는 데에는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 핵무기 수와 플루토늄 보유량 등을 북한은 연내에 신고할 것이다. 그 신고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폐기할 것이냐에 대해 내년 초 쯤에 합의가 돼야 한다. 그 후에도 제대로 폐기했는가에 대한 검증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가기에는 신뢰가 부족하다. 검증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부시 대통령은 핵시설 해체까지는 자기 임기 내에 해결함으로써 북핵문제 해결의 분수령을 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미국으로서는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한다든가 몇 가지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 후로는 남북이 군비통제를 해야 하는데 협상을 통해서 아무리 빨리 서둘러도 4~5년 안에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유럽 재래식 군비감축협상은 거의 20년이 걸렸는데, 우리는 그 보다 빨리 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협상을 통해 남북이 과다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을 상호 감축해 군사력 균형을 이룩해야 불가침과 평화를 보장할 수 있게 된다. 베트남의 예에서 보듯이 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 평화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평화를 보장할 실질적인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 상황 전개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 5년 정도 걸리는 과정이 될 것이다.
고유환 : 평화협정 문제에 대해 한 말씀드리고 싶다. 만약 2.13합의가 연내 이행되면 북측이 핵폐기와 평화협정을 교환하자고 할 가능성 있다고 본다. 그런 제안을 미국이 받아들이고 관계정상화까지 수용하면 핵폐기와 관계정상화를 교환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것이 평화체제로 가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어 5년 정도로 길게 보겠는데 협정은 그런 식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 부시 대통령의 태도 변화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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