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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는 무작정 무기 잡은 혁명가가 아니었다"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260> '혁명동지'가 본 게바라 최후의 작전

쿠바군의 현역 육군 준장이자 혁명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하리 비졔가스 장군이 최근 아르헨티나를 방문했다. 평생 영웅으로 추앙했던 체 게바라 사령관의 79회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14일은 중남미 저항의 상징이자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추앙받고 있는 체 게바라가 태어난 지 79년이 되는 날이었다. 체가 태어난 로사리오 시와 산타페 주정부는 이날을 공휴일로 선포하고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가졌다.

체가 태어난 고향에서 치러진 탄생 기념식에는 체의 딸 알레이다와 아들 까밀리오가 참석, 로사리오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쿠바 정부는 이 행사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해 체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기도 했다.

"체 게바라는 나의 영웅이자 생명의 은인"
▲ 카스트로로부터 혁명영웅 칭호와 함께 장군 계급장을 받고 있는 하리 비졔가스 ⓒ쿠바 일간 <그란마>

쿠바에서 온 축하사절단에는 체의 투쟁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던 측근의 한 사람인 하리 비졔가스가 끼어 있어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리 비졔가스는 체가 쿠바를 떠나 콩고와 앙골라, 그리고 볼리비아 혁명을 주도했던 9년의 세월을 체의 곁에서 함께 보낸 3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비졔가스는 체의 볼리비아 혁명 실패 후 천신만고 끝에 칠레를 거쳐 쿠바로 건너가 혁명영웅이 됐고 쿠바혁명군 장군으로 승진했다.

1940년생인 비졔가스는 쿠바의 시에라 마에스트로 지역에 살면서 14세 때 쿠바 혁명군에 가담하면서 피델 카스트로와 인연을 맺었다. 소년 비졔가스는 당시 카스트로 게릴라군의 활동을 알리는 삐라를 뿌리거나 벽보를 붙이는 등 어린 소년들이 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일로 쿠바혁명에 동참했다.

18세가 된 비졔가스는 혁명군을 이끌고 쿠바에 상륙한 체 게바라 부대에 배속돼 연락병 등 체의 잔심부름을 하는 것으로 체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볼리비아에서 체의 게릴라부대와 함께 정부군에 포위됐지만 체의 명령에 따라 먼저 도주,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비졔가스 장군에게는 체는 자신의 영웅이자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로사리오에서 체의 탄생기념식을 마친 비졔가스 일행은 체가 장성하고 교육을 받았던 코르도바의 알따그라시아로 자리를 옮겨 코르도바시가 주관한 기념행사에서 체의 일생을 재조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비졔가스 장군이 회고한 체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강연내용을 입수했다. 그 내용을 요약한다.

"체의 최후 작전은 부상 부하 살리기"

"1868년 쿠바는 노예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육 기회를 박탈당했고, 문화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도 누릴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나는 지워도 지워도 없어지지 않은 검은색 피부를 원망하며 살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나는 우연히 카스트로가 조직한 '7월 26일 운동'이라는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했다. 카스트로가 외치는 평등한 사회의 건설과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14살의 나이에 카스트로가 이끄는 게릴라부대의 일원이 된 나는 사회주의 사상이나 혁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당시 나는 사회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나의 검은 이 피부색을 가지고도 백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카스트로의 열성에 동감했을 뿐이었다.

1958년 체 게바라 사령관과 까밀리오 씨엔푸에고가 산따 끌라라 전투를 준비할 때 나는 비로소 체의 휘하 게릴라부대에 전령으로 예속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때부터 1967년 10월까지 9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잠시도 체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항상 그의 곁을 지켰다. 지금으로 치자면 일종의 연락병이자 경호요원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나와 체는 13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났지만 체는 나를 항상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그는 매우 상냥하고 낭만적이었으며 인간미가 넘쳐나는 전형적인 아르헨티노였다. 그러나 공무를 집행할 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그는 어린 나를 '신지식'으로 무장시켜주는 것을 아주 즐겁게 여기곤 했다.

체는 산속의 오지에서나 쿠바의 생활 속에서 항상 책을 가까이했고 어디를 가나 각종 지식서적들을 챙기는 것을 우선시했다. 그래서 우리는 체가 항상 '움직이는 도서실'을 몰고 다닌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체는 이를 바탕으로 콩고의 산속에서나 볼리비아의 험지에서도 혁명군들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이 쌓은 지식을 전해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 쿠바 내무부 건물의 대형 체 게바라 초상화 ⓒ프레시안

체는 무작정 무기를 잡은 평범한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중남미 소외계층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빈부와 인종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항상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각오를 다졌던 것이다.

혹자는 체가 볼리비아에서 무모한 게릴라 작전을 폈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작전은 항상 치밀했고 실수가 없었다. 그의 게릴라 부대 운영철칙은 항상 흩어져서 적과 대항해야 하며 흩어진 공간을 이어줄 보급로와 식량공급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볼리비아 정부군과 최후의 전투에서 체는 병력과 화력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피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환자들과 부상자들이 끝까지 피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결사항전을 계속한 것이었다.

체는 당시 볼리비아 정부군의 병력 규모와 화력을 계산한 결과 부대 전체가 동시에 퇴각을 한다면 모두 몰살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환자들에게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먼저 도주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는 정부군의 추격을 몸소 막은 것이었다.

그가 만일 환자들과 부상자들이 안전지대로 피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지 않고 중간에 후퇴했더라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체는 부상자들과 환자들이 안전지대로 도주할 수 있도록 끝까지 항전하다 자신이 사로잡힌 것이었다.

최후의 순간 체는 작전의 측면보다는 병들고 부상당한 부하들을 살리고자 하는 도덕적인 측면을 우선 고려했던 것이다.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체의 최후 작전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이해하지 못해 생긴 오해일 뿐이다.

나는 근대 중남미 혁명의 신화적인 영웅의 곁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아직까지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내 일생에 있어서 결코 놓칠 수 없는 황금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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