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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은 무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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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은 무죄다

[Homo designans·2] '간판'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서울의 거리풍경에 대해 말이 많다. "혼잡하고 세련되지 못하다", "녹지가 너무 적다", "전통과 단절되어 있고 한국적 특징이 적다", "마치 촌스런 뉴욕 같다"는 것 등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대체로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세련되게 정돈된 거리풍경과 한국적 거리풍경은 경우에 따라 상치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첨언하고 싶다.

예컨대 88 서울올림픽 때 거리를 세련되게 꾸민답시고 포장마차를 철거한 적이 있다. 유형의 문화유산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서울에서 한국적 맛을 느끼게 해줄 몇 안 되는 거리문화를 없애버린 꼴이었다. 당시 포장마차를 문화적 자산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논란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물론 관에서는 시민의 통행권과 도시미관을 이유로 철거를 강행했다. 그러나 포장마차를 우리의 특색으로 인정하고 좀 더 세련된 거리문화로 다듬는 것이 더 문화중심적인 발상이 아닌가 싶다.

'규제'인가, '자연발생적 조화'인가

혼잡함의 주범인 간판에 관한 논의에서도 동일한 구도가 되풀이될 수 있다. 규제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연발생적으로 놔둬야 하는가 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규제를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1943년부터 간판규제법을 제정해 크기와 간판의 개수, 색채를 규제하고 간판세까지 징수하는 파리나 비슷한 규제를 통해 도시미관을 정비한 일본의 사례를 거론한다. 그러나 파리의 규제는 문화유산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한 것이며 파리의 상업지구나 외곽지역에서는 규제가 느슨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손상시킬 역사적 유물이 전무하다시피 한 우리 도시에서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간판들을 규제하는 것이 업주들의 불만만 자아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올 초부터 간판규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있는 경기도 화성시에는 업주들의 민원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래서는 그 규제가 효과를 보기 어렵다.

올림픽 때의 포장마차처럼 난립하는 간판들을 도리어 한국적 특색으로 보자면 그대로 두는 것이 옳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홍콩의 도심에는 우리 못지않게 크고 붉은 간판들이 난립해 있다. 그렇다고 홍콩의 시민들이나 그곳을 찾는 외국인들이 눈살을 찌푸리지는 않는다. 도리어 홍콩다움으로 인식할 뿐이다.
▲ 홍콩 구시가지의 모습ⓒ 홍콩 관광진홍청

'홍콩의 지혜'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러나 이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다. 중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붉은 색 등 원색을 많이 사용해 왔다. 그리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 중단 없이 이어져 와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쌓여 있다. 예컨대 대만이나 홍콩의 고건축물을 보면 붉은 색의 채도가 생각보다 낮고 검정색과 함께 쓰는 경우가 많아 색채 간 충돌이 심하지 않다. 붉은 색과 청색 또는 초록색이 만나는 경계부위에 조각을 깊게 해 음영을 만들어 충돌을 피해가기도 한다.

이런 노하우가 생활에 녹아 현재의 거리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다. 더러 예외적인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홍콩의 간판들에는 색채들 간의 채도에 강약을 주는 전통적 배색기법이 살아 있다. 간판 글자를 봐도 크기나 서체, 글자 간격 면에서 우리보다 낫다. 또한 간판과 상품 포장, 버스, 택시, 상점 인테리어 등 여러 환경요소들이 서로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왼쪽)중국의 고건축물에서는 붉은 색의 채도가 낮아 초록색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기둥의 검정색과 금색도 충돌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오른쪽)고채도의 보색들이 만나는 경우는 음각과 양각이 만들어 내는 음영이 두 색의 충돌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때다.

▲ 홍콩 웨스턴 마켓의 인테리어 배색이나 버스의 외장 색에 중국의 전통적 배색기법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 우리의 거리모습에서는 어떠한 전통도 찾을 수 없다. 또한 다른 환경요소들과 연계되어 있지도 않다

우리도 중국인 못지않게 붉은 색을 포함한 화려한 원색대비를 좋아했다. 사찰의 단청, 색동저고리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전통 배색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성정이 라틴의 그것과 닮았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의 유니폼 색이나 붉은 악마는 그런 성정이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반면 이웃나라 일본은 매우 다른 성정을 지녀 전통적으로 파스텔 톤의 색채와 중간색을 좋아한다.

이런 점들을 무시하고 일률적 기준으로 색채 사용을 규제하면 한국적 특색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우리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높아지면 주변 환경은 색채중심에서 질감중심으로 바뀌고 색채도 우리의 성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저절로 부드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 안타깝게도 이런 아름다운 배색기법의 현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작은 뉴욕' '작은 도쿄' 만들어서야…

문제는 급격한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성정에 맞는 전통 배색기법이 생활 속에 자리 잡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홍콩처럼 오랜 세월 숙성된 배색을 간판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한글도 투박하게 사용되고 있다. 다른 환경요소들과 조화를 이루지도 못한다. 식당 간판이 내부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고 서점간판, 생맥주집, 화장품점 간판들이 모두 비슷하게 소리만 지르고 있을 뿐이다. 아름다움의 기준도 너무 단선적이어서 간혹 아름답다고 몇몇 단체에서 선정한 간판들을 보면 서구풍 일색이다.

우리가 할 일은 전통적인 것을 포함해서 다양한 미적 기준의 모델들을 개발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참고할 수 있도록 간판을 포함한 다양한 환경디자인 샘플을 누가 나서서 개발하고 업주들이 쉽게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인들의 디자인 소양이 높아져야 한다. 그리고 규제는 최소화해야 한다. 관에서는 규제보다 디자인 소양을 높이는 일 등 간접적인 지원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나머지는 홍콩의 사례에서처럼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도쿄나 홍콩과 다른 서울이 될 수 있다. 도시환경정비가 절대로 '작은 뉴욕', '작은 도쿄'를 만드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살림살이를 닮은 간판 혹은 '한국적 조치'의 원점

규제 중심의 도시 환경 개선작업이 효과를 보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살림살이 때문이다. 우리의 거리모습은 우리의 살림살이가 만든 것이고 그 살림살이가 변하지 않는 이상 거리의 모습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예컨대 경쟁이 치열하니 업주들은 행인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색채와 문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후발 업소일수록 이런 생각은 더 강하게 마련이다. 업소의 부침이 심하다 보니 업종이 바뀔 때마다 옛 간판 자국을 가리기 위해 먼저 간판보다 더 큰 간판을 붙이게 되는 경우도 많다. 처음 건물을 지을 때 간판부착 위치 등을 고려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서로 밀집해 있어 여간해서는 간판들이 주는 혼잡함을 피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나름대로 미관을 생각하고 싶어도 참고할 만한 샘플이 없는 경우도 꽤 될 것이다.

이런 문제의 해결방법은 도와주는 방식이어야지 규제위주의 접근이 아니다. 규정 자체를 만드는 일도 쉽지 않다.
▲ 업소가 바뀔 때마다 간판 자국을 가리기 위해 이전 보다 더 큰 간판을 달아야만 하는 경우도 많다.

▲ 도쿄 메구로역 주변의 건물. 설계 때부터 간판 부착위치가 고려돼 있다. 도쿄 대부분의 건물에서 이런 배려를 읽을 수 있다.

어떻게 색채, 형태, 서체, 질감, 크기 등 수많은 요인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디자인을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규정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예컨대 현재와 같이 "글자의 면적이 전체 면적의 8할 이하여야 하고 빨강이나 흑색 계열이 전체 면적의 절반을 넘으면 안 된다"는 식의 규정은 적용하기도 어렵고 디자인적 창의성을 죽이기만 할 뿐이다.

빨간색으로 건물 전체를 뒤덮고 글자 크기가 건물 크기만 해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규정과 규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다. 파리의 간판이 아름다운 것은 규제 때문이 아니라 환경과 디자인에 대한 그들의 소양과 규제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문화적 자긍심이 몫을 하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규제는 단지 역사적 유물의 시각적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는 경고시스템일 뿐이다.
▲ 일본 신주쿠의 광고 간판(왼쪽)과 서울 신촌의 한 식당(가운데). 빨간색이 많다고 무조건 혼잡하고 자극적인 것은 아니다. 일본 녹본기 힐스의 루이비통 매장 간판(오른쪽). 글자가 커도 얼마든지 차분하고 세련된 디자인이 가능하다.

'규제'로는 안 된다. 스스로 하게 하라!
▲ 동경 메구로 역 주변의 건물. 한 건물 내 여러 업체들의 간판위치와 크기가 통일되어 있다. 건물주의 관심이 있어야 이런 일들이 가능할 것이다.

반복해서 이야기 하지만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업주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하고 관은 곁에서 지원만 하는 것이 좋다. 예컨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건물주들이 아름다운 간판이 건물의 내재가치를 높일 수 있고 상권 유입인구를 늘릴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해 업주들과 간판 문제를 알아서 협의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스스로 알아서 하는 고급 상점가는 그대로 두고 그렇지 않은 업소들을 작은 상권 단위로 묶어 요청이 있을 경우 전체적인 디자인을 코디네이션 해주고 개별업체의 디자인 상담을 해줄 필요도 있다. 상권 내 에서의 간판 경쟁이 필요 없도록 공동간판 등의 방안을 마련해 제시하고 더불어 간판제작자들의 안목을 높일 수 있는 디자인 교육도 병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업주들은 이들의 안목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담당할 디자이너가 각 구청별로 몇 명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구청에도 디자이너가 있어야 할 때가 되었다. 구청의 디자이너는 관련 교육프로그램 운영이나 코디네이터 혹은 상담자의 역할만 해야 한다.

지역에 맞는 디자인 샘플이나 디자인 소스 개발을 지원해줄 지역의 디자이너 그룹을 육성할 필요도 있다. 중앙의 유명 디자인 회사에 지원에 의존할 경우 요즘 각 지자체의 심벌마크에서 보듯 하나씩 보면 그럴 듯하지만 모두 비슷비슷한 획일적인 디자인으로 거리 모습이 바뀔 수 있다. 이런 일들을 촉진할 수 있는 여러 지원책들이 지역 특성에 맞게 나와야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한국 산업디자인진흥원(KIDP)과 같은 중앙의 기관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다양한 간판 디자인샘플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업주들이 참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관과 민이 협력하되 관은 규정을 최소화하고 간접적인 지원을 책임지며 민이 자발적으로 간판문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해야 다소 더딜지라도 우리 살림살이에 들어맞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살림살이 수준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최적의 간판을 보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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