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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비싼 것인가?"

[지상현의 'Homo designans'·1]'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지향하며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요즘 부쩍 높아졌다. 그러나 관심도만큼 디자인에 대한 이해수준이 높아지지는 않은 것 같다. 디자인은 다른 분야와 달리 사회의 인식수준 내에서 발전한다. 예컨대 공학은 연구시스템만 제대로 작동되면 대중의 지식수준과 상관없이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인은 사회의 구석구석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 그 자체만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법이 없다.

디자인은 우리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공기처럼 호흡된다. 문화와 산업이 만나는 접점이자 우리의 문화적 특징과 수준을 겉으로 드러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발전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간 외국 유명디자인의 성공 스토리, 외국 디자인계의 몇 가지 트렌드, 산업에서의 디자인의 역할, 디자인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견해가 미디어에서 충분히 소개되었다. 이런 정보들 덕에 고교 교실에는 디자인 전공을 원하는 학생들이 넘쳐나고 관에서조차 얼마간의 디자인 예산을 책정할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이런 양적 팽창에서 한 걸음 나아가 질적 성장을 생각해봐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자면 디자이너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높아져야 한다. 디자인이란 디자이너만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문화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디자인 하는 인간'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새길 수 있는 '호모 데지그난스(Homo designans)'라는 라틴어 조어를, 이 분야에 정통한 분들의 도움을 얻어, 만들어 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런 맥락에서 몇 가지 생각해볼 거리들을 준비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디자인을 이해해보자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의 시각적 환경의 질을 높이고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일에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됐으면 한다. <필자>


몇 해 전 시내 유명 서점 안에 있는 문구점에 들렀다가 놀란 적이 있다. 외국의 디자이너가 제작한 편지나이프, 가위, 연필통 등 소품의 가격이 개당 10만 원을 훌쩍 넘었다. 순간 욱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조금 세련됐다고 이렇게 소비자를 현혹하다니!"

좋은 디자인이 구매 욕구를 자극하고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도 이건 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약간의 차이로 제품의 가격이 급상승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명품점에 가면 1000만 원이 넘는 양복이나 액세서리, 억대로 치닫는 AV시스템이 즐비하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가의 대체 상품을 사면 된다. 뻔히 알고 있는데, 그때는 왜 그리 화가 났을까? 어쩌면 명품관에 있어야 할 물건이 서민이 드나드는 서점이라는 안전영역으로 침입한 것에 대한 영역본능이 작동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잘 모르겠다.

비싼 디자인은 좋은 것인가?

이 경험에 오버랩돼 떠오르는 낯익은 풍경들이 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술자리에서 디자인 하나 때문에 몇 배 비싸게 팔리는 모모 브랜드의 성공스토리를 선망하고 디자인의 힘을 칭송한다. 나아가 '소수를 위한 것일지라도 자신만의 디자인세계가 담긴 특별한 디자인을 하고 싶다'며 작가주의를 말하고 수입 종이 같은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지 못해 안달한다. 이런 태도는 디자인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간주돼 격려 받는다.

의식했건 못했건 이런 이야기들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을 위한 명품주의, 엘리트주의 디자인이다. 물론 이게 무작정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 아주 자연스러운 시장주의적 사고의 하나이며 필자도 이런 대화에 말을 보탠 적이 많았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봐도 "다양한 디자인의 세계에서 주된 관심사가 그런 것뿐이었을까", "왜 디자인에서 가치의 문제를 외면하고 수단으로만 생각해 스스로를 낮추었을까"하는 자성이 든다.

디자인에는 추구해야 할 가치가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다. 인간에게 편하고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자는 이 정신은 세계적 디자이너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의 말을 빌지 않아도 디자인을 디자인이게 만드는 핵심가치다. 그래서 디자인은 스타일리즘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디자인'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인간을 위한 디자인은 디자인 선진국의 정책에서도 살아 숨 쉰다. 예컨대 세계의 '디자인 공장'이 되겠다며 대처 정부 시절부터 강력한 디자인 육성정책을 펴고 있는 영국에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100대 디자인 과제를 선정해 추진 중이다. 100대 디자인 과제에는 시각장애우 들을 위한 색채점자 개발처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과제가 여럿 있다.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유니버설 디자인'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노약자, 장애우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환경과 제품을 만들자는 디자인 이념을 말한다. 예컨대 휠체어를 위해 통로나 문틀에 턱을 없애거나 눈이 어두운 노인이나 문맹자를 위한 약 처방전 디자인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디자인에는 약간의 원가 상승이 불가피하지만 유니버설 디자인을 하는 기업과 디자이너는 그 정도는 개의치 않는다.
▲ 일본의 표준적인 약처방전. 약 이름뿐 아니라 약의 모양과 복용방법, 부작용까지 꼼꼼하고 크게 적혀 있어 누구라도 어려움 없이 약을 복용할 수 있다. ⓒ프레시안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린 디자인(Green Design)'이란 말이 회자된 적이 있다. 쉽게 말해 환경을 생각하는 디자인이다. 가급적 환경 친화적이거나 재활용된 재료를 사용하며 재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재료를 낭비하지 않는 디자인을 말한다.

각 민족의 고유한 시각 문화를 현대에 맞게 다듬는 일 역시 디자인의 소중한 과제다. 생명력을 잃고 화석화되기 쉬운 소중한 문화적 자산을 다듬어 살아 숨 쉬게 하는 것, 이는 경제적 가치를 떠나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는 소중한 일이다. 예컨대 홍익대 안상수 교수의 탈 네모틀 체의 개발은 한글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일깨웠고, 알파벳에 치여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던 우리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사라져가던 한국 도깨비의 형상이 붉은 악마의 마스코트로 되살아난 것도 마찬가지 경우다.

우리는 디자인에서 어떤 가치를 지향하나?

이렇게 디자인에는 소중한 가치들이 여럿 있다. 그리고 이런 가치들이 균형 있게 발현될 때 디자인의 건강성이 유지되고 비로소 디자인은 사회발전의 중요한 동력으로 기능하게 된다.
▲ 한글을 활용한 의상으로 이상봉의 작품이다.@프레시안

명품주의까지 가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을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물론 마케팅이라는 맥락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도 있고 작가주의 디자이너도 필요하다. 이들 덕에 디자인 방법론이 발전하고 새로운 스타일이 공급된다.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디자인의 세계가 완성되지 않는다. 좀 더 기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디자이너들도 있어야 디자인은 완결된 분야가 되고 시스템이 된다.

예컨대 박물관에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리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디자이너들이 있다. 장애우나 노약자들이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환경과 제품을 설계하는 디자이너도 있고 디자인의 가치를 현대화하는 디자인 이론가, 방법론을 개발하는 디자인학자도 있다.

실로 다양한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기본에 충실할 때 독창성도, 실용성도 커진다는 대목이다. 인간의 심리적, 물리적 욕구와 깊게 만나는 디자인은 수명이 길다. 반대로 인간의 욕구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면 한 때 반짝이는 디자인은 가능해도 오래 지속되는 디자인을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디자인의 본질적 가치에 충실해야 인간의 욕구와 깊게 만날 수 있다.

'실용성'과 '독창성'이 만날 수 있는 길은?

예컨대 독창적인 손잡이로 시장을 장악한 'OXO International' 사의 'Good Grip' 시리즈 주방기구들을 보자.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는 아내를 위한 애틋한 마음에서 탄생한 이 시리즈는 진정한 실용성과 독창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 OXO사의 주방기구들. 개당 가격은 10달러 정도 ⓒ프레시안

또 전통문화는 독창성의 보고다. 오랜 세월에 걸쳐 대대손손 다듬어진 전통문양과 각종 도구들에는 당대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농밀한 아름다움이 있다. 순수한 무(無)에서 시작된 유(有)는 존재하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딛고 창작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전통문화는 확실한 디딤판이 된다. 한글을 이용한 패턴으로 프랑스 패션 디자인계를 놀라게 한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이 그러한 사례다. 골판지나 폐신문지 등이 새로운 디자인 소재로 각광받게 된 것은 그린 디자인이 독창성의 자양분이 되었던 비슷한 경우다.

이렇게 디자인계에서 다양하고 본질적인 가치가 추구되고 그 결과물이 공유될 때 그 디자인계는 좀 더 완전한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그런 사이 우리 거리와 환경은 아름답고 편한 곳이 될 것이다. 나아가 우리 디자인은 남들이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폭과 깊이와 독창성을 갖게 될 것이다.

글쓴이 '지상현'은,

1960년 서울생.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연세대 대학원에서 지각 및 인지 심리학을 공부했다. SKC에서 4년 반 정도 디자이너로 근무했고 2년 정도 디자인회사를 운영한 적도 있다. 현재 한성대학교 미디어디자인 컨텐츠 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며 주 전공은 미술 및 디자인 심리학이다. "디자인의 법칙", "시각예술과 디자인의 심리학", "뇌, 아름다움을 말하다" 등을 5권의 책을 썼다. 심리학을 기반으로 디자인 교육, 경영, 창작 등에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하려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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