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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모사드는 '아이히만 체포작전' 조작했다"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249> 새롭게 드러난 체포작전의 실상

지난 1960년대 초 전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아이히만 체포작전'이 조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스릴 넘치는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던 아이히만 체포작전의 '전말'은 다수의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요원들과 서방기자들에 의해 각각 다른 제목으로 책으로 출간되기도 해 그 내용의 진위를 놓고 파문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필자가 페론 가(家)의 진실을 취재하면서 수집한 자료와 최근 아르헨티나의 한 언론인에 의해 새롭게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최측근이었던 나치 친위대(SS) 고급장교 출신으로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는 나치 패배 이후 5년 가까이 독일 정부 관리로 일하기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후 경제재건을 위해 히틀러의 자금이 필요했고 석유관련사업 전문가이기도 했던 그의 경력이 독일정부로서는 아까웠던 것이다.
▲ 현역시절의 아돌프 아이히만 ⓒ베를린 DHM자료

그러나 이스라엘과 연합군 측에서 그의 나치전력을 문제 삼기 시작하자 아이히만은 이탈리아로 건너가 한 수도원에 은신 중 지난 1950년 아르헨티나로 피신, 10년 가까이 독일의 자본투자와 기술이전을 유치하는 등 왕성한 경제활동을 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르헨티나로 피신한 아이히만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가 아르헨티나로 입국할 때는 리까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을 사용했지만 2년 후 자신과 합류한 가족들은 당당하게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의 자녀들도 본명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독일계 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가 아르헨티나를 선택한 건 후안 도밍고 페론 전 대통령의 평생 지우이자 오른팔 역할을 했던 호르헤 안또니오와의 친분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페론의 최측근이었던 호르헤 안또니오는 이탈리아로 날아가 아이히만을 비롯해 10여 명의 나치장교들을 직접 인솔해 오기도 했다.

페론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아이히만은 1951년 안또니오와 함께 메르세데스 벤츠 자동차의 아르헨 현지생산 공장설립을 주도했고 이 회사의 현지법인 간부로 임명되어 안정된 생활을 보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페론은 승용차가 없는 일반 서민들의 대중교통수단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벤츠사에 대형버스의 대량 생산을 주문했고, 아이히만은 페론의 이 프로젝트를 차질 없이 수행했던 것이다. 이때 생산된 벤츠사의 시내버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까지도 아르헨티나 전국의 시내버스로 운행되고 있다.

벤츠 시내버스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 하나. 아르헨 한인 이민 초창기 때의 일이다.

한때 아르헨 교민들에게는 누가 무슨 승용차를 타는지가 큰 관심사였다. 각종 모임이나 축구친선경기장 같은 곳에서 만나면 "어이, 자네 무슨 차 타나?"라고 물어보는 게 인사였다. 이에 대해 그때까지 승용차를 장만하지 못한 교민들은 큰 소리로 "아, 나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다닌다네"라고 대답했다. 승용차가 없어 아직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고백이었던 셈이다. 그만큼 이때 생산된 벤츠 버스는 일반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하며 이들의 발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아무튼 페론 정부는 독일과의 경제협력, 기술이전 등을 위해 그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면서 반대급부로 그의 신변을 철저히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나치 전범이라는 신분을 잊고 아르헨티나 상류층들과 어울리며 자유로운 삶을 즐겼던 것으로 나타났다.

나치 전범이라는 신분을 잊고 아르헨티나에서 승승장구하던 아이히만은 1955년 아르헨 군부가 쿠데타로 페론을 축출하고 강제로 정권을 잡으면서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새롭게 정권을 잡은 군부가 벤츠 공장의 설립 자금 출처를 문제 삼은 것이다. 나치의 숨겨진 비자금이 아르헨 현지 자동차공장에 투입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었다.

나치 자금 활용 문제로 전전긍긍하던 아르헨티나 벤츠 현지법인의 최고주주 도이체방크 임원들은 윌리암 모세띠라는 인물을 끌어들여 군부와 사법부를 설득하게 된다.

아르헨 사법부는 주식양도와 현지 노동자 고용조건 완화, 그리고 약간의 벌금을 내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윌리암 모세띠는 1960년 5월 1일 벤츠 현지법인의 CEO로 전격 기용된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모사드의 아이히만 체포작전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윌리암 모세띠는 이탈리아 군인 출신으로 무솔리니 측근 인사였으며 무솔리니 실각 이후 미국 정부기관을 위해 일하는 동시에 스탠다드 오일로부터도 활동자금을 받고 있는 비밀스러운 인사였다.

그런 그가 메르세데스 벤츠 아르헨 현지법인 최고책임자로 임명된 직후인 1960년 5월 11일 정오 아이히만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외각 모처의 중요한 모임에 참석하고 오겠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남기고 집을 떠난 뒤 실종됐다.

이날 오후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 요원들에 의해 납치된 뒤 소형 비행기에 태워져 우루과이로 옮겨지고, 여기서 대형비행기를 바꿔 타고 이스라엘로 이송돼 사형 언도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이와 함께 아르헨 현지언론인 가비 웨버는 최근 아르헨티나 정부자료와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아이히만 체포작전 내용이 터무니없게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웨버의 주장을 요약한다.

"지난 1961년 12월 15일 이스라엘 사법부가 아돌프 아이히만 전 나치 친위대 장교에 대해 수백만의 유대인 학살책임을 물어 사형 언도를 내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계적인 화제가 된 아이히만 체포 작전은 사실과는 다르게 진행됐다.

10년 이상 아이히만을 추적해 오던 이스라엘의 모사드 요원들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그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1960년 5월 11일 오후 시내 외곽에서 대기 중이던 자동차에 아이히만을 밀어 넣어 아주 쉽게 그를 납치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약 9일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모처의 안가에 감금한 후 그를 약물에 중독된 항공사 승무원으로 가장해 아르헨 출입국관리들의 눈을 속이고 엘 알 브리스톨 브리타니카 항공기를 통해 아르헨티나 에세이사 국제공항을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항공기는 1960년 5월 21일 오전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이스라엘 정부대표들을 태우고 온 전세기로서 에세이사 국제공항에 대기 중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항공기가 21일 자정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다음날 오전 7시 35분 이스라엘에 도착했다면서 중간에 연료 공급을 위해 다카에 한번 기착했다고 발표했다.



▲ 아이히만을 우루과이로 납치해간 경비행기와 동종의 항공기 ⓒ파이퍼 항공사 자료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정부 대표들이 타고 온 전세기의 최대항속거리가 6869km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다카까지는 6952km다. 이는 운항 중 다른 곳 어디에 한번 더 기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아르헨티나 당국이 당시 출입국관리소와 세관 등을 조사했던 자료에 따르면 그날 밤 약물중독이나 환자였던 승무원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아이히만이 에세이사 공항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탑승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 대표들이 타고 온 이 항공기는 이스라엘로 향하기에 앞서 중간에 우루과이의 뿐따 델 에스떼의 라구나 델 사우세 국제공항에 잠시 기착했었다. 그렇다면 왜 이 항공기가 우루과이를 경유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아르헨티나 정부나 세계의 언론들은 지난 1960년 5월 11일 아이히만이 거주했던 집 근처 국내공항에 미국 국적의 소형 파이퍼 항공기 한 대가 정착해 있었던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항공기의 미국인 조종사가 공항 주변을 서성거리다 그날 오후 갑자기 사라진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이 소형 항공기는 그날 오후 모사드 요원들에 의해 납치된 아이히만을 은밀하게 탑승시키고 우루과이 뿐따 델 에스떼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 안가에 아이히만을 감금시킨 후 취조를 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10일이 지난 같은 달 21일 부에노스아이레스로부터 날아온 엘 알 브리스톨 브리타니카 항공기에 아이히만을 태우고 유유히 이스라엘로 향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항공기는 연료공급을 위해 다카에 잠시 기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아이히만의 체포작전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모사드의 활약이 아니라 벤츠 아르헨 현지법인 책임자가 된 윌리암 모세띠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모세띠가 아이히만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외곽 모처로 임원회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불러냈고 사전에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통보 받은 모사드 요원들이 회합 장소로 들어가기 위해 길을 건너던 아이히만을 순식간에 대기 중이던 차량에 밀쳐 넣은 것이다. 그게 모사드가 아르헨티나에서 벌인 작전의 전부였다.

그 후 아이히만의 신병을 확보한 모사드 요원들은 탑승자들에 대한 감시가 거의 전무한 국내 자가용 비행장에 대기 중이던 소형 파이퍼 항공기를 이용,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아이히만을 우루과이까지 납치해 간 것이다.

이것이 전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아이히만 체포작전의 실제 상황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소리소문 없이 납치하기 위해 윌리암 모세띠를 아르헨 벤츠 현지법인 책임자로 임명될 수 있도록 모종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띠라는 인물이 스탠다드 오일을 위해 일한 인물이라는 걸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스라엘 정부는 1961년 5월 11일 아이히만을 납치한 후 21일까지 10일 동안 무슨 일이 벌였는지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정보기관 요원들은 아이히만을 취조하면서 고문을 했는지, 아니면 아르헨 벤츠 생산 공장의 운영과 관리에 대한 모종의 타협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더불어 아르헨 정부가 이스라엘에 제기한 아이히만 납치사건에 대한 국가주권 침해 주장이 확실한 결론을 보지 못한 채 중간에 유야무야된 것도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아이히만이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적법한 절차를 무시한 채 백주에 외국에 가서 사람을 납치한 행위는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 될 수 없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 전세계 언론 등이 현지의 실제상황은 무시하고 모사드와 이스라엘 정부의 발표만을 중심으로 책을 펴내 많은 금전적인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이는 결론적으로 각국의 독자들을 우롱한 것이며 조작된 정보를 바탕으로 허무맹랑한 픽션을 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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