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는 정치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논쟁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감한 정치가 바로 '안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해주고 있다. 안보가 정치화되는 순간, 웬만한 사실과 증거, 합리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NLL 논란은 10월 8일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국회 발언으로 촉발되었지만, 이 발언은 나름의 예열과정을 거쳐 '감행된' 것이었다. 9월 17일 이명박 대통령은 긴급외교안보장관회의를 소집했는데, 그 회의의 핵심 결론은 북한 어선의 NLL 침범에 강력 대응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흘 후인 21일에는 NLL을 넘은 북한 어선에 대해 우리 해군의 경고사격이 가해졌다. 북한 어선의 NLL 월선을 이유로 긴급외교안보장관회의를 소집한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10년간 북한의 비무장어선이(경비정 제외) 225회나 NLL을 침범했음에도 단 5번에 그쳤던 해군의 경고사격이 안보장관회의가 끝나자마자, 그것도 대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NLL 논란의 예열과정이 아니고는 설명이 어렵다.
NLL 논란, 여권의 예열에서 총공세까지
정문헌 의원의 소위 'NLL 포기 비밀정상회담' 발언이 있은 후에는, 이 이슈를 전방위로 확산하려는 노력이 전개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정상회담 대화록 폐기 논란이다. <문화일보>가 '여권 고위관계자'의 말을 근거로 '노대통령의 대화록 폐기 지시'를 처음 보도하자, 새누리당 의원들이 이를 근거로 "회담록 폐기는 역사기록 말살행위"라는 용어를 써가며 파상적 공세를 전개했고, 급기야 박근혜 후보까지 "역사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역사의 보복을 받는다"며 우회공격에 나섰다. 이는 여권 고위관계자의 말이 언론의 세탁을 거쳐 다시 여권의 공세 근거가 되는 전형적인 '자기증폭' 과정이다.
NLL의 정치화를 위한 지원은 정부 차원에서도 조직적으로 전개된다. 10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연평도를 방문하여 "통일이 될 때까지는 우리 북방한계선(NLL)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면서 안보의 정치화에 직접 나섰다. 10월 24일 제44차 한·미 안보협의회의(SCM)에서는 양국 국방장관이 나서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의 실질적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등 이례적으로 NLL을 언급했다.
그리고 이러한 예열, 발화, 지원사격 등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NLL 논란과 관련된 박근혜 후보의 발언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처음에는 "그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이 그것에 대해 진실을 얘기하면 된다"면서 약간 비껴서 있을 듯하다가, 지난 20일에는 "NLL 포기 세력에 나라를 맡길 수 없다," 21일에는 "장병들이 목숨 걸고 NLL을 지키고 있는데 땅따먹기니, 영토선이 아니니 하면서 안보를 무너뜨리는 게 누구인가"라며 NLL 공세에 올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미 종결된 NLL의 성격 논란
물론 공을 많이 들여 준비한 NLL 공세가 결과적으로는 박근혜 후보의 보수화 덧칠만 강화시켜 그의 국민대통합 행보를 위축시키는 꼴이 되고 만 것은 '안보의 정치화'가 내포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현재 벌어지고 있는 NLL 논란은 1996년 김영삼정부 시절 국회에서 벌어진 NLL 논란과 비교하면 더욱 아이러니하다.
당시 이양호 국방장관은 "북방한계선은 우리 어선이 조업 도중 잘못해 월북할 것을 우려해 설정한 것인 만큼 북한에서 이를 넘어와도 정전협정과는 관련이 없다"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당시 야당인 국민회의는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망언"이라며 이 장관의 파면을 요구했고, 여당인 신한국당은 "이 문제는 매우 전문적인 사항으로 소관부처인 국방부가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라며 이 장관의 발언을 적극 옹호했다. 지난 16년 동안의 남북관계 발전과 개방적 대북인식 변화를 감안하면, 현재의 NLL 논란에서 여당이 보여주는 현실인식은 '완벽한 퇴행'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이양호 장관의 발언은 NLL이 우리측에서 일방적으로 설정한 해상경계선이고, 따라서 북한의 월선을 정전협정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이는 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와 불가침부속합의서의 NLL에 대한 정의 부분과 일치한다. 불가침부속합의서 10조는 남북간 협의에 의해 해상불가침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을 인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남북기본합의서 상의 이러한 정리는 90년대 이래 대한민국 정부의 기본입장이었고, 이는 이명박정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9년 국방부가 작성한 북방한계선 설명 자료에도 NLL이 '실질적 해상경계선'이라고만 정의되어 있고, 영토선이란 표현은 단 한마디도 없다. 즉 NLL의 성격은 이미 오래전에 정리된 문제이고 새삼 논쟁할 사안도 아닌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NLL의 성격이 아니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해법'이다.
문제는 NLL의 해법이다
NLL문제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해법은 10.4선언에서 합의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이다. 이 구상의 특징은 서해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남북경제협력을 연계시킨 점에 있다. 즉 이 구상은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의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통해 NLL의 분쟁성을 평화협력으로 변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구상에 대해서는 박근혜 후보도 당시에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 들어와 이 구상은 즉각 부정되었고, 연평도 포격사건 등으로 서해는 한반도 군사적 긴장의 근원지가 되었다. 그에 따라 북한의 NLL에 대한 입장도 더욱 경색되었다. 그리고 지난 2007년의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도 남북간 군사적 대결구조의 강화와 남북경협의 축소라는 조건으로 인해 과거의 구상 그대로는 실현되기는 어려워졌다. 따라서 NLL 문제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해법인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 역시 변화된 조건에 맞게 새롭게 업그레이드될 필요가 생겼다.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이 변화된 상황에 맞게 재구성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가지 점의 검토가 필요하다. 하나는 NLL 문제를 우회하기 어렵게 된 현실을 반영하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NLL과 직접 연계되는 공동어로구역의 설정 문제이다.
'평화의 정치'를 향해 나아가자
우선 NLL과 직접 연관되는 공동어로구역 설정문제는 남과 북이 각각 주장하는 구역 하나씩을 선정하여 이 두 구역을 시범구역으로 우선 설정·실시하는 단계적 접근 방안이 있을 수 있다. 또 NLL 문제 자체는 한반도 평화관리를 위한 남북 혹은 남·북·미(·중)의 별도 협의기구를 구성·논의하도록 하여, NLL 논의가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 추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이는 한반도 평화관리의 핵심이 되는 평화협정 체결 논의를 분리·병행함으로써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의 동력을 지속시키는 방안이다. 물론 평화협정 논의 역시 합의 가능한 수준에서 포괄적 잠정협정을 먼저 이끌어내는 단계적 접근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제 NLL 논란은 서해평화정착을 위한 실질적 해법 찾기로 논의의 중심이 옮아가야 한다. 그래야 "진짜 결과를 만드는, 진짜 사실에 근거한 진짜 논쟁"(빌 클린턴)으로 변화될 수 있다. NLL 문제가 해법을 둘러싼 논쟁으로 발전하면, 그때 비로소 안보의 정치화는 '평화의 정치화'로 바뀔 수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