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군이 전격 석방되는 조건으로 미군 측이 이라크에 억류된 이란인 석방을 약속했을 것이란 추정이 나오는 가운데, 이번 사건을 풀기 위해 진행된 지난 13 일 동안의 영국·미국과 이란 간 협상에서 이란이 발군의 협상력을 보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한 해결이 난망해 보였던 이번 사건이 협상을 통해 해결된 것은 이란의 핵 시설을 둘러싼 미국과 이란 간의 갈등도 외교적 수단을 통해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능케 한다.
"부활절 맞은 영국인들에 대한 선물"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이슬람 예언자 무하마드의 생일과 예수의 부활절을 맞아 영국인들에 대한 '선물'로 영국 병사들을 "재판하지 않고 사면해 석방하겠다"고 밝혔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이란은 이들 영국 해군을 사법처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이를 용서한다"는 전제를 달아, 영국 병사들이 이란 영해를 침범했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이로써 이란과 이라크를 가르는 샤트 알-아랍 수로 상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에 의해 체포된 뒤 억류돼 온 영국 해군 15명은 13일 만에 자유를 찾게 됐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기자회견 직후 테헤란 내 영국 대사관으로 인도된 이들은 이르면 5일 오전 11시께 런던에 도착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격적인 이날 석방 발표는 하루 전날인 3일 밤 이란 국가안보최고회의 의장 알리 라리자니가 영국 총리 수석 외교정책 보좌관 나이젤 샤인월드와 통화를 한 후 결정됐다.
당초 3일 낮에 예정돼 있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하루 늦춰진 뒤 석방발표가 난 것으로 미뤄 이날 밤 통화에서 양 측 간 물밑 협상이 타결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기자회견과 비슷한 시점에 이란 국영통신 <IRNA>가 "이란 정부의 특사가 이라크 북부 아르빌 감호소에 있는 이란 외교 공무원 5명을 면회하는 것이 허용됐다"고 보도한 것은 영국과 이란이 서로 각자의 인질을 교환한 게 아니냐는 추정을 낳고 있다.
영국군 석방의 조건으로 지난 1월 11일 이라크 주둔 미군이 아르빌 내 이란 외교사무소를 급습해 이라크 내 무장단체를 지원한 혐의로 체포된 뒤 '연합군 감호소'에 억류된 이란 공무원 5명을 석방하라는 것은 이란 정부가 내놓은 카드일 가능성이 높다.
같은 날 지난 2월 바그다드에서 이라크 특수부대 복장의 괴한들에게 납치됐었던 잘랄 샤라피 이란 2등 서기관도 석방됐다.
명분도 챙기고 실익도 얻고…이란의 '판정승'
영국군 석방을 위한 지난 13일 간의 협상 결과에 대해 <BBC>는 "이란은 좋은 패를 가졌고 게임도 잘 했다"고 평가해 사실상 이란의 '판정승'을 선언했다.
이란 정부는 억류한 영국군이 이란 영해 침범을 자백하는 영상을 3차례나 국영 방송을 통해 방영해 '체포의 정당성'을 충분히 설명한 뒤 가능한 한 오랫동안 억류할 것이란 서방의 예상을 깨고 '깜짝 발표'로 화려하게 사태를 마무리 했다.
특히 서방의 최대 축일인 부활절에 맞춰 아량을 배풂으로써 전에 없던 관대한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이란력으로 새해가 시작하는 3월 21일에 맞춰 납치된 이란인들을 풀어주라는 이라크 정부 측의 요청을 거절한 미국의 태도와도 대조를 이뤘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이란은 한시도 주도권을 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영국군 석방 발표 후에는 영국군을 체포한 혁명수비대 사령관에겐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이번 사건을 '승리'로 장식하는 세리머니도 잊지 않았다.
이번 영국군 억류에는 끊이지 않는 이란인 납치 사건에 대한 보복성격도 있었던 것으로 풀이되는 만큼, 미국이 핵 시설을 공격해 올 경우 이란도 즉각 같은 수위의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경고'의 효과도 발휘했다.
반면, 영국 정부는 이란에 시종 끌려 다니며 '굴욕적인' 협상을 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 영국 정부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인질 교환'의 증거가 확실히 드러날 경우 비난의 수위는 한 층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사건 발생 후 초반 며칠 동안 이란이 '알아서' 병사들을 풀어주도록 기다리다가 뒤늦게야 유엔과 유럽연합을 돌아다니며 지지를 요청하는 등 초동대응도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내심 갖고 협상하면 된다"…협상파 힘 받을 듯
그러나 상황이야 어찌됐든 이번 사건을 무력이 아닌 협상을 통해 해결한 것은 서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란의 위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 와중에서 '온건·협상파'들에게 힘을 실어줬다는 분석이다.
<가디언>은 "이번 사건을 통해 미국과 영국의 '비둘기파'들은 '인내심을 갖고 협상을 하면 언젠가는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고 전망했다.
이란 내에서도 '실용파'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번 사태 해결에 '수훈갑'으로 꼽히는 라리자니 국가안보최고회의 의장은 지난 2일 영국 방송에 출연해 "이란은 외교적 해법을 원한다"고 밝힘으로써 협상 국면을 만들어 냈다.
전날 테헤란 주재 영국 대사관이 공격을 당하면서 대결로 치닫던 양국 관계가 라리자니 의장의 발언으로 완화된 것이다.
이란 쪽에서 먼저 유연한 태도를 보이자 강경론이 힘을 받던 영국 내 기류도 선회했고 그 결과 '이란의 승리'로 사태가 해결될 수 있었던 만큼 이번 사건으로 이란 정부 내 온건파들의 입지도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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