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에는 그동안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자제 해 왔던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드디어 입을 열어 "이란의 영국 해군 억류는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즉각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은 억류된 영국 해군을 '인질(hostage)'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오히려 영국군의 이란 영해 침범을 인정치 않는 서방을 향해 "오만하다"고 받아쳤다. 서구 언론과 여론은 온통 영국 해군의 석방 여부에만 관심을 쏟고 있지만 이란 영해를 침범한 영국군을 체포한 것은 정당한 법집행이었으며 오히려 '인질극'을 시작한 쪽은 미국이라는 것이 이란 정부의 주장인 것이다.
1월 이라크에서 체포된 '이란 외교관' 5명 행방이 묘연
21년간 CIA의 중동 전문 요원으로 활동했었던 로버트 베어는 지난 달 29일 <타임>에 기고한 글에서 "영국군 억류가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것은 이란 정부에서도 인정하고 있지만 도발은 미국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이란 정부의 한결같은 입장"이라고 전했다.
이란 정부는 지난 1월 11일 이라크 주둔 미군이 이라크 쿠르지역의 수도인 아르빌에 있는 이란 연락사무소를 급습한 후 이란 외교관 6명을 체포한 것이 '도발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서 미군을 공격하는 세력들에 무기를 공급하는 네트워크를 찾아내 소탕하겠다"고 밝히기 수 시간 전에 발생했고 당시 미군은 장갑차에 블랙호크까지 동원했었다.
미군 측은 체포한 이란인들이 이슬람혁명수비대 대원들이며 이라크 내 시아파 무장단체 지원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미군 측은 "급습한 사무실에선 이라크 내 무장단체와 이란인들의 관계를 증명할 만한 문서들이 발견됐다"고 밝히며 체포된 6명 중 1명만을 무혐의 석방했다.
문제는 그 이후 이들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이란 전문가이자 카터행정부 국가안보회의에서 일했던 개리 식 콜롬비아대 교수는 "그들은 그냥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그들의 운명을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독립통신사인 IPS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이들을 체포한 직후 스위스정부를 통해 이들의 체포 사실을 이란정부에 알렸다고 한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과 외교관계를 단절한 미국은 스위스정부를 대리인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을 밝힌 미 국무부의 한 대변인은 차후의 모든 질문은 바그다드에 있는 다국적군사령부(MFI)에 문의하라며 일체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다국적군사령부 대변인 크리스토퍼 가버 중령은 "이란인들은 '연합군 감호소' 내에 있다"고 확인할 뿐 그들의 상태나 처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어 의혹은 점점 불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무장단체 지원 증거 확보" 공언하면서 재판은 안 해
지난 달 바그다드에서 열린 이라크 컨퍼런스에 참가한 이란측 대표단은 이들이 자국의 외교관이라면서 미국에 대해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의 한 대변인은 이라크정부의 요청에 의해 이들의 체포 및 구금에 관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면서 "미국 정부는 조사가 진행 중인 사항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논평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만을 밝혔다. 자그마치 두 달 이상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미국의 민간 전문가들조차 미군이 이란인들을 체포하고 억류한 데에는 법적 근거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라크에 대한 미군의 군정을 종식하고 이라크정부로의 주권이양을 규정하고 있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서는 미군이 보안상의 이유로 적 전투원을 구금할 수 있는 이른바 '보안 구금(security detention)권'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도 구금과 관련된 절차는 이라크 국내법을 따르도록 돼 있다. 즉 구금 이후 14일 이내에 유·무죄를 가려 이라크법정에 기소하든가 석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라크 법에서도 무고한 이라크 주민이나 미영 연합군에 적대행위를 해 무장 세력으로 확인이 된 경우에만 구금이 가능하고 구금된 자들은 14일 내에 이라크 민간법원에 기소토록 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 미 컬럼비아 법대의 스코트 호튼 교수(국제법)는 IPS와의 인터뷰에서 "(미군의) 보안구금권에 따라 체포된 이란인들은 지금까지 어떤 죄목으로도 기소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불법적으로 구금돼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같은 미군의 자의적인 인신구속은 이라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아프간을 비롯해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체포된 수많은 사람들을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마구잡이로 구금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에서만 아무런 법적 근거없이 미군에 구금돼 있는 사람이 자그마치 1만5000명에 이른다. 이에 대해 국제인권단체인 휴면라이츠워치의 한 간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미군에 의한 마구잡이식 인신구속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면서 "이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미국의 벌거벗은 힘의 행사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이란 정부는 구금된 이란인들이 외교관이며 쿠르드 자치정부의 승인 아래 아르빌에 머물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란 정부의 주장대로라면 미군은 외교관의 신변 안전을 보장한 의한 비엔나 협약도 위반한 셈이 된다.
이란인의 신분이 외교관이냐 아니냐에 따라 미국 측 과실의 중량이 달라지는 가운데 <IPS>는 이들이 체포 당시 완전히 외교관 신분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이들이 외교관 신분을 승인받기 위한 문서를 쿠르드 자치정부에 제출해 놓은 상태이고 자치정부가 사실상 외교관 대우를 했다는 점에서 미국과 이란 정부 간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군이 이라크 내 이란인들의 신변을 위협한 것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라는 점도 이란 정부를 격분케 하는 요인이다.
작년 12월 20일에는 미군이 이라크 내에서 이란 외교관 두 명이 타고 가던 차량을 별 이유 없이 세워 검문했는가 하면 그 다음날에는 이라크 시아파 지도자 압둘 아지즈 알 하킴의 사무실을 급습해 혁명수비대 소속 이란인 두 명을 체포하기도 했다.
미군의 이 '정치적 도발'로 페르시아 만에 엄습했던 전운은 9일 후 체포된 이란인들이 이라크 추방 명령을 받고 석방되고 나서야 해소됐다.
이란 정부는 그간 구금된 이란인 5명의 석방을 꾸준히 촉구해 온 바 영국 해군 체포 배경엔 이에 대한 반발도 작용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이란 측이 영국 해군의 석방 조건으로 억류된 이란인들의 석방을 요구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지만 미국이 이란과의 협상에 응할 가능성이 낮다는 점에서 이란과 미국 간의 갈등의 고리는 '외교적 해법'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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