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일제 강점기에 조선미술을 애호한 일본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1921년 광화문이 헐리는 것을 그토록 슬퍼했다고. 민간차원의 많은 조선미술품을 소장하고 조선미술에 대한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중에 청승맞은 표현 '비애의 미'라는 말도 해서 반감을 갖게 했다는 것도.
일본이 저지른 여러 가지 범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한국을 진정 사랑한 일본인들이 없지 않았다. 그들을 잊을 수 없고 이번 전시회는 그런 상호간의 애정과 신뢰의 교환같은 것이다. 무네요시(柳宗悅; 1884~1961, 소에쓰라고도 부른다)는 철학자로 일찍부터 조선미술의 아름다움에 눈떴다. 조선에 십수 차례 다녀가며 그의 열정은 여러 가지 활동으로 구체화됐다. 서울과 도쿄에서 조선도자기 전시회도 열고 1924년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만들었다. 일본, 조선, 유럽의 민예품을 간수할 일본 민예관을 설립하고 방대한 저술활동과 강의를 하다가 1961년 타계했다. 그가 쓴 책이 국내에 여러 권 번역돼 있다.
조선의 미술이라는 명제를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열을 쏟아 부었나. 그것은 단순한 애호나 실용 이상의 것이다. 야나기는 20대 나이에 조선미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의 주변에는 같이 조선미술에 빠져들고 조선인이 다 되어 살았으며 조선민족미술관도 같이 세운 아사까와 노리다카(淺川伯敎), 아사까와 다꾸미(淺川巧) 형제가 있었다.
1984년 일본인에게는 최초로 그에게 대한민국 정부의 보관문화훈장이 수여됐다. 장남 무네미찌(柳宗理) 민예관장이 대신 받으러 와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미술에 관한 야나기의 이야기를 얼마큼 들었다. 1986년경 그가 설립한 도쿄의 일본민예관을 가보았지만 거기서는 한국미술품이 그렇게 많이 전시돼 있지 않아서 야나기와 조선의 관계가 느껴지지 않았다. 조선미술이 언급된 민예지 몇 권과 사진을 구할 수 있었다. 몇 년 전에는 고 최태영 박사가 일본 명치대 재학중에 야나기 무네요시 부부와 얽힌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기록해두고 싶었다.
그런 차에 야나기 무네요시가 지녔던 조선미술품 73점을 실물로, 그것도 일본의 민예품 및 현대도예와 대대적으로 비교해 볼 전시회가 펼쳐진 것이다.
2층에서 그가 지녔던 조선 도자기와 그릇, 가구, 불상 등을 보았을 때, 그 느낌은 '천상의 것처럼 산뜻하고 정교하고 부드러웠다.' 바로 옆에 더 많은 일본의 전통예술품이 같이 전시되고 있었다. 색감이나 자연스러운 손길 등에서 두 나라의 전통은 아주 달랐다. "아, 이래서 조선 미술품을 좋아한 거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별로 크지도 요란스럽지도 않은 몇 개의 도자기, 연적, 놋쇠와 돌 그릇, 목가구 같은 생활미술품뿐이었는데 모두 정교하기가 이를 데 없고 뛰어난 장인의 손에서 나온 것임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오래된 물건들도 아니었다. 대부분 18~20세기 조선 후기의 것들이어서 그 물건이 지닌 삶의 호흡까지 낯설지 않았다.
화려한 붉은 색으로 '福' 자가 그려진, 간장종지보다 더 작은 합이 몇 손을 거쳐 미국으로 나갔다가 우연찮게 야나기의 손으로 되돌아온 것부터 그가 좋아하고 아끼던 물건들을 별 꾸밈없이 늘어놓은 것도 박물관의 권위적이고 체계적 수집품을 보는 것과는 달랐다. 좋아서 찾아갖는 아름다운 물건은 이성의 대상을 넘어선다.
13.5cm, 반 뼘 정도 작은 크기에 8각형 몸체, 푸른색 줄 몇 개로 꽃 한포기를 휙휙 그려놓은 백자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처음으로 간직한 한국미술품이었다. 1914년 동료 노리다카에게서 이 단지를 선물 받고 그는 조선미술에 눈뜨게 되었다고 한다. 깨소금이나 꿀, 고춧가루 같은 걸 넣어두었을까? 소량으로 담그는 장김치 같은 걸 담아두었을까?
부엌 쪽에서 실용에 쓰인 그릇임이 확실해서 모가 닳고 얼룩지고 흠이 많았지만 이 단지야 말로 소리없이 천상의 느낌을 던져주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어째서 조선의 것은 아름다운가.' 라고 쓴 글이 십분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조형의 세계에서 이 정도의 것을 영속적으로 지니고 있는 나라는 별로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의 조선', 국제타임스 1947.9.17. 이길진 옮김 <조선과 그 예술>, 1994, 신구, p.181.)
'뭘 천상의 것이라고까지?' 하던 이도 막상 보고 나더니 "일본 민예품하고 비교해 보니 정말 조선 미술품 다른 걸 알겠다"고 했다.
대나무를 이어붙이고 4개의 개다리를 붙여 만든 벼루함은 국내전문가도 기법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민예관 측에서는 '한국에서 알면 좀 가르쳐달라'고 했다. 현대미술보다 더 현대적인 석조주전자 등 석물이 많았다. 미술관 측에서는 석조공예품에 많은 비중을 두고 전시했다. 어디 한 군데 허점이 안 보일 만큼 정교한 놋쇠주전자는 방짜유기 같았다. 패랭이꽃과 도라지꽃이 양면에 그려진 편병, 북두칠성 문양이 선명한 호리병 등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조그만 연적들이 한웅큼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처음 보는 녹색 돌의 복숭아 같은 연적도 있고 놋쇠 거북이 연적, 하얀 백자 무릎연적도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어떻게 무릎을 미적 대상으로 삼아 불렀단 말인가. 극작가 정복근 씨가 "누가 여기 있는 것 같아요. 명작을 보면 언제나 그걸 만든 사람이 떠오르지요. 요 조그만 꽃무늬 연적을 만들어 놓고 혼자 즐거워 했을 사람도." 했다.
탄성이 나올만한 물건이 또 있었다. 조그만 돌부처 하나가 서너살 난 귀여운 소년의 얼굴을 하고 놓여 있었다. 즐거움이 가득한 눈, 행복한 기운을 머금은 앳된 얼굴, 인중을 돋운 금은 그 아이가 코를 흘린 자국 같았다. 조그만 입은 웃음을 머금고 머리도 부처님 머리라기 보단 어린애의 머리였다. 그래도 걸친 옷은 스님 옷이다. 그런데 손에 여의주를 쥔 약사보살의 형상이었다.
"요렇게 인간적인 불상을 만드는 데는 한국밖에 없을 거다."
"이렇게 귀여운 아들이 만일 병이 나서 아프다 죽었다면… 부모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잊지 못했을지 알 것 같군요. 아마 그래서 아들의 얼굴로 약사보살을 새긴 것 아닐까. 낫게 해주려는 염원을 그렇게 나타내지 않았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눈앞에 자꾸 어른거리는 그 얼굴이 돌에 새겨져 영원히 살게 된 것 아닌지.
"도공이 자기의 얼굴을 자화상처럼 조각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화가들이 자기 얼굴의 특징을 다른 사람으로도 잘 그리잖아요."
"이렇게 좋은 물건은 정말 옆에 두고 보고 싶어요. 모조품이라도 만들면 안될까."
출판인 김예옥 씨 등 일행 사이에 두런두런 그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 불상의 유래같은 것을 더 알 수는 없을까. 출토된 곳이나 야나기에게 건네진 경위만이라도. 이 어린 돌부처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실물로 보려고 전시장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다.
맨 아래층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일생을 보여주는 사진과 책 등이 있었다. 1920년 서울 인사동의 태화정(지금의 하나로 빌딩)에 십여 명의 장년신사들이 모여 찍은 사진에는 무네요시 일행 말고 조선사람으로 김우영(외교관, 나혜석의 남편), 친일파가 되기 전의 윤치호 등이 있다. 누구의 딸인지 맵시있게 차려입은 10여 세 전후 두 명의 조선 소녀도 있다.
1922년 서울에서 '이조도자기 박람회'를 연 사진도 있는데, 전시장은 조선귀족원이다. 일제로부터 합방의 댓가로 높지도 않은 귀족 작위를 얻어가진 한국인들이 지금 을지로 1가에 전용건물을 마련했는데, 그 내부 사진을 여기 사진에서 처음 보았다.
경복궁 집경당 안에 차려졌던 조선민족미술관 사진도 있다. 1924년 야나기와 아사까와 형제가 자신들의 소장품을 가지고 차린 박물관이다. 야나기는 조선사람들이 '천한 도공의 도자기를 뭐 좋다고 전시하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적고 있다.
1984년 아들 무네미찌 씨가 서울에 왔을 때 '아버님이 조선에 미술관을 만들어놓으셨는데 이후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라고 냉정한 어조로 하는 말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 띵 했었다. 그 미술관이 어떻게 없어졌는지, 소장품들이 어떻게 흩어졌는지에 대해선 아무 자료도 증언도 못 들었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다고도 한다.
당시 무네미찌 씨가 해준 이야기를 다시 꺼내 보았다. "민예관 소장품은 일본, 유럽, 한국 등의 실용을 겸한 예술품을 망라합니다. 수량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약 2만여 점 가량). 부친이 처음 조선에 온 것은 1915년이었고 그때는 이런 물건을 수집하는 이가 드물고 양이 많았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생활예술을 가지고 박물관을 세운 것은 아버님의 일본민예관이 세계 최초입니다."
무네미찌 씨가 서울에 와서 처음 찾은 곳은 1931년 조선에서 사망해 조선옷을 입고 조선인 묘지에 묻힌 아사까와 다꾸미(1891~1931) 씨의 망우리 묘소였다. "부친의 조선미술에 대한 애정은 아사까와 씨 형제한테서 영향을 받은 것이 크다"고 그는 말했다. 아사까와 다꾸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임업시험장 기사를 지내면서 형 노리다카와 함께 조선미술을 사랑하고 일본을 비판했으며 조선인을 위해 헌신했다. 저작으로 <조선도자명고>, <조선의 소반>이 있다.
"일본인으로서는 선친께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문화훈장을 받게 됐습니다. 열심히 한국을 위해 애쓴 부분에 대한 답례로 알고 감사드립니다. 선친도 살아계셨다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무네미찌 씨는 현대공예디자인을 전공, 독일에서 교수를 지내고 지금은 일본민예관장을 맡고 있는 산업공예디자이너다. 1984년에 벌써 '컴퓨터를 사용한 최첨단의 현대 디자인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미와 전통을 존경합니다. 옛날에 겪은 문화는 한국이 일본의 선생이었습니다. 한일 양국의 현대화 과정에 서로 존경과 신뢰가 동반되기 바랍니다. 양국 모두 그 점이 문제 됩니다. 한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습니다. 민예관에서 한국미술전을 개최할까 합니다. 아버지를 닮아 그런지 나도 물건을 보면 한국 것인지 여부를 금새 알아봅니다. 진열품을 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낼 수 있죠. 나라에서 처음 다까마쓰(高松塚) 고분이 발굴됐을 때 벽화의 인물상이 한국 것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일본민예관은 관료가 개입되는 걸 아주 싫어해서 초기에 정부의 지원도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존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부를 해 오고, 한국인의 기부도 있다고 그 당시 감사해 했다. 관료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간섭에서부터 자유로우려는 그 말은 지금도 굉장히 의미있는 이야기로 생각된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말하는 대로 무네요시의 조선미술 소장품은 '허황되지 않고도 정교하고 알찬 물건들'이다. 아름답다는 본질이 돋보이는 것은 그러한 기품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철학자이자 여행가, 이상주의자, 로맨티스트였습니다. 20대에 조선의 미를 발견하고 놀라고 한국의 여러 가지 불행과 그 시대적 상황에서 고통받는 것이 당신의 이상주의와 상반되어 의분을 가지셨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미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요. 부친이 수집한 한국관계 물건은 대개 민예품들이고 도자기, 가구 등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무네요시의 부인 가네코(柳兼子)는 성악가로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의 천도교당, YMCA 등에서 음악회를 열고 수익금을 조선민족미술관을 위해 기부하는 등 야나기과 함께 활동했다. 1921년 가네코가 서울 천도교회당에서 가진 독창회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도 자료로 나와 있었다. 노래 곡목은 롯시니, 슈베르트, 죠르다노의 가곡 등이고 음악회 평은 1920년대 신문명에 대한 갈망과 호감이 물씬 배어 있는 음악회 스케치 기사였다. 무네요시는 곳곳에서 강연도 했으며 많은 청중이 호응했다.
그런데 뜻밖에 야나기 무네요시와 가네코 부인에 대한 특별한 일화 하나를 1999~2005년 사이 고 최태영 박사에게서 들었다.
"나는 1920년대 메이지대학 법과 학생이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가 그 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쳐서 내가 배우댔어. 조선미술을 애호해 조선미술전시회도 열고 서울의 광화문이 헐리는 것을 반대하고 그러니까 일본인 학생들이 '야나기 선생이 자꾸 조선미술 이야기만 한다. 조선인인가 보다'고 배척하려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나서서 '야나기 선생은 진짜 일본인이다' 하고 적극 옹호했어. 배척운동은 더 이상 일지 않았죠."
"당시 도쿄의 조선유학생회 경비도 마련할 겸 그의 부인 알토 성악가 가네코의 음악회가 열리면 내가 음악회 표를 팔러 다니기도 했어요. 가네코의 음악회라면 다들 두말 없었어요. 팔린 표값만큼의 돈을 유학생회에서 기부 받았습니다. 그 돈은 조선유학생을 위한 활동비로만 쓰는 겁니다. 그래서 야나기 선생과 친했더랬어. 가네코가 부른 노래 중에 알토 음색에 잘 맞던 노래를 내가 우리말로 옮겨 불렀더랬어.
'은빛 나는 작은 새가 / 바다 밀물 따라 왔다가 / 썰물에 떠나 어디론가 간다.'
그런데 그때 표를 팔러 다니다 한 교회에 가보니까 무슨 박사 무슨 박사 아주 점잖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한일합방을 반대한 유명한 7박사라고 지금 생각하지요. 당시엔 박사가 아주 귀했거든. 일본에서는 7박사가 한일합방 반대성명을 낸 사실을 애써 덮어두려고 했지요. 박사가 귀하니까 처벌도 하지 못했고. 구마모도(熊本)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의 법과 선생 우끼다 가즈오(浮田和民)가 7박사의 선두에 있던 사람이었소."
이 사실은 최 박사의 역사회고록 '인간단군을 찾아서'와 2004년 12월호 학술원통신에 발표한 '한일합방을 반대한 일본의 7박사' 글에 7박사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설명으로 조금씩 언급됐었다.
법학자 최태영 선생은 일본에서 일본인 스승을 통해 서양법철학을 공부했지만 평생 친일 한 적이 없고 일본의 역사왜곡에 맞서 고대사를 연구한 역사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일본어를 국어로 쓰라는 일본정부 방침에 공식적으로 반대한 유일한 교육자이며 조선청년들에게 학도병이나 정신대 나가야 된다는 반민족 연설을 하지 않았다.
야나기 무네요시 또한 군국주의가 팽배한 일본사회에서도 관료의 간섭에 길들여지지 않으려 했던 자유주의자였다. 그가 어느 부분 조선을 옹호한 것, 수집한 물건을 이리저리 거간하지도 않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평가했으며 자신의 민예관 운영에 정부의 지원을 거절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나는 각자의 입장을 지키면서 우의를 나눈 최태영 선생과 야나기 무네요시 부부 사이의 이 일화가 그 어려운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참으로 아름다운 한일 간 지성인 사이의 교류였다고 생각한다. 최태영 선생의 장서 중에 무네요시가 지은 책 <信과 美>(1943년 생활문화연구회 발행) 한 권이 있는데, 이번 전시회에 나온 그의 저서 일괄 중에 이 책은 보이지 않았다.
아들 무네미찌 씨도 "어머니는 당시 유명한 성악가였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고 가정적인 문제가 없진 않았으나 아버지가 하는 일에 이해가 많았고 한국에 기부하는 일이 자연스러웠습니다"고 했다. 그는 또 "아버지가 친한파로 공격받던 당시의 신문 기사를 모아 출판했으면 합니다"고 말했었다. 최태영 선생이 일본학생들이 그를 배척하려 했다는 증언과 일치하는 자료다. 22권이나 되는 야나기의 전집에 이러한 언급이 포함돼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일본의 시부야 노부코(澁谷昶子) 영화감독이 2004년 성악가 가네코의 다큐멘터리 단편영화를 제작하면서 자료를 찾아 한국에 왔었는데 최태영 선생이 그 소식을 안 것은 한참 뒤라서 이야기를 전하지 못했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일민미술관의 김희령 실장에 의하면, 이 단편영화가 제작된 소식을 민예관에서 동아일보에 알려오면서 차제에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민예관에서는 장소도 좁고 해서 이처럼 광범위하게 한일 전통민예품을 대조전시하는 일 같은 건 하지 못했다.
영화는 가네코 부인을 중심으로 제작됐다. 그녀의 음색은 날카롭고 힘찼다. 83세, 85세 때에도 독창회를 열었으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일본의 철학자 쯔루미 슌스케가 평가하는 다음의 말이 나온다.
'무네요시가 한국문화에 몰입했다. 가네코는 성악가로 번 돈을 전부 남편 일에 쏟아 넣으면서 남편이 하는 일의 짐을 나눠 지었다. 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시대를 앞서나갔다. 메이지 시대의 군국주의에서도 그들은 일본사회의 편협한 국수주의에 함몰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부부로서 같이 어울린 것은 근사한 일이다. 이런 사람들이 일본에 있어 다행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나올까 하는 것이 관계자들의 주목거리다. '비애의 미'라는 표현에 일찍이 박종홍(철학자)이 '고구려의 웅장한 미술을 지닌 우리다'고 이런 감상을 거부하고 고유섭 등이 '그저 詩적인 말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원래 무네요시의 그 말은 '위엄의 미', '건강의 미'라는 표현과 같이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조선미술을 말할 때 아무 생각 없이 한이니 비애니 하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야나기의 글에는 조선미술에 대해 생각할만한 좋은 표현이 더 많다. 민화에 대한 다음 글은 조선의 민화를 자리매김하는 예리한 평론이다.
"조선의 민화는 모두 조선풍으로 이루어져 있어 결코 중국의 모방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조선민화는 확실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결코 다른 나라나 화풍에 종속된 표현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무명인 민화뿐만 아니라 記銘한 조선화도 크게 다시 보아야만 한다. 후자인 경우도 중국 직계인 것과 조선계인 것이 있는데 후자에 훨씬 더 특색이 있다.
그리고 이 분야에 있어서도 아직 어느 미술관도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앞서 이(李)왕가 및 총독부 미술관 등에서 수집한 조선화는 대부분이 중국 계통의 것이었다. 더더구나 민화는 한 폭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회화사에서 민화기 제외되어 있는 현재의 사정은 바뀌어야 한다. 아마도 이들 민화가 오히려 현대 화가들에게 더 경탄을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만큼 무언가 새로운 자유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의 민화', 민예80호, 1959년 8월호; 이길진 옮김 <조선과 그 예술>, 신구, 1994, p.323.
민예관 소장 한국 미술품 중 조선민화가 2005년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반갑다 우리 민화' 전시회 때 다수 나와서 전시됐었다. 이번에는 73점의 생활예술품들이 나왔다. 다만 무네미찌 전 관장(91)은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 전시회 개관에도 오지 못했다.
전시회는 초반엔 별로 방문객이 없다가 차츰 늘어난다고 한다. 오는 2월25일까지 연장전시한다. 이번에 공개된 민예관 소장 조선미술품을 전문가들이 미적으로 더 분석하고 무네요시의 조선미술론이 더 많은 토론 등을 통해 학문적으로 발전된다면 우리 미술이 갖는 자산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더 깊이 있어진 조선미술의 다채로운 면모를 보고 싶다. 그리고 이처럼 아름다운 물건들을 더 자주, 더 가까이, 물건의 개인적인 내력과 애호의 열정이 뒤섞인 흥미로운 일상으로 접해보고 싶다.
전시장 밖에 나오니 야나기도 사랑했던 광화문이 제자리를 잡아 복원되느라고 가림막을 친 채 저녁 어스름 속에 서 있었다. 그 앞에 광장이 조금이라도 만들어지려나? 광화문 네거리의 대한제국 기념비각과 그 앞의 만세문, 길상의 동물 조각이 얹힌 풍경이 더할 나위 없이 '서울다운' 아름다운 삽화처럼 눈에 들어왔다. 야나기의 조선미술품은 이런 풍경과 삼위일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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