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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죽음으로 진실 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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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죽음으로 진실 덮다"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40> 후세인 처형과 인혁당 처형

"억! 그렇게 빨리!" 법정에서 형이 확정된 지 나흘 만에 사담 후세인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리다. 바로 그때 후세인 얼굴에 겹쳐 '인혁당' 재판(1975년)으로 대법원 판결 확정 바로 다음날 처형됐던 8명의 피고인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1980년대 말 '유신독재의 제물 인혁당 사건'이란 기사를 쓰기 위해 만났던 유가족들의 눈물 어린 얼굴들이 떠올랐다.

술 한 잔 먹고 박정희 욕하다 파출소로 끌려가면 순경이 "너! 빨갱이지?"라는 거칠게 묻던 1970년대를 살다 간 희생자들과 21세기의 후세인을 잇는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무려 31년의 터울을 둔 두 재판엔 무서운 정치적 계산들이 깔려 있다. 유신독재체제 강화(박정희)와 이라크 침공 정당화(조지 부시)에 재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선전한 세력들이 진실을 덮겠다는 일념 아래 서둘러 피고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인혁당' 조작자들은 언제 심판 받나

'인혁당' 사건 조작지시 총책은 대통령 박정희, 조작의 실무주역은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와 6국장 이용택, 유신독재의 허수아비 법원 총수는 대법원장 민복기였다. 박정희는 인혁당 사건에 집요할 만큼의 관심을 보였다. 1989년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금배지를 달고 있던 이용택을 만났더니, "한창 수사가 진행중일 때, 나는 1주일에 두 번꼴로 청와대로 가서 직접 보고를 드렸다. 물론 신직수 부장과 함께 갔다"고 했다. 물론 그는 "내가 고문을 지시한 일도, 고문 하는 것을 본 적도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천주교인권위원회 엮음,『사법살인, 1975년4월의 학살』174-5쪽 참조).

후세인 사형판결은 1982년 시아파 밀집 거주지역인 두자일을 방문했던 후세인이 공격을 받은 뒤 그곳 주민 148명을 재판에 넘겨 처형한 데서 비롯됐다. 밉든 곱든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암살하려 했다면 중죄다. 다만 14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것은 지나쳤다고 지적된다. 수니파 출신 독재자 후세인은 "나를 거스르면 이렇게 된다"는 메시지를 시아파에게 전하려 했을 것이다.

두자일 사건과 인혁당 사건엔 큰 차이가 있다. 두자일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인혁당 사건은 조작된 일이다. 두자일 사건을 지휘한 바르잔 이브라힘 알-티크리티 전 정보국장(후세인의 배다른 동생), 재판을 맡았던 아와드 알-반다르 전 혁명재판소장도 후세인과 함께 지난 12월26일 사형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 두 사람도 곧 처형될 운명이다. 그런데 인혁당 사건 조작자들은 전혀 아니다. 법정 단죄는커녕 "내가 그때 지나쳤소" 또는 "죽을 죄를 졌소"라는 유감이나 반성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가리고 싶은 부끄러운 미국의 과거사

유신독재의 서슬 푸른 법정에서 형 확정 판결이 내려진 다음날 처형된 '인혁당' 피고인들이 할 말을 못하고 갔다면, 후세인은 미국인들이 교육시킨 이라크 판사가 진행하는 비공개 법정에서 진실을 제대로 못 밝히고 갔다. 그렇다면 후세인에 관련된 진실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국가이익을 위해서라면 독재자와 기꺼이 손을 잡았던 미국의 부끄러운 과거사가 얽혀 있다.

이란-이라크전쟁(1980-8년)에서 미국이 행한 역할은 중동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미국은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이 있기 전까지 이란의 석유 이권 4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란 혁명으로 하루아침에 석유이권을 빼앗긴 미국, 페르시아 만의 강자를 꿈꾸던 후세인의 기묘한 결합이 이뤄졌다. 1983년 11월 26일 레이건 행정부 고위관계자들은 '국가안보 결정지침(NSDD) 114' 문건으로 이란-이라크전쟁과 관련한 미국의 중동정책을 새롭게 정비했다.

이에 따라 1983년 12월 20일 도널드 럼스펠드(전 국방장관)는 이라크의 바그다드 대통령궁에서 후세인을 만나 90분 동안 밀담을 나누었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럼스펠드 특사에게 "미국은 이란의 승리를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점을 후세인에게 밝히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 무렵 이라크는 이란군의 공세에 밀려 마즈눈 유전지대를 빼앗기는 등 고전하고 있었다. 미국은 국토 면적에서나 인구에서 이라크보다 훨씬 덩치가 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국인 이란과의 소모적인 전쟁을 후세인이 8년 동안이나 질질 끌도록, 군사정보와 화학원료를 비롯한 물자로 후세인 정권을 지원했다. 그 규모는 무려 297억 달러 어치다. 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국제금융기관들에게 압력을 가해 이라크에 전쟁비용을 대 주도록 했다.

이라크는 이란-이라크전쟁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함으로써 국제법을 잇달아 어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후세인 지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21세기 들어 미국의 석유갈증이 심해지자, 2003년 이라크 침공 때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를 침공명분 가운데 하나로 삼았던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할랍자 주민 5000명 누가 죽였나

후세인은 그에게 사형이 언도된 두자일 사건 말고 다른 재판도 진행 중이었다. 1980년대 이라크 북부 쿠르드 족을 화학무기로 죽였다는 사건들에 대한 재판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명분의 하나로 기회 있을 때마다 "자국 국민을 화학무기로 죽였다"란 주장을 해 왔다. 그 대표적 근거로 꼽아 온 것이 1988년3월 이라크 북부 할랍자 마을에서 쿠르드족 주민 5000명을 화학무기 공격으로 무참하게 죽인 사건이다.
▲ '세기의 재판'이라 불릴 사담 후세인 재판은 점령국인 미국이 교육시킨 이라크 판사들에 의해 진행돼, 처음부터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됐다. ⓒ프레시안

그러나 이 대목에 관한 한 후세인은 할 말이 있다. 그가 처형당하지 않고 쿠르드 족 학살사건을 다루는 법정에 나섰더라면, "당시 할랍자 마을의 쿠르드족 주민들을 화학무기로 죽인 것은 이란군이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 해병이 1990년 12월, 걸프전쟁 작전 참고자료로 작성한 <이란-이라크 전쟁의 교훈>이란 제목의 기밀문서, 다른 하나는 미 국방정보국(DIA) 기밀보고서다.

해병대 기밀문서(FMFRP 3-203)는 부록 항목에서 이란-이라크 양쪽의 화학무기들을 분석했다. 문서는 "(5000명에 이르는) 할랍자 마을 쿠르드족을 죽인 문제의 화학무기는 혈액제재로 보인다. 이라크 군은 이런 종류의 화학무기를 사용한 적이 없다. 이란군이 쿠르드족을 공격했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라 적었다. 쿠르드족 주민들은 양쪽 군대가 벌이는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에 끼여 있다가 이란군이 쏜 화학무기에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재명의 뉴욕통신<9> 부시 전쟁당위론 3가지의 허구: "쿠르드족 죽인 것은 후세인 아닌 이란군" 2003년3월17일자 참조).

부시 미 행정부는 사담 후세인을 악(evil)의 존재로 그려 왔다. 할랍자 마을의 쿠르드족 학살설도 그 주요근거로 제시돼 왔다. 만일 후세인이 서둘러 처형되지 않고 쿠르드족 학살과 관련된 다른 재판으로 법정에 나선다면, 부시 대통령은 곤혹스런 처지에 빠졌을 것이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전에 퍼뜨렸던 후세인-빈 라덴 연루설처럼 "아니면 말고…"로 얼버무리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제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쿠르드족 학살재판의 핵심 당사자인 후세인을 없애버린 것이다.

후세인이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이라크 현지취재 때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기 바로 직전까지 바드다드대 법대의 학장을 지냈던 수헬 파틀라위를 만났었다. 전쟁법 전문가인 파틀라위는 "유엔안보리 결의를 거치지 않은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은 뚜렷한 국제법 위반이며, 아부 그라이브 감옥에서의 수감자 학대는 전쟁범죄 행위로서 1949년 제네바협정을 어긴 사건"이라 지적했다.

따라서 파틀라위는 영미 정치지도자들과 군사령관들이 1998년 로마협정에 따라 출범한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전범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했다. '세기의 재판'으로 기록될 후세인 재판은 '승자의 재판' 성격이 짙다. 훗날의 역사가들은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미국이 졌다면, 법정에 설 사람은 후세인이 아니라 부시였을지도 모른다고 기록할 것이다.

(이 글은 <한겨레신문> 1월12일자에 실린 필자의 칼럼을 다시 수정한 것입니다.)

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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