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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인미공', 그리고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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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인미공', 그리고 창덕궁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24> 원서동 언더그라운드

무심히 지나치는 이들은 아마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원서동, 이곳이 20~30여년전 쯤 비롯된 예술의 일종 학파가 숨 쉬는 곳임을.

율곡로에 면한 현대건설 사옥 옆에 건축의 서울학파를 자칭하는 건축사무소 '공간'이 있다. 거기서 안쪽으로 들어가 창덕궁 요금문 앞에 있는 '인사미술공간(인미공)'은 서울의 언더그라운드 미술학파를 나타낸다고 해도 좋다. 한국불교미술박물관, 궁중음식연구원도 한 동네에 있다.

굉장한 장소는 아니라 해도 이름 붙여 말 할만한 곳들도 많다. 원서동 언덕 막바지 비원 담밖 흔히 '장희빈 집터'라고 부르는 곳, 상궁이던 여성이 대궐을 나와 살던 야무진 한옥 백홍렬의 집은 서울의 문화재다.

동네 아래쪽에는 오래돼 퇴락한 집들이 많이 있지만, 툇마루에 놓인 붉은 다알리아 화분 같은 어여쁜 장면이 빼곡 열린 문틈으로 보인다. 화가 고희동의 버려진 옛집은 귀신 나올 것 같은 폐가가 되어 가림막이 둘러쳐 있다. 작가 최인호씨가 이 동네에 새 작업실을 짓는다 하고 사진가 유기성씨도 여기 산다.
▲ 건축사무소 공간. 무대예술까지 아우르던 시대가 있었다. 원서동의 한 이정표이다. ⓒ하지권

건축가 김수근씨가 생존해 있을 때 '공간' 건축사무소 지하에 소극장이 있었다. 전시장, 찻집과 석탑있는 마당까지 어울린 장소로 1980년 이전부터 십수년간 소규모 무대예술의 진수를 담아내고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무용, 연극, 음악, 국악, 미술 할 것 없이 한국 전통예술의 진취적인 방향을 짚어나간 좋은 무대가 많았다.

무녀 춤꾼과 대학교수 춤꾼이 동등하게 어울리고 1978년경 김덕수사물놀이가 여기서 배태됐다. 관객을 사로잡는 눈매가 카리스마적인 김숙자씨가 열두자 명주수건을 날리며 코앞에서 도살풀이를 추던 곳이고 진주에서 올라온 김수악씨가 열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논개살풀이를 추었다. 고설봉씨가 신파연극의 대화법을 보여준 무대도 있었다.

백남준씨가 관객으로 와서 앉아있기도 했다. 김덕수 사물놀이의 원 멤버 김용배씨가 자살한 뒤 공간에서 49재 추모공연을 하던 날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이들 사물놀이의 존재를 알았던 사람들만이 공간 그 좁은 극장안이 울려 터지도록 나오는 화음과 김용배의 연주를 기억한다. 뉴욕에 있으면서도 이런 자리를 찾아 비좁은 자리에 내로라 하는 자의식 없이 와 있는 사람이 백남준이었다. 그가 사랑한 한국문화의 근간은 이런 현장에서 나왔다. 선한 얼굴의 뛰어난 연주자였던 김용배란 이름을 앞세운 마지막 자리였던 듯하다.
▲ 불교미술박물관 장독대에 놓인 북돌. 현대조각같다. ⓒ하지권

여기서는 객석 자체가 무대같은 날이 많았다. 돌이 깔린 현관 물확에 담긴 금붕어를 보면서 무용가 김백봉씨가 '담뱃재 혹은 고추가루를 먹여서 배 뒤집어진 금붕어 살리는 법'을 가르쳐주던 밤도 있었다. 사업가 전낙원씨가 소리없이 구경하고 돌아가곤 했다. 지금 그의 기업이 벌이는 문화사업이 있다면 근저에 '공간'의 이런 밤들도 녹아있을 것이다.

1980년대 많은 저녁을 일 때문이긴 했지만 공간 소극장에서 보냈다. 김수근같은 문화애호가가 있었기에 공간의 그 시대가 가능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참으로 화려한 면면들이 여기 모이고 문화예술을 이끌어간 어떤 경향을 만들어 냈다. 문화라고 불릴 만한 것이다. 여름이면 담장이가 감싸는 검은 전벽돌 집, 고인이 된 김수근씨는 서울학파라고 부르며 공간의 여러 면모를 사랑했었다. 그의 사후 소극장은 폐쇄되고 지금은 건축사무소만 활동 중인 것 같다. 정치, 경제처럼 권력적인 힘은 안 보여도 문화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겠다.

인사미술공간은 공식채널로는 잡히지 않는 젊은 미술가들의 활동공간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미술가들을 위한 자료수집과 지원 등을 행하는 곳으로 인사동에 있다가 2006년 봄 원서동으로 이사와 새 둥지를 틀었다.

1980년대에 <폼A>이라는 전위적 미술잡지를 발행하던 일단의 젊은 미술가들이 있었다. 아주 신선한 인상을 던졌던 언더그라운드 움직임이었다. 그때 활동하던 백지숙씨 등이 이제 선배가 되어 이곳을 다시 젊은 작가들이 모여드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들어가는 문이 거울이라 빨려 들어가듯 안에를 기웃해보니 외국인 예술가와 함께하는 여행잡지 워크숍이 진행 중이고 난해한 미술용어들이 가득해 내가 잘못 왔나 싶었다. '생각은 입에서 나온다'며 워크숍을 통해 잡지를 만들고 또 여러 나라를 순회전시한다 한다.

사람들이 하나 가득한데 미술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작품'에다 자료가 산더미 같았다. 그래도 잘난척들 하는 것 같지는 않고 누군가 상냥한 태도로 '전시장도 보세요, 지금 전시 중이거든요' 해서 불이 환한 지하 통로로 내려가 보았다.

통로 끝 자투리 공간의 회벽이 수술실처럼 환했다. 보이는 게 왜 아무것도 없나 했더니 벽면에 '돈 다 내놔(Give me all your money)' 하는 글귀 한 줄이 낙서처럼 새겨져 있었다. "저게 강도처럼 총을 쏴서 만든 글씨에요, 아주 절실한 소리에요" 그래서 그것이 젊은 예술임을 알았다.
▲ 갑신정변의 절박함이 담긴 장소 창덕궁 비원 요금문 앞. 이 일대는 궁담이 모두 가려졌다. ⓒ하지권

일하는 직원의 책상도 미술품인가 보았다. 컴퓨터와 프린터를 눈높이에 놓게 길다란 책상이 높낮이를 이루고 움푹 파이기도 하고 아무튼 처음 보는 구성이었다. 바퀴 달린 책장에 3천권의 자료가 모여있고 중고 명품 의자들, 벽도 천장도 조명등과 책상도 설치미술가의 손을 빌려 저예산으로 폐품을 활용해 마련한 실내장식이라고 했다. 천장 한구석을 뻥 뚫어서 하늘과 겨울나무가 조금 보였다.

젊은 미술가들의 이름을 많이 들었다. 제도권을 답습하기보다 괴상하든 말든 자기만의 생각을 진지하게 펼치는 사람들이 살아있구나 싶었다. 이들이 여기에 모이는 이유는 '원서동 집세가 인사동보다 싸서' 란 것이었다. 과거의 젊은이들이 하던 것처럼 '인미공'이란 알쏭달쏭한 이름 아래 새 세대들이 한몫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오동나무 있는 길에 면해 한국불교미술박물관이 있다. 개인집 넓은 마당에 되는 대로 놓인 듯한 북돌(상석 같은 것을 고이는 북 모양의 받침돌)이나 석탑이 어디서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돌조각들이다. 돌조각은 이상하게 외국의 어떤 예술작품보다 조선시대 이런 예술품들이 마음에 안긴다.

최고 예술가급의 석공들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런 조각들이 거저 생겨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안평대군, 홍석주 등 조선시대를 통틀어 예술애호가들의 행적을 알아보고 싶다. 몇몇 이름으로 남은 이들의 아름다움이나 지적 호사를 추구한 일화를 들으면 고양되는 기분이 된다. 그것은 민중이란 이름과는 다른 것이고 또 최고의 미적 수준은 성취하기 어려운 것인 만큼 잘 간수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예술행정 아닐까 등등이 생각난다. 어떤 소장가들을 거쳐 이곳에 안착하게 됐는지를 들은 것도 있다.

꽃 좋아하는 안주인이 가꾸는 뒷동산의 정원은 봄 여름내 이 일대 최고의 꽃밭을 형성한다. 꽃이 땅위에서 그토록 화려할 수 있다는 것도 드물게 보는 풍경이 되었기에 사랑스럽다.

전시장 안에서 불상을 받친 모란꽃무늬 좌대를 보았다. 불교에 꼭 연꽃만 나오는 것도 아니구나 싶었다. 큰 절에 가서도 불상이 그저 뻘건 방석에 받쳐진 것을 보면 퍽이나 천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렇게 우아한 좌대가 정식으로 있다는 것을 보고는 우리나라 불교미술에 다시금 신뢰가 갔다. 반야용선(극락 가는 불교의 배)의 줄을 붙들고 악착같이 극락에 가려고 기어오르는 '악착동자' 목조각도 있어 불교의 유머가 보인다. 여기서 연구하는 티벳 불교용품들이 별도로 차려져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구경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전시품목도 많지는 않다. 그러나 개인적 신앙과 전문가적 손길이 반반씩 어우러진 듯한 그 여유가 좋아 보인다. 조만간 다시 전시관을 짓는다고 한다. 그럼 지금 보는 이 자연스런 여유는 없어지고 돌조각도 사라지고 말쑥한 공식공간만이 제공되려나.

창덕궁 서쪽의 이 동네, 계동과 원서동에는 역사속의 유명한 사람들 거처가 즐비하고 틈틈이 이름난 부자들의 고래등같은 한옥저택도 보인다. 그런가하면 오래된 기와집들이 해체되어 부분 부분 남은 잔해가 파묻히듯 서있다. 담벼락만 한식 그대로 남은 긴 화초담은 조만간 무너질 듯 아스라하다. 특별히 서울사람이 살고 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옛 서울의 영화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닌 듯한 인상을 남긴다.

백홍렬 가에 몇 년전까지 집주인이 있어 살 때는 방위를 따라 제대로 된 살림집의 분위기가 나고 이야기가 통했다. 궁에 소속됐던 사람이 궁 옆에서 살았다는 사실과도 연결돼 서울의 분위기를 내주었다. 대궐안 생활의 여러 면을 담당했던 상궁들 생의 후일담만으로도 서울은 흥미롭다.
▲ 계동에 남은 한옥과 줄행랑. 지붕만 남기고 안팎이 다 상점으로 변신했다. ⓒ하지권

현재 이 집은 이웃 한샘 디자인센터 경내로 들어가 버렸다. 과거의 잘생긴 대문도 헐린 채 새 담장으로 꽉 막혀 잘 보이지도 않고 창고겸 허드렛집으로 쓰인다. 문화재라고 이름 붙으면 뭐하나, 서울의 역사를 또하나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

한샘디자인센터건물은 이 일대에서 눈에 띄는 한·양식 절충의 현대식 큰 건물이다. 건축당시에는 가구박물관이 된다고 해서 완공되면 볼거리가 생기겠거니 했는데 지금은 회사측의 보안이 철저해 문 앞을 지나는 것조차 눈총을 받는다.

원서동 언덕배기에 들어선 빌라들은 모두 비원(창덕궁) 숲을 정원처럼 내려다 보게 창이 나있다. 4,5층짜리 양옥들이건만 골목길은 그대로여서 어지간한 미로같다. 맞은편에는 창덕궁 담을 끼고 들어선 집들이 있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이 청군에 쫓겨 급박한 상황 속에 피신하던 비원 요금문 주변도 집으로 가려졌다. 궁궐의 담벼락을 제모습 그대로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정취를 느낄 수 있을 텐데 사유권처럼 점령당한 셈이다.

창덕궁 안 원서동 주택가가 보이는 비공개 서쪽 길이 몇 년전 북촌 포럼때 잠간 공개됐었다. 처음 보는 선원전과 책고 등 많은 건물, 방정하고 아름다운 연못 달린 정자가 있고 좋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궁궐 속의 고요함이 깊숙이 스며든 그곳은 반할 만큼 좋았다. 이런 자산을 지닌 서울사람들이 마냥 천박하고 무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숲 속을 관통해 넓은 길이 나있었다. 박정희대통령 때 말 타려고 여기다 길을 냈다고 한다. 철탑도 들어서 있다. 담 위로는 담에 붙여지은 집들의 뒷벽이 얼룩덜룩하고 비닐이며 걸레같은 것을 걸쳐놓기까지 했다.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궁 안팍이 그토록 지저분하다면 문화유산의 자격에 위협이 된다는 것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고 했다.

흔히 보는 소시민적 한옥구조와는 다른 한옥이 계동에 여럿 된다. 모두 원주인들은 떠나고 삶의 형태는 달라졌다. 그중 문대사 집으로 불리던 큰 한옥 하나는 절이 되었다. 계단을 높이 올라가 조각이 특이한 문안으로 예쁘장한 정원이 보이고 뒷마당엔 엄청나게 오래된 살구나무가 있다. 단순치 않은 구조 속에 방이 굉장히 많아 켜켜로 위아래 사람들이 있어 움직였을 모습이 보인다. 강남으로 떠난 주인 할머니가 못잊어 가끔 와보고 기둥이랑을 어루만진다고 한다.

구한말 민재무관 집으로 알려진 곳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북촌문화센터가 되었다. 서울시 건물이 되기 전 이집에 오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 부자인 누군가가 사서 이사왔는데 딸만 일곱을 낳았다고 했다. 옛이야기에 나오는 집처럼 이곳 저곳 돌아가는 구석이 많고 사치했던 서울 부르주아의 내면을 알 수 있는 보기 드문 집구조이다. 지금은 무슨 세트장처럼 사람 손길이 느껴지지 않고 새로 지은 부분은 졸아든 것 같아 보이고 친절하지만 공식적인 응대만이 있다.
▲ 젊은 미술가들이 모여드는 원서동 인미공의 워크숖. ⓒ하지권

한옥이 살림집이기보다는 상업공간으로 바뀌는 것은 자연스런 추세인 듯하다. 한옥에서 먹는 음식점은 일반적이고 지금은 한옥의 정취를 한껏 고조시킨 비싼 술집, 사무실, 화랑 등도 된다. 그런가 하면 골목길에 기와지붕을 인 한옥이 떡볶이집이 되고 튀김도 팔고 있다. 메뉴가 스무 가지도 넘을 것 같은 학생상대 분식점 한옥도 1960년대 스타일 그대로 남아있다.

계동 입구 한규설 대감네 안채도 음식점, 위엄있던 줄행랑은 모두 구멍가게 규모 10여개 점포가 되었다. 한규설 대감집은 중구 장교동에도 있었다. 중구에 한옥이라곤 그저그런 서민한옥 단 한 채만 남아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한규설의 그 아흔아홉간 집을 보존했다면 중구를 대표하는 명예로운 건축으로 남았을 것이다. 굳이 그 잘생긴 한옥을 없애고 파리공원을 만들어서 더 좋아졌단 말인가?

종로구엔 북촌을 끼고 한옥이 몇백집 남아있지만 오래된 저택의 줄행랑이 뻗쳐있는 광경 같은 것은 참으로 귀한 풍경이 되었다.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집도 행랑채는 일찍이 불하되어 모양도 모두 바뀌고 작은 가게들이 되었다. 그나마 이곳 계동에 지붕이 길게 이어진 채 공개된 두 집의 줄행랑이 '잔해'처럼 지붕과 벽 껍데기만이라도 남아있다. 그 풍경은 이곳의 대표적 그림같이도 보인다.

이 모든 풍경들이 모자이크처럼 어울려 계동-원서동의 매력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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