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혼란 없이 돌아간다는 것은 한국사회가 꽤나 성숙했음을 입증하는 역설적인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 반면에 정부 입장에서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어떻게 국정운영을 마무리해 나갈 것인지 고민해야 할 위기임을 잊어서도 안 된다.
더욱이 사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정도를 걷는 것이 임기를 제대로 마무리하는 길임은 역대 정권의 발자취가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제 하에서 역대 정부의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은 대선과 얽히면서 미묘한 움직임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남북관계는 대선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고 정부에 따라서는 이를 선거과정에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실제 정책을 펴기도 했기에 사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 임기 말 시점에 남북관계 분야에서 비교가 될 수 있는 대상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의 세 대통령이 될 것이다. 나아가 임기 말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독재에서 민주화로 이행시기에 해당되지만 남북대화가 개시된 것까지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전두환 정부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4개 정부를 비교해 보면 대체로 김영삼 정부를 기점으로 남북관계가 대선과정에서 발휘한 영향력의 성격은 크게 전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 이전에는 대립적인 냉전적 남북관계가 오히려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또 그러한 방향에서 이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그 이후에는 남북 간의 화해·협력 기조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김대중 정부 당시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꾸준히 진전된 화해·협력의 흐름이 노무현 정부 탄생에 유리한 여건이 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정략적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시대적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북한 핵실험 이후 국제정세
북한 핵실험 사태 직후 김대중 정부 이래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견지되던 대북 화해·협력정책은 큰 기로에 서는 듯한 상황이었다. 핵실험 이후 이른바 '포용정책'의 효과 내지 책임 문제가 보수 세력 및 언론의 공격 대상이 되면서 논쟁의 초점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정부는 대북 인도주의 지원을 중단했고 남북대화는 단절된 상태에 있다. 핵실험 직후 노무현 대통령은 대북 화해·협력정책에 대해 일시적으로 회의적인 견해를 밝힌 바도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여당 및 소수 야당의 전향적인 자세에 힘입어 다시 원래 기조로 중심을 잡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중재 노력으로 북한 측이 더 이상 추가 핵실험이 없을 것이며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사태는 협상국면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도 유엔제재를 추진하는 한편 위폐문제에서 이를 풀어가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10월과 11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의 양자협상이 실현되며, 북미 간에 본격적인 협상이 성립하는 듯한 흐름이 조성되고 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북한이 핵포기 조치를 실행하면 종전협정(평화협정)에 서명할 수도 있다는 뜻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힐-김계관 회담에서는 북한이 핵포기 조치를 개시하면 2008년까지 1년 반의 기간을 두고 북미 관계정상화를 이행할 수도 있음을 제안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이제 북핵문제는 핵실험이라는 대치와 긴장의 국면에서 협상의 국면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12월 19일부터는 6자회담이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대선 기간과 겹치는 기간에는 적어도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사태가 악화되거나 대립과 긴장이 조성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미 간의 불신이 큰 만큼 협상은 난항을 거듭할 것이며, 타결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할 것이다. 그렇게 미국과 북한이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하며 해결이 지체될 수는 있을 것이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는 어느 쪽도 파국의 상황으로 몰고 갈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우선 미국 국내 정세를 보면, 지난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공화당 행정부에 대해 의회의 민주당을 중심으로 협상론의 압력이 강해질 것이며, 힐 차관보가 대북정책조정관을 겸임하게 됨에 따라 그의 권한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진 부시 정부는 북핵문제에서 일정한 성과를 보여주려는 의욕을 가질 수도 있다.
중국 입장에서는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이다. 중국은 국력을 총동원해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추진하는 만큼, 한반도 정세를 안정화시키고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따라서 미중 간에는 베이징 올림픽을 둘러싸고 일정한 타협이 성립할 가능성이 크다.
또 이를 계기로 중국도 북한에 대해 일정한 경제적 이익을 보장할 수 있으며, 이는 북한에게도 놓치기 아까운 기회가 될 것이다. 이미 북한은 11월 남한에 베이징 올림픽 단일팀 구성 문제를 제안했고 준비접촉이 성사되고 있다.
내년 대선국면과 북핵문제
이처럼 노무현 정부에게는 임기 말에 와서야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오히려 그 이전보다 비교적 유리한 대외적 국면이 전개될 수 있다. 이 점에서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절정에 다다르고 이후 2년 이상 퇴조 국면을 보인 김대중 정부나, 1991년 말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체결한 뒤 북핵문제가 대두되며 임기 말을 맞아 남북관계에서 정체 상태에 빠졌던 노태우 정부와 비교된다.
그러나 국제정세와는 대조적으로 국내적으로는 노무현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따라서 유리한 대외정세가 좋은 기회가 될지 어떨지는 쉽게 낙관할 수 없다.
어떻든 역대 정부에서 임기 말에 남북관계에서 국제적으로 유리한 정세를 맞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며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다. 북한으로서도 남한 정부의 임기 말에 남북관계를 새롭게 타개한 적은 없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상황이 된다.
정치적 계산의 차원에서만 보면 북한으로서는 노무현 정부와 남북관계에서 새로운 성과를 만들어 갈 수도 있겠지만, 차기 정부의 향방에 따라 노무현 정부와의 합의가 계속 지켜질지가 최우선적인 관심사일 것이다. 만일 한나라당 정권이 탄생할 가능성이 크다면, 굳이 현 정부와 타협하기보다 시기를 늦추어 차기 정부와 합의를 보려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2대에 걸친 성과를 한나라당 정권이 전부 뒤집어 버리는 상황이 되지 않을지 현재로서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남북관계는 아니지만 이미 2000년 10월 미국의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와 합의한 북미공동코뮈니케가 부시 행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휴지조각이 된 경험은 북한에게도 뼈아픈 참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북미관계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유동적이라 사태 전개를 정확히 점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북한이 선거과정에서 나타날 여야 대결의 구도를 면밀하게 지켜보며 노무현 정부와의 협상에 임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점에서 선거과정에서 한나라당이 선거 공약으로 어떤 성격의 대북정책을 제시할지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거꾸로 이는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처음 겪는 경험이 될 것이다. 이미 지난 대선에서 경직된 대북정책이 패배 요인이었음을 자성하고 있던 한나라당으로서는 그동안 유연성을 보여 온 대북노선을 북한 핵실험 이후 다시 강경한 쪽으로 회귀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북핵문제 정세가 협상국면으로 전환하자 한나라당에게는 커다란 딜레마로 다가오고 있다. 강경으로만 가자니 북한의 비난에 직면하며, 노무현 정부와 북한의 협상을 가능성을 높여줄 우려가 있고, 그렇다고 전향적으로 가자니 정부와 여당의 정책을 정당화시켜 주며 정책의 지속성을 보장해 줄 우려가 있다. 어느 쪽이 대권 획득에 도움이 될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남북 각각의 과제
이처럼 내년 대선 국면에서의 남북관계는 고난도의 복잡한 게임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미묘한 정세에서 계산이 어려울수록 정도를 가야 한다는 원칙은 남북 모두가 견지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는 정치적 계산의 문제를 넘어 역사적 평가에서 노무현 정부가 남북 화해·협력에서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된 6.15시대를 계승했는가 하는 점에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대중 정부 이래 형성되어 온 '평화의 지배블록'이 한미FTA협상 개시 선언이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 과정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심각하게 여기고 여당과 함께 지지층을 재결집시켜 간다는 지향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이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다시 한나라당에게 대연정과 유사한 거국내각 구성을 제안했다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다. 대북정책에서 초당적 협력을 얻어내기 위한 노력과 연정 제안은 전혀 다른 차원의 정치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치적 계산에서 보더라도 노무현 정부로서는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한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이 없다. 북핵문제가 국제적으로 협상국면에 들어가고 있고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유지될 가능성이 큰 만큼, 그것이 실제 가시적 성과로 나타날지 어떨지와 별개로 화해·협력정책의 기조를 유지하는 것은 국제정세와 합치하는 것이다.
6.15시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책무는 남쪽 못지않게 북한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중요한 과제다. 일단 북한은 6자회담의 타결을 위해 총력을 다 하겠지만, 지난 9.19공동성명 때와 마찬가지로 남북관계의 모멘텀을 살리는 것이 회담 성사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남북관계를 타개하는 데 어느 정치세력을 협상 상대로 삼느냐 하는 기준을 정치적 계산을 넘어서 6.15정신을 지켜나갈 세력인가 아닌가에 두고, 북한부터 대승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남한 측이 6.15정신을 견지하도록 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최소한 중단기적으로는 정권 교체가 없는 북한, 5년마다 정권이 바뀌는 남한, 각각의 정치체제 차이를 감안할 때, 이 점이야말로 북한이 자기 체제의 특성을 살려 남북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다.
이처럼 어려운 국면에서 남북 모두가 짊어져야 할 몫이 있지만, 먼저 행동에 나서야 하는 것은 남쪽이다. 노무현 정부가 북핵문제 해결에 실마리를 찾고 한반도 평화의 흐름을 조성하기 위한 제일차적 과제는 남북 간의 신뢰회복이다. 우선 이것이 이루어져야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남북관계에서 무엇인가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것이며, 6자회담에서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신뢰관계 없이는 대선이란 미묘하고 복잡한 정세에서 북한의 호응을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위한 급선무는 남북 간에 지혜를 짜내며 식량, 비료 등 인도주의 지원을 재개하는 일이다.
노무현 정부가 대북정책의 기조를 지키면서도 조심해야 할 것은 국민을 상대로 정략적 접근을 꾀한다는 인식을 주지 않는 것이다. 특히 남북관계에서 큰 이벤트를 시도할 때에 철저한 준비는 물론이고 절차에서도 매우 신중한 정치적 고려가 필요하다.
노무현 정부로서는 임기 중 현재까지 다른 분야에서는 이렇다 할 개혁정책의 업적을 남긴 것이 없기 때문에 남북관계에서라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려는 욕심을 내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최악 수준의 국민적 지지도를 감안할 때 남북관계의 합의가 '역풍'으로 작용해 모처럼의 성과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음을 결코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비교적 정치적으로 초당적일 수 있는 민간통일운동에 핵심적 역할을 부여하며 협력관계 하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현명한 방책일 것이다. 이미 작년 6.15 5주년 행사와 8.15행사에서 정부와 민간은 자리를 함께 하며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경험이 있다.
물론 현 정부의 극도로 낮은 국민적 지지를 고려하면 이는 민간통일운동 입장에서는 반드시 달가운 일인 것만은 아니며 기회이자 동시에 커다란 부담이기도 할 것이다.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발표했으나 여론의 반발을 일으키며 선거에서 큰 소득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도 되돌아보아야 한다. 남북관계마저도 다른 분야나 마찬가지로 차질을 빚는다면 그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한 심각한 수준이 될 것이다.
이러한 국내 정세를 감안할 때 6자회담이나 남북관계가 재가동되는 데 맞추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무대로 남북이 주도하며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등 관련국이 동참할 수 있는 국제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유관국이 참여하는 국제행사가 합의된다면 보수 여론의 반발을 완화시키고 정략적이란 인상도 불식시킴으로써 어떠한 정권이든 이를 뒤집기는 어렵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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