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편지를 몇 번이나 읽으면서 제가 알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리장벽, 이스라엘 군인들, 세계적 지성들도 같이 참여했던 인간방패, 중동전쟁, 검은9월단, 알라신, 성지순례 여행지에서 요란을 떠는 일부 한국의 기독교도들, 그리고 당신의 말대로 1시간에 한 명꼴로 학살당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한국의 여느 사람들처럼 제가 알고 있는 내용들은 너무나 빈약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이나 일본, 스위스나 호주, 중국에 대해선 관심이 많지만, 이슬람권 나라들이나 힌두권 나라들, 동남아시아 사람들,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선 관심이 덜한 편입니다. 갑작스레 경제적으로 부국의 반열에 오르자 GNP가 낮은 나라에 대해서는 시장으로는 관심을 가져도 심정적으로는 오만하기조차 한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입니다. 그 말은 GNP가 높은 경제대국들에게는 매우 순종적이고 아부를 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점령당한 사람으로서 그 곤경과 아픔을 같이 나눠야 할 형제라기보다 분노한 테러리스트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주류들이 대단히 친미적인 데에다 접하는 정보라는 게 CNN류의 외신이 전하는 내용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타락한 CNN 같은 화면은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넘어지고 세워지고, 다시 무너지는 광경을 하루 종일 전 세계에 쏘곤 합니다. 가해자를 정의의 사도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편집기술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흡수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세계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인종들은 백인들입니다. 그런 백인의 힘을 확장하고 지키려는 상업방송이 조작한 이미지에 세계인들은 쉽게 속아 넘어가기 일쑤인데, 우리 사회는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편견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뿐인가요. 한국사회는 이미 전면적 혁명이 불가능해져버렸기에 오랜 시간 독재정권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이 새 정권에 그토록 열망하던 합리적 개혁을 요청했건만, 그런 시대적 요청을 도외시한 채 새 정권이 들어서자 한 첫 번째 행위가 이라크파병이었습니다. 한국의 문인들은 그해 겨울, 목청을 높여 파병반대를 외쳤고,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명분 없는 이라크 침공의 하수인으로 사용될 내 나라 젊은이들의 파병에 대하여 '피묻은 국익은 사양하겠다'고 외쳤습니다. 이라크나 레바논에 한국군이 있어야 할 이유는 지금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참여정부가 결행한 그릇된 결정을 우리는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네 이슬람 사람들에게 수치감을 느끼고 있으며, 끝내 파병을 막지 못한 무능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저는 어쩌다 환경운동을 하게 된 사람입니다. '어쩌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제 천직이라기보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질 생명파괴와 부정, 자연파괴에 수반된 인간 사회의 불의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고 말았습니다.
환경운동을 저는 '상식의 회복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어느 날 당신네 땅에 들어와 '없던 국경'이 타력(他力)으로 그어지고, 난민이 생기고, 올리브 나무가 베어지고, 지하수가 오염되고, 거기 분리장벽이 세워질 때부터 당신의 조국은 언제 끝날지 모를 분쟁지역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분쟁지역은 거기뿐만이 아닙니다. 이 행성 자체가 분쟁지역입니다. 지구촌은 지금 자원낭비와 환경파괴를 내용으로 하는 '지구와의 전쟁' 중입니다. 지구와의 전쟁에 박차를 가하는 전쟁범죄자들은 세계 자원의 80%를 낭비하는 세계 인구 20%들로서, 이른바 선진대국들입니다. 한국사회 역시 그들의 대열에 서둘러 들어가기 위해 끝없는 '경제성장론'을 신앙처럼 받들고 있는 한심한 사회입니다.
당신들은 오만하고 무례한 유대인들에 의해 피를 흘리고, 지구 역시 그 참을성의 임계점을 넘어 신음을 토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관측사상 유례없다"는 수식어와 함께 돌발하는 기상이변은 가장 뚜렷한 지구의 경고신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가 내지르는 고통의 소리는 거대한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조종(弔鐘)소리로 들립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가 이 행성 외에는 다른 살 데가 없는 한, 지구촌 어디나 분쟁지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팔레스타인에서 1시간에 한 명꼴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인간의 힘으로는 제어하기 힘든 지구의 기상이변을 초래한 세력이 같은 얼굴들이라는 점입니다. 나의 조국이 그 선봉에 서려고 사력을 다해 안간힘 쓰고 있는 데 대해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 소리의 반향이 아주 작듯이 한국사회는 개발과 발전망상이 막강한 위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제 무력감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끝없는 자원파괴를 전제로 한 대규모 생산과 미국식 삶을 모델로 한 대량소비, 그리고 국토 전체를 소비재로 생각하는 신개발주의자들은 분단된 남녘의 산하를 마구 허물어 절박하지도 않은 대운하를 파겠다고 호언하고 있습니다. 경기침체로 인한 대중들의 좌절감을 자신의 정권욕 충족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파괴적 자연관을 가진 이가 이 나라의 다음 정권을 차지하겠다고 지금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평택 대추리의 농민들을 내쫓고 거기 미군기지를 세우는 일은 당신이 한국에 왔을 때 직접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북의 핵실험 이후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망발도 나오고 있습니다. 전쟁 자체가 평화를 파괴하는 일인데, 이런 망언이 백주에 국회에서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세력들과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아야 하는 이곳인들, 어찌 분쟁지역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지금, 바쉬르 샬라쉬, 당신과 '같은 분쟁'을 겪고 있고, 당신과 '같은 적'을 대면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쉬르 샬라쉬, 저는 지금 바로 그 이유 때문에도 당신과 나는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이 더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억지 위안을 드리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신이 한국에서 돌아가자 맞닥뜨린 베이트 하눈 학살사건을 접하며 저는 생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인간의 영성은 믿지만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전하는 학살소식을 접하며 동아시아의 정신세계에 오랫동안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불교 우화 하나가 문득 생각납니다. 불교 법화경에는 생명의 탄생과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盲龜遇木)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망망한 바다 속에 눈 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거북이는 100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머리를 내밀어 숨을 들이키고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넓은 바다에는 이리저리 떠 다니는 구멍 뚫린 널빤지가 하나 있습니다. 눈 먼 거북이 100년에 한 차례씩 물 위로 고개를 떠밀 때, 마침 그 널빤지의 구멍에 머리가 딱 들어맞아 오랫동안 숨을 쉴 확률이란 얼마나 희유할까? 붓다는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일을 눈 먼 거북이 구멍 뚫린 판자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에 비유했습니다. 우리가 이 대지에 '한 생명체'로 탄생하게 된 일의 어려움과 신비스러움, 경탄에 대한 비유로서 붓다의 이 말씀은 비유의 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쉬르 샬라쉬, 당신 때문에 저는 얼마 전에 접한 한 과학자의 글도 떠올랐습니다. 한스 모라벡이라는 과학자가 한 말인데, 그는 시간이 많았는가 모르겠지만, 인간이 눈을 깜박이는 것을 계산해 본 모양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인간의 망막이 한번 움직일 때 두뇌는 초당 100조 회의 연산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두뇌와 비슷한 기능을 따라잡기 위해 오늘날 수준의 PC 약 100만 대 정도가 동원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저는 놀라움과 신비로운 경탄으로 새삼 몸을 떨었습니다.(존 브록만 John Brockman 엮음, <과학의 최전선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소소, 2006, 215쪽).
오늘도 당신의 고향에서는 이토록 귀한 인간의 목숨이 1시간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만 소중할까요. 로드 킬로 죽어가는 야생동물의 망막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옥 같은 환경의 공장식 축산으로 학대받고 있는 소나 돼지나 닭의 망막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른 생명체 이야기는 잠시 접고라도,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는 나찌 학살의 피해자로서 유대인들보다 더 큰 괴로움과 성찰의 기회를 얻은 민족도 다시없을 것입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증언과 교훈은 그래서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구한 역사로부터 획득한 교훈이 팔레스타인에서는 눈곱만큼도 적용되지 않는 것을 또한 인류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설화를 근거로 형성된 배타적 선민의식은 인류의 이름으로 타넘어야 할 오만과 편견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15년간 히말라야를 자주 다녔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난 것은 주로 북인도나 네팔 등지의 히말라야 산군(山群)에서였습니다. 군에 입대하기 전이나 막 제대한 젊은 이스라엘리(인)들에게 히말라야는 스트레스를 풀고, 깽판을 치는 천혜의 독무대였습니다. 히말라야 원주민들이나 전세계의 열린 배낭족들이 가장 혐오하고 경멸하는 무리들이 바로 군대와 관련해 정서적으로 문제를 안고 그곳에 온 이스라엘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잃어버리지 않은 카메라를 잃어버렸다고 여관주인에게 돈을 뜯어냈고, 여관의 이불을 불태우고, 숙박비를 내지 않고 도망을 치거나, 질 높은 히말라야 대마초를 상용하며, 다른 여행자들과 끊임없이 칼부림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결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명민한 랍비들이 아마 '홀리 피플'은 이민족이나 이방인들에게 절대 사과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던 모양입니다. 단 한번이라도 히말라야를 한 달 이상 여행한 사람들이라면 제 경험이나 제가 들은 이스라엘 청년들에 대한 평판이 낭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히말라야는 제게 인간의 영성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한편 도그마로서의 종교의 해악을 다시 확인시켜 준 곳이기도 합니다.
'착한 핵'이 없고, '정당한 전쟁'이 없듯이 전쟁은 인간의 역사에서 극복해야 할 마지막 벽일지도 모릅니다. 전면적 살상을 목표로 삼는 전쟁은 필연적으로 최악의 환경파괴를 야기합니다. 그래서 곧 환경운동은 평화운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문제와 반전, 비전(非戰)운동은 구분할 수 없습니다. 구분하려는 자들이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거나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자들입니다. 군대가 있는 나라가 민주주의를 할 수 있을까, 저희들의 고민은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지구에 싸움을 건 세력들이 곧 사람을 상대로 한 모든 전쟁의 주범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쉬르 샬라쉬,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형제여!"라고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발음하게 됩니다.
저는 당신들의 승리를 희망하고, 또한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국기(國旗)에 이미 이스라엘의 팽창주의가 담겨 있다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얀 바탕은 중동 땅, 그리고 한복판의 '다윗의 별'은 이스라엘이 그 중심에 있다는 뜻이고, 위의 파란 줄은 유프라테스 강, 아래 파란 줄은 나일강을 상징합니다. 국기에 담긴 이스라엘이 꿈꾸는 홀리랜드의 범위가 너무나 거창합니다.
반면에 농사 짓고 살다 땅을 잃어버린 당신들의 요구는 지난 3천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듯이 지금 이곳에서 전처럼 살고 싶다는 요구뿐입니다. 군사력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의 집념과 당신들의 소박한 요구는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로는 어느 한쪽의 완벽한 승리가 불가능한 싸움으로 여겨집니다. 한쪽은 서부 열강이 궁여지책으로 제멋대로 만든 억지와 당신이 말한 대로 근거가 불확실한 신화에 의존하고 있고, 당신들의 요구는 뿌리와 실체가 있고, 그 땅에서 올리브 나무와 같이 보낸 세월의 기억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당신들은 농사를 지었고,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자로서 서유럽에서 경멸을 받기 전까지는 유목민이었습니다. 유목민과 농경사회의 충돌이 어떤 결판을 낳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제게 지구와의 전쟁을 불사하는 현실과 너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지구를 파괴하는 자들은 끝없는 확장주의자들이고, 생태주의자들은 지구 생명체들과의 공존과 공생, 그리고 소수문화의 옹호를 전제로 한 소박하고 건강한 비물질적 삶을 희망합니다. 한쪽은 무례하고, 한쪽은 품위가 있다는 점에서도 이 대립자들은 매우 비슷하군요. 한쪽은 이익이 되지 않는 손님을 반기지 않고, 한쪽은 손님을 신처럼 환대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군요.
이스라엘의 팽창주의에 맞서 당신네들이 당신들의 땅을 지키고 되찾는 것이 곧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역사와 인간 한계의 벽에 의존하는 자들과의 싸움에서 비폭력 저항은 하나의 숭고한 목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 이름을 거듭 부르고 있는 당신의 친구는 '점령당한 자의 의무는 점령자와의 싸움밖에 없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억울하게 갇힌 자에게 탈주가 의무이듯이 당신의 선택지는 명료합니다. 오해를 무릅쓰고 이렇게 극언하는 것은 오늘, 제 수준이 여기까지밖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때 저는 티벳전사들을 수년간 찾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히말라야에서 제가 만난 티벳전사는 "다시 20대가 되어도 총을 들 것인가?"라고 묻자, 지체없이 "그렇다"라고 답했습니다. 단호한 얼굴로 그렇게 답한 늙은 전사는 중국이 라사에 침공하기 전에는 라마였는데, 부모 형제를 다 잃고 울면서 법복을 벗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전투 중에 자신이 살해한 중국인 다섯 명의 영혼을 위해 살아 있는 내내 매일 아침 명복을 비는 참회의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단호한 대답은 여지없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용서는 화해 뒤에 이뤄질 일, 당신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무례한 점령자들과의 싸움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당신의 의무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싸움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바쉬르 샬라쉬! 당신은 시인이기 때문에 마치 우루과이의 갈레아노가 '남미 500년 수탈사'라는 주제에 평생 매달렸듯이 시인으로서 당신의 팔레스타인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비행기삯이 생기고 언젠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당신네 나라에 형제의 마음으로 방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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