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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총국…홍영식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23>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옆에 회화나무 고목 하나와 한옥 한 채로 남은 우정총국 건물이 있다. 지금 정보통신부의 시조이다. 1884년(고종 21년) 근대화된 우편제도를 실시할 때 이곳에 자리 잡았던 건물 중의 한 부분으로, 안에는 당시의 여러 가지 자료가 전시돼 있다.

조계사 앞길은 바로 인사동 옆이면서 북적거리는 그곳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길가엔 불교용품, 미술품 상점들이 즐비하다. 진열장 안으로 보일 듯 말 듯 불교미술의 섬세한 면모를 엿볼 수도 있다. 조계사는 한국불교의 중심사찰이지만 대웅전 속까지 길에 훤히 드러난 경내는 수도처의 경건함보다 번잡한 시정의 느낌이 강하다. 뒷골목은 가정집이다가 모조리 업소로 변한 동네로 이어져 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요리조리 지름길을 찾아 큰길로 빨리 빠져나가는 재미가 있다.

그런 동네를 끼고, 두어 그루 고목 회화나무와 귀한 백송이 서있는 이곳은 아마 조선조 당시 의료관련 약재를 키우던 전의감 터라 그 흔적이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도화서 터였다는 알림판도 있다. 아무튼 이곳은 평범한 동네는 아니었다. 1884년 4월 이래로는 개화파 정치가 홍영식의 주도로 실시된 근대우편제도의 발상지이자 같은 해 12월4일 갑신정변의 현장으로 지금까지 자취가 남았다.

이때는 근대화의 막이 열린 시기였다. 일본에 조선의 선진문화를 전달해주러 간 조선통신사의 마지막 방일이 있었던 1811년에서 불과 70여년 지나 일본, 미국, 영국, 독일과의 통상조약이 이루어지고 푸트 미국공사가 부임했다. 영국, 독일 공사도 일본과 겸직해 와있었다. 미국주재 조선공사 파견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보빙사란 이름으로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조선 관리들이 처음으로 미국 산업계를 시찰하고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것이 1883년 12월이었다.

관립 영어학교가 막 개설되고 조선에 들어온 각국의 이권다툼이 치열해진 때였다. 그래도 본격적 근대교육이나 개신교 선교는 시작되기 전이고 영국과 러시아공사관의 서양건물이 처음 완공된 것은 1890년이었으니까 우편제도는 어떤 방면보다 발 빠르게 근대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우정총국의 사적은 풍파를 거치다가 1970년대에 와서 우정총국이라는 현판을 달고 정비가 됐다. 한옥 한 채에 마련된 소규모 체신기념관과 부근에 조그만 우정공원이 있다. 일년 사철 늘 닫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을 밀고 들어가면 1884년 이래의 몇가지 우정관련 자료를 볼 수 있다.

자료는 홍영식이 미국서 보고 온 것을 고종에게 말하는 내용을 적은 경연록 두루마리부터 시작된다. 두껍게 말린 백지두루마리에 상왈(上曰)...하는 한문글씨로 적힌 그 내용은 조선개국 504년으로 명기된(1895년)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보다 10년도 더 빨리 쓰여진 미국견문록이겠다. 우리말로 나온 것이 없으려나 했는데 못 찾았다. 고종이 무엇을 묻고 홍영식은 어떻게 미국을 설명했는지 그의 기념관 안에서조차 알 수 없었다.

오랜 기간 근대우편제도를 관찰해온 병조참판 홍영식의 건의에 따라 고종은 이 나라에 근대우편제도를 실시키로 했다. 1884년 4월 22일 고종이 내린 왕명은 근대제도의 필요성을 절절히 인식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었다(고종이 우정사업을 전교한 4월 22일은 오늘날 정보통신의 날로 기념된다).

'각국과 더불어 통상한 이래 안팎의 관계와 교섭이 날로 늘어나고 따라서 관청, 상인들이 주고받는 통신이 많아지게 되었다. 진실로 그 통신을 적절하게 체전(遞傳)하지 않으면 소식과 기맥을 잇대어서 멀고 가까움이 일체로 될 수 없다. 이에 명하노니 우정총국을 설립하여 연해의 각 항구에서 왕래하는 서신을 관장하고, 내지(內地)의 우편도 또한 마땅히 점차 확장하여 공사의 이익을 거두도록 하라....'
▲ 회화나무 고목옆 조그만 한옥 한 채만이 남은 1884년의 우정총국 사적. ⓒ하지권

다음날 홍영식이 우정총국 총판에 임명되고 각종 제도와 개국 준비가 시작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한 채의 작은 집만이 아닌 큰 규모의 관청건물 군이었을 것이다. 법규 제정, 직원 인선, 업무 분장 등이 진행되고 11월18일에는 우표가 발행되어 서울-인천간 우편업무가 시작됐다. 종로 네거리, 남대문 문안 등 10곳이 지정돼 우표를 팔았다. 1884년 당시의 직접적인 자료로 서울에서 우표를 팔고 집배하는 장소를 그린 지도, 우편물 취급에 관한 기본 법규를 기록한 '대조선 우정규칙', '우정총국 사무분장 및 직제규정', 우표 5종 등의 자료가 나와있다.

역사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우편업무가 시작되고 보름 남짓, 12월 4일 밤 우정총국의 발족 축하 만찬 자리가 갑신정변의 현장이 된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홍영식, 김옥균, 박영효, 민영익 등이 개화와 수구로 갈려 죽고 죽였다. '일본이 우릴 도울 것이라고 기대한 김옥균의 무모함으로 정변은 실패했다(최태영 박사의 김옥균 평에서 인용)'. 홍영식은 피살되고 역적죄가 내려져 영의정을 지낸 부친은 자살하고 집안은 멸족됐다. 형 홍만식 참정은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했다.

재동 그의 집은 몰수되어 서양식 의료기관 광혜원이 됐다. 가족들이 살해된 집안의 방바닥엔 핏자국이 고여 있고 문짝까지 다 약탈된 채였다고 광혜원을 '접수'한 미국 선교자이자 의사 알렌은 기록을 남겼다. 서구식 가구로 꾸민 김옥균의 호화저택은 불탔다. 서재필의 젖먹이 아들은 아무도 거둬주지 않아 굶어죽었다. 그는 역적으로 잡혀죽지 않기 위해 미국 국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근대식 우정업무는 이후 11년간 중단되고 이때 발행된 5종 우표는 쓰이지 못했다. 그들이 살던 집 동네 아스팔트 바닥에는 지금 오래된 백송 한 그루만이 땅에 뿌리박고 남았다.

우정총국의 자료는 1900년대 초의 자료 몇 점도 보여준다. 우표 55종, 우편물 무게를 다는 저울, 사무용 종이 인쇄판, 날짜를 찍는 인장, 인장함, 집배원의 제복 등. 그중 아주 반가운 자료 하나가 있었다. '우'자(字) 표식이다. 우편번호의 표시로서 우자, 빠른우편을 보낼 때 편지 겉봉에 찍어주던 낯익은 우자 디자인이 큼직하게 인쇄된 보고서 책이 있었다. 광무 4년 11월 22일의 글자가 보인다. 1900년 우정총국을 뒤이은 통신원의 깃발 디자인으로 민상호 총판때 처음 고안된 것이었음을 이를 통해 처음 알았다.

'우'자는 그러면 대한민국에서 태극기 다음으로 오래된 디자인일 것이다. '우'자 디자인을 상부에 보고하는 책자는 '하야, 하니' 하는 토씨말고는 다 한문이고 한글로 된 상세한 내용설명은 역시 없다. 그래도 아직 생명을 갖고 통용되는 우자 표식이 1900년경 조선시대에 고안된 창의물이란 사실은 기뻤다.

우정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세 사람- 홍영식, 민상호, 장화식의 사진도 있다. 민상호는 명성황후의 사촌으로 12살때인 1882년부터 1887년까지 미국유학을 하고 와 과거에 급제한 관료로 1897년 만국우편연합세계총회에 조선 전권대사로 참여했다. 1902년 통신원총판이 되어 홍영식의 뒤를 이어 우정사업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합방 당시 일본이 준 남작작위를 받아들이고 친일기관인 중추원에 적을 두었다.

반면 민상호의 다음 대 총판인 장화식은 1905년 을사5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될 때 일본의 통신권 인도요구를 계속적으로 거부하고 다른 관원에게도 이를 거부할 것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고급관리 중에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하고 나는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홍보물도 없고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왜 그런 사실을 많이 알게 하지 않는 것일까. 사진만으로 봐서는 나이가 많은 관료인데 근대적인 우정업무를 맡아 이끌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그에 관한 내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다면 한 편의 드라마 이상일 것 같다.

홍영식이 등장하는 1883년 이래 1900년대 초의 사진은 근대로 향하는 한국사 자료이기도 하다. 1881년경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홍영식 4인이 양복을 입고 함께 서있는 사진은 한국 양복사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모습이다. 머리도 짧게 잘랐고 수염없이 면도했다. 모두가 조선의 근대화를 열망한 젊은 혁명가들이었다. 그런가하면 미국시찰을 가서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조선 관리의 대례복 차림이고 미국과 조약에 서명하는 장면도 조선관복차림으로 품위있어 보인다. 이들 보빙사 일행과 수행원, 미국 일본 청나라 사무관들이 함께 찍은 사진에서는 일상복으로 전복,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있는, 20대 후반의 젊은 관료들이다.

갑신정변에서는 대립했지만 이들은 개혁을 향하던 과정의 동지이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기록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은 홍영식 김옥균 등과 민영익 등의 개인적 친분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협력 갈등하다가 파국을 맞았나 하는 정확한 사실이다. 소설로 된 픽션말고 근거있는 연구로서 밝혀진 그들의 관계의 흐름이 알고 싶어진다. 나중에 서광범의 묘비명은 알렌이 썼다.

그 일행이 미국에서 돌아온 뒤 외교적 도움을 준 퍼시벌 로웰(보빙사의 미국 사무관, 후일의 천문학자, 1855-1916)을 초청해 1883년 12월말 겨울(혹은 1884년1월경) 대궐(경복궁같다)로 고종을 알현토록 했다. 이때 홍영식의 모습이 당시의 조선기행을 기록한 로웰의 책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사람들(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책에 남았다.

'맨 앞에 선 홍영식의 긴 궁정식 걸음걸이 - 그것은 고대 비극에 나오는 듯한 관리의 걸음걸이로 보는 이에게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위 아래로 날개짓 하는 고고한 학의 자태를 연상케 할 만큼 매우 당당하고 위엄있어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온몸을 감싼 엷은 색 관복으로 인해 그 효과는 더 강조돼 보였다. 나는 헛되이 그의 권위있는 걸음걸이를 흉내 내보려 했음을 고백하겠다. (고종을 배알한 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예를 다하며 품위있게 뒤로 물러났다.
▲ 우정총국의 기념비적 인물 세사람- 근대화된 우정총국의 창시자 홍영식(좌),조선의 통신권을 일제에 인도할 것을 거부한 우정국총판 장화식(중), 우정국 업무에 힘쓴 민상호. 일찍이 미국에 유학한 관료였으나 일본정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아들였다(우). ⓒ하지권

너무나도 충실했던 친구 홍영식, 그는 진정한 애국자였건만, 이 책이 나올 무렵(1885)에는 순국자가 되어 버렸다. 그의 명복을 빌 뿐이다.'

궁정의 걸음걸이- 그것은 아마도 종묘제례를 지낼 때 제관들이 계단을 오르는 특별한 발디딤법 같은 걸음걸이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로웰은 홍영식과 동갑이었다.

1884년 외무아문(외무부)이 차려진 저택을 배경으로 관원 여럿이 단체사진을 찍었다. 로웰이 1883-1884년 서울에 왔을 때 찍은 사진인데 아직 우정총국 업무는 시작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포갠 홍영식이 한가운데 있다. 얼굴 사진을 보아도 그렇고 29세의 홍영식은 겁날 것 없는 자신감을 지닌 사람같다. 앉고 서고 한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천릭입은 무관도 한 사람 있으며 두루마기, 전복, 관복차림이 섞인 그들은 조직적인 집단처럼 느껴진다. 조선말 관리들 사진으로 이 사진만큼 비권위적이면서 자연스럽고 인상적인 것을 따로이 보지 못했다. 대궐관련 관청인 전의감에 들어선 우정총국은 같은 관청인 종친부나 총무당처럼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에워싼 건물이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우정총국의 뒤를 이어 생긴 통신원 총판을 지낸 민상호는 최초의 유화초상화를 남겼다. 1898년 28세 난 그의 초상을 그린 미국인화가 휴버트 보스는 민상호가 '가장 순수한 한국인 모습의 전형'으로 '그의 인품과 높은 학식에 매료됐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인품과 학식을 갖춘, 더구나 왕가의 사람인 그는 조국을 패망시켜 굴욕의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남작작위를 거절하지 않았을까. 기회주의자 관료에 불과한 것일까?

우정총국 개설 축하 만찬이 있던 장소는 견지동 우정총국 건물이라고도 하고 재동 외아문이라고도 한다. 18명의 좌석이 차려진 연회장이고 수행한 사람들도 많았을 테니 작은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변의 첫 신호가 된 불이 난 민가는 어느 방향 쯤일런지?

정변 실패후 소수는 일본, 미국으로 도피하기도 했지만 중요 인물 말고도 70여명이 연루돼 심문을 받았다. 피비린내 나는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청·일 양국군이 여러 백명 죽고 장안에는 효수된 시체들이 며칠동안 즐비했다. 그러나 근대화를 담당할 인물이 귀하던 그즈음 유길준은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로 체포되었다가 포도대장 한규설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하고 연금됐고, 민영익의 지원도 받아 한규설의 장교동 저택과 민영익의 가회동 집 취운정에 연금된 상태로 <서유견문>을 써냈다.

이 기념관에서 서운한 것은 우정총국 유물 중 집배원의 복장이 허술하게 복원됐다는 것이다. 조그만 진열장 안에 들이기 위해서인 듯 인형옷만하게 지어 입혀놓은 초기 집배원의 흰 두루마기는 한복바느질도 아닌 양복 옷이었다. 공식 기념관에 한복도 제대로 못 만들어 입히는 여기가 한국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소매에 우자 디자인이 들어가 있는 양복제복도 실물보다 작게 쑤셔 박히듯 들어가 있었다. 이 작은 한옥 하나로 한국의 우편업무기념관을 유지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전시유물은 오랜동안 손을 본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정통부 홈페이지의 우정총국 소개가 자세한 것도 아니다.

공원에는 현대에까지 쓰이던 빨간색 우체통을 실제 쓰던 주물 우체통이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옆구리가 꿰진 엉터리를 갖다 두었다. 전국적으로 현대까지 쓰이던 주물 우체통 하나 구하지 못하게 됐단 말인가. 이런 가짜가 진실을 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도 별로 안 찾는 여기에 왜 공중화장실을 어정쩡한 한식으로 옆에 붙여 지어놓는 것인지 이해가 안됐다. 10년쯤 전이지만 경희궁 어정(御井)우물 바로 옆 길거리에 싸구려 기와로 올린 대형 한옥형태 화장실이 있었다. 한옥을 관광하라는 것인가? 서울의 자취를 따라 이곳을 둘러보던 외국인들이 저희끼리 심하게 흉을 보고 있었다. 북촌을 둘러보는 동안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보았다. 비단 북촌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병신성스런 옷과 우체통에 설명도 전시방식도 구태의연한 체신기념관이지만 그나마 '여기 우정총국이 체신기념관이다'고 알리는 문구는 안내판에 한줄 들어가 있을 뿐, 눈에 띄지 않는다.

안국동 네거리에서 우정총국은 한말 행정의 중요한 역사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장소다. 여기에 오면 홍영식과 서광범 민영익 등 당시 사람들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개화기때 인물 민영환의 동상도 여기 와 있다. 일본에 뺏기기 전까지 조선 관리의 근대화 열정으로 추진된 우정총국 업무의 활기도 느껴진다. 열정적 관료들에 의한 역사의 정신적 근간이 모처럼 치열하게 드러나 보이는 공간이자 개혁에 따라붙는 피로 얼룩진 절망까지 숨죽인 듯 스며있다. 그들이 살던 집도, 모두가 바라보았던 백송도 모두 이 부근에 모여 있다. 근대화를 향한 개혁의 한 시대가 응집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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