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처음 살 땐 아주 훌륭한 백자이다가 오래 되면서 쓰지 않고 있지만 버리지는 못하는 그릇처럼 낯 익었다. 한 귀퉁이가 상해서 때운 것인지 원래 그런건지 얼룩이 들어 있는데 진하지는 않았다. 반듯한 굽 위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두툼하게 벌어진 사발은 '이도 다완' 으로 불리는 사발보다 크고, 어떤 황금비를 따라 부드럽게 벌어지다 막힌 모양이 영락없는 물 혹은 국 대접의 용도를 내비쳤다. '좋은 그릇이로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림 제목은 '대고려(大高麗)' 였다. 그러나 왜 얼룩이 있는 것일까? 그 점이 미적 평가에 한몫을 했던가?
언뜻 일본의 대덕사, 고보리 엔슈라는 유명한 다도가(茶道家)의 추모사찰에 있다는 조선 사발 '기자에몬의 이도다완' 사진이 떠올랐다. 임진왜란 이후 한때 일본의 기자에몬이란 사람 소유였다가 파란만장의 역사 끝에 대덕사에 기증된 조선 서남부의 막사발이다. 일본 다도가들이 보물로 여긴 이 그릇은 사진으로만 보아도 강렬한 얼룩이 꼭 핏자국처럼 느껴져 놀라게 되는 조선사발이었다.
이 사발에 대한 이야기는 필자가 <경향신문>에 있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고 존 코벨 박사에게서 들었다. '임진왜란 때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의 혼'이 생각나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대고려 대접은 순한 백자에 이도다완처럼 날렵하지는 않아 사발 아닌 대접이 분명하고 얼룩은 그렇게 치명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대고려' 대접을 한참 보고난 뒤 그 옆에 일련의 조선 그릇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야 여기도 그릇들이 좋은 게 있구나.' 아주 잘 생긴 달항아리가 환하게 전시장 벽에 걸려 있었다. 여러 그릇들 틈에 그 광채와 모양새로 도저히 감춰질 수 없이 돋보이는 백자 항아리였다. 유화물감의 붓자국은 집안의 자연광선에서 보는 항아리의 음영처럼 보였다.
내가 잊지 못하는 조선백자 달항아리로 오사카 동양도자박물관 아타카(安宅) 소장품의 달항아리를 처음 보았을 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의 충격이었다. 오래된 듯 바랜 백자유약색을 띄고 있으며, 아마도 가마 속에서 구워질 때 한쪽이 약간 불룩하게 변형된 듯한 그 조선 달항아리에 그걸 만든 도공의 모습이 겹쳐지는 느낌이었다. 흰 바지 저고리를 입은, 조용하고 점잖은 중년 남자일 것 같았다. 그가 가마에서 꺼낸 그 그릇을 들고 옆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또 만들 수 없는 명품임을 그도 알고, 그릇의 미래를 생각하는 얼굴인 것 같았다.
오병학의 그림 백자 달항아리는 옆으로 넓은 듯 퍼진 모양이 아다카 소장 달항아리와 비슷하면서도 경쾌하고 순하게 다가와 보였다. 그리고 백자 제기, 웅천(熊川) 다완, 검은 유약의 독구리, 자라병, 어깨넓은 백자 항아리, 그런 그림들이 즐비하게 그릇전처럼 전시장 벽에 펼쳐져 있었다.
대고려 대접과 백자 달항아리 그림에 대한 호기심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오병학 선생은 예술가들이 흔히 지니는 교만같은 것이 없어 보였다. 마치 도공처럼 그는 몇 번에 걸쳐 그릇들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대접은 대고려야요. 조선을 고려라고 말하는 거지요. 규슈 구마모도 출신 호소가와 집안의 가보로 내려오는 조선 대접인데 십여 년에 한번쯤 동경의 백화점이나 미술관 같은 데서 전시됩니다. 어떻게나 좋은지 보고서 놀랐지요. 일본에서 조선 도자기 전시가 있으면 꼭 가서 한나절 자세히 들여다 보고 머리빡에 넣고 오지요. 이 백자사발은 두 번 보았습니다. 이조백자, 웅장하면서도 섬세하지요.
우리나라 도자기는 따뜻하고 온도감이 있어요. 온도감이 나오는 도자기는 세상에서 한국 도자기뿐입니다. 외국의 도자기는 기술적으로 완벽한 공예품이지만 미묘한 뉘앙스나 온도감은 없습니다. 나는 가마에서 흙으로 직접 빚는 도공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 화면 위에 도자기를 굽는 겁니다."
"이 백자 달항아리는 미쓰비시 재벌네 소장품으로 그 집안 미술관에 전시된 걸 보았어요. 원래는 용이 그려진 청화백자인데 내가 용무늬 지우고 백자로 만들어 그렸어요. 고려자기 주전자, 이건 아주 연하죠. 보통 소개되는 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고 그렸지요. 이것도 미쓰비시 집안 가보인데 전시회에서 보았습니다."
오병학의 전시회는 일본에서 거의 평생을 보낸 조선인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순전한 한국정서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생략이나 강조 등의 기법상 특징이 있는 전형적인 근대유화지만 그가 보여주는 도자기 그릇이며 인물화 등은 한국적 아름다움과 힘의 본질을 순하게 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옛날 것에 집착해 골동의 고색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옛 물건이나 현대 도자기나 가리지 않고 작품 자체가 맘에 드나 안드나 하는 걸로만 평가할 뿐이라요. 고색이 깃들어야 가치 있다고 하는 것은 골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지만 나는 오직 미술적 관점에서, 자신의 심미안에 따라 판단해 볼 뿐입니다.'
그림이 풍기는 분위기가 고리타분한 옛날 것에 잠겨들지 않고 흥겹게 느껴진 것은 그런 탐미적인 화가의 이미지에서 오는 것 같았다.
"난 다 큰 다음에 일본으로 미술 공부하러 간 거라요. 거기서도 의식주는 완전 조선사람이었어요. 한국역사는 해방된 뒤부터 봤어요. 유럽은 나중에 몇 번 가고. 나는 훼손되지 않은 한국인의 스피리트를 가졌습니다."
1924년 평안남도 순천 태생. 18세 때 동경예술대학에 들어갔다. "막상 가보니 내가 존경하던 화가는 우릴 가르치지 않고 강사나 다른 교수가 가르치는데 내가 그림도 형편없는 이 사람들에게서 무얼 배우갔나 싶어 학교에 나가질 않았어요. 그 대신 사람들 없는 방학 때 점심 싸들고 학교에 가서 미켈란젤로 석고 작품을 하루종일 뎃생하고 지냈지요. 세잔느를 파고 들면 서양유화의 본질이 나와요. 강희안, 이상좌, 정선, 미켈란젤로, 세잔느 이런 사람들이 내 선생인 거라요."
화가로서의 경력은 마흔이 넘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생을 죽도록 해서 신문배달, 야간전화교환수, 별 일을 다했다.
"그림이 밥이 되나요. 그림쟁이가 되는건 가족을 울리는 거라요. 아내 미츠코는 같이 그림 그리던 동료였는데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30년 전 떠나고 그 이후 혼자 삽니다. 내가 그림이나 그리면 되지 부자가 무슨 소용이에요. 지금은 혹가다 그림을 팔아 밥 먹고 있죠."
전시회 기간 중에 화랑을 지나칠 때마다 들어가 보고 화가에게 몇 가지씩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흥미진진한 국면이 전개됐다. 이제껏 십수회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전시회를 가졌는데, 이력 중 특이한 것이 한국의 전래동화 '도깨비를 이긴 바우'와 '금강산 호랑이 잡기' 책의 삽화를 그려 1970년대에 일본에서 출판한 것이었다.
이 그림이 보고 싶었다. 절판된 지 오래건만 애를 써서 책을 구해 보았다. '도깨비를 이긴 바우'는 전 시즈오까 대학의 비교민속학교수 김양기(金兩其)선생이 일본말로 옮긴 책인데 19점의 삽화가 들어갔다. '금강산 호랑이 잡기'는 15편의 한국 전래동화를 도리고에 야스꼬 씨가 일역해서 낸 것으로 이야기 한 편마다 삽화 1점이 들어갔다. 단순한 삽화를 넘어선 그림들이었다.
"호랑이, 도깨비, 금강산, 그런 자료를 많이 수집해 보면서 상상으로 그렸지요. 도깨비는 탈을 자료로 했어요. 우리나라 동화니까 우리의 민족적 미감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전시회나 삽화나 제 그림은 모두 똑같은 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입니다."
화가가 '나는 훼손되지 않은 한국정신을 가졌다'고 외칠 만한 경력이 아닌가 했다.
1층은 전부 대작 탈춤그림이었다. 탈춤의 여러 장면 말고도 말뚝이, 취발이, 도령, 양반, 파계승, 원숭이, 문둥이, 샌님 이런 등장인물들이 마치 개인 초상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탈을 그렇게 인물화로 독립시킨 초상화는 처음 봤다. 작가가 인물화에 매우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인물초상으로 오씨, 시인, 배우, 그런 제목을 달고 있는 초상화가 있었는데 화가 주변의 인물들이 많았다. 마주치면 누군지 얼굴을 알아볼 것 같은 그림들이다.
여성의 누드 그림도 있었다. 누드의 육감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지만 에로틱한 분위기는 없었다. "난 인체를 그릴 때는 도자기를 생각하고, 도자기를 그릴 땐 여성의 인체를 다루듯 그려요. 직업모델을 쓰면 생기가 살아나지 않아서 안 씁니다. 친구의 딸이 이 그림 모델이 되었습니다. 손을 이렇게 미륵보살처럼 하고 한국에서 온 미륵보살상 같은 느낌으로 그렸습니다. 나는 한국의 비너스를 그리고 싶어요."
일본의 마에다 겐지(前田憲二) 감독이 그의 누드 그림에 반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살면서 한국적인 주제로 그리는 작품을 두고 일본에서 반응이 어떤지 묻는 질문이 있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힘이 있지요. 내 그림에 홀딱 반한 일본인들도 많아요. 내 그림을 좋아하게 되면 한국을 사랑하게 되지요. 서로 속을 주면서 교제하면 한국, 일본이 없습니다"라고 이 화가는 말했다.
이제껏 200~300여 점을 그렸다. 유화가 물감이 잘 마르지 않으니 오늘 그리다 놔두고 '내일 아침 어떻게 좀 해보자' 하고 계속적으로 그려야 하니 끈기가 있어야 한다. '난작을 많이 그리진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림을 많이 팔지도 않았다. 소장자가 정말 그 그림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림을 내놓았는데 백자 달항아리 그림의 소장자 재일교포 강호자 씨는 '그동안 마음에 드는 그림을 못 만나서 보석을 모으고 있다가 이 그림을 보면서부터 그림수집으로 돌아섰다'고 했다. 많은 작품을 일본의 재일 교포들이 소장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처음이자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이번 전시회에 강호자 씨 등 일본 내 그의 팬들이 전부 가족동반해 전시회에 왔다. 전시장에는 그래서 늘 일본적인 분위기가 조금씩 느껴지는 사람들이 섞여 조용하게 모여 있었다. 전시장의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서울의 그림 전시회에 그렇게 소장자와 팬들이 연일 제 일처럼 흥겨워 하며 나와있는 전시회는 과문한 탓인지 별로 보지 못했다. 이것은 한국 태생에 일본적 환경이 덧붙여진 현상일까? 한국의 도자기 등에서 찾아낸 미학을 사랑하고 수집한 일본사람들이 많았기에.
"처음 와본 서울인데 고향에 온 것 같아요. 음식이 맛있고 길가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활기가 있어요. 우린 일본사람들 사이에서 사니까 어딘가 이질감이 있는데 여긴 한국이니 그런 것 없지요.
우리 민족적인 감성은 활발하고 역동적이면서 정반대로 도자기의 정적이고 정밀하고 깊은 정감이 있어요. 떠들기만 하는 것 아니고 두 가지의 대조적인 감성이 있어요."
일본에서 60여 년을 산 이 한국인은 미술적 관점을 그렇게 포착하고 있었다.
서울 와서 청와대 뒤 북악산과 인왕산을 진작부터 그려보려고 벼르고 있었다. "산세의 변화가 좋고 리듬이 있잖아요? 서울을 둘러싼 산은 자연이 만든 액자라요. 서울은 그 안에 오목하게 자리잡은 도시로서 작품 그 자체입니다. 지금은 빌딩들이 서서 가려졌지만 옛날 서울사진 같은 것 많이 봤습니다."
가장 오래된 구월산 단군초상도 책의 그림으로 보았다. "단군초상은 인물 자체의 고귀한 품격이 나와야 하는데 보통 보는 이름없는 민화 단군 그림은 눈에 안 들어와요. 거기 비해 구월산 단군초상은 그래도 괜찮아 보입니다. 단군초상은 적어도 이 수준 아래로는 내려가선 안됩니다. 이 단군상에 작가의 기량과 표현력이 다 나와 있어요. 왕자의 품격이 나옵니다. 남성적이고 풍모가 두툼하고 귀는 부처님같이 크고.
그런데 조형적으로 보면 그렇게 옛날 그림이 아니에요. 구월산에 있었어도 이건 20세기에 들어와 그린 그림입니다. 고대에 작가가 그린 듯한, 그림 전체에서 풍기는 옛날 느낌이 없습니다. 이 초상은 결코 나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네요. 그저 그만하구나 하는 정도지."
단군을 그려보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너무 오랜 선배라 실제로 내가 본 사람이 아니니 그릴 수 있을지? 하긴 르동이나 러시아의 샤갈도 신화적 주제를 많이 그렸지요"라고 했다.
누군가의 주소에 청구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는 "청구…. 우리나라의 옛날 이름이지요"하고 답했다. 그런 상식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단군 이래 중국 남북한 일본 미국 기타 여러 국가로 흩어져 나가있는 동이족 중 그는 일본에 거주하는 한인이 되었지만 민족정서의 원형을 건강하게 보존한 '동이- 오랑캐 夷자가 아니라 큰활 夷자다-' 같았다. 그는 또 하나의 고향이며 딸이 사는 평양에서도 전시회를 갖고 싶다고 했다. 북적이는 인사동에서 4339년의 이야기가 나온 셈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