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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수준 안되면 세계로 못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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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수준 안되면 세계로 못 나가"

재일조선인 1세 오병학 화백 국내 첫 개인전

재일조선인 1세 화가 오병학(82) 화백 6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인사동 '학고재'에서 개인전을 연다. 일본 밖에서는 처음 열리는 전시회로 "서울과 평양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 꿈"이라던 오 화백 꿈의 절반이 이뤄진 셈이다.

오 화백은 1924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식민지의 현실과 가난은 그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게 했다. 그래서 그는 18세이던 1942년 가진 재산을 모두 털어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다. 편도행이었다.

"민족 자존심 있는데, 일본 사람 밑에서 그림 그릴 수 없었다"

일본 도쿄에서 신문팔이를 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오 화백은 1946년 도쿄예술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의 민족적 자존심은 '일본 그림'을 배울 수 있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은 우리를 식민지배한 나라인데,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고 그 밑에 있는 것은 내 자부심이 용납하지 못했다"며 "그리고 사실 일본 작가들의 작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1948년 예술대학을 중퇴했다.
▲ ⓒ오병학

그 이후 오 화백은 '독학'의 길로 들어섰다. 밤에는 야간 전화교환수와 신문배달을 해 돈을 벌고 낮에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20~30년을 보냈다.

그가 주목한 작가는 인상파의 거장, 프랑스 화가 '세잔느'였다. 그는 "신물배달과 야간 전화교환수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아껴 닥치는 대로 세잔느의 화집을 사 모았다"고 회상했다. 세잔느의 화집은 모두 모았을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부터 피카소애 이르기까지 서양의 화풍을 공부할 수 있는 화집들을 사들여 혼자 분석하고 공부하고 그리며 젊은 날을 보냈다. 그는 "세잔느와 몇몇 유럽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본에 방문해 오 화백의 실제 작품과 작업실을 둘러본 미술평론가 최석태 씨는 "실제 작품을 보니 강렬한 분위기와 일부 작품의 압도하는 크기로 인한 박력이 화집을 통해 짐작하던 것과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며 "화집을 보며 눈 앞에 자주 어른거리던 세잔느의 그림자도 아주 미미했다"고 평했다.

최 씨는 "오병학은 세잔느의 장점에 젊은 시절은 물론 완숙기에 이른 지금도 자신을 열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화가로 간주한다"며 "세잔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화면의 구조가 탄탄하다는 의미이면서, 현대적이거나 당대적인 감각을 염두에 두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아니다"고 평했다.

"우리 민족성 알리려면 표현 방법이 세계적 수준이어야"

오 화백 스스로도 '기본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일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서양화의 기술과 경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며 "누드와 정물을 많이 그리며 기초를 다졌다"고 말했다.

그렇게 기본기를 다진 그가 '민족적' 주제를 찾아 그리기 시작한 것이 탈춤(탈)과 백자였다. 그는 1995년 완성한 '백자 도자기'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다.

특히 그의 탈춤 작품들의 '역동성'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지난 2005년 오 화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마에다 켄지 감독은 "1986년 요코하마에서 열린 '일한 회화전'에 갔다가 전람회장 출구 앞에서 한 폭의 탈출 그림을 보았다"며 "그림을 보고 있자니 춤추는 이들의 옷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내 뺨에까지 전해지는 듯 했으며 토속적인 선율마저 느껴졌고, 순간 이 그림에 천년의 시간을 이어 온 조선반도 전체의 역사와 문화가 응축돼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온 몸에 강한 전율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최석태 씨도 "보는 사람을 함께 약동하도록 이끄는 것 같은 동적인 화면은 이 분야에 대한 문외한인 필자마저 움찔거리게 하는 동시에 보는 사이 코허리를 시큰하게 만들었다"고 평했다.

오 화백은 "유화를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민족의 감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민족성만 강조하다보면 관심이 지역에만 국한될 수 있기 때문에 세계에 알리기 위해 세계적 수준의 작품을 만들 수 있게 실력을 다지는 데 전력을 다했다"고 말했다. 한 평론가는 "가장 서구적인 화폭에 민족 전통의 소재를 담았다"고 평가했다.
▲ ⓒ오병학

고고(孤高)한 화가…뒤늦게 세상에서 주목

오 화백은 '고고(孤高)한'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첫 개인전을 연 것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나서 20여 년이 지난 1968년이었다. 자신을 알리는 데 인색해 '주문제작'은 물론 일본 화상에는 그림도 잘 팔지 않았다. 우연히 그의 그림을 접한 평론가들의 첫 반응은 "아니 이런 화가를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미술평론가 하류 이치로 씨는 "처음으로 오병학 씨의 개인전을 봤을 때 나는 이처럼 강하고 진한 향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리는 재일교포 화가를 그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음에 스스로 놀랐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 평양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수학여행으로 서울을 다녀간 뒤 70여 년 만에 다시 서울을 찾은 오 화백은 '민족적 풍경'에 대한 욕심이 강하다. 전시회가 끝나면 전주와 경주 불국사, 민속촌 등을 찾아다닐 예정이다.
▲ ⓒ오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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