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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3000여명이 한국 이주 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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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3000여명이 한국 이주 원하고 있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10/06] 국내이주 사할린동포 고창남ㆍ김삼룡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추석명절 잘 보내고 계십니까?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서 정담도 나누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실텐데... 하지만 고향이 있어도 고향을 가지 못하는, 가족을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가슴아픈 사연을 가진 분들도 계십니다. 안산과 인천, 서울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할린 동포들도 그렇습니다. 정부에서 마련한 영주귀국제도를 통해 고국땅을 찾게 됐지만, 두고 온 자식생각에, 그리움만 쌓여간다고 하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사할린 동포들이 모여살고 있는 안산고향마을의 고창남 노인회장과 김삼룡씨를 초대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 사할린으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탄광노동 등 중노동에 시달리다 광복됐지만,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사할린 동포들... 반세기 만에 고향에서 살게 됐지만, 가족과 떨어져 살 수 밖에 없는 사연을 들어보고 사할린 동포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귀향의 꿈은 무엇인지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안산 고향마을 사할린 동포 2세 고창남 노인회장과 김삼룡씨입니다.

고창남 노인회장은 1935년 사할린 출생으로 62년 모스크바 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사할린 지구물리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내던 중 한국에 영주귀국을 결정, 2000년 2월 안산 고향마을에 정착했습니다. 김삼룡 씨는 1934년 경상북도 김천 출생으로 1940년 7살 때, 아버지의 사업으로 인해 사할린으로 이주했습니다. 그곳 목재산업전문학교에서 제지기술을 배워 1992년까지 43년간 제지기계업종에서 근무했고, 2000년 2월16일 한국에 영주 귀국했습니다. 고창남 회장, 김삼룡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한국에서 6번째 추석을 맞으시는데, 안산 고향마을에 계신 분들도 나름대로 잔치를 하십니까?

고창남 : 추석은 가족들이 모여서 지내는 명절인데,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자녀들을 사할린에 놔두고 온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니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 같은데,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안산시에 있는 사회단체에서 원조를 많이 해주시고 잔치를 해주십니다.

박인규 : 김삼룡 선생님도 자제분들이 한국에 없고 사할린에 있나요? 김삼룡: 셋인데, 아들 둘 딸 하나를 놔두고 왔지요. 만나고 싶지만 간단치 않은 문제니까.

박인규 : 혼자 계신가요? 부인도 같이 계신가요?

김삼룡 : 부인도 같이

박인규 : 고창남 회장님도 부인과 같이 와 계십니까?

고창남 :

박인규 : 사할린에서 오신 분들이 안산 고향마을에 몇 분이나 계십니까?

고창남 : 현재는 837명입니다. 입주할 때는 970명이었는데 6년 동안 160명이 돌아가셨습니다.

박인규 : 837명이면 적지 않은 숫자가 아닌데 하나의 아파트 단지에 모여 사십니까?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고창남 : 예. 아파트 한 단지에 모여서 같이 삽니다.

박인규 : 김삼룡 선생님, 사할린 동포들이 15백여 명 된다고 하는데 나머지 7,8백 명은 어디어디 사시나요?

김삼룡 : 대구에 계시고 인천, 김포 근처. 강원도에도..

박인규 : 그 중에서도 안산 고향마을에 제일 많이 모여 사시는데, 제가 듣기로는 안산 고향마을의 아파트가 한국 정부에서 땅을 대고 일본 적십자사가 돈을 대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게 됐는지 고회장님이 설명을 해주시죠.

고창남 : 역사를 간단히 말하면 일본 정부에서 94년도에 320억이라는 돈을 내서 그 중에서 50억은 인천 요양원 짓는 데 쓰고 270억을 안산 고향마을 짓는 데 쓰게 됐고 한국 정부에서는 땅을, 일본 측에서는 돈을 냈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일본 사람들이 일제 시대 때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한국사람들을 사할린으로 끌고 가서 일을 시킨 데 대한 보상금 비슷한 거군요.

김삼룡 : 손해배상이죠.

고창남 : 사실 사할린 동포들은.. 1세들은 제 2차 전쟁 전에 강제징용을 간 사람도 있고 전쟁 후에는 일본사람들 자기 동포만 고국에 데려가고 우린 남겨놓고, 우리는 누가 데려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국도 데려가지 않고 일본도. 우리는 국적이 없는 사람들이 돼서 그 상태로 오랫동안 살았죠.

박인규 : 김삼룡 선생님, 그래도 한 마을에 8백여 명이 같이 모여 사시니까 외롭지도 않고 의지도 되고 그러실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김삼룡 : 안산에서 다 부담해 주는 게.. 아파트 단지 안에 체육관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체육 하는 기계가 다 있습니다. 탁구 하는 곳도 있고 심심하지 않아요. 노인정 있고.

박인규 : 남자 분과 여자 분 중 어느 쪽이 더 많으신가요?

김삼룡 : 할머니들이 더 많습니다. 살아보면 남자는 빨리 세상을 뜨고, 결국에는 한 6년 살다 보니 여자들이 더 많게 되는..

박인규 : 고창남 회장님은 사할린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한국말이 김삼룡 선생님보다 조금 서투르신 것 같아요. 자제분들이 대개 사할린에 계시지만 고회장님 같은 경우는 따님이 한국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결혼을 이쪽에서 하신 건가요?

고창남 : 예. 손녀들 둘이 있는데..

박인규 : 따님이 어디 사세요?

고창남 : 광명시

박인규 : 손주도 있으십니까?

고창남 : 둘 있죠.

박인규 : 글머 가끔 놀러 오겠네요. 고창남 회장님은 고향마을 동포 중에서도 운이 좋으신 경우네요.

고창남 :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박인규 : 아까 김삼룡 선생님은 자제분이 세 분이라고 하셨는데, 세 분 다 사할린에 있습니까?

김삼룡 : 다 사할린에 있는데 걔들은 배운 게 없으니까, 우리말도 못합니다. 전부 다 못해요. 간단한 말은 좀 알아 듣지만 나같이 말은 못 합니다.

박인규 : 사실은 한국에 와도 일하기가 어렵겠군요

김삼룡 : 어렵습니다. 그게 큰 문제죠. 집도 없는 데다가 말도 못한다. 그럼 여기서 살아나갈 수가 없어요

박인규 : 6년 동안 사할린에 갔다 오신 적은 있으십니까?

김삼룡 : 적십자 부담으로 두 번 갔다 왔습니다.

박인규 : 좋으셨겠네요.

김삼룡 : 좋았죠. 반갑고.

박인규 : 추석에는 가족들이 다 모이는데, 김삼룡 선생님은 가시지는 못했지만 선물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김삼룡 : 선물을 보냈는데, 우체국에서 보통우편으로 보내면 몇날 며칠을 간다, 비행기로 보내면 며칠 간다 다 예상해서 보냈습니다. 장남한테는, 손자 손녀들이 우리나라 라면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그 라면이 한국할머니 라면을 달라.. 여기서 보낸 것. 그렇게 말하니까 이번에 한 50개 보내고. 두루두루, 김도 보내고.

박인규 : 라면을 항공우편으로 보내셨어요?

김삼룡 : 항공우편으로 보냈는데 선물값은 3만원 쯤인데 운송비용이 7만원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부담스러워서 다음에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배로 보내야겠어요.

박인규 : 고창남 회장님은 고향마을의 노인회장이시니까, 한국이 고향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기가 태어나고 산 데가 고향이라고 치면 사할린이 고향이신 거잖아요. 8백 몇 명 계시는 동포들 중에서 다시 사할린에 돌아가고 싶다는 한국이 좀 불편하다는 분들은 안 계신가요?

고창남 : 우리가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의 60년 이상 살았으니까 사할린 생각 안 난다고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제일 고민한 건, 자녀들 없이 우리가 여기서 사는 것. 특히 우리가 고령인이기 때문에.. 벌써 7,80세 넘은 사람들이고 병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플 때는 돌봐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럴 때 자녀들 생각이 더 나거든요. 그럴 때는 아마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자녀들이 여기 있었으면... 여기 없으니까 가고 싶다는 말을 하는 걸 거예요.

박인규 : 고창남 회장님은 아직 건강하시죠?

고창남 : 병을 가졌습니다. 고혈압.

박인규 : 여기 오신 지 6년 되셨는데 사할린에 아드님이 한 분 계시다고 하셨잖아요. 사할린에 갔다 오신 적이 있습니까?

고창남 : 몇 번 갔다 왔습니다. 금년에도 갔다 왔습니다.

박인규 : 사할린 갔다 오시면 사할린과 여기 중 살기가 어느 쪽이 더 좋으세요?

고창남 : 저는 정말 여기 온 걸 후회 안 합니다. 여기가 좋아요. 사실상 거기서 남아 있었으면... 제가 일하던 직장의 월급도 작았고 연금으로도 살기 어렵습니다. 저는 후회 안 합니다.

박인규 : 한국이 어떤 점이 좋으시던가요?

고창남 : 지금도 말했지만 60년 살면서 그 나라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거기서 살다가 여기 오니까 좀 다른 느낌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그런 점이 가끔은 있지만 우리가 여기 와서 살면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박인규 : 김삼룡 선생님도 한 두 번을 갔다 오셨는데, 오랜만에 가보시니까 사할린은 어떻던가요?

김삼룡 : 사할린은 지내기가 바쁩니다. 살기 바쁩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보통 인간의 평균으로 보면 살기 바쁩니다. 그런 거 보면 안타깝죠. 다 자손들 데려와서 여기서 일 시키고 같이 살았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못 하니까 유감스럽고. 여기 살기야 뭐 거기와 비교할 순 없고 같은 우리 민족끼리 사니까. 외국에서 난 59년 살았는데 외국에서 제일 비참한 게 민족차별이입니다. 공산시대에 사회주의 나라에서 살아온 걸 다 생각해 보면 고생 중에서도 민족차별이 제일 심했거든요. 지금도 그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박인규 : 소련 시절에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공식으로는 차별 안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김삼룡 : 공식적으로, 법으로는 그렇게 말해 놨지만 그 법을 민간들이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박인규 : 김삼룡 선생님 같은 경우는 구체적으로 사시면서 학교를 다니고 취업하실 때 어떤 식으로 민족 차별을 당하셨나요?

김삼룡 : 제지공으로서 일할 때, 한인들 다 일을 잘 합니다. 똑똑하고. 그러니까 자꾸 그 사람들을 선두로 세우려고 하는데, 못 세웁니다. 공산당원이나 되고 뭐 되면 앞으로 가고 좋은 자리 차지할 수 있지만.. 당원이 아니니까. 당원은 일을 못해도 먼저 가고 우리는 뒤에 쳐져 있습니다.

박인규 : 역시 같은 민족이 모여 살아야 마음도 편한 모양이네요.

김삼룡 : 그러니까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생기죠.

박인규 : 고창남 회장님, 그동안 돌아가신 분이 한 160명 되신다고 했는데, 같이 안장되는 공동의 묘지가 있나요?

고창남 : 사할린 동포 귀국자를 위해서 망향의 동산이 있습니다. 거기서 유골을 모시고 있습니다. 글런데 요새는 자녀들이 와서 돌아가신 부모의 유골을 사할린으로 모셔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박인규 : 하긴 자제분들 입장에서는 성묘도 해야 되는데 때마다 한국으로 오는 것도 큰 일이겠네요. 제일 좋기는 사실 1세대나 2세대만 오시는 게 아니라 자제분들이 같이 한국에 와서 생활하면 좋을 텐데, 김삼룡 선생님도 말이나 생활능력 때문에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래도 자제분들이 한국에 와서 정착한 경우는 없습니까?

고창남 : 우리 마을에선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고 있는 건 한 가족을 데려와서 같이 살자는 건데, 사실 자녀들이 와서 일을 하더라도 기술자로서 일하기가 어렵고 한국에서는 차별을 받습니다. 막노동을 할 때는 같은 일을 해도 사할린에서 온 사람들이 돈을 적게 받고. 그런 거 볼 때는 자녀들한테도 자기 의견이 생기거든요. 사실상 그 사람들을 오자고 해도.. 어떻게 정부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면 되는 것 같은데 제 생각에는 아직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됐으니까 앞으로도 어려움이 많을 것 같습니다.

박인규 : 김삼룡 선생님, 자제분들 중에서 한국말이 되고 살 자신이 있다. 그러면 오실까요?

김삼룡 : 자신이 있다는 젊은이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처음에 여기 2000년도에 들어와을 때 지게차 일 하는 거 보고 크레인, 포크레인 일을 한국 젊은이들이 하는 거 보면 기가 막히게 잘 합니다. 우리 러시아에서 59년 살아서 일하는 거 그런 일하는 거 다 봤거든요. 비교를 못 합니다. 그리고 큰아들이 대학교 끝나서 건축사 사장으로 일하는데 걔가 여기 와서 한국 기술자와 같이 일 못합니다. 기술이 떨어지니까. 문제가 큽니다. 그러니까 걔들이 돈 벌어서 한국에 가서 집 사서 여기 살겠다. 못 산다.

박인규 : 연세가 드신 분들은 정부 지원으로살 수 있지만 젊은 분들이 못 오시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의 이산가족이 생기고 있는 것 같네요. 그것도 참 큰 문제입니다.

김삼룡 : 우리가 만들었죠.

박인규 : 지금부터는 사할린에 가신 분들이 어떻게 가시게 됐는지, 사할린 동포들의 영주귀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또 정부에 대해서 바라는 건 무엇인지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우선 고창남 회장님께 말씀을 여쭐까 하는데요, 모스크바 대학이라고 하면 굉장히 질 좋은 대학 아닙니까? 굉장히 공부를 잘 하셨던 것 같아요.

고창남 : 들어가기 좀 어려운데, 한 번 해봤습니다.

박인규 : 고창남 회장님은 사할린에서 태어나셨는데 아버님 되시는 분은 어떻게 사할린에 가신 겁니까?

고창남 : 아버지는 보통 모집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 나갔고, 제가 알기로는 처음에 탄광 일을 하다가 전쟁 후에는 그냥 보통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박인규 : 김 선생님은 고향이 경북 김천이신데 사할린까지 가시게 됐어요. 아버님이 사업을 하셨다고 하셨는데 돈 벌러 가신 건가요?

김삼룡 : 정확히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그 때가 한 36, 37년도 됐을 겁니다. 그런데 내가 어려서 아버지가 뭐 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다만 집에서 떠나서 규슈 탄광에서 일한 건 압니다. 규슈에서 일하다가 어떻게 사할린에 들어갔어요. 그랬는데 왜 갔는가, 강제모집으로 갔는가도 모르고 어머니도 얘길 안 하고. 그렇게 사할린에서 일하다 보니까, 아버지가 신체가 좋아서 일을 잘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서 가족을 부르라는 허가를 받은 모양이에요. 그래서 들어오라고 해서 여동생 둘과 나와 어머니가 모여서.

박인규 : 사할린에서는 동포들끼리 추석 명절을 쇱니까?

고창남 : 예. 추석 명절과.. 사할린에서는 전통적 풍습을 지키고 있거든요. 그래서 양력 8월 15일을 추석으로 해서 제사도 지내요.

박인규 : 양력으로 지내는 이유가 있나요?

고창남 : 음력을 안 쓰고, 그때는 달력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보통 8월 15일을 추석으로 해서 묘도 가고 제사도 지내고.

박인규 : 양력으로 하면 굉장히 더울 때인데.. 좀 이상하네요.

고창남 : 그런데 광복절과 겹치거든요. 해방의 날이라고 해서. 그래서 사할린에서는 그 날 사람들이 아주 즐겁게 지내는 것 같아요.

박인규 : 한국에 오셔서 자제분들을 자주 만나시기는 힘들지만 김 선생님은 고향이 김천이시니까 친척들을 좀 만나 보셨습니까?

김삼룡 : 2000년도에 와서 사촌고모님의 아들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영주귀국 했다고 알려 줬는데 놀러 오란 말도 안 하고 우리도 안 가니까. 고모는 돌아가셨으니까.. 고모가 살아 계셨다면 인사를 갔을 텐데 고모도 안 계시고. 그러니까 좀 멀거든요.

박인규 : 한 번도 안 본 상태니까.. 그렇겠네요. 고 회장님은 남한테 친척 분들이 있습니까?

고창남 : 있습니다. 제가 89년도에 처음 왔을 때 형님을 찾았습니다. 형님이 저를 아주 반갑게 맞아 주시고. 저를 위해서 친척들과 다 모여서 제주도에서 잔치까지 해 줬습니다. 그 후에는 매년 사할린에서 출장으로 왔다 갔다 할 때 한국에 오면 제일 방문하고. 또 서울에 조카들이 있어요. 누나도 있었지만. 그래서 지금은 명절 때나 1년에 한 번은 제가 제주도에 갑니다. 명절에는 조카 중에서 누가 우리한테 옵니다.

박인규 : 고창남 회장님은 한국에 따님도 계시고 형님도 계시고. 복이 많으신 것 같아요.

고창남 : 형님은 돌아가셨고 조카들은 많으니까..

박인규 : 사할린에 우리나라 동포들이 대략 몇 분 계십니까?

고창남 : 우리가 알기로는 3만5천 명인데 영주귀국대상자가 일본 측에서 결정한 것이 1945년도까지 출생한 사람을 2세로 쳐서.

박인규 : 영주귀국을 할 수 있는 분들은 자격이 있는 거군요. 그 자격이 1945년 출생자여야 된다.

고창남 : 그런 사람들이 3천 명 됩니다.

박인규 : 그런데 지금 들어와 계신 분은 1500 명.

고창남 : 아니, 남아 있는 분이 3천 명.

박인규 : 국내에 돌아오신 분 말고 3만 5천 명의 사할린 동포가 계신데 그 중에서 영주귀국의 대상이 되는 분들이 3천 명이 아직 사할린에 계시다. 그 분들이 못 들어오는 이유가 뭡니까?

고창남 : 살 데가 없습니다.

박인규 : 안산 고향마을에는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나요?

고창남 : 없습니다. 방이 비면 들어오고 있습니다.

박인규 : 그러면 일본 적십자사에서 사할린 동포들 중에 45년 이전 출생자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좀 더 지원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김삼룡 : 이 문제에 대해서 일본 측이 꼭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런데 안산시에 고향마을만 지어 놓고 아직까지 움직임이 없거든요. 한국 정부에서도 사할린 동포들의 문제를 일본에 돌렸습니다.

박인규 : 한국 정부에서도 사할린 동포들의 귀국 문제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 적십자에서 책임져야 된다고 주장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김삼룡 : 지금 두 정부가 합해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년에 국회에서 사할린 동포 특별법안이 제의 됐습니다.

박인규 : 영주귀국제도가 94년도에 시작됐다고 말씀하셨는데 두 분 다 2000년도에 들어오셨어요. 특별한 사정이 있으셨나요?

김삼룡 : 고향마을에 젊은 사람이 많이 들어왔어요. 60살 좀 넘은 사람...

박인규 : 김 선생님보다 나이가 더 젊으신 분들

김삼룡 : 내 친구도 같이 동창생이 16명 있었는데, 사할린에 살았는데 그때 내가 거기서 회장을 했으니까 사실을 잘 압니다. 우리가 신청했을 때 한국에 귀국하겠다고 했을 때 16가구가 나가게 됐어요. 신청했는데 헛소문이 나와서... 한국에 가면 몇 만원 받고 의료비, 치료비, 먹을 거, 관리비 다 하면 돈이 모자라서 당신들은 굶어 죽는다는 헛소문이 나서 16가구에서 남한 사람 네 가구가 나옵니다. 나하고 세 집이 남았는데 다른 사람들 소문 듣고 취소해 버렸어요.

박인규 : 지금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것에는 만족하십니까?

김삼룡 : 만족하니까... 먹을 거, 잘 거, 입을 거 여기서 다 해결되잖아요.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니까 걱정은 없어요.

박인규 : 지금은 부인만 모시고 올 수 있는 모양인데 한 분 더 같이 올 수 있다고 지금 법안이 됐다면서요?

고창남 : 법안이 돼 있는데요, 그래서 사할린에서 기대가 많고 우리도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안이 통과되면 한 가족을 모시고 올 수 있다는.. 우리도 한 가족을 부를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사실 이 문제를 한국 정부에서 해결해 주시면 우리보다도 사할린 동포들에게 아주 좋은 법안이고, 기대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박인규 : 아무래도 자제분들이 3만 명이 넘는 3,4세 분들이 오시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을 텐데 그런 분들이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정부나 사회에서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요?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고창남 : 지금 상황에선 어려운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작년에 한명숙 총리님이 국회의원일 때 공청회에 갔다 왔거든요. 그때 그 말이 나왔는데 법안에서는 아직까지 한 가족 외에는 형편이 안 된다. 그러니까 법안에서는 한 가족만 보고 있다고,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박인규 : 김삼룡 선생님은 한국에 사시는 생활에 만족하신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래도 바라시는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정부에서 이런 걸 해줬으면 좋겠다.

김삼룡 : 국회에서 자손들을 하나 데려올 수 있도록 하면.. 나라에서 책임지고 우리말 공부 시키고 직장도 대주고, 이게 해결돼야 올 사람이 좀 많아질 겁니다. 그것보다 우리 더 잘 살라고는 생각 안 합니다. 이 정도면 편하니까.

박인규 : 정부에서 사할린의 젊은 동포들을 위해서 말이나 문화, 직업을 배울 수 있는 뭔가를 했으면 좋겠다. 김삼룡: 예. 그런 걸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와서 당장 내일 일을 갈 수는 없거든요. 말을 배워야 됩니다.

고창남 : 제 생각에는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에는... 그 문제가 아주 필요합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그리고 우리가 저 뿐 아니라 아마 사할린 동포들이 다 한국 정부에 원하고 있는 건 한국 자체가 강한 나라가 돼야 돼요. 우리가 모두 원하고 있는 건 한국 경제가 좋아지고 한국이 세계에서 아주 강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한국이 강해야 사할린 동포들도 든든하게 생각합니다.

박인규 : 3만 명이라는 숫자가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데 정부가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추석인데, 고창남 회장님은 따님이라도 계시지만 김삼룡 선생님은 자제분들이 다 사할린에 계셔서.. 이 전파가 사할린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이 자리를 빌어서 사할린에 있는 자제분들한테 인사나 당부 말씀을 해주시죠.

고창남 : 사할린에서 문제없이 잘 살기 바라고,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있다는 걸 전하고 싶습니다.

박인규 : 거기 살아도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김삼룡 선생님은 자제 분이 세 분이신데..

김삼룡 : 전에 사할린 살 때는 추석이라고 8월 15일에 양력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전통문화를 할아버지부터 그렇게 지내 왔으니까 지금까지 내 아버지 제사를 지내죠. 왜 그때 제사를 지냈나 하면 우리 모두 직장에 다니니까 명절이 닥치면 불편한 점이 많아요. 음력을 하면. 그러니까 양력으로 넘겨서 이때까지 해 왔는데 가족들 다 모아서 제사 지내고 음식도 먹고 좋았는데, 일단 우리가 여기에 영주귀국 했으니까 우리 전통문화인 추석을 음력으로 넘겼죠.

박인규 : 그럼 사할린의 자제분들도 음력으로 지금 추석을 쇠는 군요.

김삼룡 : 그러니까 걔들도 그 때 가서 벌초하고, 제사는 내가 여기서 지내고.

박인규 : 혹시 사할린에 있는 두 아들과 따님에게 하실 말씀은 없으세요?

김삼룡 : 우리 부모들 걱정은 하지 말고 거기서 열심히 살아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박인규 : 부모님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한국에 와 계신 사할린 동포들도 편안하게 지내시고 자제분들과도 자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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