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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에서 한국말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세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10/04] 재독한인 입양인들의 대모 김광숙 회장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지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1000 명의 간호사들이 독일로 건너갔습니다. 비슷한 기간 7900여 명의 한국 광부들도 독일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125달러. 어디서도 차관을 빌릴 수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에 가서 1억4천만 마르크, 약 3천만 달러의 산업차관을 빌려왔고 간호사와 광부들은 그 차관에 대한 인력담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만 40년이 지난 오늘, 코리안 엔젤로 불렸던 간호사들은 할머니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김광숙 씨는 재독한인 입양인의 대모로 활동하며 입양인을 데리고 최근 한국에서 열린 세계한민족축전에 참가하기도 했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재독한인 입양인의 대모 김광숙 씨를 초대해서 현재 유럽의 입양인 실태는 어떠한지, 한국인 입양인들이 고국을 향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얘기를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재유럽입양인후원회 김광숙 회장입니다. 김광숙 회장은 1946년 전주 출생으로 전주여고를 졸업하고 간호보조사로 활동하던 중 1970년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됐습니다. 이후 베를린 간호협회 회장, 베를린 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1994년부터 재독청소년입양인후원회를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고 올해 3월부터 재유럽입양인 후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파독간호사들의 노후대책과 입양인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03년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이번에 한국에 오신 게 세계한민족축전에 참가하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즐거우셨습니까?

김광숙 : 너무 즐거웠어요.

박인규 : 이번에 와 계시는 동안에 환갑을 맞으셨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김광숙 : 네. 아주 좋았고 감회 깊었어요.

박인규 : 수십 명의 아들, 딸들이 축하를 해 드렸다구요.

김광숙 : 유럽에서 20명의 입양인들이 같이 왔습니다. 함께 축하해 주셨어요.

박인규 : 노무현 대통령도 환갑이 9월 27일이었는데 비슷하시네요.

김광숙 : 제가 1주일 빠르죠.

박인규 : 재독, 재유럽 입양인들의 대모 역할을 하고 계신데 독일에 있는 입양인들이 김광숙 회장을 부르는 별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김광숙 : '탄테'라고 해요. 이모나 고모라는 뜻인데요, 친척이라는 뜻이죠.

박인규 : 이번주가 추석 연휴인데 독일에서는 한국인들 또는 입양인들이 추석을 잘 쇠고 계십니까? 어떤 식으로 보내세요?

김광숙 : 한인회에서 추석행사를 거의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입양인들이 참여해서 즐겁게 놀고, 떡도 먹고 송편도 만들고...

박인규 : 독일에 사시는 한국인들이 대략 몇 명쯤 되세요?

김광숙 : 한 3만 명 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박인규 : 그럼 그 중에 한국인 입양인도 포함된 거죠? 몇 명쯤입니까?

김광숙 : 입양인 수가 독일에는 2550명 정도 됩니다.

박인규 : 유럽 전체로는 어떻습니까?

김광숙 : 전체로는 5만 명이 넘습니다.

박인규 : 독일이 유럽에서 상당히 큰 나라인데 독일로 입양된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네요.

김광숙 : 1990년 이후에는 독일에서 한국 입양인들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박인규 :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까?

김광숙 : 수속이 좀 복잡하고, 독일사회에서 남미, 아프리카, 동구 유럽권 입양인들을 많이 받고 있어서 수속절차가 복잡한 한국에서는 안 데려오려고 해요.

박인규 : 말하자면 한국도 먹고 살 만하니까 알아서 키우라는 의미인가 보죠?

김광숙 : 그렇죠. 88올림픽 이후로 그렇게 됐습니다.

박인규 : 1994년부터 청소년입양인후원회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계시고, 올해부터는 재유럽입양인후원회 회장을 맡고 계신데, 우선 청소년입양인후원회라는 게 어떤 건지 소개해 주시죠.

김광숙 : 우리 교포2세들과 입양인들을 합쳐서 만든 모임입니다. 제가 97년도에 한인회장을 했는데 그 때 제 공약이 청소년들을 위한 일, 노후대책. 선배님들을 위한 일을 하려고 했는데 한가람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한가람이라는 것은 작은 물줄기가 흘러서 큰 강을 이룬다는 뜻이거든요. 청소년들.. 그 당시에는 16세 이상으로 해서 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박인규 : 후원이라면 상담같은 걸 하시나요? 어떤 식의 후원을 하시나요?

김광숙 : 상담을 많이 하고, 친부모를 찾겠다든지, 뿌리찾기 한국문화를 배우고 싶다면 고전무용이나 태권도도 가르쳐 주고, 한국음식 등 한국에 대해서 많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박인규 : 올해부터는 재유럽입양인후원회 회장도 맡고 계신데, 그런 후원을 해주려면 여러 가지 일을 해주실 분들이 계셔야 될 텐데, 자원봉사를 하시나요?

김광숙 : 완전히 자원봉사입니다.

박인규 : 재독청소년입양인후원회에서는 몇 분이 그런 일을 하십니까?

김광숙 : 적극적으로 하시는 분들은 한 30명 정도, 무명으로.. 음성적으로는 100여 명 됩니다.

박인규 : 한가람회라는 걸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한가람회는 또 어떤 역할을 하는 겁니까?

김광숙 : 청소년들 모임이기 때문에, 결성은 해줬지만 그걸 이끌어 나가는 건 2세들 자체입니다. 그들끼리 모여서 포럼도 하고..

박인규 : 후원회를 통해서 상담을 해보시면 유럽으로 입양 온 한국인 청소년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고민은 어떤 건가요?

김광숙 : 한국 가정은 어느 정도 한국식을 따라갈 수 있지만 한국인과 독일인 부부의 한독가정은 좀 방향이 다르죠. 그래서 독일식 방식으로...

박인규 : 대기 입양을 아주 어렸을 때 갔을 텐데 그런 문화의 차이를 느끼나요?

김광숙 : 느끼죠. 자라는 과정에서는 별로 못 느끼는데 어느 정도 성인이 돼갈 때는. 일례로 한 번도 한국음식을 먹지 않았던 애가 갑자기 김치를 내놓으면 아무 부담없이 먹는다든지, 이런 일이 많아요. 생전 안 먹어봤던 음식인데.

박인규 : 그야말로 한국인의 피가 있는 모양이죠. 독일가정에 입양된 한국인 청소년들은 대체로 잘 살고 있죠? 어렵게 사는 친구들도 좀 있습니까?

김광숙 : 어렵게 사는 친구들은 거의 묻혀있기 때문에 저희들이 발굴을 못합니다. 또 하나, 부모를 찾겠다든지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는 아이들이 저를 많이 찾죠. 행사에 참여도 하고 적극적으로 부서를 맡아서 일도 하고.

박인규 : 우리나라 TV프로그램에서도 외국에 입양을 갔다가 국내에 있는 부모를 찾아서 만나게 해주던데, 아무래도 친부모를 찾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이 많은 모양이죠?

김광숙 : 많죠. 거의가.. 98%는 찾고 싶어합니다.

박인규 : 이번에 온 입양아 중 한 분도 부모를 찾으려고 한다고...

김광숙 : 한 분이 아니라 12명이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 명도 못 찾았습니다.

박인규 : 왜 그게 어려울까요?

김광숙 : 글쎄요. 한국 부모들이 찾으려고 해야 찾는 거 아니겠습니까?

박인규 : 그럼 자기 뿌리가 어딘지 알고 싶고 친부모를 찾고 싶어하는데요 한국에 있는 친부모들이 안 나타나서 그런가요?

김광숙 : 네. 입양자료도 상당히 부족합니다.

박인규 : 친 부모를 만나는 경우가 드뭅니까?

김광숙 : 아주 드물어요. 독일 같은 경우는 상당히 없거든요. 거의 대여섯 명 정도. 부모를 찾고 싶어하는 입양인들은 대다수고.

박인규 : 그런데 실제로 찾는 사람은 극소수고.

김광숙 : 그래서 제가 한국에 같이 와서 부모를 찾을 때는 항상, 기대는 하지 말고 네가 태어난 나라가 이렇다는 걸 먼저 익혀 두라고 하거든요.

박인규 : 혹시 아주 극소수지만 독일에 입양된 청소년 중에 한국의 친부모를 만나는 경우는 어떤 경우가 있는지 소개해 주실 만한 사례가 있습니까?

김광숙 : 한 아이가 생후 6개월 때 입양이 됐어요. 그 아이가 대학생 모국 연수에 왔거든요. 와서 부모를 찾는다고 생각은 안 했어요. 너무 서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우연히 그 어머니가 아이를 찾으려고 해서 찾게 됐어요.

박인규 : 만났을 경우에 독일로 입양 간 청소년은 한국말을 잘 합니까?

김광숙 : 못 했어요. 그래서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자꾸 눈치만 보더라구요. 그런데 엄마가 먼저 손을 잡고 하니까 같이 울더라구요.

박인규 : 대개 해외 입양된 청소년들은 친부모한테 너무 미안해 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지 말아라. 만나기만 해도 좋다고 하는데 친부모들은 그런 부담이 있어서 안 나오시는 건가요?

김광숙 : 그렇죠. 수치를 많이 느끼시는 것 같아요.

박인규 : 오랜만에 만나도 서로 말이 안 통해서 갑갑할 텐데, 재독, 재유럽 입양인 후원회가 한국문화를 가르친다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제일 중요한 게 말을 가르치는 일일 것 같아요. 조직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준비랄까 한국 정부의 지원이 있습니까?

김광숙 : 한국의 6개 대학에서 입양인들을 대상으로 3개월 장학생을 뽑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대학에 일 년에 두 명 정도 보내고. 그렇게 한국말을 배우고. 또 제가 원하는 바가... 대학생들은 그렇게 하지만 직업학교를 다닌다든지 한국말을 배우고 싶은데 계기가 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서 정부에서 한 1년 정도 한국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박인규 : 저는 미국에서 조금 생활을 해봤는데 주말학교라고 해서 교회에서도 가르치더라구요. 그렇게 자발적으로 가르치는 프로그램도 있습니까?

김광숙 : 한인학교가 있고, 대사관 문화원에서 성인들을 위해서 한글반을 조직했어요. 거기에 입양인들이 많이 나가고 있습니다.

박인규 : 유럽에 계신 한국교포들이 입양인 청소년들을 위해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다. 이럴 때 정부에서 어떤 지원을 해줬으면 하고 바라시는 게 있습니까?

김광숙 : 거의 입양인들이 한국에 와서 생활하면서 배우고 싶어하기 때문에, 제가 볼 때는, 독일에서는 독일어를 쓰지 한국어를 안 쓰거든요.

박인규 : 이번에 한민족축전이 15회인 걸로 아는데 전 세계에서 몇 명이나 모였습니까?

김광숙 : 매년 하는데, 5백 명 이상입니다.

박인규 : 그 숫자를 늘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네요.

김광숙 : 우리 입양인들은 무한정으로 받아주고 있어요. 나름대로 정부에서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죠.

박인규 : 지금부터는 좀 개인적인 질문도 드려볼까 합니다. 간호사로 독일에 가신 게 1970년, 한국 나이로 25살 때였는데 친구 따라 강남 가셨다는 말도 있어요.

김광숙 : 그 당시에 길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독일에 가겠대요. 친구니까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갔어요.

박인규 : 간호사 일을 하실 때입니까?

김광숙 : 그 당시에는 간호보조원이었죠. 보건소에서 일하다가 해외개발공사에 신청해서 바로 됐어요.

박인규 : 그 당시 가신 분들은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하셨다던데, 독일의 언어는 좀 배워서 가셨나요?

김광숙 : 아니죠. 가서 진짜 언어소통이 제일 어려웠죠.

박인규 : 가자마자 바로 일하셨어요?

김광숙 : 3개월 동안 기본적인 독일어를 배웠어요.

박인규 : 바로 서베를린에서 쭉 일하신 겁니까?

김광숙 : 네. 저는 서베를린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34년 동안 일했습니다.

박인규 : 만천 명이 가셨다는데 한국인 간호사들끼리 모임도 있으셨어요?

김광숙 : 재독간호협회도 있고 저희들은 베를린에서 72년도에 베를린간호위원회를 조직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그때 가셨던 간호사 분들이 대부분 은퇴하셨겠네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김광숙 : 많이 은퇴했죠. 거의 연금생활 하시는 분도 많고 독일분과 결혼해서 한독가정을 이루신 분도 많고. 3년 계약이 끝나고 바로 오신 분들도 있고.

박인규 : 간호사 활동을 하시다가 어떻게 해서 한국 입양인들과 인연을 맺게 되신 겁니까?

김광숙 : 74년도에 한국에 휴가를 왔어요. 그랬다가 독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독일로 입양돼 가는 아이들을 봤어요. 그때 굉장히 마음이 아팠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러면 안 되겠다. 그래도 한국 아이는 한국에서 길러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죠.

박인규 : 실제로 입양인들을 위해서 뭔가 활동을 해야겠다고 시작하신 건 언제입니까?

김광숙 : 94년도에 청소년입양인후원회를 결성해서, 베를린에 있으신 몇몇 분과 같이 결성해서 총괄적으로 일을 하게 됐죠.

박인규 : 베를린에도 한국인 입양인들이 많았습니까?

김광숙 : 백여 명 있었어요.

박인규 : 처음에 입양인들과 대화를 트고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김광숙 : 네. 저희들 세대가 입양인들을 버린 세대 아닙니까? 그래서 신뢰감을 얻기 굉장히 힘들었어요. 근 10년이 됐어요. 그동안 여유를 갖고 정이라는 거... 한국에는 끈끈한 정이라는 게 있다고 계속 시도해 왔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입양인들도 저를 탄테라고 부르면서 제가 입양인들의 가족으로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처음에는 한국인이라는 것 자체를 싫어했겠군요 말하자면...

김광숙 : 싫어했다기보다도 못 믿겠다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많이 보냈어요.

박인규 : 입양돼서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은 대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어떤 유형이 있습니까?

김광숙 : 양부모들이 거의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신 분들이 많아요. 여유가 있고 다들 중산층이라서 다른 어려움은 없고, 어렸을 때 왔던... 돌 지나기 전에 독일로 입양 온 입양인들은 상당히 공부도 잘하고, 박사도 많아요 변호사도 있고.

박인규 : 그렇게 독일에서 사회적으로 입지를 굳힌 분들은 예를 들면 한국을 위해서 혹은 한국과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는 분도 있을 것 같아요.

김광숙 : 많죠.

박인규 : 제가 몇 년 전에 남해도에 가봤더니 독일마을이라고 해서 그 당시 김두관 군수가 독일에 가신 광부나 간호사들을 위해서 노후를 물 좋고 산 좋은 남해도에 사시라고 마을을 만들었던데, 그쪽으로 가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까?

김광숙 : 여러 분 계신다고 들었어요. 저는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는데.

박인규 : 입양인 후원하시느라 아직 거기까지는 못 가보셨군요.

김광숙 : 네. 그쪽에서 온 입양인이 없어서, 부모 찾고... 그쪽으로 가지는 못했어요. 부산까지는 갔는데.

박인규 : 자기 자식을 해외로 입양 보낸 친부모들이 양심의 가책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잘 찾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그 중 일부는 자기가 입양 보낸 아이를 꼭 보고 싶다는 분도 꽤 있으실 것 같아요. 만약에 독일이나 유럽에 아이를 입양 보낸 부모님 중에서 아이를 찾고 싶다는 분들은 어떤 방법을 취하면 연락이 가능할까요?
▲ ⓒkbs 1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김광숙 : 입양인 기관이 네 군데 있습니다. 그 기관에 연락하시면 찾으실 수 있어요. 홀트, 동방, 대한, 한국. 네 군데가 있습니다.

박인규 : 해당국에 가는 게 아니라 일단은 국내에서 입양을 담당한 기관에 추적을 하면 알아볼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재유럽한인입양인후원회 회장을 맡으신 게 올해부터죠? 임기가 얼마나 되세요?

김광숙 : 올해 3월에 맡았고, 임기가 회칙으로는 2년으로 돼 있는데요, 저는 제가 나이도 있고 하니 이제는 젊은 분들이... 그리고 다른 유럽의 나라 쪽에서 젊은 분들이 나오셔서 같이 일했으면 합니다.

박인규 : 독일은 입양인이 2550명이지만 유럽 전체로는 5만 명이라고 하셨는데, 재유럽입양인후원회 회장을 맡으시면 유럽 전역의 입양인들을 위해서 하셔야 될 일도 많을 것 같습니다.

김광숙 : 저희들은 1년에 한 번씩 체육대회도 합니다.

박인규 : 어디서 합니까?

김광숙 : 나라마다 다르죠. 입양인들이 다 모이는데, 올해는 7월에 네달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했습니다. 올림픽 선수촌.

박인규 : 유럽으로 입양 오는 한국인들은 갈수록 줄어든다고 봐야겠죠?

김광숙 : 스칸디나비아 쪽도 거의 받지 않고 있고. 제일 많은 동네가 지금 불란서인데요, 그곳에 만 명이 넘습니다. 거기엔 아직도 어린아이들이 있고.

박인규 : 프랑스 국민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한국인의 정체성이나 뿌리를 잃지 않도록 뭔가를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재유럽한인입양인후원회 회장으로서 앞으로 하시고 싶은 사업 같은 게 있으세요?

김광숙 : 저는 별로 욕심은 없는데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한국에서 한국말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셨으면. 그게 제가 첫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박인규 : 다른 것보다도 입양인들이 한국말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국가나 사회에서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올해가 환갑이신데, 객지생활 오래 하다 보면 나이가 들수록 고향이 그리워진다고 해요. 혹시 고향에 오시고 싶지는 않으세요?

김광숙 : 글쎄요. 제가 입양인을 맡다 보니까... 걔네들도 거기 국적을 따랐고, 걔네를 돌봐주고 나서... 글쎄요. 저는 아마 거기서... 걔네들이 내 아들딸이나 마찬가지라서.

박인규 : 한국에 들어오는 것보다 그쪽에 있는 친구들이 더 가족 같고... 입양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면 연민도 많이 느끼지만 우리 한국 사회나 정부가 제대로 지원을 많이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해외교포를 포함한 입양인들에 대해서 한국 국민들이 어떻게 대해줬으면 좋겠다. 그런게 있다면 마지막으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광숙 : 동정의 눈초리보다는 하나의 가족으로 대해주면 제일 좋겠습니다.

박인규 : 앞으로 독일에 들어가셔서도 한국인 입양인들을 위해서, '탄테'로서 많은 도움을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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