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주는 종로의 유명한 요정 ㅇ장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상당한 보조가 있었다는데 두 개의 사실은 복잡한 세부조건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단순히 요정주인이 정부를 동원해 자신이 영업할 요정을 신축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6,000평 가까운 산자락을 다져 택지로 만드는 데 군 공병대가 투입됐다. 라이온건축사무소 정재원씨가 모든 건물을 설계하고 대목장 정대기, 박광석씨 등이 한옥 목조건축 4채, 현대건설이 콘크리트 한옥 3채를 시공했고 중앙정보부가 감독, 1년여 만에 완공됐다.
삼청각은 남북회담 이후 30여년간 우여곡절을 거쳐 폐가가 되기도 했다가 2001년 대보수를 거쳐 지금의 민간운영체제로 돌아갔다. 서울성의 북문 숙정문이 멀리 보이는 북악산 자락의 풍광을 마주하며 그동안 무성해진 소나무 숲, 별당같은 분위기의 한옥을 보고 호사스런 음식을 먹는 장소로 이곳을 찾아갈 수 있다.
화려하지만 콘크리트의 딱딱한 느낌을 주는 삼문을 들어서 얼마간 걸으면 경회루보다 더 큰 한옥 4층 건물이 나온다. 이곳이 건평 978평의 콘크리트 한옥 일화당이다. 나머지 50-100평 규모의 한옥 청천당, 천추당, 동백헌, 취한당, 유하정이 주변 숲속에 드문드문 펼쳐진다. 팔각지붕의 정자 유하정 옆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다. 솟을삼문과 일화당, 유하정은 콘크리트 건축이고 다른 한옥 4채는 목재건축이다.
남북회담 이후에도 국빈급 외국인들에게 한국적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정부차원의 많은 접대가 이뤄져 2002년 월드컵 때도 그 역할을 했다. 그보다는 1970년대 최고급 요정으로 사업가, 정치인, 고급관료, 전문가등 실력자들이 많이 드나들고 과거 박정희대통령도 찾아와 놀던 곳이라는 비사로 많이 알려졌다.
1970년대는 고급 요정의 전성시대로 서울사람의 사교생활 일면을 담당했다. 식당이기보다는 고급한 별당에서 주안상에 풍악도 나오고 젊은 기생들이 합석하여 접대를 겸한 사교가 이뤄지는 것이었다. 기생은 전통을 벗어나 1970년대에는 호스티스로 바뀌어 있어 이들 이야기가 소설로 영화로 많이 나왔다. 기생에게 매혹돼 인생이 요동치는 남녀의 한국판 '춘희'같은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다. 모여서 옛날처럼 시를 나눴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지만 술과 은밀한 논의들이 넘치고 시 대신 영화같은 현대식'풍류'들이 연출됐을 것이다.
이후 고급요정이 전 같지 않으면서 예식장 겸한 음식점으로 바뀌었지만 계속 적자가 쌓여 1999년 폐관되기에 이르렀다. 건설회사가 이곳을 고급주택지로 개발하려던 차에 시민단체가 보존에 나서고 2001년 서울시가 이를 수용해 재보수, 오늘에 이르렀다. 가볍게 들르기에는 비용이 고가인데 한옥 한 채를 차지하고 벌이는 모임, 가족이나 회사 기념일, 동창회, 생일 등에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30여년 전인 1972년 지어질 때의 자료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설계자인 건축가 정재원씨는 2002년도에 타계했다. 아들 정내원씨가 건축사무소를 이어받아 활동 중인데, 선친에게서 들은 몇가지 사실이 당시 상황을 말해준다.
"부친은 1968년부터 건축사무소를 운영하셨어요. 전통건축 설계의 거장이셨죠. 자세한 상황은 나중에 들어 안 것이 전부이고 6개 건물의 모든 설계도면과 공사일지는 중앙정보부가 다 가져갔습니다. 기타 원고도 30여년 지나면서 분실된 듯 해요.
콘크리트 건축은 지금 기술이 좋아서 조립하기 쉽지만 그 당시 일화당처럼 큰 한옥을 콘크리트로 지을 때는 공포나 기둥 서까래같은 부재를 전부 거푸집을 만들어 지어야 했습니다. 한옥은 전통대목들이 짓고 누가 편액을 썼는지 그런 세부 사실은 기억에 없어요. 2001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이곳을 리모델링할 때 부친이 공사팀에게 건축 당시 이야기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보수가 끝난 다음해 작고하셨지요. 이즈음 이곳을 건축 리포트 쓴다고 묻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일화당은 한옥이면서도 대연회장과 극장을 갖춘 현대적 용도의 건물로 보기에도 요새같이 튼튼한데 모든 면에서 남북의 만남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 건물이었던 듯하다. 정주영씨가 직접 지휘하고 중앙정보부가 난리난듯 서둘러 3개월만에 지었다는 집은 일화당을 말하는 것 아닌가 한다.
천추당, 청천당, 동백헌, 취한당의 건축책임자는 대목장 박광석(朴光錫), 정대기(鄭大基)씨였다. 박광석씨는 이미 작고했고 정대기씨(77)는 아직 활동중인 대목으로 얼마 전까지 대한문 해체보수 작업중이었다. 그가 30여년전 작업을 말해주었다.
"원래는 양식 건축하던 이가 일을 보고 있었는데 그 재주론 한옥이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박광석씨와 내가 불려갔지요. 가보니 한옥에 쓸 수 없는 자재들을 사놓고 일이 안되니 쩔쩔매고 있었어요. 건축주는 정부에서 10억원을 지원받고 집을 짓기로 했는데 막연하게 일반 건축비의 2배로 한옥 건축비를 책정해 놓고 있었지요. 건축주도 제치고 정보부가 나서서 우리에게 책임을 지우려 했습니다. 그래서 건축비를 4배로 잡는 조건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 했더니 안된다면서도 끝마쳐라 마라 심하게 재촉했어요. 일당 200원이었던 때의 일입니다.
인천 목재소에 가서 목재를 모두 새로 구입했는데 당시엔 굵은 국산 육송이 없어 모두 수입목재로 썼습니다. 한옥 설계도는 이미 나와 있었지요. 그러나 목조한옥의 실제시공은 양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문 만드는 창호니 화초담이니 그 방면 전문가 대목 소목 20,30명이 와서 일했습니다. 과정 내내 젊은 사람들이 나와 얼마나 들볶아대던지 일하는 게 무슨 연필로 종이에 쓱쓱 그리듯 되는 줄 알고 서두르는 거예요. 비 쏟아지는 장마 속에 우비 입고 일을 했지요. 한 일년여 걸렸습니다. 처음부터 북한과의 회담에 소용될 것을 염두에 둔 건축이었습니다."
1973년 6월 남북회담의 환영만찬이 열리며 개관됐다.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북한의 박성철이 당시 남북대표였다. 막상 회담자체는 이곳에서 진행되지 않았다. 이후 30여년이 흘렀다.
2001년 대보수작업은 김승업 현 '김해 문화의 전당' 사장이 책임자였다.
"1999년 폐관된 뒤엔 고급 주택지로 팔릴 처지가 된 걸 시민들과 서울시가 나서서 구해냈어요. 문화재가 될 시간적 근거는 없지만 다시 짓기 어려운 건축에 1970년대 긴박한 정치사의 이면을 담은 역사의 장이라 아끼려는 것이죠. 시민에게 공개된 장소로 만들기로 하고 대보수가 시작됐습니다. 2년 동안 전기 수도 다 끊기고 폐허처럼 되어 있어 유하정 옆 계곡의 물을 떠다 마시면서 7개월간 작업했습니다.
그러면서 1972년 건축 당시의 여러 상황과 정치권력이 얽힌 건축물을 자세히 알게 되었지요. 당시 일화당은 남북협상을 치르려던 긴장된 회담장소이고 대통령의 참석을 염두에 둔 곳이라 경호문제가 심각한 요인이었답니다. 시간이 급하니까 군 공병대가 동원돼 터를 다지고 정주영씨가 와서 직접 지휘하고 일화당 뒤의 콘크리트 계단은 중앙정보부의 지적을 받고 비상용으로 단 3일 만에 만들어 놓은 것이랍니다. 그런 걸 자연스럽게 보기좋은 마당과 연결되는 통로로 바꾸고 뒷마당을 트고 내부를 다 바꿨지요."
일화당은 어떤 대궐건물보다도 크다. 지붕이 건물의 반쯤 내려덮어 육중하고 어딘가 비밀스럽고 복잡해 보인다. 화초담이 둘리고 예쁜 문이 두 개나 나있는 뜰이 있어 여기서 결혼식이 열리곤 했다. 마당 양 끝에 심은 두 그루 목련은 왠지 1970년대 분위기를 낸다.
"30년 만에 대대적 보수를 한 것인데 그때까지 재목이 깨끗하고 좋아서 그대로 썼습니다. 여기 건물을 사대부 취향의 것으로 할지, 대궐같은 분위기로 할지 건축가와 상의했지요. 워낙 웅장한 건물이니 대궐 분위기 쪽으로 맞추자 해서 비원이랑 경복궁에게 가서 색깔들을 찾고 밤색과 녹색을 위주로 30년 된 바랜 색 내느라고 페인트 칠 배합에 골똘하기도 하고."
김승업씨는 삼청각을 보수하면서 알게 된 삼청각 인물사를 글로 쓰고 싶어한다. 그야말로 권력과 유착된 인물사였다고 한다. 값싼 기생관광지가 되면서 시끄러워지니 고급 손님들이 피하기 시작하고 그대로 몰락원인이 됐다고 그는 보고 있다. 삼청각 요정을 경영하던 두 자매는 모친이 막강한 파워를 행사했던 세력가로, 뉴욕 요식업계에서 활동 중이다. 수많은 사건이 점철된 1970년대 요정의 세계와 그 변천사가 나올지 모른다.
서울시내 중심가에서 가까운 거리건만, 여기는 별도의 세계였다. 식당 안에서는 접근이 금지된 숙정문과 서울성벽이 바라 보였다. 대중적 분위기보다는 어디서 많이 본 인사들이 모이는 장소 같았다. 음식은 백자그릇에 담겨 신선로까지 모든 것이 1인분씩 제공된다. 주방장 박경식씨는 '한식은 완전 보편화 된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선 궁중요리를 가미한다'고 한다. 전은 한달에 한번씩 바뀌고 실처럼 가늘게 채 썬 구절판은 '기계로 썰면 손보다 더 더디다.'북한 요리사들이 얼마나 가늘게 채 치는지 놀라워 했었는데, 채썰기는 요리사들에게 당연한 재능인가 보다.
정대기대목과 동행해 나무 우거진 틈에 높게 낮게 자리잡은 6채의 한옥건물들을 보았다. 그는 30여년전 공사 당시 너무도 닦달 당한게 진저리가 나 이후 30년이 넘게 이곳엔 들어와보지 않다가 2006년 이번에 처음 와보았다. "나무들이 많이 컸구나, 집이 파묻혀서 보이질 않네. 그때는 작은 나무들이었는데."
동백헌과 취한당는 똑같이 지어진 50여평 규모의 한옥인데 앞쪽이 정원과 담으로 막혀있어 아주 외진 집 같은 인상을 주었다. 지붕에 오동나무가 자랐다. "나무를 타고 습기가 서까래에 스며들어 금방 썩으니 저런 건 빨리 뽑아줘야 합니다. 소나무라 해도 지붕 위를 덮치는 나무는 지붕이 금방 상하게 합니다. 그래도 30년을 까딱없이 버티고 있는 것 보니 잘 지었네."
온갖 무늬를 아로새긴 담장은 꽃보다 더 화려하고 기와는 정갈했다. 싯귀를 적은 주련 걸린 기둥은 사대부의 풍취를 내려고 했다. 낙선재 문 창호의 조각같은 무늬를 그대로 본뜬 문살, 이중문, 풍경 매달린 처마, 고가구 약간이 거기 있었다. 그런데 마루는 현대식 쪽마루이고 난간을 두른 재목은 한옥용 목재가 아닌 듯 가벼워 보인다. 빈 방에는 교자상들만 많았다. 동행한 원로 화학자 김도심 전 한양화학 부사장이 상에 난 젓가락 두드린 자국을 얼른 알아보았다. '이 요정도 두어 번 왔었던것 같애'했다. 지금은 무슨 공예강습 장소로 이용된다고 했다.
청천당은 박대통령이 좋아했던 집이라는데 별도의 문을 통해 잔디 깔린 넓은 앞마당을 지나 대청 분합문같은 출입문으로 들어가게 됐다. 집 전체에 문과 난간이 조각처럼 이어져있고 집모양이 정교했다. 여기서는 야외파티가 제격인 것 같았다. 누군가의 칠순잔치, 회사 10주년 모임 안내판이 있고 청사초롱이 난간마다 걸렸다.
천추당은 한옥 중 제일 커서 100평은 되는 집 같았다. 긴 마루가 집의 전면에 걸쳐 나있었다. 그 역시 살림집의 인상은 아니었다. 배용준이 여기서 영화촬영을 위한 다도를 배웠다고 했다. 여기서도 점심상차림이 가능한지 활짝 열어젖힌 방안에서는 전문직 여성처럼 보이는 세련된 일행이 다담상을 놓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든 건물마다 공들여 제작한 듯한 현판이 걸려있었다.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도 없고 전부 한자인데 아주 어려운 전서체 같아서 읽기 힘들었다. 집집 마다 나있는 중문밖의 통로는 아스팔트 포장으로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소리없이 지나갔다. 바로 양옆은 바위를 쌓아올린 조경에 여러 가지 나무가 서있고 동백헌 취한당 앞은 숲이나 다름없었다.
깊숙한 골짜기 계곡위에 지어진 팔각정 유하정은 어지간한 아파트 한 채 정도로 넓어보였다. 그러나 콘크리트 난간이며 벽체같은 것이 여기서 제일 덜 섬세한 건축같았다. 수십명이 앉아도 될 방에는 병풍이 둘려있고 밴드시설이 보인다. 가무 한판이 벌어지는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저녁 가까운 시간 악기를 들고 옷을 차려입은 음악인들이 '경호용' 비상계단을 통해 이동하는게 보였다. 도무지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공간같았다.
그 옆의 산언덕에는 꽃들이 피어나고 앵두도 열렸다. 하늘면적이 더 넓어 보였다. 백간 한옥에서 모처럼 점심을 사먹고 산책한 하오는 그렇게 지나갔다. 다시 시내로 들어와 도시에 복귀했다.
경복궁을 중수한 신응수대목은 '잘 지은 한옥입니다. 지금 이런 건축을 새로 하려면 그 당시에 들인 돈만큼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보존할 만한 건축입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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