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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서 80회 생일 맞는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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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병상에서 80회 생일 맞는 카스트로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185> 카스트로의 일생

반세기 동안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쿠바의 혁명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전세계 좌파정치인들의 '교장선생'으로 불리는 피델 카스트로 의장이 오는 13일로 80세 생일을 맞는다.
  
  지난 1959년1월 무장혁명을 통해 쿠바의 최고통치권자로 군림한 후 아직까지도 군 계급으로는 쿠바 육군의 현역 원수(Comandante en Jefe del ejército cubano)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카스트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케네디 대통령 등 10여명의 대통령이 바뀐 미국정부의 끈질긴 견제와 암살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재함을 과시하다 최근 장출혈로 인한 긴급수술로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다.
  
  혁명가로서 전세계 진보주의자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으며 슈퍼파워를 가진 초 강대국 미국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뿜어 대며 중남미 전역에 반미를 주도하던 카스트로도 고령과 병마에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80회 생일을 맞는 파란만장한 피델 카스트로의 일생을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스(Fidel Alejandro Castro Ruz)가 본명인 카스트로는 지난 1926년 8월 13일 쿠바 동부 오리엔떼 주의 비란이라는 지역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던 스페인계 이민자 앙헬 카스트로의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카스트로 가의 기록에 따르면 피델은 카스트로와 루스라는 두 개의 성을 가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가정부출신이었던 피델의 어머니 리나 루스 곤살레스의 처녀시절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함께 부르고 있는 경우다. 피델의 아버지는 첫 번째 부인과의 호적정리가 늦어져 피델이 15세가 돼서야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마치고 호적정리를 하면서 피델의 성을 양친의 성을 따라 카스트로 루스로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앙헬 카스트로는 피델이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남다른 총명함을 보이자 알레한드로(알렉산더 대왕의 스페인식 이름)라고 부르며 세계를 주름잡는 영웅이 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피델은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시절에는 공부보다는 야구 등의 운동을 즐겼다고 한다.
  
  피델이 혁명가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1945년 아바나대학 법대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쿠바의 상황은 정부의 부정부패와 기득권층의 착취 등에 항거하는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정통 쿠바시민들의 당'이라는 정치단체가 태동했다.
  
  1947년 카스트로는 '정통 쿠바시민들의 당'에 정식으로 입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벌이게 된다. 카스트로는 쿠바인들의 정체성 회복과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인 독립, 부패한 친미파 기득권층 정치인들의 추방을 기치로 내걸고 반정부 운동을 주도했다.
  
  아바나 법대생들이 주축이 된 반정부운동을 주도하던 카스트로가 무장혁명으로 투쟁노선을 변경하게 된 동기는 1948년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개최된 제9차 범아메리카대륙 학생연맹총회를 참석하면서부터다. 보고타 총회에서는 '미국의 중남미 지배야욕을 분쇄하자'는 게 주의제로 상정됐다.
  
  보고타에 모인 중남미 대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반미운동을 벌이자는 데 합의하고 이 운동의 로드맵을 마련한 순간, 콜롬비아 인민자유당의 지도자가 암살 당하는 불상사 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콜롬비아 노동자들과 저소득층 일반시민들이 거리로 뛰쳐 나와 과격시위를 벌이게 하는 계기가 됐고 정부군의 발포로 다수의 시위군중이 희생당하는 유혈사태로 확대되었다.
  
  콜롬비아 정부의 무차별한 시위진압에 흥분한 중남미 학생들과 일반시민들의 합세로 이 시위는 콜롬비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콜롬비아 정부는 카스트로를 시위 주동세력으로 지목하고 지명수배를 내리자 카스트로는 가까스로 보고타 소재 쿠바대사관으로 피신한 후 현지외교관들의 도움을 받아 아바나로 돌아온다. 카스트로는 이때 보고타에서 정치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민중들의 힘을 목격했고 민중들의 궐기가 든든한 정치적인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돌아온 카스트로는 당시 상류층 출신이자 아바나대학 동창 이었던 미르따 디아스 발라르뜨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50년 아바나 법대를 졸업한 카스트로는 소외계층과 정치범들을 챙기는 인권변호사로 변신한다.
  
  인권변호사로서 이름을 날리던 카스트로는 1952년 '정통 쿠바시민들의 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을 받아 선거유세를 하던 중 풀헨시오 바띠스따가 이끈 쿠데타 군이 쿠바를 장악,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는 바람에 정치가로서의 꿈을 접게 된다.
  
  군부의 힘을 통해 쿠바를 장악한 바띠스따는 미국과 특권층들의 지원에 힘입어 강력한 정보정치를 펴 반대파들을 탄압하고 자신의 1인 독재체제를 강화, 정치가로서 카스트로의 꿈은 한 순간에 좌절되고 만 것이다
  
  이를 계기로 '정통 쿠바시민의 당'을 탈당한 카스트로는 바띠스따 정권이 헌법을 어겼다며 법률적인 투쟁을 선언하고 쿠바의 헌법기관에 정치활동규제에 대한 유권 해석을 청원한다. 그러나 카스트로의 청원은 기각되고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헌법 기관은 카스트로의 위헌 투쟁을 오히려 위법화한다.
  
  이때부터 카스트로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길은 무장을 통한 민중혁명 뿐이라는 각오를 다졌다. 이후 변호사 업무를 폐업한 카스트로는 바띠스따 정권의 전복을 목표로 지하무장단체 조직구축에 발벗고 나섰다.
  
  각종 개인화기와 탄약 등을 구비한 160여명의 카스트로의 무장세력은 1953년 7월 26일 바띠스따 정권의 주력부대인 몬타카 수비대를 공격한다. 하지만 의욕만 앞세운 카스트로의 무장세력이 1000명이 넘는 쿠바의 정규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실전경험이 전무했던 카스트로의 첫 번째 무장투쟁은 160여명의 동지들 중 135명이 사망하는 비참한 결과를 낳고 실패로 끝이 났다. 천신만고 끝에 생명을 구한 카스트로는 도주 중 붙잡혀 15년의 형을 언도 받는다. 이 재판에서 카스트로는 최후진술을 통해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겨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쿠바 저항세력의 대표주자로 확실하게 자리 매김을 했다.
  
  카스트로의 영향력이 쿠바 내에서 점점 확대되어가자 바띠스따 정권은 카스트로를 멕시코의 정치범 재활센터로 보내게 된다. 멕시코에서 2년 정도를 보낸 카스트로는 정부의 특별사면령의 혜택을 받아 석방된 후 멕시코에 남아 정치범들은 규합, '7월 26일 운동' 이라는 무장혁명군을 조직한다.
  
  몬카다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혁명군 재편에 전력하던 카스트로는 게릴라전의 탁월한 전술과 이론으로 무장한 체 게바라를 만나게 된다. 체 게바라 역시 도탄에 빠진 중남미 민중들을 구하는 길은 무장혁명이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어 이 두 사람은 순식간에 형제 이상의 우의를 다지고 쿠바해방을 함께 결의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또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을 통해 소련정부로부터 무장혁명에 필요한 무기 지원과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던 퇴역장교 알베르또 바죠를 교관으로 삼아 기습작전 훈련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정예화된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쿠바로 잠입, 쿠바전역에 지하세력 구축에 전력하여 점점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쿠바의 전체 도시에 탄탄한 지하무장세력을 구축한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1958년 12월 체 게바라와 까밀리오 씨엔푸에고를 선봉으로 하여 산따 끌라라 전투의 승리로 기선을 제압하고 전국에 숨어있던 지하혁명세력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일어나자 바띠스따 정부군은 전투의욕을 상실하고 줄지어 투항을 하게 된다.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체 게바라의 혁명군은 드디어 1958년 12월 31일 아바나를 함락시켰고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독재자 바띠스따는 1959년 1월 1일 새벽 쿠바를 떠나 망명길을 떠난다.
  
  카스트로의 혁명군에 의해 쿠바가 해방되자 그동안 억압받던 쿠바 전역의 민중들이 쿠바혁명의 상징인 붉은색과 검은색의 '7월 26일 운동'의 깃발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대대적인 환영을 벌였다.
  
  쿠바를 완전 장악한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비상법원 판사출신의 우루띠아 박사를 임시대통령에 임명하고 미국정부 역시 카스트로 정부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1959년 1월 8일 아바나에 입성한 카스트로는 쿠바혁명군 원수에 취임하고 그 해 2월16일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자신들이 지원했던 바띠스따 정권이 몰락하자 쿠바산 설탕수입에 쿼터제를 적용, 경제제재를 본격화한다. 이에 맞서 카스트로는 8억5000만 달러에 달하는 미 기업소유 사유재산을 국유화하고 외국인들의 쿠바 내 농장 소유권한을 제한시켰다.
  
  카스트로의 혁명정부는 또한 쿠바의 모든 산업을 국유화화고 상류층들의 사유 재산을 압류 조치했다. 이 과정에서 100만 명이 넘는, 재산을 몰수당한 바띠스따 정권의 고위관료들과 상류층들이 쿠바를 떠나 미국 마이애미에 정착하여 반카스트로 체제운동을 벌이게 된다.
  
  미국 정부는 이때부터 쿠바 소재 정유공장에서 생산되는 석유판매를 금지시키고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이에 카스트로는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쵸프 서기장과 동맹 관계를 맺고 석유와 군사, 경제지원을 받기에 이른다.
  
  소련은 또 쿠바 혁명정부를 미국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쿠바 혁명정부방위위원회를 발족시켜 대규모 자문단을 쿠바에 상주시켜 미국과의 대립을 본격화시켰다. 바로 코 앞 쿠바문제가 냉전시기에 미소 양대 강대국의 파워게임양상으로 상황이 급변하자 미국정부는 카스트로 제거를 위해 비밀리에 마이애미거주 쿠바출신 젊은이들을 규합, 중앙정보국(CIA)요원들의 지도아래 군사훈련을 시켜 쿠바 침공을 노린다.
  
  1961년 미 중앙정보국 요원들로부터 특수훈련을 받은 1400여명의 쿠바출신 카스트로 제거군대는 피그만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때 미국정부는 자신들의 군대가 쿠바에 상륙하기만 하면 국민적인 환영을 받을 것이라는 착각을 했다. 또한 쿠바 군경도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 않고 투항할 것으로 사태를 오판했다. 하지만 결과는 100여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전원이 카스트로의 혁명군에게 생포되는 참패로 끝이 났다. 그 후 미국은 이들의 지원을 중지하고 미국정부가 이 군대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 이후 대규모 미국 정규군의 침공을 우려한 카스트로는1962년 소련의 군사적인 지원강화를 요구하게 되고 소련은 쿠바방위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쿠바 내에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기지 설치를 서두른다. 이른바 미국과 소련의 쿠바 미사일 사태가 터진 것이다. 미소 양국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제3차 세계 대전 일보직전까지 갔던 이 사건은 이미 잘 알려져 있어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미국과 팽팽한 대립의 각을 유지하면서 혁명을 주도하던 카스트로는 지난1991년 소련연방의 붕괴로 경제적인 지원이 끊기자 국가부도사태를 맞는 등 쿠바경제를 지탱해주던 85% 이상의 시장이 사라져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로 인해 식량과 생필품부족현상에 시달린 카스트로는 남미와 아프리카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카리브연안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추진한다. 이어 유럽연합(EU) 국가들도 카스트로의 지원에 나서고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의 등장과 남미의 좌파정부들의 지원에 힘입어 위기를 넘기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쿠바국민들로부터 추앙받던 인권변호사에서 법전 대신 무기를 잡은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는 수백 번에 걸친 절대 절명의 위기 순간에도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쿠바의 소외계층들을 챙기고 외국기업들과 대지주 사회특권층들의 착취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던 빈민층을 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카스트로의 혁명 성공은 지난 500여 년 가까이 착취와 인권유린으로 얼룩진 중남미대륙에 좌파정부의 바람을 몰고 와 중남미 민중들이 외세와 군부통치로부터 해방되는 주춧돌 역할을 했다고 현지역사가들은 입을 모은다. 아메리카대륙에서 카스트로야 말로 시몬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 장군을 이은 '해방영웅'이라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쿠바 해방의 영웅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관계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쿠바를 해방시킨 건 체 게바라였지만 카스트로가 오로지 쿠바혁명만을 고집했다면 체 게바라는 중남미 전체 민중혁명을 꿈꿔왔다는 게 서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 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체는 개인의 이익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국민 전체의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을 주도해왔으나 권력화되는 카스트로 형제의 독주체제에 약간은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절대권력은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속설을 입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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