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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은 평화와 존엄에 대한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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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은 평화와 존엄에 대한 화두이다

[황새울에 평화를! 릴레이 기고] 공선옥 '시궁창에 처박힌 인간의 존엄'

대추리 도두리는 섬처럼 보였다. 섬 안에 갇힌 사람들. 농부가 농사철인데도 농토에 나가지 못하면 그것이 갇힌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들은 날개 꺾인 새 같았다. 농부가 농사를 짓지 못하면 날개 꺾인 새와 무엇이 다르랴.

누군가는 말한다. 그곳 사람들이 그처럼 반대하는 이유는 보상금 더 받으려고 그런다고. 그 말은 그곳 사람을, 아니 사람 자체를 모욕하는 말이다. 농부는 그저, 제 농사짓던 땅에서 농사지으며 살다 그 땅에 묻히기를 바랄 뿐이다.

또 누군가는 말한다. 한번 결정된 국가정책에 기를 쓰고 반대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한테 묻고 싶다. 당신에게 어느 날 갑자기 국가정책이니 보상금 받고 당신이 살던 곳에서 떠나라고 한다면 당신은 아무 소리 않고 보상금만 받고 떠날 수 있느냐고. 더군다나 그 살던 곳이 첫 번째도 아니고 세 번째로 쫓겨나야 하는 땅이라면.

내가 대추리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건, 바로 이 나라는 결코 '평화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날 아침 신문에서 나는 일본 교토의 평화로 가득한 집들의 풍경을 적은 글을 보았다. 교토는 가보지 못했지만 아주 오래된 도시라고 들었다. 오래된 것들이 새것들로 인해 훼손되지 않도록 오래된 것들을 지키는 것. 나는 그것이 평화라고 여긴다.
▲ <대추리 아메리카> 연작 중 일부. 설치미술가 최병수씨 작품 ⓒ황새우울

아이 책상 유리판 밑에 평택에 있어서 평화란 군부대가 철수하고 농사짓는 것이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 있다. 말 그대로다. 교토의 평화가, 오래된 것들을 새것들로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라면 평택의 평화란 지금 그곳에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그러하도록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미군이 있어야만 우리나라의 평화가 지켜진다고. 실지로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모르겠다. 정말 우리나라의 평화는 미군이 있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미군이 있어서 우리나라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고 치자. 어쩐지 아슬아슬한 평화다. 미군이 쏙 빠져나가면 북한이 쳐들어오고 이젠 소련이 아닌 중국이 넘어 들어올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대추리에 가서 확실하게 느낀 건, 이런 식으로 미군이 주둔하고 이런 식으로 미군기지를 확장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슬아슬한 평화, 동북아의 균형추 노릇을 미군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하는 것이 첫째 관건이긴 하지만, 아직 우리에겐 그럴 힘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쳐도 대추리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면, 우리나라 정부는 부모 말 안 들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공포를 지닌 '어린애'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유를 좀 더 구체화하자면 너, 아빠 말 안 들으면 너 죽고 나 죽어 임마, 하면서 동생을 다그치는 형 같다고나 할까. 대추리 말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저건 그저 남의 집 일이다, 하는 식으로 구경만 하는 것 같다. 형과 동생이 아빠의 그늘 밑에 있다고 치자. 그러나, 아빠가 동생에게 폭력을 가하면 형은 아빠의 폭력성을 시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가 어쩐가는 모르겠지만 미군이 있어 우리나라의 평화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쳐도 지금 평택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면, 너희들의 평화를 유지해주고 있으니, 그 대가로 너희들 좀 괴롭혀도 돼,라고 하는 것만 같다.

결과적으로 힘없는 자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힘 있는 자들이 가하는 괴롭힘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럴 때 그런 식으로 생존한다는 것은 결코 존엄하지가 않다. 산다는 것이 모욕이다. 살려면 모욕도 참아내야 한다는 것인가? 때마침 치밀어오는 욕지기는 다만 힘없는 자의 푸념일 뿐인가. 아, 존엄, 존엄은 어디에 가 있는가. 어느 시궁창에 처박혀 있는 것인가. 이 땅, 이 나라 현실에서 존엄한 삶의 방식,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가?

지금 구속되어 있는 김지태 대추리 이장의 어머니를 만났다. 70노구의 할머니는 말했다. "우리 동네까지 미군기지 된다고 자기들끼리 결정해 놓고는 어느 날 갑자기 보상금 줄 테니 나가라는 거야. 나 시집와서도 그랬어. 어느 날 갑자기 저녁답에 '미국놈'들이 동네에 막 '쳐들어와서' 나가라는 거야. 아무 소리도 없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부르도자 밀고 와서는 우리 밥 먹고 있는 것 뻔히 보면서도 측간부터 때려부시잖아. 그래서 두 손을 뺨에 대고 하룻밤만 자고 나간다는 시늉으로 사정사정해서 겨우 이 마을로 보따리 싸갖고 들어온 야. 그런데 지금도 그러는 거야.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미국놈도 아닌 우리나라 정부 사람이. 누가 돈 달랬나? 무엇보담도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다고 국회의원이든, 장관이든 대통령이든 누가 와서 주민들한테 가만가만 설명이라도 했나? 우리는 그것이 분한겨. 우리를 자기들 맘대로 헐 수 있다고 생각하구서 하는 짓거리가 아니구 뭣이여, 이게. 사람을 깔보는 거여. 우릴 농사꾼이라고 무시허는 처사여, 이게."
▲ <다시 대추리>. 설치미술가 최병수씨 작품 ⓒ황새우울

요체는 그렇다. 무엇이든지, 관에서 결정하면 주민들은 거기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유구한 폭력이다. 누가 원했나? 주민들이 원했다고? 서울 한양주택건도 그렇다. 누가 강북 뉴타운 개발인가 뭔가를 원했나? 나는 당신들을 발전시켜 주려고 하는데 왜 거부하느냐고 윽박지르는 것. 돈 좋지 않느냐고, 가난한 서민들의 가장 약한 곳을 건드려가면서 꼬드기는 비열성. 급기야는 죄인 취급을 하고 잡아가는 것. 관 사람들은 그것을 사업진행이라고, 좀 더 그럴싸하게 행정집행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윽박지름, 폭력에 다름 아니다. 민들이 관을 만들었지만, 관은 민 위에서 군림한다.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아침 햇살이 만신창이가 된 대추리 앞들을 내리비추고 있다. 큰대(大), 가을추(秋). 들이 넓어 가을이 풍성하다 하여 붙은 이름 대추리. 그러나, 대추리 앞들은 지금 갈가리 찢겨져 있다. 굳이 농심이 아니더라도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지고 철조망이 쳐지고 곳곳에 초소를 설치하고 군인들과 경찰로 에워싼 대추리 앞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차마 바라보기가 힘들만큼 처연하다.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농로를 휘저으며 사방군데서 군인들이 악을 써가며 아침구보를 하고 있다. 이 시간쯤이면 이 마을 저 마을 농부들이 나와 논 물꼬도 보고 풀도 한 짐 베고 어이, 마늘 소출이 좀 어떤가? 아침인사도 나누고 할 참이다.

그러나, 지금 웃통을 벗어젖힌 군인들이 철조망으로 가로쳐진 논두렁 사방군데를 휘돌면서 악악거리고 있다. 외곽들엔 전경들의 초소가 있다. 전경들 초소는 마치 모내기할 때 그늘막 하려고 쳐놓은 차일 같다. 그 차일 밑에서 전경들은 교대로 아침을 먹고 있다. 세 명씩 2조다. 세 명이 나란히 정좌하여 식판으로 배달되어온 아침을 먹고 그들이 다 먹고 나서는 또 뒤에서 부동자세로 서있던 세 명이 앞사람들처럼 그렇게 절도 있게 밥을 먹는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물도 절도 있게 나눠먹고 소변은 초소를 벗어나와 논두렁 아무곳에나 '갈긴다'.

군인 초소는 전경초소 안쪽에 있다. 군인들 초소는 내보기엔 공포스럽지만 누군가에게는 만족스러울 정도로 모양새가 그럴싸하다. 군인들 또한 전경들처럼 그렇게 교대로 아침을 먹는다. 시위대를 막으려고 집단으로 와 있는 전경들은 그들을 싣고 온 버스에 몸을 기대고 논두렁에 퍼질러 앉아 밥을 먹고 식수차의 꼭지를 틀어 설거지를 하고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한다. 그들 중 몇몇은 대추리 마을 빈집에 들어가 그 집 뚤방에 앉아 쉬는 사람도 있다. 얼굴에 여드름자국이 아직 가시지 않은 앳된 총각들은 뭘 물어도 통 대답을 안했다.
▲ <생명 그리고 평화> 설치미술가 최병수씨 작품ⓒ황새우울

대추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 대추리에 들어와서 빈집에 깃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 시간에 아침을 먹는다. 밥을 하고 텃밭에 기른 아욱으로, 전에 살던 사람들이 두고 간 장독대에서 퍼온 된장으로 아욱된장국을 끓여 먹는다. 아직 대추리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고 앞으로도 결코 주민등록 이전을 할 생각 없다는 한 할머니는 텃밭에서 기른 상추를 한아름 뜯어가지고 마을로 들어와 있는 젊은 사람들한테 갖다 주면서 그런다. "저기 논두렁에서 밥 먹는 애기들은 뭐에다 밥을 먹는가 모르겠네. 갸들한테도 좀 갖다 주면 좋겄는데." 하기사 논두렁에 있는 '애기'들은 할머니에겐 손주만한 '애'들이다.

이게 이 땅의 평화다. 우리나라의 평화다. 다같이 밥 먹고 사는 것. 나 밥 먹을 때 너도 밥 먹고 내 집 밥 먹고 살 때 이웃집도 밥 먹고 사는 것. 내 집 걱정될 때 이웃집도 걱정되는 것. 그리 걱정해주면서 다같이 밥 먹고 사는 것. 그러나, 지금, 밥을 먹고 살긴 살되 그 밥을 넘기는 것이 영 편치 않다. 밥 먹는 자리가 편치 않다. 손주 같은 애들이 이슬도 걷히지 않은 논두렁에서 배달 식판밥을 몇 날 며칠째 먹어야 한다. 그런 애들 바라보며 대추리 도두리 어른들은 오늘도 밥은 먹되 편한 밥이 아니다. 밥 먹고 살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밥도 밥 나름이다.

텔레비전에 보니 대추리 도두리 어른들더러 이틀 안에 지난해 심은 농작물을 거두어가게끔 특별 '배려'가 있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 '배려'에 대추리 도두리 농부들이 감사의 염이라도 가지기를 바랐던 것은 설마 아니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다 뺏어놓고, 조금 남은 것은 너 가져도 좋다,라고 하는 처사에 다름 아니라고 나는 본다. 자진출두한 이장을 댓바람에 구속해놓고 농작물 수확의 기회를 준다느니, 의료봉사를 한다느니,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다. 야욕을 감추고 겉으로 웃는 비열함, 이 또한 폭력이다.

자, 이제 다시 한번 관건은 평화와 존엄이다. 비열성 앞에서 나는 나의 존엄을 지켜야 하고 폭력 앞에서 나는 나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 오늘, 평택은 바로 그것이다. 비열한 폭력 앞에서 평화와 존엄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몸짓, 절박한 저항에 다름 아닌 것이다. 평화를 원하고 존엄을 지키고자 한다면, 당신이 정말 삶의 방식이 평화롭기를 원한다면, 생존하는 방식이 존엄하기를 원한다면 지금 평택에 가보라. 거기, 평생을 흙만 만지고 살아서 몸도 마음도 다 흙 같기만 한 우리의 '오래된' 농부, 우리의 부모들이 말없이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게,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오래 힘들었던 당신을 끌어안아 줄 것이니. 그렇게 몸으로 평화와 존엄 고갱이를 가르쳐 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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