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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성녀, 에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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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성녀, 에비타

김영길의 '남미리포트' <168> 페론 주치의의 충격고백 (7)

'아르헨티나를 최고의 복지국가로... '

그렇다면 아르헨티나 국민들로부터는 '성 에비타' 라는 존경과 '국모'라는 찬사를 함께 받고 있지만 해외에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무참하게 왜곡됐다는 에바 페론의 진정한 삶의 진실은 무엇인가?

마리아 에바 두아르떼 페론(María Eva Duarte de Perón)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에바는 1919년 5월 7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00Km 지점에 위치한 로스 똘도스라는 작은 농장지대에서 목장관리를 하던 후안 두아르떼의 1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에바의 아버지 후안 두아르떼는 치빌꼬이라는 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문의 후손으로서 보수파 정치권을 추종해 왔으며, 큰 목장의 소유주이기도 했다. 그러나 급진당(UCR)의 집권으로 가문이 몰락하자 로스 똘도스 소재의 한 목장에 관리인이 되면서 두 집 살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 5세 때의 에비타. 태어날 때부터 연예인 기질을 가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페론 재단

7살 때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에바는 삯바느질을 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교육을 받으며 영화배우의 꿈을 키웠다.

에바의 언니였던 에르민다가 쓴 전기 "나의 동생 에비타"에 따르면 에바의 언니들은 부친 사망 후 우체국 직원과 학교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오빠는 식료품가게 점원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갔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막내였던 에바는 8살이 돼서야 비로소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에바의 연예인적인 기질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 학교의 문화행사나 연극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또 지방 문화영화 등에도 출연해 어려서부터 배우로서의 자질을 인정받기도 했다.

에바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배우들의 사진을 모으는 것을 취미로 삼고 동네극장을 기웃거리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이 때쯤 에바 가족은 후닌이라는 소도시로 이사를 가 언니가 지방학교 교사로 취직을 했고 오빠는 약국에서 일자리를 구해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을 누렸다.

이 무렵 중학과정을 마친 에바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상경할 것을 고집한다. 후일 에바는 이에 대해 "그 당시 나는 대중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것을 즐겼고 대중을 위해 무언가 위대한 것을 이루기를 바랬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가난에 찌든 유년생활을 보냈던 그녀가 아르헨티나를 세 계최고의 복지국가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어려서부터 다졌다는 설명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에바는 바로 코미디극단에 입단, 희극배우 생활을 시작 했다. 에바의 초기 부에노스아이레스 생활은 어머니의 먼 친척이던 군 장교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어린 딸의 안부가 궁금한 에바의 생모 후아나 이바르구렌은 몇 번에 걸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올라와 어린 딸이 연예인의 꿈을 버리고 낙향하기를 종용했지만 에바의 의지는 확고했다.

에바가 연예계에 첫 출연을 했던 1935년 3월 28일 당시의 부에노스 주요 일간지 연예기사에는 "에바가 비록 단역이었지만 아주 짧은 시간에 자신의 역을 아주 잘 소화해내고 있다"는 기사를 볼 수가 있다. 시골 태생인 16살의 어린 소녀가 배우로서의 자질을 처음부터 인정 받았던 셈이다.
▲ 에바를 출세시킨 아구스띤 마갈디. 그는 체 게바라에게 기타를 가르치기도 했다. ⓒ페론 재단

그 후 에바는 이 극단을 따라 아르헨 전국순회 공연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연예계는 코미디가 아니면 비극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일단 연기력을 인정받은 에바였지만 비극적인 역보다는 오히려 코미디를 선택했던 것이다.

얼마 후 다시 부에노스로 돌아온 에바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으며 유명 잡지의 표지모델을 비롯해 영화에도 출연하게 된다. 18세에 이미 영화배우로 연예계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에바는 몇 번의 주연 배역을 맡기도 했지만 영화배우로서는 크게 성공을 하지 못했다.

에바가 신인 코미디 배우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 건 까를로스 가르델 이후 최고의 탱고가수라는 평가를 받았던 아구스띤 마갈디(1903~1938)와의 로맨스가 언론에 공개되면서부터였다.

마갈디와 에바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34년부터 팬과 인기가수의 사이였다가 나중에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발전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근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들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마갈디는 에바를 자신이 출연하고 있던 '라디오 벨그라노'의 음악프로에 가수로 데뷔시켰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아 나중에 '백금'이라는 연속극에 출연하도록 교섭을 했고 에바는 이 프로를 통해 성우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에바는 '라디오 아르헨티나'와 '라디오 미뜨레' 등에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성우와 아나운서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극빈자들의 성녀가 된 에비타'

영화배우의 꿈을 접지 못한 에바는 성우와 아나운서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가끔씩 영화계의 문을 두드렸다. 현지 역사학자들은 만일 에바가 페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영화배우로도 대성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940년대 초부터 유명 아나운서와 성우로 아르헨 상류사회의 저명인사가 된 에바는 동료 성우와 아나운서들을 규합해 조합 형식의 조직체를 결성하고 회장에 추대됐다. 에바가 이끈 연예인조합은 빈민층들과 불우청소년 돕기 자선사업을 주요 활동으로 하면서 상류층 귀부인들과 기업주들의 자선사업 참여를 유도했다.
▲ 1938년부터 성우와 아나운서로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에바. ⓒ페론 재단

에바가 상류층에 매몰차고 가차 없었다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다르게 에바는 이들의 후원이 필요했고 결국 이들의 도움에 의해 에바는 전국의 빈곤층들로부터 성녀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현지 학자들은 "제2의 에비타라고 불리는, 아르헨의 대표적인 기업 로마 네그라사의 뽀르따밧 여사가 대표적인 예"라고 지적했다. (뽀르따밧 여사에 대해서는 필자의 <남미 리포트> 2005년 4월 30일자 '돈보다 명예 택한 제2의 에비타'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페론 대령과 운명적인 만남의 장소가 된 루나파크 실내체육관(세계 권투 타이틀매치 경기장으로 유명하며 페론이 즐겨 찾던 곳이기도 했다)도 이런 사업에 자주 이용되던 곳이었다. 에바는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자선행사를 주도했고 당시 복지부 장관이었던 페론이 이 행사에 주빈으로 참석했던 것이다.

첫 부인을 사별하고 로마에서 사귄 연인도 행방불명되어 외롭게 지내던 페론은 에바의 미모와,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에 매료되어 장관과 민간구호사업 책임자 간의 관계 이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에바를 처음 본 순간을 페론은 이렇게 회고했다." 루니파크에 들어선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맞은편에 서 있는 여성은 내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지오바나였기 때문이었다."

페론은 에바를 처음 보는 순간 자신이 로마에서 사귄 연인 지오바나 델 피오리가 아르헨티나로 온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페론이 에바에서 처음부터 호감을 갖고 접근한 이유이기도 했다.

에바는 페론 대령과 20년 이상 나이차이가 나는 점을 의식해 처음에는 복지부 장관과 빈민구호단체 책임자 간의 협조 차원의 만남을 넘어서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페론에게 끌리게 된 건 한마디로 서로 코드가 맞았던 것이다.

페론은 노예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있던 원주민들과 라빰빠 농장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주도했고, 에바는 전국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빈민구제에 앞장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함께 바꿔보자'는 데에 의기 투합을 하게 된다.
▲ 전국의 극빈층들이 보낸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고 있는 에바 페론. "에바는 이 업무 때문에 건강을 망쳤다"고 바레이로 박사는 주장했다. ⓒ페론 재단

에바는 그 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는 라디오프로를 진행하면서 불우청소년들과 나이 많은 여성근로자들을 돕는 사업에 발벗고 나섰다. 노동·복지장관에 부통령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둔 에비타는 배고픈 사람을 방치해 둘 수 없다며 매일 오전 7시에 출근, 정부관료들과 노동자들을 면담하고 각처의 빈민들이 도움이 필요하다며 보내온 1만여 통의 편지들을 읽고 일일이 답장과 함께 필요한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

이때부터 불우청소년들과 빈민촌 노인들 사이에서는 에바를 가리켜 '성녀'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편지로 써보내면 이를 바로 마련해주는 에바의 구제사업은 소외계층들과 빈민들에게는 '신의 도움'이라는 감동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지금도 아르헨 노총본부(CGT)건물 에비타 기념관에 가보면 군정 당시 에바와 페론의 흔적 말살작전에도 불구하고 당시 에바가 받은 수만 통의 편지들이 전시돼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시골아이들의 "인형을 가져보는 게 소원"이라는 소박한 꿈에서부터 "어린 자식과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재봉틀 한 대만 보내 달라"는 한 미혼모의 애절한 사연이 있는가 하면 "누구나가 자유롭게 치료와 요양을 할 수 있는 병원이 필요하다"는 벽지 촌로의 소원 등 갖가지 사연들이 간절한 기도처럼 빼곡히 적혀 있다.

이들에게 에바는 그야말로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는 '살아 있는 성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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