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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잘못된 계산은 내 책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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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잘못된 계산은 내 책임이 아니다

[황새울에 평화를! 릴레이 기고] 홍기돈 '실종된 민주주의'

한 달 전쯤이다. 연구소 모임이 끝나 광화문 거리 집회에 간다고 하니 선배 평론가가 묻는다. 그분은 사안을 바라볼 때 나와 관점이 거의 비슷한 편인데, 이때는 다소 차이가 느껴졌다.

"홍 선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구호가 옳다고 생각해요? 그럼 미군을 서울에 남겨두는 건 괜찮다는 거요?"
"에이, '이전 반대'가 아닙니다. '확장이전 반대'죠."
"그러면 서울의 미군들더러 지금의 평택미군기지 부지 안으로 들어가라는 건가요?"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제 주장은 그렇습니다."
"그게 가능하기나 합니까? 그러면 미군은 당연히 서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거 아니요? 그냥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게 목표도 분명하고,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제대로 맞서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음에 드는 구호를 내건다고 세상이 그렇게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국민들을 설득하며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게 전술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럼 공간도 나눠주지도 않으면서 미군더러 그냥 이전만 하라는 주장에 누가 동의할까요? 설득력이 없지 않나요?"
"그건 대통령이 나서서 답변할 일이지 문학평론가의 몫은 아니죠. 제 원고료 항목에는 그런 게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미군들은 전략적 유연성에 따라 서울에 남아 있으라고 해도 대추리·도두리로 분명히 갈 겁니다. 일단 '확장이전 반대'를 주장하면 되는 까닭이죠."
▲ 평택 미군기지 철조망에 걸린 한 시민사회단체의 현수막 ⓒ프레시안

이런 대화가 오가고 나니 선배 평론가는 마지막에 허허 웃어 버린다. 내가 무턱대고 우기는 것으로만 여기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논의는 여기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는 여기서부터 결정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싸고 정부는 대화와 설득, 타협의 과정을 배제해 버렸다. 다만,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에게 돈 몇 푼 줄 테니 나가라는 통보를 일방적으로 내렸을 따름이다.

국가주의에 찌들지 않은 '건강한 국민'이라면 이런 상황에 처해서 당연히 따지지 않겠는가. 대추리·도두리의 주민들이 그러했다. 자신들이 전생(全生)에 걸쳐 그곳을 일구었다는 한탄과 탄식을 쏟아냈고, 삶의 터전에서 내쫓겨야 하는 이유나 제대로 들어보자고 목소리를 모았다. 내가 보기에 이건 당연한 요구였기에 나 또한 당연히 그들 편에 섰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어떠했나. 군대와 경찰병력을 투입하였다. '대통령이 나서서 답변할 일이지 문학평론가의 몫'은 아니라는 나의 판단은 여기서 빚어진다. 주한미군 기지를 확장하려면 그에 따른 타당한 논의와 절차가 필요한데 이게 완전히 생략되었으며, 이건 문학평론가인 내 책임이 아니라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그래, 대추리·도두리를 고립시키고 언로(言路)를 통해 상황을 왜곡하는 것이 능사인가. 노무현 대통령이 공부한 '유신헌법'에는 어떻게 나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민주주의에서는 이러한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풀어가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 대추리 주민들 ⓒ 프레시안

참여정부가 나서서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을 금전의 노예로 매도하는 장면에서는 상당한 분노를 느꼈다. 나중에는,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비루하고 옹색한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그리고 주민들이 불순한 세력의 선동에 넘어갔다고 왜곡하는 데 대해서도 조소를 금치 못했다. 주민들의 아픔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그렇게도 불순한 것인가. 민주주의는 증발하고 정치적 술수만 남은 꼴이다.

노건평 씨처럼 농사를 짓고 있으므로 관점에 따라 '시골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노무현 대통령 특별기자회견 발언에서)이라고 무시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내가 접한 대추리·도두리의 주민들은 남의 말에 쉽게 현혹될 만큼 그렇게 어리석어 보이지 않았다. 거대신문들이 참여정부의 입장을 무차별적으로 지원사격하는 것도 탐탁치 않았다. 최소한의 낯짝이라도 있다면, 권력을 나눠가질 때 참여정부와 거대신문은 그 공허한 싸움을 그만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초록은 동색이면서 무슨 싸움질을 그리 요란하게 하느냐는 말이다.

국가는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립한다. 여러 가지 해악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국가는 쉽게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대추리·도두리의 문제는 이제껏 보여주었던 참여정부의 무개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계기이기도 하다. 몇 가지 장면을 보자.

2002년 대선 기간에 신효순·심미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이회창, 노무현 후보에게 성명서에 서명을 제안한 바 있다. 이회창 후보가 긍적적인 답변을 했던 반면,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은 성명서로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면서 거부했다. 대통령이라면 자국민의 생명이 걸린 일을 무엇보다 우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대통령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비유컨대 '대통령 전용기를 구입한다/못한다' 따위의 문제와는 층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째 여기에 대해 그리 무감각할까.

김선일 씨가 무장단체에 잡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의 또 다른 입인 유시민 국회의원은 아주 냉정하게 발언했다. "사람 하나 잡혀갔다고 정책을 바꿀 국가가 어디 있느냐." 무장단체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김선일 씨를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발언으로 들렸는데,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솟아나는 것일까. 나는 그의 눈먼 자신감/승부욕을 보며 경악했다. 국가의 존립 근거를 무참하게 허무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대통령의 최측근이 할 소린가. 요즘 한미FTA 협상 강행에서 보여주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신감/승부욕도 비슷하게 다가온다.

나는 공권력을 투입하여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려 들었던 '부안 항쟁'을 기억한다. 여기에 대화와 설득은 없었다. 그게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주의다. 노동자가 분신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일갈했다. "분신으로 투쟁하던 시대는 지났다." 검사들과는 대화를 해도 노동자들과는 대화를 않겠다는 것이 '참여'정부의 기본 노선이다. 참여정부 들어 사회적인 양극화가 괜히 극심해졌겠는가. 대통령의 생각은 많이 다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문제는 국민들의 수준이 아니라 정권의 실력과 왜곡된 민주주의의 이해에서 발생하고 있다.
▲ 청와대 앞에서 단식 기도를 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를 격려하기 위해 방문객들이 가져온 그림과 인형들. ⓒ 프레시안

"조금 기다려 보지요. 현재 돌아가는 상황으로 가늠하건대, 아마 선배님께서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긴 갈 겁니다. 이 사안은 한미FTA 협상과 이어질 수밖에 없을 테고, 이쯤 되면 스크린쿼터를 매개로 영화인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게 될 겁니다. 작가들도 나서게 되겠지요. 정태춘 씨가 음악인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할 테고요. 대중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계산입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일방적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FTA 협상 문제가 중요하게 떠오를 것이며, 이번 기지이전 문제에서 드러났던 굴욕적 내용과 과정 또한 같은 맥락에서 논의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진보 진영이 제대로 분위기만 이끌어갈 수 있다면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도 다시 살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일단 그때까지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고민하는 게 나을 성싶은데요. 그래도 상황이 안 좋으면 이 땅 국민들의 팔자지 우리만 나서서 무엇을 어쩌겠습니까?"

선배 평론가와 그런 얘기를 나눈 지 이제 한 달여 지났다. 지금까지는 나의 계산이 그리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가 않다. 6월 13일 신효순·심미선의 4주기가 토고와의 축구로 인해 백지처럼 잊혀지는 상황이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혹시 월드컵이 끝나면 무슨 얘기가 나올까. 4년 전에도 그러했으니 일말의 기대를 가져본다.

그래도 분위기의 별다른 반전이 없다면? 이 땅 국민들의 팔자지 내가 어떡하겠나. 나의 원고료 항목에는 거기에 대한 책임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나의 능력은 겨우 이 정도까지밖에 안 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는 깨어 있는 민중들이 나서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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