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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에 대추나무를 심자

[황새울에 평화를! 릴레이 기고] 김규성 '다산(多産)과 번창의 상징, 대추'

저녁 후

어머니를 부축하여
오 일팔 자유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내 평생 오늘처럼
오래 한 여자의 손을 잡아본 적 없었다

-졸시 「어머니」전문

어쩌면 이 시는 짧고 담백한 문맥만으로는 모처럼 만찬 후의 여가를 누린 뿌듯한 모자지정보다도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저질러 온 불효의 회한이 더 어울리는 한 편의 흔한 사모곡으로 가볍게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뼈만 남으신 손과의 뜨거운 악수, 즉 "평생에 걸쳐 가장 오래 잡아본 여자의 손"을 허락해준 산책로는 다름 아닌 5·18공원, 그것도 "5·18 자유공원"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저녁을 배불리 먹은 후, 어머니의 손을 꼭 부여잡고 공원을 산책하며 흐뭇해하는 평범한 시민의 일상적 자유와 평화, 그 소박하지만 소중한 기본권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세상이야말로 오월 정신의 진정한 모습이자 귀결이어야 한다는 뜻에서 시를 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굳이 "5·18 자유공원"을 그 배경으로 한 것은 다분히 오월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되새기기 위한 장치다. 그러기에 처음에는 제목도 오월로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가장 오래 잡아 본 한 여자의 손"이 지시하는 모성으로의 회귀야말로 한결 보편적 의미의 확장을 자연스럽게 거둘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어머니」로 했다.
▲ ⓒ 프레시안

거대담론의 궁극적 착지는 미시담론이어야 하고, 미시담론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서 복무할 때만 그 진정성이 역사의 추인을 받을 수 있다. 해방 이후 줄곧 우리의 화두이자 당면과제이던 조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의 구현 등 거대담론은 국가의 기층을 이루는 일반 민중이 저마다 삶의 터전에서 일상적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 미시담론을 열매로 할 때만 그 논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거대담론은 잠에서 덜 깬 미시담론을 부추겨 구호나 깃발로 이용하고는 교활하게 배반하며 끊임없이 거대담론을 복제해 왔다. 조국, 민주화, 사회정의 등의 거대담론은 대추리 같이 평범한 마을의 소박한 일상적 미시담론을 보호하고 확장하는 데 그 진의가 있음에도 그것을 시류와 편의의 산물인 법의 이름으로 짓밟고 외면하는 것처럼 말이다.

생명사상이나 환경운동의 진면목이자 효시인 노자의 무위자연은 오늘에 와서 더 유효하다. 파괴될 대로 파괴되고 변형될 대로 변형된 자연환경은 장시간의 휴식이 필요할 만큼 지쳐있다. 중증의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 역시 휴식년에 접어든 산중의 안정과 휴식이 필요하듯이 지혜의 보고(寶庫)인 자연의 품속에 고이 담가온 영혼의 눈과 귀가 열리지 않고서는 사물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없다.

고향은 무한 질주를 탐하는 인류의 원심력에 대한 견제구이자 구심력이다. 까맣게 전생의 기억을 닫고 살아가는 인류에게 실낙원의 향수를 돌이켜 본연과 궁극을 되찾아 주는 원시회귀의 젖줄이며 자아 회복의 지름길이다. 발가벗고 자란 자신의 진면목이 지문처럼 각인 돼 있는 한 인격의 성소(聖所)다. 다시는 더럽힐 수 없는 순진무구를 지향하는 순수여행의 지도다. 무엇보다도 고향은 어떤 언어로도 대체할 수 없는 모국어의 산실이자 저장고이다. 날마다 천일야화가 넘실거리는 신화와 전설, 그리고 깨알같은 담론의 곳간이다.

그러기에 작은 샛길 하나를 새로 낼 때도 들풀, 개미집, 거미줄, 새 발자국 등 무수한 시간과 공간적 인연들이 파괴당하고 단절의 아픔을 겪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역사와 환경의 무참한 파괴일 수밖에 없는 국토의 손질에는 장기적 안목에 의거한 합리적이고도 치밀한 손익 계산이 수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평택 시위대" 중 단 몇 사람이라도, 대추리 어느 한 구석 발길이 머물지 않은 곳이라곤 없는 평생의 둥지에 조상 대대로의 뼈를 묻고, 당연히 그 곁에 자신도 묻히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어떤 구실이나 명분으로도 그 열망을 제어할 권리가 없다. 조국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면면히 민족적 전통을 이어 온 토착민의 절실한 존재가치가 보호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
▲ 경찰과 군이 깊게 골을 파고 그 안에 철조망을 집어 넣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 프레시안

고향이 있기에 비로소 끈끈한 사회적 정서가 가능한 이유는 고향이야말로 곧 조국의 핵심이며, 모국어이며, 민족 고유 정서이듯 생명체에 있어서 최고의 진정성이요 불가침의 존엄이기 때문이다. 거주 이전의 자유 못지 않게 붙박이 텃새와도 같은 주거의 자유 또한 국민의 우선적 기본권이라는 법률 상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실향(失鄕)은 곧 조국과, 모국어와 민족 고유 정서의 상실이기에, 언제인지도 모르게 관습적으로 내려져 온 역사의 닻을 차마 옮길 수 없는 대추리 사람들에게 대추리는 절박한 생존의 현장이자 최후의 주소에 다름 아닌 것이다.

진리의 거처(居處)가 비근한 평범에 있듯이 민주주의는 다수의 평범을 지향한다. 지극한 평범이 그 주소이고 텍스트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이 제 성에 차는 일터에서 땀 흘린 만큼 누리고 사는 세상이면 더 바랄 게 없다. 민주주의는 일반적 상식이 통하는 사회 이상(以上)의 이상(理想)은 요구하지 않는다. 자유와 평등이 크게 갈등하지 않고 소통하는, 더불어 살되 개인의 사생활이 살뜰히 존중받는 그런 세상이면 만족할 따름이다.

군(軍)의 존재는 국민이 저마다의 보금자리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 생명과 재산을 지켜 주는 보루다. 한편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지각 있는 지휘관은 적국의 유물과 유적조차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보고 민간인의 생명 못지 않게 소중히 보호해 왔다. 그런데 하물며 누대에 걸쳐 조성된, 조국의 살아 있는 유산이자 역사이며, 전통과 민족혼의 박물관인 부족국가(조국의 기초)를 전시도 아닌 평시에 군사기지로, 그것도 언젠가는 떠나야 할 외국군의 군대로 바꾸려들다니!

그동안 행정편의주의나 졸속한 개발논리에 의해 얼마나 숱한 조국의 진면목과 모국어와 고향이 도륙돼 왔던가. 어쩔 수 없이 용산기지를 한반도 어딘가에 대체할 운명이라면 대추리보다 인적이 드물고 주민의 저항이 덜한 곳을 애써 찾아보았어야 하지 않은가.

완전한 자주독립을 기하려면 외국 군대의 철수는 필수적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멀쩡한 자주국가에 외국군이 버젓이 주둔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는 치욕이라는 데도 내심 동의할 것이다. 그러기에 하루속히 우리만의 자주국방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적 대 명제임은 새삼 들먹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대내외적 여건이 아직은 전쟁의 불안과 위협이 상존하는 엄연한 현실이기에, 당분간은 그 숙명적 과제를 점진적으로 풀어나가는 단계적 과정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치자.

그러나 그 마땅찮은 필요악이 세계 평화와 자유민주의 수호를 위한 국가 간의 동지적 협정에 기인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국민 대대수가 진정으로 동의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한시적 공조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미국군의 주둔이 공산주의의 무력적 위협으로부터 자유와 평화 원칙에 충실한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이데올로기적 거대담론을 근거로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 비추어지는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은 미국적 자본주의에 충실한 선택된 소수 기득권 층들의 축재와, 권위와, 세습적 계급 독점을 보장하는 일방로일 뿐, 진정한 조국의 품으로부터 철저히 배반당하고, 소외되고, 절망을 곱씹는 대다수 민중의 미시담론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하루 속히 자유와 평화의 자주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 조국의 선결 과제인데도, 국민 평균치의 수십, 수백 배의 몫을 가지고도 더 많은 몫을 챙기려 혈안이 된 기득권 세력들이, 최소한의 생계도 지탱할 수 없어 목을 매는 자살 증후군을 들추어대며 갈수록 멀어지는 사회의 양극화를 질책하고 걱정하는 웃지 못할 희극이 연출되고 있는 조국의 암담한 현주소를 들여다보노라면, 오히려 외국군의 주둔에 안주하며 그 기생적 혜택을 고착화하려는 식민잔재들이 없지 않은지 자꾸만 반문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갈등의 틈바구니에 대추리가 필사즉생의 배수진을 담보로 저리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 ⓒ 프레시안

타성적 이성과 각박한 감성이 충돌할 때는 현실을 고려한 심층적 원론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나는 미군의 당장 철수에 대해서는 섣불리 입을 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우월하고 내 적성에도 맞는 체제라는 데는 어머니나, 나나, 내 아이들까지도 확고부동하게 입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나는 부모와 자식이, 형제가 눈 질끈 감고 덤비는 안타까운 격투를 멀리서 흘려보며 아파만 했을 뿐 시위 현장의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다만 조국이라는 모국어의 분절(分節)인 대추리가 보유하고 있고 상징하는 전통적 생존의 존엄만큼은 철저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일차원적 명제를 새삼 강조하고자 할 따름이다.

고향을 사방으로 가로질러 또 신작로가 뚫린다. 우수수 풀뿌리가 뽑히고 나무 밑동이 댕강 잘린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내 고사리 손을 잡고 횡단보도나 신호등도 없이 활보하던 들판이다. 그 족보를 들여다보면 인류보다도 더 아득하고 뿌리깊은 가문( 家門)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풀벌레 울음 뚝 그치고 풀잎과 풀잎, 가지와 가지, 나무와 풀을 다리 놓던 거미줄 갈가리 찢긴 자리에 자동차만의 거미줄이 쳐지는 것이다. 그 숨가쁜 포충망에 걸린 새와 동구막을 지키던 개, 그리고 새끼 밴 들고양이들이 잔인하게 짓이겨 널브러진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가장 흔한 단골이다. 이 땅에서 웬만한 토종의 뿌리는 그렇게 아스팔트의 먹이로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되어간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갓길 틈을 뚫고 또 새 풀이 자라고 있다. 어느새 죽은 새의 새끼가 심어놓은 것이다. 죽은 개와 들고양이 새끼는 부리나케 거름을 주고 간다. 볼수록 두려운 생명력이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연의 섭리다.

자꾸만 무슨 말인가 더 덧붙이고 싶은 안타까움을 졸시 한 편으로 마감한다.

눈감고도 사방이 환하던 마을
속살 환한 개울 속
혼인색 어린 피라미 잡아다
도심의 하수구에 방생했다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미처 펴지지 않는 지느러미
어둠 속에 파닥거리다
파닥거리다 헉 숨이 막혀서
검은 피라미는
빗줄기 타고 허공에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이내 시멘트 위에 떨어지고
뒷 이야기는
정녕 아무도, 아무도 모른다.


―「검은 피라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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