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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에서 친절한 카자흐인을 만나다"

서길수 교수의 '알타이 답사기' 〈30〉

알타이의 카자흐인

낮 1시가 다 되어 출발한 답사단 일행은 추야도로로 나갔다가 다시 산기슭으로 방향을 튼다. 15분 쯤 가니 가축을 기르는 카자흐인 유르타가 나타난다. 오랜만에 원주민을 만나 20분 동안 함께하며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 보았다. 우리는 뜻하지 않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밖은 사막처럼 태양이 작열하고 있는데 유르타 안은 시원했다. 유르타 안에는 가운데 난로가 있고 그 주위에 침대, 이불, 부엌살림들이 놓여 있었다. 이 방안에서 4식구가 살고 있는데 아버지 예씨루(31세), 어머니 카띠라(30세), 할머니 카와뇨(67세), 그리고 마디나(5세)이다. 유르타는 여름에만 사는 집이고 원래는 뗴벨레르(Tebeler)라는, 바로 추야도로 건너편 마을에 산다고 한다. 나중에 할머니 두 분과 남자 한 사람, 두 아이가 더 나타났는데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일가친척들이 찾아온 것이라고 한다. 내 얼굴과 카자흐인 당신의 인상이 거의 같다고 했더니 카자흐인이 "눈이 다르다"며 동의하지 않는다.

이 젊은 부부는 꽤 부자였다. 말 60마리 이상(정확하지 않다), 낙타 20마리, 소와 양은 세어보지 않아서 몇 마리인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소 가운데 5마리는 우유와 버터를 위해 암소를 기른다고 한다. 내가 "당신은 부자다"고 했더니 웃기만 한다. 본인은 자신을 별로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유르타 안 한쪽에서 말젖술(뚜르크어로 꾸르가크)을 만들고 있다. 말 젖은 '꾸므이스'라고 하는데 하루에 6번씩 짜낸다고 한다. 이 말 젖을 통에 넣고 한나절을 저으면 하루 뒤에는 술이 된다고 한다. 이 집 주인장은 말 젖 술통을 끊임없이 저으면서 술 만드는 방법을 직접 보여주었다.

카자흐인 부부는 우리들에게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들을 내어놓았는데 '쿠므이스'라고 부르는 말젖, 반죽해서 둥글게 만든 '바울사키'라고 부르는 빵, '레벤'이라는 식물로 만든 '바리예나'라는 쨈, 그리고 시큼한 맛이 나는 우유를 맛볼 수 있었다. 우리도 아이들에게 사탕과 초콜릿을 선물로 주면서 이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말도 빌려 타면서 짧지만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말하는 도중에 아버지를 "아빠"라고 해 우리말과 꼭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어머니는?"이라고 물었으나 "아따"라는 대답에 약간 실망하는 대원들이 있었다.
▲ 카자흐인 가족(좌). 말젖술을 만들기 위해 젓고 있는 모습.(우) ⓒ프레시안

주로 코쉬-아가치 지역에 살고 있는 카자흐인들의 인구는 많지 않지만 자기 민족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에 살던 카자흐인들이 알타이산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1870~1900년대로 130년 전쯤 된다. 청나라에 속해 있던 카자흐인들이 러시아의 국적을 받아들이기 직전인 1900년, 그들 110개의 천막이 무리를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다음해 부유한 땅이라고 알려진 추야지역으로 이주했다. 국경에 이주한 카자흐인들의 역사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어떤 때는 몽골로 갔다가 어떤 때는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오는 이주를 계속하며 국경을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1930년 소련 시절부터 알타이 남쪽에 카자흐인이 늘어나 1989년에는 코쉬-아가치지역 인구의 54.4%가 카자흐인들이고, 나머지 39.6%가 텔렌기트(Telengit)인과 알타이인들이었다.

1991년 초부터 새로 이주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바로 소련연방에서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해인데, 그때 많은 카자흐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떠났다. 그러나 몇 년 지난 뒤, 조국보다는 좀 더 현대적이고 러시아식으로 살았던 알타이 카자흐인들은 다시 알타이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현재 코쉬-아가치 지역에는 카자흐인들이 전체 인구의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주로 추야초원, 코쉬-아가치, 좌나-아울(Zhana-aul), 떼벨레르(Teleber), 따샨타(Tashanta) 같이 국경지역 추야도로의 주요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몇 개의 종족이 하나의 민족으로 합쳐 단합된 삶을 살아간다. 이 민족은 자기 전통 문화와 언어를 잘 보존하는 높은 자아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단일성과 자주성을 인식하고 있다. 카자흐인들은 '꾸루따이'라는 자치기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 자치기구의 간부회는 각 종족의 족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 대표들은 자기 민족의 역사, 언어, 전통, 종교 같은 방면에서 하나씩 일을 맡아 책임을 지며, 그들은 놀라울 만큼 목표 지향적이며 친절하고 손님 접대를 잘 하며, 모두를 한 가족처럼 여긴다.

카자흐인들은 모두 건조한 고산지대인 추야스텝(해발 1700~2000m)에서 살고 있다. 이 지역의 연 평균기온이 -6~-7℃이고, 늘 건조하거나 눈에 덮여 있기 때문에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카자흐인들은 반유목인 축산업이 근본적인 경제 활동이다. 이들은 작은 초원에서의 낙타를 사육하고, 일부 카자흐인들은 독수리 사냥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통적인 주거형태는 지붕이 가파르지 않게 나무로 만든 집이다. 겨울에 폭설이 자주 내리지 않기 때문에 맞배지붕을 이용하지 않는다. 알타이 인과 비슷하게 많은 카자흐인들의 마당에는 여름에 부엌으로 쓰이는 유목민 천막 유르타가 있다. 어떤 곳에서는 카자흐인들이 유목민 시절에 이용한 펠트를 둘러 친 천막을 볼 수 있다. 안에 골조를 세우고 외부는 두꺼운 펠트로 덮는데, 작은 나무문은 들어갈 때 부딪히기 쉽기 때문에 머리를 앞으로 많이 숙여야 한다. 방의 한 가운데 난로가 있고, 난로에는 계속 모닥불을 피우는데 연기는 지붕꼭대기에 있는 둥그런 구멍으로 나간다.
▲ 카자흐인들의 주택과 축사(좌). 카자흐인들의 둥근 밥상과 음식(우) ⓒ프레시안

유목민들에게 카펫은 중요한 생활 일용품이다. 알타이 식의 얇고 하얀 카펫과는 달리 카자흐인들은 두 개의 얇은 천으로 된 카펫을 사용한다. 선명한 물감으로 물들인 두꺼운 펠트로 만든다. 신부들이 결혼할 때 가져 가는 지참품은 빨간 색으로 만든 카펫이다. 어머니들은 딸들을 도와주기 위해 씌르마키를 만드는데, 씌르마키가 크면 클수록 신부 가족은 부자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카펫 하나를 생산하는 데에 무늬와 크기에 따라 2주에서 2개월까지 걸리는데 둥근꼴보다 네모꼴이 더 많다.

카자흐인들은 알타이 사람처럼 낮은 원형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다. 끓여서 먹는 양고기와 말고기가 으뜸가는 음식이고, 그 고기로 고기국물(야채 외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도 만들어 먹으며, 발효시킨 우유도 많이 먹는다. 카자흐인들은 정성들여 뼈에서 고기를 발라 손으로 먹는다. 축제 때는 양 머리가 가장 중요한 음식이다. 귀한 손님에게는 뼈를 주는데, 그 뼈를 '좜베스'라고 한다. 또한 러시아식 만두와 양고기를 넣어 고기반죽을 만들어 구운 과자들이 있다. 카자흐인 음식 가운데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은 삶은 양고기와 파를 넣어 반죽한 뒤 손으로 먹는 '베쉬바르마크'다.

노련한 카자흐인들은 알코올 음료를 마시지 않고, 말젖을 마신다. 순수한 말젖을 말가죽으로 만든 용기에 붓고 유장(젖 성분에서 흰자질과 굳기름을 뺀 것)을 섞는다. 그리고 앙금이 생겨 맑아지게 하기 위해서 하루 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마신다. 고기를 먹은 뒤 다른 음식과 함께 마유를 많이 마시는데, 마유는 가장 아시아적인 음료이고, 호흡기 질환(폐병)을 치료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현대 카자흐인들은 민족 축제날만 전통 옷을 입는다. 여자 옷차림은 검붉은 색 벨벳에 금실로 수를 놓는다. 원피스 위쪽에 소매가 없는 옷을 입는다. 머리에는 작은 모자를 쓴다. 여자들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머리쓰개를 쓰는데, 색과 무늬로 연령과 지위를 알 수 있다. 늙기 시작한 여자들은 평평하고 하얀 머리쓰개를 쓴다. 남자들은 타타르인, 터키인과 마찬가지로 둥근 모자를 쓰는데, 색과 무늬는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준다. 가장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인 족장은 하얀 무늬를 오려서 붙인 검고 둥근 모자를 쓴다.

카자흐스탄 인들은 꽤 음악적인 민중이다. 돔브라(2현금)와 피리는 모든 음악에 사용하는 악기다. 축제기간 동안 여자들은 돔브라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가장 유명한 노래 가운데 하나는 "다스따르한"이다. 이 노래는 기쁨과 불행을 동시에 나타내는 독특한 노래인데 카자흐 식으로 "오늘 우리 모두가 여기에 모인 것은 멋진 일이다"는 것이다.

카자흐인들은 신앙심이 깊어서 이슬람 축제를 가지며, 전통적인 축제를 즐기기도 한다. 5월 1일부터 9일까지 '끄즈후울(아가씨를 잡아라)'이란 민속놀이를 한다. 젊은 남녀가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독특한 달리기인데, 총각이 아가씨를 쫓아가 그녀에게 키스를 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아가씨가 총각을 채찍으로 몰아내 버린다.
▲ 카자흐인들의 평생 반려자 ⓒ프레시안

카자흐인 가족들은 자신의 계보를 잘 알고 있다. 족보에 따라 일곱 번째 혈통 아래까지 정확하게 금혼을 지킨다. 늙기 시작한 사람들, 존경받는 족장들은 자신들의 선조들을 이해하고 숭배하는데, 전통적으로 부계 혈통을 따른다. 대를 잇는 기억을 통해 신화적인 선조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전해진다. 카자흐인들은 모두 옛 세대의 기억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이런 기억이 아이들에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현대 카자흐인들에게 산문문학은 과거의 경험을 전하는 방법의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가족들은 족장이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 족장은 카자흐 역사 가운데 과거에 실제 존재한 수많은 인물(시인 따늬륵, 잔인한 도적 찌뜨껨바이, 현명한 칸 따흐따므쉬)에 대해서 얘기해 준다.

1370년대에 칸 따흐따므쉬는, 징기스칸의 카호프 봉기에서 선두에 섰고, 그 결과 그들은 알타이로 이주했다. 이야기에서 자신의 조상들을 장중한 영웅, 지혜롭고 강한 영웅으로 묘사한다. 신화는 또한 마쩨리-카자쉬끼로부터 징기스칸의 출생까지 다양하다. 위대한 칸의 장례식에 대한 전설을 보면 이렇다.

"장례식에 참여했던 모두를 죽이고, 그 무덤 위로 말떼를 쫓아내고, 황무지에 수풀을 심었다." 지금까지 징기스칸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카자흐인들은 좌자또르(아르구트의 수원)계곡에 있는 오랜 무덤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본다.

꾸르각(Kurgak) 바위그림(1857m, N49° 50'925", E88° 48'706")

시간은 이미 2시 반이 되었다. 서둘러 다음 일정으로 이어간다. 간단하게 낮밥을 먹고 바로 가까이에 있는 꾸르각 바위그림을 답사했다. 꾸르만-따우에서 본 바위그림과 비슷한 그림을 6점 볼 수 있었다. 6점 모두 반쯤 이상 떨어져 나가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꾸바레프 교수는 이곳 바위그림도 신석기 시대의 것이며 꾸르만-따우에서 본 것과 생김새와 새긴 기법이 똑 같은 것으로 보아 같은 사람이 새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밖에도 늑대, 곰, 사슴, 활을 든 사람, 말을 탄 사람 같은 그림이 여러 점 있었으며 9세기 뚜르크 시대의 룬문자도 84자나 볼 수 있었다. 오늘은 여러 곳의 바위그림을 한꺼번에 본 셈인데 무엇보다 흔치 않은 신석기 시대의 바위그림을 두 곳이나 답사하는 행운을 누렸다.

바위그림이 그려진 바위 옆에 돌로 쌓은 꾸르간이 하나 있는데 몇 년 전 꾸바레프 교수가 아들과 함께 발굴했다고 한다. 무덤에서는 사람과 말의 뼈만 나오고 아무런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이 무덤은 100년도 안 된 알타이 텔렝기트인의 무덤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이곳 답사 도중 아주 중요한 일을 하나 처리했다. 그 동안 춥고 깊은 산속을 돌아다니느라고 통 목욕을 할 수가 없어 아주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침 바위그림이 있는 곳 언덕 너머 샘처럼 물이 나는 곳이 있고 여기서 흐르는 물이 얕은 도랑을 이루고 있다. 이 물이 차고 뭐하고 따질 겨를이 없다. 오늘 지나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면 정말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머리를 감고 아래만 씻고 내복을 갈아입었더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햇볕이 따가운 대낮인데도 모기의 공격은 집요했다. 그 동안 터득한 여러 가지 기술로 공격을 막아보았지만 결국 발목이 물려 등산화를 신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 뚜르크 시대의 꾸르각 바위그림(곰, 좌)과 눈문자(우)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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