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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발견하다! 구석기 유적을

서길수 교수의 '알타이 답사기' 〈25〉

***꼬꼬죠크강가의 꾸르간과 모기떼**

오늘의 목적지인 꼬꼬죠크강가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가 다 되어서다. 이곳은 우리가 탄 차만 오고 니꼴라이가 모는 특수차는 발굴장으로 가고, 대신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유리 할아버지의 트럭이 오게 되어 있다. 꼬꼬죠크강은 우코크에서 따라 내려왔던 따르하뜨강과 우코크 올라가기 전 바위그림을 발굴했던 이르비스뚜 사이에 있는 작은 강이다. 제법 큰 언덕 사이로 시원하게 물이 흐르고 아득히 추야스텝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꼬꼬죠크강에 도착해 1시간이 넘게 강가를 중심으로 바위그림을 찾아보았지만 눈에 띠지 않고, 대신 강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대형 꾸르간(2012m, N49°48'571", E88°27'911")들을 여러 기 발견했다.

강가에 야영준비를 마치고 기다렸으나 우리의 영양을 담당한 이리나와 수송 담당 유리 할아버지 오지 않는다. 그러자 꾸바레프 교수가 직접 마카로니에 통조림을 넣어 만든 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제 요리사 역할까지 한 것이다.

"꾸르간 있는 곳은 모가기 많다." 다시 한번 실감나게 하는 대단한 공격이다. 해발 2000m가 넘는 지역에 이처럼 모기가 극성일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수 천 년 간 황량한 지역에서 죽어간 영혼들이 꾸르간 주변에 모여 모기로 환생하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전투에 참가한 무사들이고 그들의 싸울아비 근성이 모기라는 공격적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닐는지! 이곳 모기에 대해 원철이는 이렇게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다.

"오늘 저녁 이곳 모기들에게 엄청난 고초를 당했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볼 일을 보고 있는데 모기들이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달려드는 것이었다. 완전히 무방비로 당한 셈이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한꺼번에 달려드는데 크기는 모기라고 할 수 없는 정도며 날아다닐 때의 소리는 좀 과장하면 전투기가 지나갈 때의 굉음을 내곤 했다. 얇은 긴소매 옷을 입고 있어도 간단하게 천을 뚫고 피를 빨아대는데 물린 후에는 엄청 붓고 그 가려움은 나로서는 참기가 힘든 것이었다. 이 척박한 환경에서 야생 동물들의 거친 살만 대하다가 부드러운 사람 엉덩이와 살을 대하니 얼마나 손쉽고 맛이 있었겠는가. 특히 꾸르간 근처를 지나기만 하면 온 몸이 망신창이가 되곤 했는데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경비병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 답사팀의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모기가 힘을 못 쓴다는 것이었다. 모기에 물려도 별다른 반응조차 없었다. 이들 앞에서 나만 유별나게 엄살을 떠는 셈이 되고 말았다."

저녁밥 먹고 나서도 아직 날이 어두워지려면 멀었다. 주변에 낮은 산처럼 높은 덕땅(臺地)이 있어 올라가 보니 아주 재미있는 돌무지무덤(積石墓)이 있다. 지금까지 본 돌무지무덤들은 대부분 커다한 돌덩이들로 봉분을 만들었는데, 이 꾸르간은 작은 돌들을 가지고 쌓아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똑같은 분위기 보여준다. 앞으로 고구려의 돌무지무덤과의 관계를 연구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그냥 잠자기는 너무 이르고 모기들의 폭격도 견딜 수 없다. 우리는 산 위에 올라가 바위그림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 걸렸지만 모두 하나씩 그림을 찾아냈다. 말, 양들을 주제로 한 조금은 조잡한 형태의 청동기 시대 바위그림이다. 깔박-따쉬나 이루비스뚜에서 너무나 많은 바위그림을 보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는데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꾸바레프 교수가 "이번에 발견한 바위그림은 한국 팀이 처음 발견한 것이니 그렇게 발표해도 좋다"는 것이다. 꾸바레프 교수가 아직 조사를 마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40년을 찾아다녀도 아직도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을 정도로 알타이의 바위그림은 전역에 퍼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팀과 다닐 때도 될 수 있으면 조사가 안 된 지역에서 야영을 하고 그 지역을 탐사하는 치밀함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찾은 그림 가까운 곳에 돌탑을 쌓아 놓고 내일 좀 더 자세히 조사하기로 했다. 오늘 찾았어도 내일은 다시 찾아야 하기 때문에 처음 찾은 바위그림에는 이렇게 돌탑을 쌓아 놓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갑자기 비가 내려 뛰어내려온 우리가 주변을 치우고 나니 다시 모기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비가 와도 뛰지 않고 여유 있게 돌아온 꾸바레프 교수가 나무막대기 하나와 가발 같은 것을 들고 온다. 작대기는 유르타를 싣고 이동하면서 살던 유목민족들이 부모를 묻을 때 썼던 것이라고 한다. 유목민들은 사람이 죽으면 옛날의 꾸르간을 파고 시체를 넣은 뒤 유르타를 설치할 때 쓰는 이 나무막대기를 위에 얹고 그 위에 다시 유르타의 베를 덮었다고 한다. 그리고 말을 희생물로 바쳤는데 꾸르간 위에 나무막대기가 있고 말뼈들이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풍속 때문이라고 한다. 꾸바레프 교수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나무막대기나 말을 희생물로 쓴 유목민들은 200년 정도밖에 안 되는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200년 전 유목민들은 옛날 청동기나 뚜르크시대의 꾸르간 위에 다시 새로운 무덤을 만든 것이다. 꾸바레프 교수는 나무막대기 끝을 보여주었다.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바로 이 구멍이 이 막대기가 유르타에 쓴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가지고 온 털은 유목민들이 쑤록을 꾀어내는 데 쓴다고 한다. 사냥꾼들이 바위 뒤에 숨어서 이 털을 흔들면 쑤록이 암놈인줄 알고 가까이 오기 때문에 그 때 쑤록을 잡는다고 한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이리나와 유리 할아버지의 차가 도착했다. 유리 할아버지, 정말 구세주 같은 사람이다. 이 맥가이버가 아니면 그 황량한 벌판 어디서 배터리 충전을 할 수 있겠는가! 간간이 내리던 비가 그치고 날이 어두워지면서 반달이 나왔다. 우리 팀들은 이미 피곤에 지쳐, 모기를 피해 텐트에 들어가 버렸지만 러시아 단원들은 밤이 늦도록 우코크에서 생긴 일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그들에게 모기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등산, 여행, 답사에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냥 잠만 잘 수 없었다. 우선 일정을 조정했다. 꾸바레프 교수는 한사코 북알타이 지역보다는 남알타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자기 지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북알타이 지역에서도 몇 군데 답사를 해 나중에 책을 쓸 때 알타이 전체를 균형 있게 써보고 싶었다. 논의 끝에 비칙투 붐이란 유적을 한 곳 더 답사하기로 추가했는데 그럴 경우 바위그림의 보고인 엘란가쉬를 빼겠다고 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여진다.

저녁 내내 꾸바레프 교수가 털어놓은 알타이 현지 전설들도 그냥 넘길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이었다.

"추야 스텝은 옛날 큰 호수였기 때문에 배로 다녀야 했다."

"내가 20년 전 레린그라드에서 일할 때 고문서에서 1911년 한 학생이 많은 무기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읽고 그것을 찾으러 산 정상까지 올라갔으나 찾지 못했다. 그 산이 바로 저 산이다."

"까라봄에서 이 산에 와 바위그림과 글자를 발견했는데 그 날이 바로 오끌라니디포프가 작고한 날(81년)이었다."

알타이의 전설에서 자신의 경험담까지 이어지면서 밤이 늦었는데도 끝이 없다. 나는 살그머니 빠져나와 잠자리에 들었다. 정말 저렇게 즐기면서 일하는 것은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7월 10일(목), 5시에 일어나 추야스텝에 뜨는 해를 찍으러 나갔으나 구름이 잔뜩 끼어 실패했다. 덕분에 6시까지 푹 잤다. 바깥 온도가 13.4℃로 우코크에 비해 상당히 따뜻한 편이다. 물론 낮이 되면 30℃가 넘는 더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 식사는 이탈리아 국수를 우유에다 말아 먹는 희한한 메뉴다. 아침밥을 먹고 2시간쯤 바위그림을 찾는 작업에 들어갔다. 꼬꼬죠끄의 바위그림은 말과 양을 주제로 한 것인데 모두 합쳐봐야 10여 점밖에 찾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찾았다는 성취감과 찾은 그림 가운데 가장 잘 된 그림을 실제 비닐로 본을 떠 본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림 48) 꾸르간 위의 막대기와 머리털
그림 49) 꼬꼬죠크강과 추야스텝

그림 50) 비닐을 대고 본을 뜨고 있다.
그림 51) 본 뜬 그림이 완성되었다.

***공동탐사팀 드디어 구석기 유적 발견**

10시 15분 오늘의 다음 목표인 차간-부르가즤(Chagan-Burgazy)를 향해 출발했다. 어제 내려올 때 사용한 꼬쉬-아가치(Kosh-Agach)로 가는 길을 건너 길도 없는 스텝지역을 동쪽으로 향해 달린다. 얼마 안가 따르하뜨강을 건너고 이어서 5기 정도의 꾸르간이 모여 있는 지점(1964m, N49°47'383", E88°33'420")을 지난다. 우리는 지금 추야스텝의 가장 남쪽 산기슭을 따라서 달리고 있다. 꾸바레프 교수는 가능하면 꾸르간 같은 유적이 있는 곳을 통과하며 자세한 위치와 분포를 설명해주고 있다. 며칠간 산길만 다니다가 오늘은 길이 좋아 편안하면서도 속도가 있어 상쾌하다. 꾸르간 5기가 있는 곳에서 얼마 안 가 오른 쪽 산기슭에 마치 신들이 바위를 가지고 살림놀이를 하다 버려둔 것처럼 큰 바위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특이한 곳이 나타났다. 꾸바레프 교수가 갑자기 차를 세운다.

"잠깐, 저 바위에 바위그림이 있는지 조사하고 가자!"

수 십 년 남 알타이에서 잔뼈가 굵은 꾸바레프 교수의 감각을 동원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몰려가 바위를 이곳저곳 뒤지며 바위그림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많지는 않지만 몇 가지 바위그림이 발견돼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주로 양과 말을 그린 그림 20여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가장 큰 돌 위에서 발견한 말 그림은 아주 잘 그린 그림이었다.

"석기가 발견됐다."

역시 꾸바레프 교수가 한 건을 올린다. 이때부터 우리는 바위그림 찾기를 그만두고 모두 달려들어 바닥에서 석기를 찾기 시작했다. 운전을 하던 유리 할아버지와 요리 담당 이리나의 역할이 대단하다. 그들은 보통 운전사나 요리사가 아니다. 유리 할아버지는 박물관장까지 한 전문가이고 이리나는 지질학을 전공한 전문가로 이런 답사를 수없이 경험한 베테랑들이었다. 우리 팀에서는 역시 미래의 고고학자 원철이가 절대적으로 우수한 성적을 냈다.

"후기 구석기 유적이다. 석기가 이렇게 많이 널려 있는 것을 보니 생활하던 석기가 남은 것이 아니고, 석기를 만드는 제작소 같다."

뜻밖에 성과를 얻은 꾸바레프 교수는 우리에게 GPS에 나타나는 정확한 지점(2012m, N49°46'467", E88°34'948")을 물어 기록하고 20점이 넘는 석기들을 1급, 2급, 그리고 버릴 것으로 분류하더니 중요한 것들을 챙긴다. 이어서 원철이와 화동이 두 고고학도에게 구석기 유물에 대한 즉석 강의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유적은 한ㆍ러 공동발굴대가 해낸 것이니 논문 쓸 때 반드시 이 점을 밝히겠다."

2004년 우리가 다시 갔을 때 꾸바레프 교수는 약속을 어기지 않고 '한ㆍ러 공동발굴대'가 발견한 구석기 유적 논문을 발표하여 우리에게 한 부를 주었다. 꾸바레프 교수에게도 큰 성과이지만 앞으로 고고학을 전공할 두 학생들에게는 아주 귀중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52) 산기슭에 모여 있는 대형 바위
그림 53) 유야스텝을 배경으로한 유적지

그림 54) 대형 바위 위의 그림
그림 55) "모두 구석기시대의 석기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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