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지나간 한 세기의 "결산"을 해보려면 100년 전의 근대화론자들이 미래의 조국을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보고 싶어했는지부터 기억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리는 지금 공화제 국가에서 살고 있는데, 일본 경찰의 보고를 그대로 믿는다면 구한말에 공화제를 국가의 모델로 최초로 제시한 단체는 〈대한매일신보〉 계통의 언론인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 등)과 미국 지향적 기독교인 (윤치호, 안창호 등) 등이 힘을 모아 1907년쯤에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신민회"라는 비밀 결사였습니다. 〈취지서〉에서 "인민과 나라"의 전체적인 "유신", 즉 전반적이며 본격적인 근대적 개혁을 외친 당대의 가장 급진적인 근대화론자인 그들은, "스스로 새로워진" 나라의 모습을 과연 어떻게 봤는가요?
〈대한매일신보〉에서 1910년 2월 22일부터 3월 3일까지 연재됐던 "20세기 신국민"이라는 텍스트(신채호가 저자로 추정됨)를 통해서 그들의 포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국가 간에 서로 경쟁하고 약자가 강자의 먹이가 되는 "민족주의와 경쟁의 시대"에 한국 국민이 "독립과 자유의 자격"을 얻으려면 먼저 "문명 열강"의 전례대로 "인민"의 에너지를 풀어주는 "계급 타파"(즉, 세습적 신분층의 철폐)와 "만인 평등"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 이 텍스트의 주된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만인 평등"이라는 것이 업적에 따른 사회적 위치 획득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모두 다 평등하게 "사리심"을 버리고 "공공심"으로 무장돼 사회를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는 당위를 의미하기도 했지요. "헌신"이란, 유럽 열강들과 경쟁할 수준의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다들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세계 시장의 점령을 최종적 목표로 해서 외국 기술로 무장하여 "생산에서 분투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상무 (尙武) 교육" (군사 교육)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100년 전의 급진파 근대주의자들이 미래의 "신국민"을 국가와 공익에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군사 교육과 병역의 의무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진취적이고 생산적인, 공리적인 "문명인"으로 상상한 셈입니다.
과연 지금의 한반도의 모습은 그들의 희망에 상응하는 것인가요? 한편으로는 그들이 그토록 선망했던 기술적인 근대성과 규율적인 근대적인 인간형이 한반도에서 어느 지역보다도 더 번창하게 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그들의 바램대로, 100년 전에 그렇게도 든든해 보였던 신분계층들의 경계선들이 결국 다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열망했던 대로 오늘날의 한국 기업들이 외국 기술을 잘 활용해서 몇 개의 품목에서 외국 시장들을 석권하고 있으며, 한국의 군대는 - 적어도 양적으로 -서구의 강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거의 2-3배로 커졌습니다. 미국과의 대결을 선언할 만큼의 군사력을 키운 북한도 그들의 희망과 아주 엇갈린 길로 간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들의 숙원대로 대다수의 한국인과 북한인들이 학교 때부터 "국가 사상"과 "상무 정신"으로 무장돼 군 복무를 "사나이가 꼭 해야 할 일"으로 당연시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복무를 기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지배층의 자제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국민개병제의 담론에 본격적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그들이 진취적이며 업적 지향적인 "신국민"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지만, 그 무비의 "교육열"에 불타는 오늘날의 한국인보다 더 진취적인 국민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문명국 모방"을 핵심으로 했던 100년 전의 근대주의적 프로젝트가 남한이 1980년대 후반에 세계체제의 준(準)핵심부에 진입함에 따라서 어느 정도 결실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이라 해도 보기 드문 정도의 국민적 통합을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인 누구나 다 평소에 피부로 느끼듯이 미시적인 차원에서 "신민회" 이념가들이 바라던 "국민의 유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데에 있습니다. 본인들도 꼭 그 이상에 따른 것은 아니었지만 "신민회" 핵심 회원들은 "세력가"들에게 굽신거리지 않고 가족주의에 휩쓸리지 않는, 문중이나 고향보다 국가와 국민을 더 중요시하는 근대적인 독립적 개체로서의 "국민"의 출현을 기대했습니다. 주로 서북 지역의 부르주아세력들에게 기댔던 "신민회" 지도자들도 "지방열 (지역 감정)"과 가족주의로부터 결코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원칙상 전근대적인 연줄의 네트워크를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연줄망이 그 중요성을 잃은 것일까요? 1996년 공보처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93,5%의 국민들이 가장 소속감을 느낀 단체로 "가족"을 우선적으로 뽑았고, 최근의 또 다른 여론 조사에 의하면 20대의 68%가 연줄망이 한국 사회에서의 성공의 관건임을 믿는다고 합니다. 즉,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공"을 들여야 하는, "인연"을 챙겨야 하고 유력자와 "안면"을 터야 하는 – 근대적인 업적주의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이와 같은 전근대적인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기에, 한국적 근대의 프로젝트를 일상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영역에서 얼마든지 더 심화시킬 여지가 있는 듯합니다.
인터넷 이용률이나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인 90%를 넘는 고졸의 대학/전문대 진학률 등으로 봐서는, "근대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초과 근대적"이라고 해야 할 사회에서, 왜 하필이면 아직까지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떠난 개체를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것인가요? 우리가 보통 이 부분을 "유교적 풍습의 영향"이라고 치부하고 일종의 "유습(遺習)"으로 다루는데, 이것이 꼭 틀린 것도 아니지만 진실의 한 일면만 보여주는 듯합니다. 물론 아직 1세대의 도시민들이 많은, "시골"의 품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한국의 도심 문화에서는 유교의 유습이 많다는 것이야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남아 있는 가부장제적 대가족의 유풍이 있는가 하면 말 그대로 "도덕 파시즘" (김상봉 교수의 표현)이라고 불러야 할 국가주의적 제도 교육이 인위적으로 확대 재생산시키는 사이비 유교적인 "충효 사상"도 한 몫을 해 왔을 것입니다. 물론 70-80년대에 비해서는 많이 순화됐지만 지금도 〈도덕〉 교과서를 보면 불평등한 사회의 의례적인 표현인 소위 "예절"이라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허위 밖에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회에의 봉사와 공헌" 등은 한 없이 강조돼도 불의와 착취에 대한 저항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지 않습니까? 결국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이란 타자가 이미 그 틀을 잡아놓은 사회에서의 순응적인 적응의 타자지향적, 자아 포기(自我 抛棄)적 처세술인데, 가족주의의 틀을 그대로 받아들여 가국(家國)의 신민 (臣民)임을 자랑스럽게 여길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복종하는 아이를 "착하다"고 부르는 학교가 없었다면 중세 기독교의 유습이 유럽에서 사라진 것처럼 한국에서도 중세 유교의 유습들도 훨씬 더 빨리 역사의 쓰레기 통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똘똘 뭉치는" 한국적인 "가족"이라는 현상을 단순히 권위주의의 주입식 교육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근대성에는 다른 요소들이 다 있어도 한 가지 없는 요소는 "복지"입니다. 국방부 등 국가 폭력을 전담한 부처들의 예산과 국방 산업 진흥을 위한 지출 등이 정부 지출 전체의 거의 절반에 임박했던 군사주의적 야만의 박정희 시대는 그렇다 치고, 비교적 평화스러운 지금에도 국가 예산 중의 복지분야의 지출비중은 26.6%로 OECD 회원국 평균 51.7%의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 허동현 교수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내로라 하는 한국의 사립 대학들의 예산에서는 국가로부터 들어오는 보조금은 많아야 5% 정도 밖에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대기업들에게 동냥을 구해가면서, 천만원대에 이르는 - 한국적인 소득 수준으로 봐서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등록금으로 학생과 학부모들을 수탈이나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한국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 비중은 국내총생산(GDP)의 4.9%로 OECD 회원국 평균 0.7%의 7배나 됩니니다.
그런데 복지의 혜택을 받기는커녕 개인이 수탈 당하는 것이 교육뿐입니까? 건강 보험의 보장률은 61%로, OECD 회원국 평균 85%에 비해 비교적으로 낮은 수준입니다. "돈이 없어서 병원 못간다"는 말은 유럽에서는 19세기 소설에서 나온 문구로 보이지만 미국이나 한국형(型)의 야수적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아직도 그대로 현실입니다.
개인은 수탈을 당하지만 국가적인 혜택을 받는 것은 개발주의의 고전적인 모델대로 바로 독점 기업이지요. 한국의 경제분야 지출 비중은 19.7%로 OECD 회원국 평균 9.5%의 2배가 넘습니다. 일본의 전례(前例)도 있고 해서, 한국의 국가는 돈을 풀어 토건 자본을 비롯한 정치적 비중이 높은 주요 기업체들을 살찌워 경기부양책을 쓰는 방법을 대단히 잘 익혀왔습니다. 그렇지만 개발 일변도로 돌아가는 사회에 개인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개인이 국가와 재벌의 "인력", 즉 소모품이 되기도 하고, 1980년대 이후로는 소비자로서도 그 나름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국가 내지 사회와의 관계의 맥락에서 "공부"나 "병 치료"와 같은 가장 근본적인 욕구도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재벌들을 키우느라고 바쁜 국가에 기댈 수 없는 개인은 결국 어디에 기대겠습니까? 당연히 가족 밖에 없지요. 사교육과 입시 지옥의 좁은 문을 통과하고 나서도 대학 등록금과 거의 필수가 된 어학 연수 비용, 자격증 공부 비용 등을 합치면 최소한 거의 5,6천만원에 가까운 돈을 지불해야 중산계층의 "성인"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한국 대학생에게, 부모들의 훈계와 강요가 아무리 싫어도 부모를 떠난 자립이란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자살에 가까운 것입니다. 유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교 시절에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애인과 같이 살기 시작한 젊은이들은 다름이 아닌 복지 사회의 수혜자들입니다. 등록금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기에 애인과의 동거를 즐기면서 부모의 통제를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신문들을 보면 대학교 1학년생들을 "고등학교 4학년생"이라 부르고 그들의 자립심의 부족과 부모에 대한 지나친 심리적 의존, 뚜렷한 개인적인 인생 설계의 결여 등을 꼬집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젊은이들만을 질타하기가 부당할 듯합니다. 현실적으로 과잉 경쟁과 복지 부재의 사회에서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이전까지의 자립이란 불가능하기에 성장기의 한국 시민들은 "시민으로서의 개인"보다 "가정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이 훨씬 더 가시적입니다. 이미 1900년대의 개화주의적 신문, 잡지들이 "개인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한국의 역대 지배자들이 선택한 개발주의의 모델에서는 가정과 각종의 "연(緣)"을 떠난 개인이란 사실상 성립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우리들의 근대화 성공"을 기리기에 아직까지 조금 이르지 않는가요?
우리 근대의 가장 치명적인 또 하나의 미비점이라면 물론 여성의 문제일 것입니다. 개화기 때부터 여성도 "국민"으로서의 계몽의 대상이자 국가에의 충성의 주체가 돼야 된다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지만, 여성 교육의 진흥 등을 요구했던 개화기의 남성 민족주의자들은 일차적으로 "아버지가 나빠도 아들이 현명할 수 있지만 현명한 어머니 밑에서 불초한 아들이 나타난 일이란 일찍이 없었다(或有父惡而子賢 未有母賢而子不肖)"는 식의 현모양처적 발상에 입각하곤 했습니다 (예컨대, 이철주, "女子敎育이 爲尤急", 〈기호흥학회월보〉, 제6호, 1909년1월, 1-3쪽). 즉, 어머니, 아내로서의 여성이 남성 지배하의 "국가와 사회"의 "문명 개화"의 하나의 도구로서, "천부(天賦)의 자질이 극히 총명한 우리 단군의 후손, 한민족이 20세기의 만국 경쟁의 장에서 보다 높은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할 부차적인 존재 (강매, "여성계의 진보", - 〈대한흥학보〉, 제2호, 1909년4월, 54-56쪽)로 인식이 됐던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의 "도솔(導率: 지도)"을 벗어나 어떤 독립적인 사회적 역할을 동등하게 한다는 것은 남성 근대주의자들에겐 악몽이었습니다. 예컨대 개화기에 거의 최초로 일본에서 근대적 교육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여 국내에서 안창호 계통의 "문화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결국 대다수의 자산계급 배경의 지식층처럼 친일의 길로 돌아선 장응진(張膺震; 1880-1950: 그 당시로는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이라는 인사는 1920년에 "여성 해방"이라는 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근래 소위 신식 여자 즉 신교육을 받았다는 여자를 보면 여간 쥐꼬리만큼의 학문을 배우고 보면 곧 여장부가 된 듯이 태도가 교만하여지고 특히 여자의 직분으로 가장 중요한 의복 음식 등의 조리와 같은 것은 이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정적 업무에 악착(齷齪)함을 도리어 신여자의 수치로 오해하고 심하면 일평생을 자립자영 (自立自營)으로 독신생활을 한다고 이것을 명예와 같이 주창하는 여자도 왕왕 불무(不無)하니 이와 같이 교육하면 필경 여자교육은 우리의 가정을 파멸하며 우리의 사회를 쇠퇴케 하고 말 것이라 합니다. 이것도 과연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그러나 이것은 과도시대의 반동(反動)으로 일어나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것인 줄 생각합니다. 즉 지금까지 교육이 전무한 여자사회 중에서 자기가 처음으로 약간의 신학문을 배우고 본 즉 주위의 타 (他) 여자에 비교하여 자기가 가장 걸출한 여자인 줄로 자인할 것은 사세 (事勢)의 부득이한 것이지오. 그러나 일반 여자의 교육이 보급 향상하여 자기보다 이상(以上)의 학문을 수득(修得)한 타 여자가 무수히 많음을 볼 때에는 그 심리가 자연히 겸손하여지는 동시에 여자의 직분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게 될 것은 필연의 사세(理勢)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차(此)에 주의를 요할 것은 일언(一言)으로 여자의 해방이라 하면 여자가 가사(家事)도 불관(不關)하며 자녀의 양육도 불고(不顧)하고 남자의 하는 사업을 대신하며 남자와 같은 업무를 취하여야만 남녀동등이 되는 줄로 생각함은 오해의 심한 자이올시다. 물론 근래 구미(歐米) 여자 중에는 정치문제 노동문제 기타 온갖 사회문제에 열중하는 이가 불소(不少)할 듯하고 심지어 전차운전수, 순사(巡査), 우편배달부 등 기타 각종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이가 대전 후에 현저히 증가하게 된 것은 사실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 중 남자의 결핍으로 인하여 나타난 특수의 현상이며 또 과연 이것이 여자 자신에 대하여 행복을 느낄는지 사회발전에 대하여 필요할 것인지 의문이올시다. 남녀양성(男女兩性)이 결합하여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 작성한 이상에는 남자는 남자의 신체에 적당한 노동을 하고 여자는 여자의 신체에 가장 적합한 노동을 분담하여 각각 분업적으로 영위(營爲)하는 것이 문화발전상 다대(多大)한 효과를 낼 것은 물론이오 또 남자는 신체가 건강하고 완력이 강한 즉 외부사업 육체노동에 종사하며 여자는 그것에 반(反)하여 심신이 다 취약(軟弱)한 즉 내부노동에 종사함이 가장 적당할 것은 누구나 다 부정치 못할 사실이오. 더구나 여자에게는 아해(兒孩)를 생산하여 양육함이 그 선천(先天)의 약속이니 여자가 이 임무를 완전히 수행함은 우리 인류사회의 기초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諸 名士의 朝鮮 女子解放觀", - 〈개벽〉, 제4호, 1920년9월, 28-30쪽).
남자보다 심신이 취약한데다가 선천적으로 아이나 낳아 키우게 돼 있는 여자라는 열등한 존재가 감히 겸손을 잃어 교육을 받았다고 자부하고 남자와 같은 직업을 가지려 하다니요! 장응진의 주장이란 바로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될 것 같고, 이것은 다소 보수적인 윗세대의 "문화 민족주의자"들의 공론 (公論)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여성의 바람직한 위치가 기본적으로 "집안"으로 잡혀 있었고, 자아 실현을 위해서든 단순히 생활이 어려워서 돈을 벌기 위해서든 "집안"을 탈출하여 직업 전선에 뛰어든 여성들은 그야말로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원 오는 환자들까지도 병 외에 간호부를 위하여 오는 수가 많고", 백화점이 여자 점원을 구경하고 희롱하는 장소가 되고 여성이 특히 서비스 직종에 취직하면 "노동 외에 에로 서비스가 조건이 되는" 등 일제 시대의 "직업 부인"들은 패권적인 남성 사회의 성애화된 이용 대상물이 되게 돼 있었습니다 ("직업부인 좌담회", - 〈신여성〉, 1933년4월, 46쪽, - 김경일,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푸른역사, 2004, 360쪽에서 재인용). 물론 개화기의 소수의 근대주의자들이 여성의 직업 갖기를 "국민된 자의 의무", 국권 회복의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하여 장려하기도 했고, 1920-30년대의 사회주의자들의 여성의 취직을 경제적 독립과 해방의 조건으로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긍정했지만, 한국 근대의 주류적인 민족주의적 담론에서는 여성은 어디까지나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학교 가면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더 많은 오늘날에 와서는 과연 사회가 진보된 만큼 남성의 패권이 퇴장했던가요? 여학생은 많고 그들의 성과도 우수하지만, 여성의 직업 진출은 여성 인구 전체의 50% 정도로 OECD 평균인 78%에 크게 못 미치고 있습니다.
저는 예컨대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노르웨이에서는 전업 주부들을 거의 본 적이 없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중산계층 이상의 가정에서는 남편의 외벌이가 거의 하나의 관습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독립"이란 과연 가능합니까? 여성의 학력이 유럽의 웬만한 나라보다 우수한 한국에서 여성의 직업적 진출이 이처럼 저조한 이유를 보자면, 우선 한국의 주요 독점 기업이나 정부 부처 등 중에서 부속 탁아소, 유치원 시설이 있는 곳이 과연 몇 개나 되는지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는 일하는 여성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편리한 산하 시설이 있는 것은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지만 노르웨이 같으면 그러한 시설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공공 육아 시설은 그렇다 치고, 과연 공립이 8% 정도밖에 안되는 일반 사회의 초등학교 이전의 육아 시설을 소득 수준이 높지 못한 여성이 이용하기가 수월합니까? 비용 문제도 그렇지만 최근의 "꿀꿀이 죽 " 사건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이윤에 눈이 먼 유치원 원장들은 아이의 건강이란 안중에도 없어 아이 맡기기가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공공 기관이 담당해야 할 육아를 사실상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가에게 전담시키니 결국 일해야 할 여성의 발목이 가정에 묶이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자본을 살찌우는 것을 특기로 하는 국가가 피지배자들의 육아 문제에 무관심한 것도 그렇지만, 요즘 같으면 여성에 대한 극심한 차별과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의 볼안화"라는 두 현상이 얽히고 설켜 여성으로서는 안정되고 자아 실현의 가능성이 있는 직장 잡기란 거의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게 됐습니다. 여성 근로자의 70%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그들의 평균 임금이란 남성 정규직의 평균 임금의 36%밖에 안되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이렇게 통계숫자만 제시하면 약간 추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멀리 가실 것도 없이 허동현 교수님께서 계시는 학교에서 식당에서 근무하는 여성 노동자나 청소를 하는 여성 노동자에게 근무 조건과 월급에 대해 물어보시기만 하시면 다 아실 것입니다. OECD 어느 국가를 가도 만나볼 수 없는 이와 같은 노동 시장에서의 태심한 차별이란 사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매장의 수준입니다.
그리고 월급이나 근로 조건은 그렇다고 치고, 여성에 대한 성희롱을 "동료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농담" 쯤으로 아는 대다수 직장들의 성차별적 분위기도 과연 일제 시대에 비해 얼마나 나아졌는지 의문에 속합니다. 옛날에 한 면세점의 여성 노동자로부터 "임신만 하면 남성 관리자가 '니가 벌써 산란기냐'고 맨날 따지는 게 우리 직장의 다반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노르웨이 같으면 소송감이 되는 이와 같은 추행은 우리에게는 그냥 "애교"로 인식돼 온 모양입니다. 늘 여성에 대한 직장에서의 "분리 통치"와 초과 착취를 특색으로 삼아온 한국 자본주의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그 본질을 바꿀 수 없는 것 같은 것이 제 느낌입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철폐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이상 과연 우리 여성에게 동등한 노동자, 자기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동등한 인간이 될 희망이란 있습니까?
한국을 이제"세계 10위의 통상 대국", 중국이나 베트남 노동자들을 착취할 수 있는 아류 제국주의적 국가로 만든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의 가시적인 성공의 대가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라는 것이 저의 근본적 질문입니다.
환경 파괴, 노동자에 대한 무제한적 착취, 미국의 군사력과 구미ㆍ일본의 자본에의 종속, 여성에 대한 구조화된 차별 등의 굵직굵직한 거시적인 문제들은 차치하고 미시적인 영역만을 들여보더라도 우리의 "근대적" 생활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적입니다. 어릴 때부터 "경쟁에서 이겨라"는 소리만 듣고 자라는 아이들이 커서도 남과의 연대의 중요성이나 휴식을 즐기는 법을 모르고, 군사적 획일주의에 길들여진 국민들이 타자, 소수자(동성연애자,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등)에 대해서 공격적, 경멸적 태도를 자주 취하고, "선진국" (100년 전의 "문명 열강")에 대한 선망만큼이나 "후진국"에 대한 무관심과 경멸심이 깊습니다.
군인, 생산자, 소비자의 기능만 아는 근대적 국민이, 자본주의 전복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한 인간의 본분으로 돌아오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물론 체제 전복의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반세기 넘어 남한의 지배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힘을 많이 들인 부분입니다. 학교나 군대를 통한 "길들이기"부터 노조 간부에 대한 포섭, 이권 나누어먹기 전략까지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시대의 조선의 "적색 노조", "적색 농민 조합"의 전통을 생각하거나 오늘날 비정규직화에 맞서 싸우는 KTX여승무원과 같은 여성계, 노동계 영웅의 실천을 생각하면, 신자유주의와 전쟁, 환경 파괴에 대한 전세계적인 반란의 선두에 결국 바로 한국의 무산 계급이 서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듭니다. 자본주의와의 80여년 동안의 전투에서 흘린 피와 눈물은 결국 씨알이 되어 새로운 사회의 새싹이 될 것입니다.
은세계의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참고 도서**
〈단재신채호 전집〉, 형설출판사, 1998
강만길 편, 〈신채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0
이광린, 신용하 편저, 〈사료로 본 한국 문화사〉, 근대편, 일지사, 1984.
유영렬,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일조각, 1997.
"[Survey] Young Koreans Down on Modern Society", - 〈Korea Herald〉, 2003, June 14:
http://kn.koreaherald.co.kr/SITE/data/html_dir/2003/06/14/200306140023.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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