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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수비대에 잡혀간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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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국경수비대에 잡혀간 사연

서길수 교수의 '알타이 답사기' 〈21〉

***국경수비대에 잡혀간 사연**

비가 계속 내려 사진 몇 장 찍고 철수하여 야영 예정지로 왔다. 마침 비가 그쳐 텐트를 치기 시작하였다. 텐트를 거의 다 쳤는데 멀리서 차 소리가 난다. 우코크에서 처음 듣는 차 소리다. 틀림없이 국경수비대 아니면 술 취한 운전사일 것이다. 예상대로 군용트럭이 나타났다.

"우리를 잡으러 온다."

풀르스닌 교수가 약간 두려운 목소리로 내뱉는다. 내가 "우리를 잡으러 오면 지프차로 오지 저렇게 큰 차가 오겠느냐?"고 묻자 "러시아는 그렇다"고 짧게 대답한다. 국경수비대가 우리를 검문하러 온 것이다. 날카롭게 생긴 장교 1명과 허름하다는 생각이 드는 사병 3명이 내려 우리를 검사할 태세에 들어간다. 사병 2명이 여권을 거두어 기록하는 동안 1명은 언덕 위에서 총을 들고 사주경계를 하는 삼엄한 분위기다. 장교는 여유 있게 우리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텐트를 모두 거두어 우리를 따라 오십시오."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를 부대까지 연행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국경선 남방한계선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텐트를 거두어 싣고 출발했다. 큰길까지는 내가 운전석 옆에 앉아 왔는데, 갑자기 차를 세우고 풀루스닌 교수가 오더니 나를 뒤로 가라고 한다. 그러더니 장교가 내가 앉았던 운전석에 앉고 우리는 모두 뒤의 짐칸에 탔는데, 문 쪽에 개머리판이 없는 아까바 소총을 든 병사들이 앉아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완전히 포로가 된 것이다. 부대까지는 꽤 먼 거리다. 바로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눈 덮인 산 아래인데 악-알라하강 가에 자리 잡고 있다.

1993년 백두산 서쪽을 오르다 국경수비대에게 걸려 3시간 동안 갇혀 있던 기억, 1999년 대흥안령을 넘다가 몽골과의 국경지역을 통행증 없이 다녔다고 해서 잡혔던 기억, 2000년 단동 호산산성을 조사하다가 압록강을 지키던 국경수비대에게 걸려 필름을 빼앗겼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여기서는 "큰일 났다"는 두려움보다는 "국경수비대와 국경지역을 가볼 수 있다"는 기대감도 생긴다. 무엇보다도 필름이나 비디오 촬영기를 검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고 없이 국경지역을 들어온 불법자 취급은 받아도 중국에서처럼 스파이 취급은 당하지 않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생각이지 풀루스닌 교수는 그렇게 편안하지 않다.

저녁 8시가 다 되어 우리가 도착한 곳은 20채 남짓한 제법 규모를 갖춘 부대다. 부대 앞에 차를 세우고 풀루스닌 교수가 부대에 들어가 조사를 받는 동안 우리는 비에 젖은 옷을 바꿔 입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우리 차를 중심으로 두 명의 군인이 총을 들고 사주경계를 하고 있다. 부대에서는 소나 말을 키우고 있다. 저녁이 되자 병사들이 소와 말들을 몰고 들어오는데 송아지들도 있다. 중국 군대처럼 여기도 멀리 떨어진 부대에서는 스스로 목축을 해 자급자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말이 중요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에 모든 병사가 말을 탄다고 한다. 소는 우유와 고기를 제공한다고 하니 유목민족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널찍한 고원에는 자연 잔디 축구장도 있다.

얼마 뒤 부대 앞 강가에 텐트를 치라는 전갈이 왔다. 우리는 비로소 텐트를 치고 저녁밥 준비를 했다. 모두 힘든 하루였지만 아무도 불평이 없다. 모두 누가 시켜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택해서 왔기 때문이다. 저녁밥을 마칠 즈음 부대에서 풀루스닌 교수를 다시 부른다.

그는 "서길수 교수, 당신은 기행문을 쓰는 데 아주 좋은 소재를 갖게 된다지만, 나는 나중에 연구소에 돌아가면 다시 불려 다니고 좋지 않는 기록이 남는다"고 하면서, 꾸바레프 교수가 이런 상황을 미리 얘기해 주지도 않았고 통역을 맡은 사람이 갑자기 총책임자가 되어 뜻밖의 곤혹을 치루고 있다고 불평한다. 원래 국경지대를 들어오려면 뚜엑따에서 신고를 하고 와야 하는데 신고를 하지 않고 그냥 왔다는 것이다. 상부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한 현장의 군인들은 아무 인적도 없는 우코크에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우리는 저녁밥을 먹고 풀루스닌 교수가 돌아오길 기다리다 지쳤다. 할 수 없이 텐트에 들어가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잘 준비를 했다. 시간은 이미 10시가 넘었다. 한참 뒤에야 돌아온 풀루스닌 교수가 "잘 됐다.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라는 명령이다"라고 말한다. 추방령이 내린 것이다. 확실한 신분의 풀루스닌 교수가 일까지 능숙하게 처리한 결과다. 덕분에 우리는 일찍 잘 수 있었다.

이렇게 아주 특별한 곳에서 아주 특별한 밤이 깊어간다.

(그림 19) 악-알라하 강과 중국 국경을 이루는 설산 사이에 국경수비대 병영이 보인다.

7월 8일(화), 아침 4시 반에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오늘은 날씨가 갤 것 같다. 5시가 되니 안개가 조금 끼며 주변 경치와 어울려 환상적인 우코크의 아침을 연출한다. 어제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군인들이 키우는 황소 한 마리가 풀루스닌 교수의 텐트를 받은 것이다. 내 텐트에도 황소 그림자가 나타나서, 재빨리 나가 쫓아버려 공격을 차단했다. 좀 고약한 손님맞이라고 생각했는데, 달리 생각하니 평소 자기들이 다니던 길에 우리가 자고 있었던 것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텐트에서 50m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이것이 엊저녁의 공포분위기였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사주경계를 하고 있던 군인들이 완전히 철수하고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어 있었다. 아침 산보도 하고, 볼일도 보고, 세수도 하고, 강가로 나가는데 우리가 야영한 주위가 온통 꾸르간으로 깔려 있다. 우리는 고대 알타이인들의 공동묘지에서 잠을 잔 것이다.

7시부터 9시까지 우리는 느긋하게 아침밥 먹고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하늘은 우리에게 우코크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짙은 안개가 밝은 햇살에 걷히면서 우코크 고원이 산뜻하게 드러난 것이다.

"텐트에서 50m 밖으로 벗어나면 안 된다."

어제 저녁 불안해하던 풀루스닌 교수가 농담까지 한다.

"제네바협정에 따르면 포로에게는 식사를 제공하게 되어 있다."

"이 빵은 군인들이 준 것이다."

"그럼 그 빵만큼만 포로였다."

모두들 해방감에 한마디씩 한다. 병영을 떠나오며 병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몇 번 정차하여 사진을 찍었다. 우코크 고원을 흐르는 악-알라하강과 작은 호수들을 근경으로 멀리 흰 눈이 덮인 봉우리들을 꼭 찍고 싶었는데 자꾸 군대 병영이 들어와 걸린다. 가장 좋은 경치는 그쪽 뿐인데 한 번 포로가 되고 난 뒤 겁이 나서 함부로 사진 찍기가 망설여졌다.

오전 동안 내내 얼음공주가 출토된 꾸르간을 중심으로 주변의 유적들을 조사했다. 고고학도들은 GPS 작업을 하고, 나는 사진과 비디오로 기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평지라서 전체사진을 찍기가 어려웠는데 다행히 우리가 타고 간 대형 특수차 위에 올라가 좋은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다.

***자연 냉동실에 보존된 고대 유물**

알타이에 사는 사람들에게 우코크는 "세상의 끝"을 뜻한다. 민간신앙에서 우코크는 지상이 아니라 하늘로 가는 입구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알타이 사람들은 이곳에서 소리를 치는 것은 크고 강한 영혼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한 대상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였다.

해발 2,000m가 넘는 우코크의 기후는 아주 혹독하다. 24시간 기온의 변화가 아주 크고, 바람을 동반한 비가 자주 내리며, 한 여름인 7월에도 눈이 남아있는 곳이 있다. 이 지역은 현재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고 국경수비대만 가끔 순찰을 돌고 있어 신과 사람들에게 잊힌 공간으로 남아있다.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덕분에 우코크에는 항상 짐승, 새, 물고기들의 천국이 되고 있다. 여름철 우코크의 호수는 오리, 거위, 학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혹독한 겨울에도 멋진 겨울 목장이 된다. 강한 바람이 눈을 협곡과 낮은 지대로 옮겨주어 동물들에게 겨울 생계를 위한 충분한 먹이를 찾을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1990년 이후 우코크의 이런 혹독한 기후조건이 인간 역사를 연구하는 데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 밝혀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혹독한 기후조건이 많은 고대의 유적들을 얼음으로 얼려 잘 보관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 냉동실은 자연 방부제가 되어 다른 지역에서는 보존이 불가능한 철기 시대의 가죽, 나무, 펠트, 털 같은 독특한 물건들을 현재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이런 것을'알타이적 현상'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왜 무덤 안에 얼음이 얼어 있었을까? 그것은 2가지 요소가 운 좋게 결합된 결과이다(국립중앙박물관, 『알타이문명전』, 1995).

첫째는 산지 알타이의 모진 기후 때문에 추운 겨울이 오래 가고, 여름은 그 기간이 짧아 땅이 완전히 녹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빠지리끄 고분의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귀족을 묻기 위해서는 깊이 6m에 크기가 7m× 7m 쯤 되는 네모꼴 구덩이를 파고, 통나무를 써서 큰 널방을 만든다. 마치 시베리아에 유행하는 통나무집과 같은 생김새다. 그리고 이 통나무 방 위 구덩이는 돌덩이들을 가져다 가득 채운다. 널방 남쪽 벽 가까이에는 나무로 만든 널(棺)이 놓이는데 그 관 안에 묻히는 사람의 주검을 안치한다. 더러 관이 2개가 있는 경우도 있다. 무덤구덩이 북쪽에는 말을 묻었다. 이 무덤구덩이를 덮은 돌과 무덤 안 널방은 모두 틈새가 있어 물들이 쉽게 스며들게 되고 머지않아 널방은 완전히 물로 채워지게 된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바로 물이 얼고, 다음 해 여름이 돌아와도 그 얼음은 녹지 않고 영원히 냉동상태가 된다. 따라서 천천히 물에 잠긴 주검과 껴묻거리들은 얼음 속에 잠기게 되고, 그 얼음은 껴묻거리를 그대로 보존시켜 주는 것이다. 빠지리끄 꾸르간은 보통 강가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데 우코크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된다. 우코크에서는 2개의 발굴팀이 20기가 넘는 빠지리끄 꾸르간을 발굴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껴묻거리가 풍부한 것도 있고 평민들의 꾸르간처럼 껴묻거리가 빈약한 것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당시 사회의 평민에서 부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든 계층의 무덤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바로 영구동토가 빈약한 평민의 무덤도 잘 보존해 주어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코크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무덤들은 크기가 작은 평민들의 것이다. 무덤 위의 돌무지는 얼핏 보면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 같지만 사실 그 구조는 꽤 복잡하다. 돌무지는 아주 큰 돌, 작은 자갈돌, 중간 크기의 강돌로 크게 3층으로 이루어진다. 주검은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한다. 무덤은 보통 2m쯤 깊게 파고, 주검을 통나무로 짠 널 안에 넣어 널방에 안치한다. 널은 종족이나 가족의 신분에 따라 나무로 만든 널받침을 이용하는 방법, 나무판자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놓는 방법, 그냥 바닥에 안치하는 방법 등이 있다. 함께 묻힌 말의 수는 신분과 부를 나타내는데 평민들의 무덤에서는 묻지 않는 경우도 있고, 드물게 2~3마리를 묻는 경우도 있다. 묻힌 말들은 안장이 씌워지고 굴레가 채워진 상태로 평소에 타고 다니던 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알타이에서 말은 인생의 동반자나 친구와 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분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봉분에 쌓인 돌덩이들을 모두 손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 첫 번째 큰 작업이다. 돌을 걷어낸 땅 밑이 얼어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행운이고 성공적인 발굴을 예고한다. 만일 얼음으로 찬 무덤일 경우 아주 원시적인 작업을 동원해서 그 얼음을 녹인다. 바로 뜨거운 물을 부어 녹이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모든 껴묻거리들을 꺼내서 천천히 말리기 위한 특별한 용액 속에 담는다. 전문적인 보존과학자들의 작업을 거치면 유물들은 원래의 모습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높은 신분을 가진 이들의 주검은 먼저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낸 다음 풀이나 양털을 채우고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로 꿰맸다. 머리는 구멍을 뚫어 골을 꺼낸 다음 흙, 양털, 풀 같은 것으로 채웠다. 장례식은 죽은 뒤 바로 하지 않았다. 반년이나 그 이상의 기간이 지난 뒤 주검을 땅에 묻었다. 만약 가을에 죽으면 이듬해 봄이 되어야 주검을 묻을 수가 있었다.

그림 20) 얼음공주가 묻힌 꾸르간
그림 21) 얼어있는 널(『알타이 문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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