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게 떠난 알타이 탐사 대장정**
7월 1일(화) 아침 8시 반, 만둣국(삐리메니)과 겔러그로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이 집 안주인이 들어온다. 엊저녁 어떻게 보냈느냐고 물었더니 "밤새 오비강가를 걸어 다니며 함께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학생답게 아주 경제적인 뒤풀이를 한 것이다. 학위증을 보여주는데 자부심이 대단하다.
까차는 지금까지 8살짜리 남자아이와 5살 난 딸을 가진 주부이면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는데 이제 중학교 영어선생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중학교 선생의 월급은 1000 ~ 2500 루블(33- 83 달러)밖에 안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1000루블 받다가 고참이 되면 2500루블을 받는데 그것 가지고는 살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러시아에는 남자는 선생을 하지 않고 여자들뿐이라고 한다.
"선생은 돈을 많이 버는 남편이 있거나 좋아서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러시아의 물가 수준에서는 한 달에 최소한 1만 ~ 2만 루블 정도는 있어야지 생계가 가능하다고 하며 자신은 다행스럽게도 남편이 한달에 보통 15,000 ~ 20,000 루블을 벌어오기 때문에 살기에 큰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학교에서 수학이나 물리는 아무래도 남자 교사가 가르쳐야 하는 과목인데 남자 교사가 없는 형편이라 러시아 교육의 질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선생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 즉 다른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선생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학교에서는 능력을 묻지 않고 학위증만 있으면 바로 취업이 된다고 한다. 가려 뽑으면 선생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은 다르다고 했다. 현재 대학은 30%가 무료로 다닐 수 있는 곳이고 70%가 돈을 지불하고 다니는 사립학교라고 하는데 사립대학에 우수한 교수들과 학생들이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사립대학 교수의 한달 수입은 8만 루블 정도인데 수입이 그 이상 되는 교수들도 많다고 한다. 과외 기회가 많은 어학 분야 특히 영어 교수들은 시간당 200루블 정도의 과외비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보통 도서관, 상점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한달 수입이 2000~3000루불 가량 된다고 하니 일부의 계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생활에 필요한 액수의 절반도 못되는 수입으로 한 달을 살고 있는 셈이었다.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이전 냉전시대의 체제를 그리워하는 것도 이런 사회의 양극화 현상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까차는 러시아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초, 중, 고의 공교육이 멍들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며 자기는 훌륭한 교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했다. 그래도 이런 의식 있는 러시아 젊은이가 있어 러시아의 미래도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예를 들면서 경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교사들의 대우도 좋아질 것이라고 위안의 말을 했지만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11시가 되자 꾸바레프 교수가 서진수 교수와 화동이를 싣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까차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고고·민족학연구소로 향하였다. 연구소를 둘러보고 또 한편으로는 이번 답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차로 운반하기 시작했다. 이번 답사는 한국에서 온 탐사단 4명, 우리를 안내할 꾸바레프 교수, 통역을 담당할 플루스닌 교수, 짐차를 운전할 유리 할아버지, 요리사인 이리나씨까지 모두 8명이다. 자동차 2대가 출발한다. 러시아제 UAZ 4륜구동 8인승 승합차 1대, 여기에 탐사단 6명이 타고 간다. 차 뒤 짐칸에는 우리들의 배낭을 비롯한 중요 물품들을 실었다. 유리 할아버지가 모는 UAZ 4륜구동 2톤 트럭에는 앞에 이리나가 함께 탄다. 제법 큰 짐차에는 텐트, 음식, 침구 같은 큰 짐으로 제법 꽉 찬다. 8명이 3주간 먹고 자는 살림이 이렇게 많은가 할 정도이다.
점심식사 전까지 출발 준비를 다 마치고 꾸바레프 교수 연구실에 잠시 들러 책 몇 권을 증정 받고 기념 촬영을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3시가 다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출발은 다시 지연되었다. 나는 어제 하루 종일 준비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일찍 출발할 줄 알았다. 그런데 11시가 넘어 연구소에 와서 그 때야 짐을 싣기 시작하더니 점심 먹고 나니 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본국인을 막론하고 살고 있던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하게 되면 도착 후 3일 안에 등록을 해야 한다. 현재는 내국인은 신고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외국인의 경우는 신고하지 않고 적발되면 많은 벌금을 내야 한다. 나는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이다. 더구나 한국 사람들의 검문은 심하다. 중국 사람으로 잘못 보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국인들이 불법체류를 하고 있다. 경찰들의 목표는 중국인을 잡는 것이다. 그들이 중국인을 붙잡는 것은 잡아서 출국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뜯기 위해서다. 외국인 등록은 보통 호텔에서 대행해 준다. 그런데 우리는 이틀간이나 민박을 했기 때문에 만일 등록을 하지 않고 가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확실하게 하고 가야 한다.
나는 이런 일을 미리 예상하고, 호텔에서 잠은 자지 않지만 비용에 호텔비를 포함시켰다. 등록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되지 않은 것이다. 급하게 아는 호텔에 사정해서 일을 처리하려는데, 우리가 한국에서 관광비자를 받을 때 아시아 최고 동쪽 도시 블라디보스톡 여행사 초청장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초청장을 발행한 곳에서 호텔로 초청장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소가 다시 초청장을 발행해서 호텔에 팩스로 보내고 어쩌고 하는데 긴 시간이 걸렸다. 기다리는 시간은 덥고 따분했다. 온도계로 차 안팎의 온도를 측정해 보니 차안이 섭씨 33.6도, 그늘도 27.5도다. 화동이는 답사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버린 표정이었다.
오후 4시 40분 드디어 알타이 답사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막상 주변의 타이가에서 나오는 향긋한 소나무 냄새를 쭉 벋은 시베리아의 도로를 달리니 기분이 아주 상쾌해진다. 밀밭, 감자밭, 메밀밭이 계속되고, 노란색, 하얀색, 감색 같은 갖가지 이름 모를 꽃들이 길가에서 우리를 반긴다. 8명의 대원에 두 대의 차, 최고의 알타이 전문가, 교수 통역관, 시베리아에서 가장 노숙한 운전기사, 그리고 지리탐사대 대원까지 한 최고의 요리사, 규모가 엄청나게 큰 탐사단은 아니지만 그래도 막강하게 인적 물적 요건을 갖춘 탐사대인 것이다. 지금까지 80개국을 여행하고, 100명이 넘는 답사단도 인솔하여 보았지만 이렇게 짜임새 있는 탐사는 처음이다.
4시간 쯤 달려 8시 30분, 노보알타이스크(바르나울 입구)에서 10분쯤 더 가니 클류치라는 작은 마을이 나오고 이곳 까페에서 저녁밥을 먹었다. 9시 30분이 되니 서서히 해가 넘어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밥을 먹고 바로 출발하여 계속 달렸다. 원래 목적지였던 블라니하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반이 다 되어서이다. 큰 간선도로에서 5㎞쯤 벗어난 마을인데 인공호수 옆에 있는 집이다. 7시간 정도 달려 왔으니 많이 온 것 같지만 우리가 탐사할 목적지까지는 아직 멀었다. 내일도 계속 달려야 하고 모래도 달려야 한다. 시베리아 평원은 미국과 유럽을 합친 만큼 넓다고 하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오늘 우리가 묵을 곳은 꾸바레프 교수의 고모댁이다. 그러니까 이곳이 꾸바레프 교수의 고향인 것이다. 할머니는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온 불청객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원래 캠핑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고모댁에서 하룻밤 신세 지기로 한 것이다. 대신 노인 혼자 살고 있어 청소나 세탁 같은 어려운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침대를 쓰지 않고 모두 침낭을 가지고 바닥에서 자기로 했다. 늦었지만 내일 일정에 대해 논의를 한 뒤 11시 반쯤 잠을 청했다.
***알타이의 동맥 추야도로**
7월 2일(수), 5시 조금 넘어 일어나 기록하고 나니 예고했던 기상시간 7시가 다 된다. 조용히 나와 할머니가 손수 가꾸는 텃밭을 둘러보았다. 제법 넓은 텃밭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 과일나무와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울타리 안에는 딸기, 당근, 감자, 참외, 무, 양파, 토마토, 오이는 물론, 파, 마늘, 고추, 호박까지 없는 것이 없고, 접시꽃, 나리꽃, 민들레 같은 꽃들도 규모 있게 자리들을 잡고 있다. 아침식사는 이른 봄에 나는 알타이 꿀, 치즈, 소시지, 빵으로 간단히 때웠는데도 출발은 9시가 다 되어서야 가능했다. 나의 답사 스타일은 아침 일찍 떠나는 것인데 여기서는 이것도 빠른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10시가 되어야 시작된다고 보면 속이 편하다.
출발 전에 할머니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약간은 수줍지만 속정 깊은 할머니의 소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골 마을은 늘 이런 때 묻지 않은 정이 느껴져서 좋다. 동네를 지나는데 쿠바레프 거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꾸바레프 교수가 이 마을에서는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구나 감탄을 했는데 본인 때문이 아니라 시민혁명 당시에 일가 중의 유명한 사람이 이 마을 출신이라 꾸바레프 거리가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12시 정각에 우리는 알타이공화국의 수도인 고르노 알타이스크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먼저 박물관을 관람하기로 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 꾸바레프 교수는 끝까지 가지 않겠다고 하여 결국 우리들만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사실 꾸바레프 교수는 고르노 알타이스크에 들리는 것을 반대했으나 답사단이 중요한 박물관을 지나칠 수 없어 들린 것이다.
나는 작년에 와서 만난 사람들과 찍은 사진을 나누어주는 일도 방문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사진 가운데 대학박물관의 부관장인 세르게이 교수의 사진을 보자 "경쟁자"라고 한다. 꾸바레프 교수가 우리를 안내한다고 했을 때 세르게이 교수가 자기와 하기로 되어 있다며 방해를 했다고 한다. 자신이 계획서를 보내지 않고 메일도 통하지 않아 답사 파트너가 바뀐 것이지만 막상 허가를 신청할 때 상당한 이의를 제기한 모양이다. 꾸바레프가 제시한 답사 비용이 파격적으로 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실 이번 답사의 모든 비용은 단 한 푼도 다른 기관의 보조 없이 참가자가 모두 지불하기 때문에 비용이 너무 높으면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꾸바레프 교수는 정말 실비만을 요구했고, 우리는 일반 여행에서 3주간 드는 비용 정도로 탐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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