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이에서 만난 동포**
오늘은 알렉스가 아주 특별한 서비스를 한다고 한다. 알타이에 사는 고려인을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보너스다. 우선 차를 몰아 시내 한 복판에 있는 병원으로 간다. 이 병원의 한 의사가 고려인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성공한 고려인으로 덕망이 있는 친구라고 자랑이 대단하다. 알렉스는 당당하게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실망스런 소식을 전한다.
"고려인 의사가 호흡곤란 상태가 와서 치료중이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다른 고려인을 안다는 것이다. 나도 어떻게든 알타이까지 왔으니 같은 동포를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 더 찾아가 보기로 했다. 알렉스는 바로 어떤 단독주택 앞에 차를 대더니 대문을 두드린다. 안에서 웃통을 벗은 주인이 나오는데 영락없는 우리 동포다.
"조선 사람이요?"
나를 보더니 유창한 우리말이 나온다.
김규식(러시아 이름 니꼴라이), 73세, 그러니까 1929년생이다. 김규식씨는 1947년 18세의 나이로 조선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간다. 1947년이면 해방이 되고 나서 2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이다. 블라디보스톡에 간 김규식 씨는 광산에서 일하다 1952년부터 산판에서 5년간 트랙터를 운전했다.
그 뒤 29살의 청년 김규식은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이곳 알타이로 왔다. 1956년에 알타인과 결혼했다는 것을 보면 아마 부인을 따라 온 것으로 보인다.
그림 24) 김규식 씨와 손녀
알타이에 와서는 트랙터 회사에서 수확기계 운전을 배워 1981년(52세)까지 일하고 정년퇴직을 했다. 그 뒤 비스크에서 3년간 양파 경작을 하는 등 일을 하다가 러시아가 개방이 되자 1992년부터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일찍부터 장사에 눈을 뜬 김규식 씨는 사업 수완이 있어 지금은 자그마한 가게를 3개나 가지고 있다.
제법 넓은 마당에는 한쪽에 거의 10m 이상 길게 장작이 쌓여 있고 하얀 승용차도 있다. 손녀 '아냐'와 사진을 찍으며 서로 볼을 대고 바라보는데 다른 나라 사람과의 사이에 낳은 아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닮았다. 결국 고아시아인으로부터 계산하면 알타이인도 같은 핏줄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이곳 고르노-알타이스크에는 우리 동포가 20명 남짓 사는데 대부분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다. 김규식 씨는 현지에서는 경제적으로 제법 성공하여서인지 손전화 번호를 써주면서 다음에 오면 꼭 다시 찾아오라고 당부한다. 함께 식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저녁 기차표를 사가지고 왔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아직도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미그기 조종사 출신의 운전수**
알렉스가 모는 22년 된 차는 탱크 소리를 내며 시내 북쪽의 두가야산 중턱으로 올라간다. 매연을 시꺼멓게 품어내지만 개의치 않는다. 안전벨트는 물론 고장이다. 경찰이 멀리 보이면 손으로 앞만 가리고 있다 지나치면 바로 치워버린다. 차는 고물이지만 운전사 알렉스는 51세로 꽤 젊은 편이다. 텔레츠코예 호수에서 태어나 일찍이 소련 공군에서 유명한 조종사였다고 한다. 공군에서 MIG 15에서 MIG 21까지 모든 전투기를 몰아보았고 제대하고는 민항기 조종사까지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 고도계는 비행기에서 떼어온 것이다."
7000시간 무사고 비행 조종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는지도 모른다. 알렉스에게 공군 조종사로서의 추억과 긍지는 대단하다. 지금도 자동차 뒷좌석 위에는 공군 파일럿 모자가 놓여 있을 정도다.
그림 36) 왕년의 소련군 파일럿
산 중턱에 내려 다차들이 들어서 있는 산길을 올라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다차에는 참외, 포도 같은 남방 식물들도 자라고 있었다. 고르노알타이스크 전체 사진을 찍고 도시의 주변과 파노라마를 감상하기 위해서다. 시내는 평원이 없고 좁은 계곡에 집들이 꽉 찬 것처럼 막혀 있는 인상을 주었다.
시내로 내려와 간단히 시내 구경을 했다. 시내 한 복판에 있는 레닌 광장만 보면 사실상 다 본 것이다. 레닌 동상, 드라마극장(수리중), 알타이호텔, 인민위원회 건물 등이 모두 한 눈에 보인다.
알타이대학에 갔다. 처음 간 곳은 사범학교인데 여학생들이 많다. 알타이는 여자 인구가 많다고 한다. 남녀 비율이 1:1.2라고 하니 좀 심각한 것 같다. 학생들이 여학생 위주라서 주로 교육, 가정, 수의사가 인기 있는 과목이라고 한다.
고고학과가 있는 대학에 가서 우선 대학박물관을 찾아갔다. 마침 고고학을 전공하는 세르게이 부관장(1954년생)이 있어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박물관을 수장고, 작업실까지 아주 자세하게 안내해 주었다. 세르게이 교수는 바위그림 전문가였다. 현재 께메로보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오기 전에 톰강의 피사니짜 바위그림을 보러 갔을 때 께메로보대학 이바노비치 선생이 최고 전문가라고 했는데 바로 세르게이 교수의 지도교수라고 한다.
세르게이 교수에게 알타이 바위그림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학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아카뎀고로독의 고고민족학연구소의 꾸바레프 교수라고 한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앞으로의 공동연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5~6명이 2주 정도 작업하면 바위그림 한 사이트 정도는 조사가 가능하고, 공동으로 책을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르게이 교수는 내년 함께 공동조사를 하자며 박물관에 가서 탁본(미깔리엔또)도 보여주고 복사도 해 주었다.
록음악을 좋아한다는 49세의 고고학자는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내가 알타이의 바위그림에 대한 자료를 좀 구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 다차에 있다고 해서 7㎞나 떨어진 다차에 갔으나 논문이 없었다. 다음에 논문과 공동발굴 계획서를 보내주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림 37) 골짜기 속의 수도
그림 38) 두가야산의 다차
그림 39) 시내 중심가 레닌광장
그림 40) 대학박물관 부관장
아직도 한 가지 일이 더 남았다. 어제 축제장에서 만난 방송국 관계자를 다시 만나 알타이 전통 음악 CD를 사기로 했기 때문이다. 방송국도 시내 한 복판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 방송국에서 사라져 가는 알타이 소리꾼들로부터 수집한 "샤먼의 노래"를 샀다. 이 CD는 출판된 것이 아니라 복사를 해서 받은 것이다. 한국과 방송프로를 합작해서 만들기를 원했다.
2층에 있는 스튜디오를 찍으러 갔는데 "한국에서 왔습니까?"라고 한국어로 말을 거는 직원이 있다. "아버지",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정도의 회화를 하는데 현재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내 명함을 보더니 '알타이에 고구려라는 마을이 있다"는 것이다. 지도에 보니 몽골과 가까운 국경지대에 "코코랴(Kokorya)"라는 마을이 있었다. 내 명함에 고구려(Koguryo)를 보고 바로 비슷한 지명을 찾아내는 재치가 아주 돋보였다. 이처럼 한국말을 배우며 한국에 관심을 가진 친구가 마지막 한국말 한 마디를 더 한다.
"곰쓸개(웅담) 사고 싶습니다."
그림 41) 소박한 방송국 스튜디오
알타이 방송국에 가서 어제 만난 피디로부터 '샤만의 노래'라는 시디를 샀다. 앞으로 한국과의 교류를 강력하게 원했다.
시간은 이미 6시를 넘고 있다. 비스크에서 8시 기차니까 서둘러 가야 한다. 버스터미널에 와서 200루블짜리 합승을 하기로 했는데 손님이 없다. 할 수 없이 400루블을 주고 출발, 생각보다 빨리 7시 40분 비스크역에 도착했다. 시간이 30분쯤 남아 있어 저녁 요기를 하기로 하고 어제 아침밥 먹던 식당에서 또 우즈베키스탄 요리를 먹었다. '플로브' 라는 메뉴인데 고기와 당근을 넣어 만든 볶음밥인데 큰 마늘을 넣는 것이 특징이다.
저녁 8시 15분 비스크를 츨발한 602열차는 다음날 아침 6시 55분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 3박 4일이라고 하지만 기차 안에서 두 밤을 잤기 때문에 사실상 알타이에서는 이틀간의 시간 밖에 없었다. 정말 숨 가쁘게 뛰어다닌 이틀간의 알타이 여행이었다. 사실상 이번 알타이 여행은 여기서 끝이 난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사실은 더 기록해 두어야 하겠다. 바로 이때부터 3년간 계속 알타이를 찾게 된 실마리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바로 꾸바레프 교수와의 만남이다.
노보시비르스크에 돌아와 박사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3개의 카드에 가득한 250장 남짓한 사진을 컴퓨터에 옮기고 작업하는 동안 박사는 여기저기 전화하느라 바쁘다. 아카뎀고로독에 가서 꾸바레프 교수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기 위해서다. 마침 우리가 만나려고 하는 꾸바레프 교수가 소속된 고고민족학연구소에 에스페란토 회원이 있어 특별히 부탁을 해 놓았다고 한다. 11시쯤 고고학연구소에 도착했다. 바로 1997년 발해 문제로 찾아왔던 곳이다.
〈그림 42〉 고고민족학 연구소 정문
〈그림 43〉 꾸바레프 교수 운명적인 만남
이 곳에서 철학을 가르친다는 유리 플루스닌 교수가 반갑게 맞아준다. 12년 전에 내가 이곳에 방문했을 때는 초보자라 나에게 말을 걸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동안 공부를 했다면서 에스페란토로 어렵지 않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유리 교수는 암각화 방면에서 세계적인 권위자인 블라지미르 꾸바레프 교수와의 만남을 주선해 놓았다. 모두가 아침에 시비리체프 교수가 전화로 지시해 놓은 것이다. 꾸바레프 교수는 산뜻하게 귀족풍을 풍기면서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국제적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덕분에 저서도 받고 시베리아에서 발굴되어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던 얼음공주(미이라)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소장된 박물관도 구경할 수 있었다. 시베리아 고고학의 총본산답게 아주 수준 높은 유물들을 잘 진열해 놓았다. 발해 유물은 정리 중이라고 해서 보지 못했다.
꾸바레프 교수는 오늘 오전 일본 학자들과 함께 알타이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리 플루스닌 교수가 특별히 부탁하지 않았다면 만남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만남이었지만 우리는 어느새 편한 마음으로 박물관을 구경하면서 계속 내년부터 공동으로 알타이 탐사가 가능한지에 대해서 논의했다. 꾸바레프 교수의 답변은 아주 간결했다.
"내년에 서길수 교수가 알타이 탐사를 온다면 나는 기꺼이 귀하의 운전사 노릇을 하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 둘 것이 있다. 처음 고르노 알타이스크의 세르게이 교수와 함께 공동조사를 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보내준다던 발굴 계획서도 보내지 않았고 귀국한 뒤 계획을 세우기 위해 몇 번 이메일을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그러나 꾸바레프 교수는 신속하게 계획서와 예산을 보내왔고, 더구나 말이 통하는 에스페란티스토가 있어 메일을 몇 번 주고받으니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매년 20일씩 2년간 알타이를 거의 망라하는 탐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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