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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 最古의 도시 비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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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알타이 最古의 도시 비스크

서길수 교수의 '알타이 답사기' 〈3〉

***알타이 역사와의 만남**

내가 알타이와 처음 인연을 가진 것은 1997월 7월 1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발해 관계 일을 마치고 정영호 교수와 함께 알타이대학을 방문했을 때이다. 대학 캠퍼스는 시내 한 복판인 디미트로프(Dimitrov)가 66번지에 있어 찾기가 쉬웠다. 아카뎀고로독의 고고민족학연구소로부터 연락을 받은 알타이대학 총장의 정중한 영접을 받았다. 이 대학 총장 키류쉰 유리 폐도로비취는 마침 고고학을 전공한 역사학 박사였다.

국립 알타이대학(Altai State University, ASU)은 1973년 설립된 이 지역 최고의 대학이다. 11개 학부, 3개 분교, 4개 학술연구소를 갖추고 있는데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과학(경제, 정치, 사회) 같은 각 분야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시베리아 오지에 있는 대학이지만 일찍이 컴퓨터 센터가 설립되어 유럽, 아시아, 미국의 교육기관들과 공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컴퓨터 역사지도 작성 프로그램(INTAS-programme)도 포함되어 있다. 학생들은 13개 학과에 24개 전공으로 8,000명 정도이면 대학원은 37개 전공에 200명 정도가 공부하고 있다. 교수진도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 16명, 박사ㆍ교수 60명, 조교수 등 250명으로 탄탄하다.

특히 시베리아에 대한 역사와 문학, 고고학과 민족학 분야에서 수준 높은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총장의 안내로 방문한 대학 박물관에는 알타이에 관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때는 '알타이'라는 이름의 아주 간단한 호기심뿐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 때 만난 알타이의 바위그림과 돌사람은 내가 알타이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 이건 장군이 아닌가? 신라에서 난 것인 줄 알았더니 아주 먼 고대에 이미 알타이에서 시작되었군!"

들어가고 나오는 구멍이 같은 오지그릇을 보고 정영호 선생님이 감탄을 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우리 문화의 흐름을 주로 중국을 비롯하여 실크로드를 통해서 들어온 것으로만 보았는데 초원을 통해 북쪽에서 들어왔을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순간이었다.

〈그림 8〉 알타이대 박물관에서(오른쪽 정영호 교수, 왼쪽 총장, 가운데 필자)

총장이 우리를 점심까지 대접하면서 극진하게 대하는 것은 한국과 고고학적인 교류를 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흉노족에 대한 발굴과 공동연구를 적극적으로 제안했는데 총장의 추천을 받은 알타이인 고고학자는 내가 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갔을 때 거기까지 유물을 가지고 와 공동연구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그 연구원이 고고학자가 가져온 유물 가운데 화살에 뼈로 만든 기구를 낀 소리나는 화살(鳴鏑)은 그 뒤 고구려를 연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고구려 문화에 상당 부분 북방 유목민족의 DNA가 섞여 있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그쪽을 전공하고 있지 않아 바로 공동 연구를 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우리 민족의 시원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우리 쪽에서 적극적으로 공동연구를 제안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미트로프 총장과의 두 번째 만남은 6년 뒤인 2003년에 이루어졌다. 꾸바레프 교수와 알타이 대탐험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며 바르나울에서 오랜만에 호텔에서 푹 쉬기로 하였다. 마침 총장이 꾸바레프 교수와 함께 고고학을 전공한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총장도 만나고 아울러 대원들에게 대학 박물관도 보여주고 싶어 총장을 찾아갔다. 마침 이 대학의 입학 시험이 있는 날이라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가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특별히 총장님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넓고 깨끗한 총장실에서 우리를 맞이해 주는 총장은 고고학 전공한 사람답지 않은 깔끔한 행정가 스타일이었다. 아쉽게도 입학시험 중이라 박물관은 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유물들을 볼 수가 있었다. 자신이 발굴하여 보관하고 있는 유물을 금고에서 꺼내 보여주는데 정말 대단한 것들이다.

***'세상에 총장실 금고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나오다니!'**

돌로 만든 컵 같은 그릇에 새겨진 그림은 바위그림에서 본 것과 아주 비슷했는데 사용하는 그릇에 그린 것은 처음 보았다. 양 머리를 조각한 돌 방망이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부족국가 초기 추장들이 자신의 권위를 나타태기 위해 들고 다녔다는 이 물건은 지금 보아도 훌륭한 조각이요 무게가 있어 보였다. 이런 유물들은 모두 년대가 기원전 18~17세기까지 올라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기가 지은 책과 몇 가지 자료도 아낌없이 꺼내 주었다. 『남북시베리아의 신석기와 초기 청동기』라는 책은 총장이 1980~1990년 사이 직접 발굴한 신석기와 초기 청동기 유물에 관한 것으로 주로 알타이지역 오비강 유역을 중심으로 연구한 것이다.

알타이 대학을 나와 시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을 관람했다. 알타이 지역 국립 향토지박물관은 볼주노바거리 46번지(전화 : 23 47 58. 월요일과 화요일 휴일. 10시부터 17시까지)에 있는데 1823년에 개관하여 180주년을 기념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 건물은 광산연구소였던(1845~1848) 이 적색 벽돌 이층건물은 건축가 포보브가 지었다. 엔지니어이며 사회 활동가인 프롤로프(1775~1839)가 주장해 지은 이 박물관에는 의학 박사이며 자연학자이면서 알타이를 연구했던 게블레르가 처음 자연과학 중심의 소장품들을 전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유물들은 2층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고고학 유물은 좌측 전시실에 전시되고 있고 석기 시대의 유물에서부터 파지리크, 흉노, 몽고, 코샤크 문화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고학 분야는 비스크 박물관에 비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훨씬 수준이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우측 전시실은 일종의 생태학 전시실인데 각종 포유류, 조류, 곤충들의 박제와 여러 광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바르나울 박물관은 고고학 박물관이라기보다는 학생들을 위한 자연사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이 더 큰 곳이었다.

***마지막 철도역이 있는 비스크**

알타이를 기차로 가려는 사람은 노보시비르스크역에서 비스크행 열차를 타야 한다. 앞으로 기차를 타고 알타이에 갈 젊은이들을 위해 기차로 갔던 경험도 기록해 두고자 한다. 앞에서 간단히 언급했지만 2002년 60일간 시베리아를 횡단할 때 정헌준 씨 추천으로 3일간의 알타이 여행을 계획한 일정이다.

7월 13일, 하루 종일 노보시비르스크 시내를 구경하고 저녁이 되어 알타이로 가기 위해 노보시비르스크역으로 나갔다. 이번 여행에는 오랜 시베리아 친구 시비르체브 교수가 함께 하기 때문에 든든하다.

"노보시비르스크역은 시베리아에서 가장 아름답다"

시비르체브 교수의 자랑이 아니더라도 노보시비르스크역은 겉을 옅은 초록색으로 깨끗하게 칠해 은은하면서도 산뜻한 인상을 준다. 1935년생으로 나보다 9살이나 더 먹은 시비르체브 교수는 마치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처럼 들떠 아주 큰 가방을 준비했다. 시베리아 사람들에게도 알타이 여행은 그만큼 가슴 설레는 지방인 것이다. "3일간 가는 여행에 무슨 짐이 그렇게 많은가?"하고 간신히 말려 몇 가지 뺐으나 가방은 역시 큰 것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 전송 나온 사람들과 얘기하느라 늦게 역사로 들어섰는데 현지에 사는 시비르체브 교수조차 우리가 탈 기차가 서 있는 플래트홈을 찾지 못해 한참 헤매다가 출발 5분 전에야 간신히 우리 자리를 찾았다. 시베리아에서는 선로들이 많이 겹쳐 있고 기차들이 서있으면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지하나 육교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미리 서두르는 것이 좋다.

저녁 9시 30분 비스크행 601호 열차 알타이로 출발하였다. 우리가 가는 알타이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다니는 간선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가 지선을 이용한다. 10시 15분 우리 기차는 첫 역인 쎄야겔(Seyagel)역에 멈춘다. 이곳이 바로 아카뎀고로독에 있는 유일한 기차역인데 쎄야겔은 '씨를 부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카뎀고로독이야말로 씨를 뿌리는 곳이 아닌가? 기차가 다시 출발해 5분도 못 가 오비강을 막아 만든 댐, '바다'가 펼쳐진다.

우리가 하루를 묵을 4인용 꾸페에는 어머니와 12살 난 아들이 미리 와 있었다. 아춈이라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을 데리고 여행하는 이 어머니는 시아버지 집에 가는 길이다. 그러니까 아춈은 할아버지 집에 가는 길이다.

***"우리 선조는 알타이 사람이다"**

"우리 선조는 알타이 사람이다"
러시아 며느리는 남편의 선조를 이렇게 말하여 강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이러한 자부심은 단순한 입자랑이 아니고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 할아버지의 옛이야기를 마치 전설처럼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할아버지는 가축을 몰고 몽골을 다녔는데 공산주의자들이 다 뺏어가 버려 말몰이꾼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 시할아버지는 102살에 말 위에서 죽었는데 말이 주인을 태운 채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남편이 군인이라 캄차카 위 북해 쪽에서 3년을 살았고 지금은 모스크바 근방에서 살고 있다는 데 남편과 아이의 고향 알타이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알타이는 옛날 몽골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고, 이 길에 얽힌 전설은 도시에 사는 손자에게도 전설의 고향으로 생활의 자긍심이 되어 있었다.

그림 12) 아춈과 어머니

"아춈, 영어로 해봐라."

아직 서툴지만 어머니 부탁으로 몇 마디 영어를 하는 아춈은 참 귀여운 소년이었다. 할아버지 선물은 무엇을 샀느냐고 물었더니 뜻밖에 '축구 유니폼'이라고 한다. 10시 반이 되니 아춈 어머니가 자리 정리를 하겠다고 한다. 시비르체브 교수와 나는 복도로 나와 차창 밖 경치를 감상하였다. 시베리아에서는 4명이 함께 같은 꾸페를 이용하는데 남녀 구별을 하지 앟고 함께 여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잠옷을 갈아입을 때는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예의이다. 이어서 두 사람이 나오고 우리가 들어가 잠자리를 준비하고 피곤하여 바로 취침하였다.

7월 14일 아침 눈을 뜨니 7시가 다 되어 간다. 자작나무 숲에는 이미 눈부신 태양이 환하게 비치고 있다. 우리가 탄 기차는 이미 바르나울을 지나 비스크로 달리고 있다. 8시 8분 종점인 비스크에 도착하였다.

***알타이크라이의 두 번째 도시 비스크**

비스크역을 나오자마자 맨 먼저 합승 택시 운전사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고르노 알타이스크 갑니다."

"바르나울 갑니다."

역 바로 앞에 있는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서 고르노 알타이스크 가는 버스 시간표를 보고나서 오늘의 첫 일정은 비스크에 있는 박물관을 보기로 했다. 그러나 박물관은 10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고 하니 그 보다 더 먼저 우선 아침밥부터 먹기로 했다. 그런데 식사도 9시부터 한다고 한다. 15분쯤 남았으니 그 시간에 역 광장 한 쪽에 있는 장터를 잠깐 구경하기로 하였다. 과자, 옷가지 같은 잡화를 파는 곳인데 제법 과일이 풍성하다. 이곳에서는 과일이 많이 나지 않지만 카자흐스탄까지 기차가 다니기 때문에 수입과일이 많다.

그림 13) 비스크 기차역

그림 14) 비스크 버스 터미널그림

15) 역전 광장 장터

그림 16) 당근 김치

라즈만식당에 가서 간단하게 아침밥을 먹기로 했다. 카자흐족이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한다. 우선 '라즈만'이라는 우즈베키스탄 수프를 시켰다. 감자를 넣은 고기국에다 국수를 넣어 만든 것인데 이 정도만 가지고도 아침은 충분할 정도이다. "한국에서 왔으면 '까레이스키 셀러드'를 시켜야 한다."는 집 주인의 강력한 추천에 따라 소위 '한국샐러드'를 시켰다.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김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오는 김치를 보니 이전에 아카뎀고로독에서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는 우즈베키스탄식 김치이다. 쉽게 말해 당근을 채로 썰어 소금으로 절인 뒤 고춧가루와 고기를 잘게 썰어 넣은 것인데 한마디로 "못 먹겠다."이다. 우선 야채가 아니고 당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은데 완전히 시어 빠진데다 썰어 넣은 고기는 질겨서 씹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값은 아주 싸기 때문에 맛있는 라즈만으로 값을 하고도 남는다. 샐러드는 못 먹었지만 그래도 알타이에서 팔리는 김치는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만 해도 그 값은 한 것이다.

비스크를 둘러보기 전에 우선 비스크에 대한 일반적인 개황을 보기로 한다.

비스크는 바르나울에서 동남쪽으로 16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알타이 지방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구 23만 4,000명)이다. 비스크는 비야(Biya)강을 사이에 두고 서북쪽과 동남쪽으로 나뉘는데, 역, 터미널, 박물관 같은 중요한 시설은 대부분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비스크는 몽골 국경까지 알타이 전체를 관통하는 추야대로의 시작점이다. 아울러 서남쪽으로 가면 석기시대 동굴로 유명한 데니소바로 가고, 비야강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유명한 텔레츠꼬예 호수로 이어지는 알타이 교통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데니소바로 가는 도중에는 벨로꾸리하라는 유명한 휴양도시도 있다.

비스크는 성채를 새워 만든 상인도시이다. 300년 전쯤 표트르 1세의 명령으로 지어진 비스크는 알타이 도시들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처음 1709년 6월 18일 비카툰 촌락이 지어진 뒤 1910년 텔레우트 군대의 습격으로 불타 없어진다. 1918년 두 번째 비카툰 성채가 비스크에 세워지고 카쟈크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50명의 군대가 주둔했다. 1758∼1761년까지 다시 중요한 재건축을 하였다. 준가르 칸국과 중국 간의 긴 전쟁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국경지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1827년에서야 확실히 톰스크현의 군의 중심이 되었다.

19세기 중엽 비스크는 상업 발달로 번성하였다. 스텝 알타이와 산악 알타이를 잇는 상업로는 물론 더 나아가 처음으로 분지를 따라 서쪽으로 몽고까지 추야 국도를 따라 무역을 개척하였다. 이 때 상업이 두 배로 증가했다. 우선 알타이인과의 교환이 발달하고 이어서 중국 상인과의 무역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1913년 시작된 철도 공사가 1915년 완공되어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비스크 사이에 기차가 다니면서 비스크는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해 나간다. 혁명 이후 비스크는 시베리아의 주요 도시가 되면서, 1925년부터 1937년까지 시베리아 지방의 중심이 되었다. 이 시기에 설탕 공장, 베이컨 공장, 자동차 수리공장 등이 세워졌다.

택시를 타고 박물관을 찾아가는데 아직 10시가 되려면 시간이 있다. 아주 순박한 운전사는 친절하게 시내를 설명해 주었다. 50루불에 박물관까지 가기로 했는데 100루불을 주고 이곳저곳 안내를 받기로 하였다.

아침밥을 먹고 택시를 한 대 빌려 박물관으로 갔다. 비스크에는 3개의 박물관이 있다. 향토지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 그리고 추야대로박물관이다. 박물관에 간다고 했더니 택시 운전사가 처음 안내한 곳은 자연사박물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고고에 관한 박물관을 가려면 '끄라에베드체스크 박물관(향토지 박물관-역사부)'이라고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여행 중 방문하던 박물관과 좀 다른 점이 있다.

첫째, 보통 대부분의 박물관들이 월요일에 쉬는데 이곳은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간을 쉰다(개관 10:00~17:00). 둘째, 입장료(5루블)에 비해서는 비싸지만 비용만 내면 얼마든지 사진(20루불)과 비디오(60루불)를 찍을 수 있다. 중국에서 박물관을 전혀 찍지 못하던 점을 생각하면 러시아의 이런 면은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고마운 것이다. 박물관을 지키고 안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할머니들이다. 월급을 많이 줄 수 없기 때문에 거의 도우미 수준의 인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박물관은 1920~1922년 비스크에 살았던 비안끼의 발의로 개관하게 되었으며, 2층 대저택인 이 벽돌 건물은 첫 번쨰 상인조합을 만든 아싸노바의 것이었다. 알타이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바르나울 박물관보다는 이 비스크 박물관이 훨씬 좋다. 우선 알타이의 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들을 수집하거나 복제하여 전시하고 있고 전시 자체도 체계적이다. 특히 알타이 바위그림 탁본은 복도에까지 빈틈없이 꼭꼭 채워놓아 볼만하다. 이 박물관에 남아있는 금동불상에 대한 에피소드도 참 특이하다. 1941년 녹여서 무기를 만들기 위해 몽골에서 불상들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 때 박물관 관계자들이 조금 빼돌린 것이 지금 전시하고 있는 불상들이다.

박물관은 뜻밖에 충실했다. 먼저 2층에 러시아 준출 역사, 1층의 고고학실은 수많은 암각화와 돌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많은 자료를 찍었고 입구에 앉은 할머니 인상도 참 온화하였다.

그림 17) 비스크 박물관 바깥 모습

그림 18) 전시된 바위그림과 돌사람

시간이 없어 추야대로박물관을 가보지 못했는데 알타이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추야대로에 관한 역사도 한 번 가볼 만하다.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와 택시를 타려고 했으나 택시 잡기가 어렵다. 박물관이 그만큼 시내 한복판에서 떨어진 곳이고 또 일요일 아침이라 택시 타고 다니는 사람이 없다. 버스를 타고 역전으로 갔다. 버스 요금은 한 사람에 4루블(약 120원), 아주 예쁜 차장 아가씨가 4루블짜리 영수증을 꼭꼭 챙겨준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차장을 하다니'할 정도로 예쁜 차장이다.

그림 19) 비스크 시내 전경

그림 20) 슬픔의 돌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와서 가까운 곳에 있는 관광지를 몇 군데 구경하고 높은 언덕 위 아파트촌에 가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파노라마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추스뺀스까야와 지미뜨라야 라스또브스까야 사원은 밖에서만 바라보고, 비야강 가에 있는 '슬픔의 돌'도 가보았다. 강가에 세워진 큰 돌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스탈린 전체주의 치하에서 처형당한 죄 없는 희생자를 기리며, 여기 국가안전위원회 정원에서 고개 숙이며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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