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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부끄러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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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 불교의 "부끄러운 역사"

박노자-허동현 서신논쟁 3부 〈15〉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불교계와 직접적으로 인연이 닿지 않은 한국의 일반적 지식인들의 한국 불교관(觀)을 보면 두 가지 상반된 측면이 있는 듯한 감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민족 문화"를 역사적으로 구축하는 데 있어서는 불교의 위치가 중심적이다 보니 "우리 문화로서의 불교"에 대한 일종의 민족주의적인 긍지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불국사의 화려한 조화의 정신, 석굴암 본존불의 자비스러운 위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이해되는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이해 안 되는 말씀을 중생들에게 던지신 성철스님의 성자연(聖者然)한 모습…. "우리"가 "세계"에 나아가서 내세울 것이 뭔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불교라고 생각하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물론, 원래 "민족적 긍지"란 어떤 성찰도 필요로 하지 않기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들었던 신라 경덕원(재위: 742-765)의 이 대형 불사(佛事)에 관련된 정치적인 계산이 무엇이었는지, 과연 불교계로서 이렇게 전제왕권에 크게 기대어도 되는지, 불국사를 장악해온 화엄종이 중국의 당나라 시대로부터 권력자들과의 어떤 관계를 가져왔는지, 아니면 과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성철스님 이전에도 존재해왔는지, 존재했다면 누가 어떤 맥락에서 했는지에 대한 생각을 우리가 잘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 자세히 보다가는 모든 위대한 일들이 곧 그 반대로 보이기 시작하기에 "민족적 긍지"를 느끼려는 사람은 비판적 성찰을 삼가야 하는 법이지요.

그런데 이 "민족문화적인" 긍지의 또 한편으로는 – 특히 불교의 교의와 오늘날의 실상의 관계를 조금 아는 경우라면 – 또 일종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조계종에서 권력다툼이 "실력다툼"으로 번질 때마다 "조계사 근방에서의 육박전" 모습이 세계 각국 텔레비전에서 어떻게 비추어질까에 대해 두렵고 부끄러운 것이고, "대입 기도"의 사진이 외국 신문에서 실릴 때마다 왠지 항의하고 싶어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인 만큼 항의할 만한 근거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생사를 훨훨 벗어나고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초월의 상태, 즉 열반으로 모든 중생들을 인도해야 할 종교에서 생 (生)과 사후(死後)에 관련된 온갖 "재(齋)"나 기도들이 하도 많기에 이걸 보다가 종교의 진실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떤 가면극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대입 기도"야 말문이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의 일이지만, 예컨대 사찰 명부전(冥府殿)의 시왕상(十王像) 앞에서 절을 올리는 것부터 꼼꼼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 부처가 될 가능성이 나에게도 있고 내가 원래부터 부처라는 사실을 내가 급기야 인식하여 깨닫기만 하면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왜 쇳덩어리 앞에서 굽신거려야 합니까? 다음 생애에서 잘못된 곳에서 태어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미 만해 한용운(1879-1944)이 이야기했듯이, 한 나라에 법이 있는 것처럼 중생이 세세생생(世世生生) 닦는 업(業)에도 일정한 법칙이 있으니 법관에게 아부해서 죄를 면하게 해달라는 것이 상식과 법리에 어긋나는 것처럼 어떤 신격에게 어떻게 아부해도 악업을 쌓은 경우에는 어차피 좋은 과보(果報)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은 마음을 닦는 차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상 앞에서 세 번 절 올리는 것까지 하나의 관습적 의식(儀式)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도 불교의 본질과 실로 크게 관계되는 일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1913, 〈조선불교유신론〉: "불교에서 숭배하는 塑繪", "불가의 각종 의식").

만해 한용운의 이 말씀이 세상에 들리게 된 지 곧 한 세기가 될 것인데, 불교를 인식하는 우리의 수준이 과연 크게 향상됐던가요? 내 마음 밖에 어느 곳에도 부처가 없다면 내 마음을 닦고 나와 둘이 아니고 하나인 중생들의 마음이 잘 닦아지도록 도와주고, 중생들이 악업을 짓게끔 만드는 외부적인 환경을 고치도록 노력하는 것이 불교일 터인데, 그러한 불교를 과연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까?

어쨌든 사찰이 "문화재", "국보"가 되고 "템플 스테이" 같은 이름으로 오리엔탈리즘적 호기심에 찬 구미 관광객에게 잘 팔리고, 드디어 "세계문화유산"이 되면 될수록 왠지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 사찰에서 행해지는 일들이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한 의심들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여담을 해도 될까요? 제가 몇 년 전에 안동에서 답사를 하면서 안막동의 치암고택(恥巖故宅)에서 며칠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치암", "부끄러움의 바위"…. 그 이름의 연유부터 대단히 궁금했는데, 주인 되시는 분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 조상이 되시는 이만현 선생이 왜적(倭敵)에게 나라가 망하자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와병 중에 병사하셨는데, 선비들이 나라를 망하게끔 놔둔 데 대한 부끄러움을 크게 느껴 아호를 "치암"으로 하셨다고 하시더랍니다. "사회책임"이라는 차원에서 이 이야기가 꽤 이상적으로 들렸는데, 제가 부끄러움으로 병사할 위인은 되지 못하지만 평상시에 학술논문 등의 형태로 쓰는 불교사에 대해 일개 불자(佛子)의 입장에서 "치사(恥史)", 즉 부끄러운 역사라고 왠지 쓰고 싶습니다.

불교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한 분의 벽지불(僻支佛)로 혼자서 그 즐거움을 만끽하지 않으시고 삼계(三界)의 일체 중생들에게 진리의 감로(甘露)를 내려주신 것을 커다란 은혜로 인식하고 이 불은(佛恩)에 우리가 정업(淨業)을 닦아 정진과 중생구제에 매진함으로써 보답해야 한다고 보지만, 불교사를 통째로 놓고 보면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불은에 보답한 일보다 불은을 배반한 일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공(空)과 연기(緣起)의 이치로 봐서는 어차피 일정한 자성(自性)이 없는 일체의 인간들이 다 절대적으로 평등한 것이었고, 바라문 계급 등의 세습적인 특권이나 번잡한 종교 의식(儀式)들이 다 허망한 거짓이었고, 국가가 분쟁 중재나 재물의 재분배와 빈민 구제 이외의 어떤 폭력적인, 착취적인 일, 특히 전쟁을 할 경우에 그 악업이 고스란히 지배자들에게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국왕들을 "독사(毒蛇)"에 비유하시고 제자들에게 일체 중생들과 고락을 같이 나누는 탁발과 무소유의 생활을 명하시고 돈을 만지는 일이나 왕궁에 들락날락거리는 일, 국왕에게 예의를 올리거나 국가에서 심부름을 맡는 일을 절대적으로 금하셨습니다.

부처님이 계획하셨던 승가(僧伽) 공동체는 탈(脫)국가적이며 친(親)민중적인, 일종의 "원시공산주의적" 공동체였지요(나카무라 하지메 지음, 차차석 옮김, 〈불교정치사회학〉, 불교시대사, 1993). 부처님께서 민중들을 이끌고 지배계급의 폭력자들을 상대로 보다 혁명적인 투쟁을 전개하시지 않으시고 소극적인 "국가로부터의 분리"에 머무르신 것은 저로서 일대의 아쉬운 일이지만, 어쨌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 본래의 모습으로 지배계급의 폭력과 선을 그어 각을 세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나 레닌을 "현대의 보살"이라고 생각하고 사회주의적 실천을 일종의 "보살행"으로 보는 것입니다. 한데, 역사적인 불교가 위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한국의 땅에서 부처님의 제자임을 내세우는 이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면 정말로 울고 싶을 뿐입니다.

예컨대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 중의 중심이라고 할 "무소유"부터 생각해봅시다. 원시 불교의 계율은 토지에 대한 소유를 포함한 일체의 부동산 소유와 금전을 만지는 모든 일들을 수행자에게 금했고, 대승계율만 해도 예컨대 노비를 소유하거나 파는 것을 명백하게 금지합니다 (〈범망경〉, 제12경계: 傷慈販賣戒).

그런데 우리 불교사는 과연 어땠는가요? 한국 불교에 가장 영향을 미쳤던 중국 불교도 애초부터 그래왔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여러 금석문에서 사찰에서의 노비의 존재는 5-6세기 이래로 확인됩니다. 1405-1406년에 억불 정책의 이름으로 조선의 태종이 서울의 일부 유명 사찰을 제외하고는 사찰의 노비 소유를 금지했지만, 국가에서 이처럼 정책적으로 막기 전까지는 계율상 있을 수 없는 "사찰들의 노비 소유"는 한국 불교의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노국공주(魯國公主)가 1365년에 죽었을 때 공민왕이 명복을 빌라고 운암사(雲岩寺)에 노비 46구(口)를 기증했다는 등의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노비에 대한 착취와 기복 신앙, 그리고 봉건 지배계급과의 유착이 불가분하게 중첩된 것입니다.

노비나 농노(예속 농민)에 대한 소유뿐만 아니라 사령(寺領)을 경작해야 했던 소작인에 대한 착취, 그리고 "장생고(長生庫)"라는 일종의 사찰기금을 통한 고리대금업도 한국 불교의 황금기라고 할 고려시대 승가 생활의 모습이었습니다. 지배자들의 헌금이나 예속된 생산 담당자의 착취, 고리대금업을 통해서 사찰의 재정이 튼튼해지고 지금도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는 그 아름다운 불상과 불화, 불서(佛書)들이 나오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과연 이와 같은 생활 방식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무소유 실천과 어떤 관계에 있었습니까?

땀의 냄새가 나는 민중의 손에서 매일의 양식을 받았던 부처님이야 민중과 권력의 관계에 있어서는 민중의 편에 설 수 있었지만 과연 농민 위에서 군림하는 승려라면 정말로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볼 수 있었겠습니까? 해방 이후에 사찰이 받은 세 가지 커다란 타격 중에는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왜색 승려 척결"의 유시와 함께 사찰의 토지를 빼앗은 토지 개혁도 있었다는 말이나, 1970년대에 한국의 한 유명 사찰에서 참선 수행했을 때 그 근방에서 그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들을 봤다는 외국 승려의 증언을 들을 때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부처님 정신의 진수라 할 무소유를 우리 불교가 철저하게 저버린 것이고, 요즘에 와서도 그 상황이 전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해결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실 수 있겠는데, 삼보정재(三寶淨財: 사찰의 재산)의 운영을 차라리 평신도들과 국가의 감찰기관이 늘 감시할 수 있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신도 위원회들에게 맡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승복을 입은 몸으로 돈을 만진다는 것은 어찌 부처님께서 바라시는 바이었겠습니까?

돈과의 관계도 그렇지만 우리로서 가장 아프게 생각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이 세상의 최강, 최악의 폭력단체, 즉 절대왕권이나 자본주의 국가와의 관계일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께서 머무셨던 사찰에서 광주학살의 살인마가 머문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과연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겠지만 아쇼카왕(재위: 기원전 273-232) 때에 불교가 군주의 외호(外護)를 받는 준(準) 국교가 된 이후로는 인도에서나 동아시아에서 불교와 국가의 관계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기준에 따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예컨대 삼국이나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불교를 일별한다면 무신 집권기 시대의 지눌(知訥: 1158-1210)만큼 독특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개경의 명리(名利) 추구 분위기를 싫어해 벽지의 지리산이나 조계산으로 가서 철저하게 수행한 그는 궁정에 출입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매일 제자와 함께 고된 울력 노동을 하는 등 그 당시의 귀족적인 "고승대덕"의 면모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온 나라가 민란으로 들끓던 시대에 그가 민중에 편에 서서 지배자들에게 저항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배자들과 적당한 거리라도 둘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눌 이전에 한국 선불교 역사를 보면 왕궁에 가기를 거절한 선승(禪僧)은 과연 몇이나 됩니까? 지눌이 속했던 사굴산파의 원조에 해당되는 범일(梵日: 810-889) 같으면 매우 예외적으로 세 명의 국왕의 귀의에 응하지 않고 오로지 오늘날의 강릉의 지역에서 묵묵히 정진하는 데 전념했지만 그가 중앙권력의 외호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강릉지역 호족의 외호를 충분히 받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범일 아니면 왕궁에 출입하는 것을 제대로 삼간 신라 말기의 고승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며, 지눌 본인은 권력자들과의 유착을 피했지만 그의 수제자 혜심(慧諶: 1178-1234)부터 시작하여 그가 세운 송광사가 중앙권력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기 시작하여 14세기 중반에 "동방 제일의 도량"으로 불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가장 재미있는 것은, 송광사가 그 시절에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했다는 것을, 우리가 대개 지금도 국가와의 부끄러운 유착이 아닌, "정당한 인정(認定)"을 받은 일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나라님 일을 도와주고 나라님에게 외호를 받는" 것은 당연지사이자 자랑이 됐기에, 박정희가 베트남 침략의 현장으로 군대를 보냈을 적에 거기에 속했던 군승들이 미제 침략의 현장에서 한국 사찰을 지어 침략군의 "무운장구"를 빌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독재자와 권승(權僧)에 의한 불교 모독이 아닌, "호국 불교의 당연한 발로"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이 하도 뿌리를 박았기에 광주의 살인마가 만해가 주석하셨던 사찰을 더럽혀도 불교계에서 할 말을 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고 불교 계율로서는 있을 수 없는 승려의 군대에의 징집도 승가의 저항을 거의 받은 일이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중생들이 불은(佛恩)을 저버린 것이 어찌 이것보다 더 심할 수 있습니까?

역사의 업보라 할까요? 한반도 주민들이 각각 4-6세기와 19-20세기에 약자의 편에 서서 평등을 주장하는 두 개의 종교, 즉 불교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축복을 입었지만, 그 중의 어느 하나도 민중에 의해서, 민중을 위한 방향으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불행을 겪는 것입니다.

개신교 대형 교회들이 부의 축적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예수님께서 들으셨다면 기절하셨을 만한 친(親)자본주의적인, 그리고 거기에다 친미적이며 군사주의적인 설교로 극우파의 혹세무민(惑世誣民)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고, 불교는 전근대적인 관습대로 폭력 단체인 신자유주의적 국가를 그대로 인정하여 전력 협력하는 채 원자화된 군중들에게 기복신앙으로 일시적이며 기만적인 위안을 주는 역할에 스스로 만족하는 상황입니다.

과연 어떻게 해서 불교가 부처님 정신, 즉 무소유와 반(反)폭력, 계급 철폐와 약자를 위한 사회적인 재분배 등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일단 "전통"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전통이란 원래 간직할 것과 버릴 것이 함께 혼재돼 있지만 한국 불교의 역사적인 모순들이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실로 태심하기에 진실된 불교를 실천하자면 "한국 전통"이라는 수식어를 과감히 버려야 할 듯하고, 부처님의 육성을 가장 가깝게 담은 초기 경전을 중신으로 해서 "전통"의 찌꺼기 아닌 오로지 부처님의 교리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부처님의 한계까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와 공의 최상의 진리를 깨우친 것이었지만 고대 인도 계급 사회의 귀족 남성으로 태어난 역사적인 가우타마 사캬무니 붓다는 여성을 남성에 비해 낮은 존재로 여기고 계급 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도전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등의 역사적인 한계를 지녔습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배우되 부처님의 한계까지 왜 배우겠습니까?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그 당시의 계급 사회를 벗어나서 숲 속에서 무계급의 공산주의적 공동체인 승가를 만드셨지만 이미 계급의 철폐가 가능하고 역사적으로 합법칙적인 이 시대에 무계급 사회를 만들려고 숲에 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투쟁이야말로 오늘날의 현실에 맞춘 불교적 수행이라는 것은 저의 굳은 믿음입니다.

현대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목표, 즉 사회주의와 불교의 정신은 둘이 아닌 하나지만, 과연 어떻게 해서 오늘의 불교가 지금과 같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 된 것입니까? 어떻게 해서 지금도 "친일 불교" 문제에 대한 논의가 계속 끊임없이 일어날 만큼 불교의 근대적인 과거에 오늘로서 별로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일들이 이렇게도 많이 감추어지게 된 것인가요?

전근대의 불교도 문제투성이였지만, "근대"와 불교의 만남은 일본이라는, "개화"와 "침략"을 동시에 의미하는 타자가 개입되어 아쉬운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1960-70년대에 나온 남한의 한국사 개설서들을 보면 개화기의 학교나 병원의 개설 등의 "선진문물 수용"을 거의 전적으로 기독교 선교사와 한국 초기 기독교인들의 업적으로 서술했습니다. 그 개설서만 배운 학생이라면 개화기에 불교가 쇠퇴해서 근대화 움직임과 거의 무관했으리라 쉽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980-90년대의 교과서 내용이나 연구논문들을 보면 불교의 근대적인 발전을 보다 중시하지만 근대 불교의 "민족의식 결여"와 "일본 불교 침투에의 저항 부족", 전체적인 "일본화"를 규탄합니다. 쉽게 짐작하시겠지만 개화기 승려들의 일본 불교 포교에 대한 대체로 호의적인 태도와 대일 협력의 모색, 그리고 1920년대의 승려들의 대량적인 일본 유학, 대처(帶妻)와 육식(肉食)의 풍토 조성 등의 문제들이 집중적 비판의 일차적인 대상에 오릅니다.

과거의 일에 대한 심판이나 규탄이야 쉽지만 이것이 과연 역사학자의 직무인가요? 그 당시에 겨우 형성이 시작됐던 "민족"의 관념을 절대적인 척도로 삼아 100년 전의 승려들의 "비(非)민족성"을 규탄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행동의 논리를 당대의 문맥 속에서 가치 중립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보다 생산적이며 과학적인 서술 태도가 아닐까요?

"민족 독립"을 우선시하는 오늘의 입장에서 1870년대 말부터 조선에서 포교에 착수한 일본 승려들은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이해되지만 유생과 탐관오리, 토호들의 토색(討索)에 계속 시달려온 조선 승려들에게는 가렴주구를 막아주기를 약속해주고 모욕적인 도성 출입 금지법을 해제시켜주도록(1895년) 갑오 내각에 압력을 넣어준 일본의 "동류"들이 "밝은 세계"로 인도해주는 "선우"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부 따라잡기" 프로젝트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 그러면서도 성공적인 "따라잡기"에 정보력과 재력 등이 태부족한 - 세계체제의 주변부의 경우에는 근대 초기의 대외의존적인 경향은 조선 불교만의 특징인가요?

개화승으로 잘 알려진 이동인이 이미 1880-81년에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자의 단체인 "흥아회"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 등의 일본 외교관과의 접촉에서 조선이 일본의 투자를 받아가면서 일본에 원자재를 공급해야 한다는 등 일종의 "종속발전"의 계획안을 내놓은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흥아회보고〉, 제4권, 1880 등 참조). 그러나 일본의 투자에 의존하는 "종속발전"을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것으로 본 것은 어윤중(魚允中; 1848-1896) 등의 갑오 내각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 아니었는가요? 윤치호 (1865-1845)와 같은 초기 기독교적 근대주의자들은 아예 "열강"에 대한 의존뿐만 아니라 어떤 한 강대국의 직접적이며 적극적인 간섭만이 "조선의 개혁"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생각마저도 자신과의 대화에서 피력합니다 (〈윤치호 일기〉 1894년7월31일). 즉, 세계체제 중심부나 그 중심부의 "대리인"을 자임한 지역적인 "패권국가 후보생" 일본에 대한 의존성이란 불교계뿐만 아니라 1880-90년대의 개화파 전체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습니다.

대한제국에서 내셔널리즘이 본격적으로 형성ㆍ보급되기 시작한 1900년대의 사정도 구조적으로 비슷했지요. "그 때 조선의 새 문명이 일본을 통해서 많이 들어오는 때이니까 (...) 새 시대의 기운이 융흥하다는 일본의 상황을 보고 싶던 것이었다 (...) 그래서 동경의 조동종(曹洞宗)대학 (오늘의 구마자와 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여 일본어도 배우고 불교도 배웠다" ("내가 왜 중이 되었나", - 〈삼천리〉, 1930년5월)라는 자신의 1908년의 도일 유학에 대한 한용운의 설명에서 보이듯이, 그 당시의 조선의 개화적인 젊은 승려들에게는 일본이 불교 근대화의 방법을 배워야 할 "새 문명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내의 일본어 교육을 누구보다도 "한국의 지사(志士) 아닌 일본의 지사"를 만드는 매국적 망동 ("한국 교육계의 비관", - 〈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15일)이라고 비판한 신채호마저도 "동화의 비관" 등의 글에서 "국수의 보존"을 조건으로 한 근대화를 위한 외국의 모방이 불가피하다고 설파했으며, 일반적 개화주의자들이 재일 유학생들을 "우리나라를 미국이나 영국처럼 부강하게 만들 주역", "조선혼(魂)의 보호자"라고 극찬했습니다 ("警告我日本遊學生諸公", - 〈대한학회월보〉, 1908년2월).

즉, 중심부 경험의 내면화를 "따라잡기"의 주된 방법으로 삼았던 초기의 내셔널리즘의 문맥으로 봐서는, 불교의 대일 종속성이 결코 예외적인 사례로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후진국 일본이 아닌 선진국 미국 등을 모델로 삼았던 기독교계의 "따라잡기" 프로젝트가 훨씬 더 미래지향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구미 "주류" 사회가 극동의 대승 불교를 "미신"이나 "우상숭배"로밖에 보지 않았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불교계의 대미 접근이 가능했겠습니까?

미국 선교사뿐만 아니라 "신민회"(1907년) 등의 국민국가 건설운동들을 지휘했던 그들의 한국 제자들도 불교를 "타파"해야 할 "미신"으로 취급했던 상황에서는, "문명화"의 방법ㆍ방향에 있어서 불교계로서 선택의 여지란 많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갈 생각을 갖기도 앞서 1904년에 러시아를 경유해서 유럽으로 가서 "신문명"을 배우려던 중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엄인섭(嚴仁燮) 등의 러시아 당국과 가까웠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서 "일본 간첩"으로 오해를 받아 간신히 생명을 부지한 한용운의 봉변은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 - 〈삼천리〉, 1933년9월), 구미를 직접 알고 싶어도 조건상 그 "신문명"을 접하지 못해 일본의 "이차적 근대"로 만족해야 했던 불교계의 비극을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개화기ㆍ식민지 때의 불교계의 "근대로의 이동의 경로"가 일본이었다는 사실은, 그 모든 부정적인 점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근대성"의 발전의 가능성도 나름대로 열어두었습니다. 예컨대 1930년대에 한용운이 심취했던 "불교적 사회주의" 사상 등에 있어서는 그 당시의 일본 불교의 진보적 승려 운동이 시사해준 바 컸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일 종속적인 불교계의 근대화가 남긴 짐도 여간 무거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식민지 당국에 대한 충성심이 "검증"된 큰 사찰의 주지들이 당국과 유착하여 축재ㆍ사치에 빠진 것은 그때부터였고, "호국 불교"가 단순히 전근대적인 국가와의 유착이 아닌, 그것보다 훨씬 더 무자비한 근대적인 군국주의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일제 말기부터 굳어진 불교의 국가주의적ㆍ군사주의적 왜곡을 벗어나는 것은 오늘의 한국 불자들에게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닐 것입니다.

박노자 드림

***도움이 될 책**

안병직 엮음, 〈한용운〉, 한길사, 1979.
〈보살계본 범망경〉, 보성문화사, 1986
가마타 시게오 지음, 신현숙 옮김, 〈한국불교사〉, 민족사, 1988
여익구, 〈민중불교철학〉, 민족사, 1988
고익진, 〈현대한국불교의 방향〉, 경서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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