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 감옥서 숨진 채 발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발칸의 도살자' 밀로셰비치 감옥서 숨진 채 발견

"심판의 기회가 사라졌다" 희생자들 분통

전쟁과 대량 학살 혐의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 기소돼 재판을 받아 오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64)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11일 헤이그 감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ICTY은 이날 밀로셰비치가 그의 감방 침대에서 숨져 있는 것을 교도관이 발견한 뒤 상부와 의료진에게 알렸으며, 곧이어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ICTY는 밀로셰비치가 자연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으나, 네덜란드 법의학 연구소로 시신을 이송해 사체부검과 독극물 검사를 지시했다. ICTY는 사체부검을 모스크바에서 해야 한다는 변호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12일 네덜란드에서 부검이 실시하겠다고 결정했고 독극물 검사를 통해 독살설에 대한 의혹도 풀 계획이라고 밝혔다. 부검에는 세르비아 의회의 요청으로 유고에서 파견된 부검의도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

밀로셰비치는 1990년 유고 대통령이 된 후 코소보전쟁(1998-1999년), 크로아티아전쟁(1991-1995년), 보스니아 전쟁(1992-1995년) 등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66건의 전쟁 및 반인륜 범죄 혐의와 1995년 세르비아의 유엔 '안전 지대'에서 8000명의 이슬람교도를 학살한 혐의로 기소돼 지난 2002년 2월 이후 4년간 ICTY에서 재판을 받아 왔다.

〈사진〉

***국제유고전범재판소 위상 '위기'**

밀로셰비치는 그동안 고혈압과 심장질환 등의 증세로 수 차례 러시아에 가서 신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으나 ICTY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해 청원을 기각했다. 그의 지지자들과 가족들은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ICTY에 있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밀로셰비치가 속했던 세르비아 사회당의 한 간부는 "밀로셰비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이라고 말했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령 대통령도 "그의 러시아행을 막은 것은 실수"라고 비난했다.

그에 대한 재판은 그동안 그의 신병 때문에 여러 번 연기되기도 했는데 지난주에는 또 다른 증인 출석을 위해 재판이 다시 중단됐었다.

그의 죽음은 지난 2002년 그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한 옛 동료 밀란 바비치가 같은 감옥에서 자살한지 6일만에 일어나 ICTY측을 더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같은 상황이 ICTY의 위상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유엔의 발칸담당 특별대사직을 지낸 칼 빌트 전 스웨덴 총리는 "밀로셰비치의 사망은 헤이그 법정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장기간의 재판과정과 막대한 비용에 지친 유엔은 ICTY에 항소과정을 포함해 모든 활동을 오는 2010년까지 마치라고 활동시한을 통고한 상태다.

하지만 '밀로셰비치 재판 외에도 보스니아 내전의 또다른 2명의 특급전범인 라트코 믈라디치와 라도반 카라지치가 아직 체포되지 않고 있어 자칫 대량학살 범죄의 핵심 3인 모두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리지 못한 채 임무를 마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희생자와 정치 지도자들 "단죄할 기회 없어졌다"**

밀로셰비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희생자 유족들은 끝나지 않은 재판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스티페 미시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그가 재판의 말미에 받아야 할 선고를 받지 못한 채 먼저 죽은 것은 유감"이라고 개탄했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의 한 간부는 "희생자들에게는 좌절이고 정의에는 역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밀로셰비치가 행한 '인종청소'의 주요 타깃이었던 코소보의 알바니아계의 지도자들은 그가 결국은 범죄를 뉘우치지 않은 채 숨졌다며 그의 죽음으로 고통스런 역사의 장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파트미르 세지우 코소보 대통령의 대변인인 무하메트 하미티는 "밀로셰비치는 코소보 국민과 인류의 적이었다"며 "그는 정의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논평했다.

옛 유고와의 협상을 주도했던 리처드 홀브룩 전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서구 쪽에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밀로셰비치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며 그를 위해 단 한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홀브룩 전 대사는 "그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기회주의자였고 이후 기회주의적 민족주의자가 됐다. 그의 행동이 30만 명의 죽음과 4차례의 전쟁, 유럽의 불안정을 가져 왔다"며 "그는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혹평했다.

밀로셰비치는 그러나 지금까지 재판에서 ICTY의 정당성과 자신의 혐의를 모두 부인해 왔으며, 지난 2001년 미국 〈폭스TV〉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는 "내가 내린 결정은 모두 합법적이었으며 유로슬라비아 헌법과 자위권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영국인 변호사인 스티븐 케이는 밀로셰비치가 재판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포자기하지도 않았다면서 "그는 나에게 자신이 재판을 모두 치르고 감옥에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EU 외무장관들 '미래적 시각' 강조**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세르비아 등 5개 발칸지역 국가 외무장관들을 초청해 발칸제국의 EU 가입문제를 논의하던 EU 25개 회원국 외무장관들은 밀로셰비치의 사망을 계기로 피로 얼룩졌던 발칸의 역사를 미래지향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비에르 솔라나 EU 외교정책 대표는 "밀로셰비치의 죽음이 세르비아가 미래를 내다보는 데 일조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잭 스트로 영국 외무장관은 "중요한 것은 세르비아 국민들이 발칸 지역 전체에 해를 끼친 밀로셰비치의 과거와 삶에 대해 선을 긋는 것"이라고 불행한 과거를 접고 새 출발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구엘 앙헬 모라티노스 스페인 외무장관도 "밀로셰비치의 죽음이 발칸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믿지 않는다"며 "그는 과거의 인물이고 오늘 여기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크-발터 스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은 "밀로셰비치는 과거의 인물이지만 아직도 그의 유산이 발칸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면서 "그의 죽음은 발칸에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새로운 활력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립 두스트-블라지 프랑스 외무장관도 "유럽에서 인종청소가 되풀이돼선 절대 안된다"면서 "이것이 밀로셰비치가 죽은 지금 우리가 상기해야할 일"이라고 말했다 .

〈박스기사〉

***밀로셰비치는 누구인가**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소패권주의를 내세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 발칸 전역에서 전쟁과 학살을 자행, 20만 명을 숨지게 하고 300만 명을 난민으로 만들었으며 유고 경제를 파탄시켰다.

1941년 8월 20일 세르비아 동부 포자레바치에서 그리스 정교 성직자와 열렬한 공산주의자 교사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1962년에, 어머니는 1973년에 각각 자살하는 비극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1964년 베오그라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지방에 있는 공산당 산하기관인 경제연구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일하며 공산주의자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티토 대통령 시절부터 온건한 공산주의 사상을 체득한 그는 빠른 두뇌회전과 강한 추진력으로 베오그라드에서 정치적 기술을 익혔고 1980년 티토 대통령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강력한 정치지도자로 부상했다.

1984년 친구인 이반 스탐볼리치가 세르비아 공산당 새 지도자가 되자 공산당 베오그라드 지구당 위원장에 올랐고, 87년 4월에는 코소보에서 소수인 세르비아계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민족주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해 스탐볼리치의 뒤를 이어 공산당 당수가 된 그는 89년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된 뒤 대 세르비아주의를 제창하며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촉발시켰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킨 그는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연방 통치 야심을 드러내며 결국 유고 전역에서 유혈사태를 야기했다.

밀로셰비치는 1997년 유고연방 대통령에 올라서도 철권통치를 휘둘렀으며 결국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인종청소,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유고 공습 이후 국민적 저항이 거세진 가운데 2000년 10월 13년간 유지해 온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1995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 당시 서방이 경제제재 압력을 가하자 협상에 나서 데이튼 협정에 서명하고, 코소보 사태 때에도 수차례 나토와의 협상에 응하는 등 현실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2000년 권력남용 등의 혐의로 체포된 그는 2001년 6월 전범재판소 법정으로 인도돼 이듬해부터 재판을 받아 왔으나, ICTY를 '승리자의 재판'이라고 무시하고 "조국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한 모든 것들이 자랑스럽다"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