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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좌파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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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좌파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하〉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130〉토착 좌파의 뿌리, 뚜빡 아마루

지난 1월 22일 볼리비아 대통령에 취임한 에보 모랄레스는 볼리비아 국민들과 취임식장에 참석한 내외 귀빈들을 향해 잉카제국의 마지막 혁명전사 뚜빡 아마루에 대한 묵념을 제안하는 것으로 눈물겨운 취임사를 시작했다.

모랄레스는 평소 자신은 아마루의 혁명정신을 이어받아 잉카제국 후손들의 민중혁명과 제2의 잉카제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공언했었다. 모랄레스의 이 말은 볼리비아 토착원주민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는 선거라는 합법적인 민중혁명을 통해 유럽이민자 후손들의 굳건한 아성을 무너뜨리고 집권에 성공했다.

토착원주민 출신인 모랄레스의 집권배경에는 제2의 뚜빡 아마루 같은 원주민 혁명가를 기대하는 토착 잉카후예들의 염원이 몰표로 연결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페루의 토착원주민들이 뚜빡 아마루가 최후의 순간에 스페인 왕정을 향해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복수를 할 것이며 잉카제국을 부활시킬 것"이라고 절규했던 유언을 후손들에게 구전으로 전하며 아마루의 부활과 잉카제국의 재건을 오늘날까지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중남미 전체의 원주민들과 심지어는 현지출생 스페인계 농민들(Criollo)까지 합류한 민중혁명의 기폭제가 됐던 페루 아마루의 무장봉기는 비극적인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러나 처참하게 죽어간 아마루의 마지막 모습은 중남미 전역의 원주민들의 가슴 속에 깊이 아로새겨진 채 그에 대한 전설이 실현되기를 지금도 고대하고 있다는 얘기다.

***'잉카제국 독립운동의 전설 아마루'**

현지역사가들은 스페인주둔군에 대항한 농민혁명을 단순한 원주민 반란이었다는 기존의 입장에서 아마루의 무장봉기야말로 중남미 원주민들의 가슴 속에 조상들의 유산을 되찾아 인간으로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민중혁명의 동기를 불어 넣어준 최초의 혁명이자 라틴아메리카 좌파바람의 시초였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 잉카제국이 멸망한 후 마지막 황제 뚜빡 아마루 1세의 피를 이어받은 뚜빡 아마루 2세는 스페인 점령군이 금 착취에 열을 올리던 시기인 1738년 3월19일 쿠스코 남부 띤따라는 부족동네에서 태어났다.

그는 점령군에 의해 쿠스코에서 스페인식 교육을 받았으며 호세 가브리엘 뚜빡 아마루라는 스페인식 이름을 갖기도 했다. 그는 아무런 권한도 없는 허울 뿐인 추장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잉카부족들의 독립에 대한 기대를 한 몸에 지닌 인물이었다.

스페인 정복군의 압정 속에서 고통 받던 잉카후손들은 아마루에 커다란 기대를 걸며 부족 별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루는 황손이라는 대표성에다 큰 키에 힘이 장사여서 일찍부터 잉카를 다시 일으켜 세울 인물로 존경을 받으며 성장했다.

정복군의 혹독한 탄압을 견디다 못해 발생한 아마루의 무장봉기는 1776년 잉카원주민들은 모두가 의무적으로 광산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규정의 폐지와 인간으로서의 대접,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과중한 세금의 삭감 등을 리마의 스페인 총독부에 공식적으로 요청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스페인 총독부는 젊은 원주민들을 광산으로 끌고가 아무런 품삯도 주지 않고 죽을 때까지 금을 캐도록 하는 중노동을 시켜 많은 원성을 사고 있었다. 또한 노약자들과 아녀자들은 농사를 짓도록 의무화하고 추수 때가 되면 소출의 전부를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강탈해 가 농부들이 아무리 열심히 자기 땅에서 일을 해도 남는 게 없어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남미 역사학자들은 당시 잉카제국 현지원주민들을 향한 점령군의 학정은 노예제도보다 한술 더 뜬 잔인한 것이었으며 스페인 국교를 앞세운 지나친 현지전통종교 탄압, 야만적인 인권유린과 노동착취 등은 인류역사상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아마루의 민중봉기는 다분히 자유를 되찾기 위한 정치적이며 사회ㆍ종교ㆍ문화적인 충돌에서 시작되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아마루는 자신의 요구가 스페인 총독부에 의해 일언지하에 거부되자 주변의 원주민 부족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정복군의 학정에 반기를 들고 모여든 잉카원주민 농민군 규모는 약 2만 명에서 4만 명까지로 추산되고 있다. 아마루는 이 부대를 '독립운동군' 이라고 명명하고 스페인군대와 일전을 벌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

1780년 아마루가 이끄는 농민군은 상가라라 전투에서 당시 신무기로 무장한 스페인 주둔군 1200여 명과 접전 끝에 대승을 거둬 리마 주재 스페인 총독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 전투는 스페인제국 군대가 중남미에서 맛본 가장 큰 첫 패배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루의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스페인 주둔군 본부인 쿠스코로 진격하지 않고 군대를 철수시킨 다음 총독부와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더 이상의 전투를 계속하면 피아간 희생이 너무 크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힘으로 한번 본때를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이 주장한 요구조건이 총독부에 의해 관철될 것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스페인 주둔군의 주력부대가 꺾였다고 판단한 아마루는 자신의 요구조건만 들어 주면 농민군을 해체시키겠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자신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서 주둔군과 총독부는 원주민학대를 멈추고 자유를 허용해줄 것을 재차 요구했다.

이에 리마의 스페인 총독부는 한편으로는 휴전협정을 벌여 시간을 벌고 다른 한편 으로는 아마루의 무장봉기에 협력한 부족추장들을 회유와 협박으로 이간질 시켜 힘을 분산시키는 작전을 구사했다. 반란군의 자중지란을 틈타 진압군을 재편성한 스페인 주둔군사령부는 승리와 휴전 분위기에 들떠 있는 아마루의 독립운동군 본부를 기습, 1781년 4월6일 아마루 가족들을 포함한 지휘부 전체를 일망타진한다.

아마루의 용맹도, 농민군의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사기도, 각종 전투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스페인제국 군대의 회유와 지연작전에 말려든 것이다.

1781년 5월18일 쿠스코로 압송된 농민군수뇌부는 전원이 사형언도를 받았고 아마루는 부인과 아이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끔찍하게 처형 당하는 장면을 보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스페인주둔군 지휘부는 아마루의 사지를 네 마리의 말에 묶어 찢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괴력을 지닌 아마루의 육체를 말들의 힘으로도 찢을 수 없자 이들은 사지를 절단 내어 시체 각 부분을 페루의 주요도시에 전시하기에 이른다. 제국군대에 저항한 반란군 괴수의 비참한 최후를 잘 보라는 경고였다.

***'중남미 민중혁명의 불지핀 아마루'**

아마루의 처참한 죽음이 중남미 전역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스페인식민지 전역의 원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분연히 일어섰다. 심지어는 브라질 일대의 아마존 원주민들과 아르헨티나 북부 후후이 원주민들도 합세하여 아마루를 잉카제국 최후의 황제로 추대하고 아마루의 형인 디에고 크리또발 아마루를 지도자로 삼아 중남미 전역에서 저항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중남미 전역의 원주민 독립군 세력이 날로 커지자 현지출생 스페인계(Criollo) 농민들과 노동자들까지 이 대열에 합류, 제국군대의 식민지정책과 노동자를 탄압하는 대지주들을 타도하자는 혁명의 불길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남미전역의 스페인 식민지 원주민들과 노동자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선 것이다.

1년 가까이 지속된 중남미 전역 민중들의 강력한 항전에 고전을 거듭하던 스페인 총독부는 드디어 아마루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겠다는 협상을 제안하고 반군들 역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원 사면하겠다는 회유책을 다시 내놓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민중혁명의 불길이 잡히자 정복군들은 그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원래의 약속은 지키지도 않았다. 민중혁명을 주도했던 원주민들의 생활은 더욱 고달파졌고 스페인 정복군에 협력한 몇몇 추장들의 재산만 살찌우고 아마루의 희생과 혁명은 잊혀져 갔다.

잉카제국의 마지막 보루였던 아마루 형제의 무장봉기가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 다음해인 1783년 7월24일 카라카스에서 태어난 시몬 볼리바르 장군이 중남미 히스패닉계의 해방자를 자처하며 이들의 못다 이룬 혁명을 이어가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물론 페루의 아마루와 멕시코의 사파타가 토착원주민들의 독립을 위한 혁명을 꿈꾸어 왔다면, 시몬 볼리바르 장군은 중남미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는 것과 아메리카대륙에서 태어난 유럽이민자 2세 농민들과 노동자들, 흑인노예들의 해방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점이 다르긴 하다.

볼리바르 장군은 마드리드와 파리에서 수학하면서 좌파혁명에 대한 꿈을 키운 후 카라카스로 돌아와 정통적인 유럽식 좌파혁명 사상을 중남미에 전파해 토착원주민 사이에서 생겨난 독립을 향한 혁명운동과는 처음부터 그 길을 달리하기도 했다.

1825년 남미의 독립영웅 산 마르틴 장군과 중미의 해방영웅 볼리바르 장군에 의해 잉카원주민들은 그렇게도 갈망하던 스페인제국으로부터는 자유를 되찾았지만 정치와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중남미 주류사회에서 잊혀져 갔다. 이들 두 영웅들에게는 처음부터 토착원주민들의 염원인 자주독립과 잉카제국건설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아르헨티나의 경우 토착원주민 말살정책까지 펼쳐 소수가 된 이들은 정글이나 고산 지역으로 피신,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생존하기에 급급한 형편이 되기까지 했다.

200년 가까이 잊혀졌던 잉카제국의 독립혁명이 다시 조명 받게 된 건 지난 1962년 페루의 좌파정당들이 다수인 원주민 표를 의식해 '뚜빡 아마루의 독립운동'을 기치로 들고 나오면서부터다. 이들에 뒤이어 뚜빡 아마루의 이름을 딴 무장게릴라 세력들이 연이어 출현, 무력혁명을 노리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 21세기의 혁명은 무장봉기가 아닌 선거를 통한 표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형태로 옷을 갈아입은 아마루의 혁명은 동양계인 알베르또 후지모리나 원주민 혼혈인 알레한드로 똘레도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될 수 있도록 작용했고, 이런 경향은 볼리비아로 이어져 원주민출신 에보 모랄레스가 집권하게 되는 이변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페루의 원주민출신 정치가 올란타 우말라는 중남미 전체 토착원주민들의 연합국가를 꿈꾸고 있어 지금까지 이질감 속에서도 협조와 생존을 함께했던 유럽계 이민자출신 좌파들과의 대립구도를 부추기고 있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또한 지금까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도 못하고 숨어 살던 토착원주민 지도자들이 세계사회포럼이나 중남미민중지도자회담 등을 통해 상호 교류를 트기 시작하면서 정치적인 연대로 그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는 것 역시 현지정치계의 골치거리다.

라쁠라따 대학의 호르헤 디마지오 교수는 남미 좌파정부에 대해 "포장만 좌파일 뿐"이라며 "이들이 진정으로 극빈 서민들과 농민노동자를 위한 지도자들인지는 의심이 간다"고 평가했다. 다만 다수인 서민 표를 의식해 좌파 지도자인척 할 뿐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토착원주민들이 정치세력화 되고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칠레에서도 모랄레스나 우말라 같은 원주민 좌파 지도자가 나온다면 유럽계 이민자 좌파 세력들과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다수인 서민 표와 인기를 얻기 위해 견제와 대결구도로 가는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전망인 것이다.

나아가 자신들을 향한 처우개선과 빼앗긴 조상들의 토지를 돌려달라는 토착원주민들의 요구가 과격시위 등을 통해 중남미 전 지역으로 확대된다면 또 다른 인종적인 갈등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북부 일부 지역에서는 원주민부족들의 이런 시위가 간헐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이들 세력은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에보 모랄레스의 집권으로 아르헨티나 내의 원주민 혈통을 가진 볼리비아 이민자들이 노조 등 사회단체를 통해 힘을 키워 아르헨 토착원주민들과 연계를 모색한다면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남미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가 성공적으로 국정을 수행해 토착 원주민들이 바라는 세상이 도래하고 페루의 원주민 우말라가 집권에 성공한다면 그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다는 것이 현지 분위기다.

어찌됐거나 지금까지 숨을 죽이고 유럽계 이민자후손들의 눈치를 살피며 불안한 생활을 영위하던 중남미 지역의 토착원주민들의 정치적인 힘이 모랄레스의 집권 이후 수면위로 부상하여 정치권과 주류사회 진출을 엿보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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