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어렸을 때 다녔던 학교의 벽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온갖 인용문들이 늘 걸려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은 바로 영화다"라는 말인데, 심심풀이로 헤겔의 책을 원문으로 읽곤 했으면서도 영화에 대한 별다른 개인적 관심이 없었던 대표적인 19세기형 인텔리 레닌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모습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과연 그러한 발언을 했으리라 믿어지십니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개인으로서의 레닌이 아닌, 혁명의 지도자로서의 레닌은 분명히 그러한 생각을 가졌을 만도 합니다. 문맹자가 70%에 달했던 그 당시의 러시아에서 공산화 작업에의 대중적인 참여를 유도하려면 반드시 영화의 대단한 대중 동원력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문맹자 아닌 글 읽을 줄 아는 도시인이라 해도, 헤겔 책 속에서 영감을 찾는 레닌형 "골수 인텔리" 아닌 이상 이념적인 패러다임을 움직이는 이미지에 옮긴 영화에 의해서야 가장 잘 동원될 수 있었습니다.
레닌 시대의 러시아도 정치적 동원 체계가 영화 없이 성립되지 못하는 사회였지만 문맹률이 러시아를 약간 웃돌았던 식민지 조선은 과연 달랐습니까? 식민지의 여러가지 통치 프로젝트들도 온건 우파의 문화민족주의도, 좌파의 계급전선 준비 작업도, 그리고 외국 자본의 침투도 다 영화를 필요로 한 셈입니다. 가사나 소설, 풍자물들을 풍부하게 싣곤 했던 개화기의 신문들도 직접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을 이용하긴 했지만, 영화만큼은 감수성을 자극하지 못했습니다.
늘 제가 외부적으로 접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진보적 의미냐 반동적 의미냐"라고 마음 속으로 따져 보는 것이 저 개인의 편벽 (偏僻)인지도 모르지만, 제가 영화를 볼 때마다 꼭 한 권의 책이 떠오릅니다. 물론 비판적인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근대적인 문화산업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비판한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고전적인 〈계몽의 변증법〉 (1944)의 "문화산업: 대중적 기만으로서의 계몽"이라는 꼭지입니다 (http://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adorno/1944/culture-industry.htm ).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 두 기수는 그 꼭지에서 영화라는 장르를 현존 체제를 유일하고 확고부동한 것으로 인식시키고 모든 탈주적 욕망들을 원색적인 "재미", "흥미"로 잠재우고 깨끗이 없애는 현대판 "대중을 위한 아편" 중의 가장 위험한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영화는 극소수의 자본과 그 자본에 마음을 판 예술적 고용인에 의해 제작, 배포되는 반면 수백만, 많게는 수천만 명에 의해 소비되는 등 "극소수에 의한 대다수의 심성적 조종"이라는 전체주의적 면모를 갖고 있고, 대개 기존의 사회적 체제를 "당연한", "정상적인" 것으로 묘사하여 그에 대한 어떤 미래 지향적인 대안도 제시하지 않고 있고, 자동차가 부품으로 만들어지듯이 인간 인식의 원색적인 부분에 호소하는 기성의 장면들로 기계적으로 "조립"됩니다.
창조성이 없는 이 사이비 "예술"이 결국 문학이나 진정한 예술을 지배하게 되어 위기 속의 후기 자본주의의 심성적인 풍경을, 창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영혼의 사막"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살상무기인 폭탄을 대량 제조하여 이라크 같은 곳에서 대량 사용하듯이, 영화라는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대량 제작하여 대중을 노예화시켜 로봇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글의 요지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읽으시면 허동현 교수님께서 "한 장르를 획일적으로 부정하는 좌파적인 교조주의"라고 비판하실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측면들이 사뭇 있는 것은 부정할 수도 없지요. 예컨대 같은 좌파이긴 하지만, 발터 벤야민은 "복제 예술"로서의 영화가 가져다준 연기자와 관람자 사이의 유기적 관계 두절과 소외,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소외된 연기자를 "스타", 즉 돈벌이 기계로 만들 수 있는 상업주의적 기능성 등을 경계하면서도 일단 공간과 시간, 인간 신체의 운동에 대한 육안의 관측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영화의 가능성들을 환영했습니다 (〈기계적 복제 시대의 예술품〉, 1936: http://www.marxists.org/reference/subject/philosophy/works/ge/benjamin.htm ).
그런데, 영화의 기술적인 가능성들을 다 인정하더라도 오늘날 상업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예컨대 대중의 의식 속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지워버리고 "세상을 즐기는 태도"를 심어주어야 하는 영화계 "스타"들을 생각해보시지요.
예외도 있지만 대개는 획일적인 연기 기법을 사용하고, 획일적인 "미남미녀"의 외모를 가지고, 온갖 "센세이션", "스캔들", "연애설" 등등과 같은 획일적인 여러 방식들로 자신의 이름들을 세인의 입에 오르고 내리게 하고, 몇 군데의 주요 연예계 자본에게 예속돼 있거나 유착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연예자본들을 보고 "스타 제작소"라 하는데, 사실 기본적인 연기 능력과 기준에 맞는 외모를 갖춘 선남선녀 누구라도 일정한 "프로모션" 과정만을 거친다면 "스타"로 제작될 수 있지요.
그만큼 문화산업의 우상들이 몰개성적인 것이고, 그 우상 숭배는 연예계의 신도(信徒)인 대중들을 똑같은 몰개성적인 우민(愚民)으로 만드는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사회적으로 중대한 사안을 소재로 삼아 영화 만들기에 나선 재능이 있는 감독이라 해도, 이 "대중 기만술"의 기존틀들을 처음부터 일단 수용해서 그 영화를 애당초부터 속류화(俗流化)시키는 경향입니다.
예컨대 "천만명 청중 동원 돌파"로 유명해진 강우석의 〈실미도〉(2003)를 생각해보시지요. 한편으로는 전과자 등의 "이등 국민" 내지 "비국민"들을 처음에 "국가를 위한 육탄"으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폐물을 폐기하듯이 폐기하려 한 박정희 정권의 반인륜성, 나아가서 일제를 계승한 남한 군사주의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는 이 영화는 과거에 대한 예술적인 고발장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 대한 고발장이기도 하지요. 일제의 악습들을 확대재생산한 군대는 지금도 본질적인 개혁을 거친 것이 아니고, 군대식의 "해병 캠프 체험"이나 "극기 훈련"에 대한 한국 기업체들의 높은 선호를 보면 보수적인 "주류"가 일제 식의 군사주의에 얼마나 젖어 있는지 당장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발장이어야 할 이 영화를 보다보면 관객이 곧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군사주의의 미학"에 빠지게 돼 있습니다. 함께 훈련을 받고 서로 맞닿음으로써 "따뜻한 전우애(戰友愛)"의 분위기를 만드는 근육질의 남체 (男體)들이야말로 이 영화의 시각적인 코드인데, 이 영화에서 여성이 본격적으로 유일하게 등장하는 강간 장면이 상징하는 여성에 대한 배제, 억압, 물화는 바로 이 "남체들의 낭만"의 전제조건입니다.
결국 군사주의를 고발하는 듯한 감독은 기존 영화의 상투적인 코드인 "근육질 남체에 의한 액션"에 그대로 옭매여 그 코드를 정치,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실미도"라는 상황에서 재현시킴으로써 상업적 흥행 효과를 극대화한 것입니다.
한국 군사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해부는 사산(死産)된 반면, 그 군사주의의 미학에 대한 은근한 – 또는 어쩌면 너무나 명백한 – 음미는 한국 사회에 만연된 마초주의와 맞닿아 이 영화를 최고의 성공작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기존의 억압적 코드들의 끈질긴 주술(呪術)이야말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이야기했던 대중적 상업 영화의 "반동성"의 핵심인 듯합니다.
대중 문화의 위와 같은 문제들은, 과연 식민지 시대의 초기의 한국 영화라고 해서 없었겠습니까? 주체적인 국민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했던 식민지 시대라, 우리는 그 당시의 상업적 대중문화라 해도 일단 조선인에 의한, 조선에 대한 것이라면 다 "민족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무조건 긍정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국민 국가의 건설이 불가능했던 시절에 "민족 문화"가 그 기능을 말하자면 대체했다는 무의식이 거기에 깔려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중 영화라는 이름의 "민족 문화"의 내용을 조금 더 클로즈업시켜 본다면 재미있는 측면들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서 "민족 영화 예술"의 상징이라 할 나운규(1902-1937)의 재기작(再起作)으로 평가 받는 1937년의 〈오몽녀〉(五夢女)를 생각해봅시다.
사실, 제작을 일본인 자본이 맡아 했지만 감독과 배우들이 조선인이고 배경도 조선이라 국민국가 방식의 분류법으로 "민족 문화"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더군다나 그 원작이 바로 1925년에 〈조선문단〉 7월호에 당선되어 나중에 〈시대일보〉에서 개작 연재했던 상허 이태준(1904-?)의 처녀작 〈오몽녀〉이었기에 우리로서는 "근대 민족 문화"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 작품이 됩니다.
인신매매가 횡행하고 식민지의 하급 관료들이 여성을 겁탈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는 부조리한 조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 당연히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가 쉽습니다. 더군다나 토속적인 요소가 강하게 느껴지기에 "조선적인 것"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수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태준의 원작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남녀 관계의 모습은 기존 사회의 가부장적인 "상식"에 딱 그대로 틀어맞는 것입니다. 오몽녀라는 여자는 아홉살에 단돈 35원에 본인보다 20살이나 더 많은 객주이자 봉사 점쟁이 지참봉에게 팔려간 의미에서 일단 사회의 "희생자"입니다. "희생된 어린 여성"만큼은 가부장적인 상상력을 더 잘 자극하는 모티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참봉과 비정상적인 부부관계를 강요 받는 성숙된 여성으로서의 오몽녀는 일차적으로 – 남성의 시선으로 관조(觀照)된 – 그녀의 "몸"으로 규정되어집니다: "(五夢女는) 美人이라는 것보다 거저 투실투실하고, 푸근푸근한 福스러운 계집이라고 할지? 그러나 이 족오마한 드멧거리에선, 제가 一色인체 하고 꼬리를 치기에는 넉넉하얏다". "투실투실, 푸근푸근한 계집"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남성들과의 관계 맥락에서만 전개됩니다.
소설에서는 청년 어부 김돌이의 남성적인 기력과, 남순사라는 하급 관료의 부(富)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던 오몽녀는 결국 맛이 있는 음식을 가져다 주고 젊은 남체(男體)로 "여성적인 음욕"을 잘 채워주었던 김돌이를 택해서 같이 블라디보스톡으로 달아나는 것이고, 영화에서는 김돌이가 오몽녀를 거의 훔쳤다시피 자신의 배로 무인도로 데려가지만 어쨌든간에 여성으로서의 오몽녀는 "대남 (對男) 관계"와 "성적인 욕망"으로만 읽혀집니다.
"여성"을 "음욕(淫慾)", "윤락(淪落)의 잠재적인 가능성"과 등가시(等價視)하는 가부장적인 사고의 전형을 바로 이 원작과 원작에 의해 만들이진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부장적인 사고에 의해 이미 순치돼 여성의 성애화(性愛化)된 면모에서 "흥미진진"을 느끼는 대중 관객들로서는 환영 받을 "고품질 눈요깃감"이지만 과연 이러한 영화는 넓은 의미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합니까? 과연 보다 나은 사회로 우리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민족적"이라는 수사를 붙이려면 붙일 수 있지만 "식민지 시대의 민족 영화"라고 해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지적한 대중 문화의 본질을 결코 벗어난 것 같지가 않습니다.
물론 허동현 교수님께서 제게 반박하실 수 있는 부분은, 남편을 박차고 원작 소설 같으면 외간의 남자를 스스로 택한 오몽녀의 적극성 정도면 적어도 전통 문화의 맥락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부분입니다. 물론 여성이 삼강오륜의 멍에를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해도 우리가 근대의 상대적인 진보성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여성이 주역이 되는 일제 시대의 "민족 영화" 하나 하나를 보노라면 그 가부장적 상상에 의해 계속 눌리는 듯한 느낌이 대단히 강하게 듭니다. 예컨대 〈오몽녀〉가 나온 2년 뒤에 방한준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정비석(1911-1991)의 1937년의 소설 〈성황당〉을 생각해보시지요.
〈조선일보〉에서 연재됐던 이 소설도, 그 각본이 〈삼천리〉(1939년 6월)에 실리기까지 했던 이 영화도 일제 말기의 "성공적인" 대중 문화 작품의 표본이라면 표본이겠지요. 잘 아시겠지만 이 작품의 분위기는 거의 오리엔탈리즘 방식으로 일종의 "이질적인 별천지"로 그려진, 원시적이며 성적인 두메산골인데, 줄거리는 숱을 구어 생계를 이어가는 현보의 아내 순이를 빼앗으려는 김상(김주사)의 "겁탈 시도"입니다.
겁탈에 맞서야 할 순이는, 비록 "개 같은 놈" 김상에게 나름의 저항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순진무구하여 모든 것을 성황님의 덕으로 생각하고 어려울 때마다 "환상의 가부장" 성황님을 찾는 "의타 (依他)의 여성"으로 그려집니다. 김상의 흉계로 현보가 경찰들에게 넘겨지고 늦은 밤에 집에 혼자 있는 순이가 김상에 의해 거의 침범을 당하게 될 때에, 그녀를 구하는 것이 그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그녀를 구하기 위해 김상을 보기 좋게 때려준 남성 광부 칠성의 "남성적인 힘"입니다. 김상과 칠성의 격투신이 이 영화의 일종의 정정이기도 한데, 남자들이 격투를 할 때에 "약한 여자"는 성황당으로 달려가 "이 싸움을 좀, 성황님, 성황님!"이라고 호소하기만 합니다.
남자는 "힘"으로 표상되지만, 순이가 나체로 하천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노력 들여 찍은 이 영화는 여성을 근본적으로 남성을 흥분시키는 "매혹적인 여체"로 만들었습니다. 식민지 시절의 영화에서는 여성의 이미지가 "요부(妖婦)"/"음녀(淫女)"와 "양처(良妻)"의 사이를 배회했지만 재미있게도 그 당시의 여성 스타들이 "음녀"보다 "현모양처"에 더 가까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오몽녀의 역을 맡았던 노재신 같으면 1930년대말 신문에서 "가정 생활을 충실히 하는 순박한 여성"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지경순(池京順) 같은 일제 말기의 대표적인 미녀 스타들에게 잡지사 등에서 늘 돌아오는 질문은, "언제 결혼할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삼천리〉, 1940년 5월호). 대중 문화가 공고화시키고 확대 재생산시키는 남성들의 상상이란 참 단순하지요?
물론 대중문화는 남성 헤게모니라는 모든 가부장적 사회들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의 구체적인 권력자들에게도 늘 유용하지요.
총독부가 영화를 활용하는 방법은 다양했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란 조선 통치에 필요한 영화들을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의 최초의 극영화로 평가받는 "월하의 맹서"(1923년 4월 9일 시사됐음)는 바로 저축 장려용 선전 영화이었지요. 약혼녀 가정의 저축이, 도박으로 빚에 빠진 주인공을 구한다는 스토리도 드라마틱하면서 대중적이며, 도박의 무모함에 대한 비판이라는 테마도 "조선인들의 악습을 고치겠다"는 총독부의 "문화정치"의 표어와 잘 맞아떨어졌겠지요.
물론 선전 영화라고 해도 윤백남의 시나리오의 테크닉이나 이월화의 뛰어난 연기력은 마땅히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며, 이 영화가 한국 영화사의 한 분수령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의 최초의 극영화가 바로 선전물이라는 점은 어쩌면 참 시사성이 크지 않습니까? 그 후에도 선전물들이 계속 나왔으며, 특히 1940년의 "조선영화령"으로 기존의 영화사들이 다 해체되고 유일한 국영 영화사만 영업하게 된 전시 체제 하의 영화란 조선인들에게 군입대를 강요하는 전쟁 선전의 일색이었습니다. 사실, 관중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한 "월하의 맹서"와 같은 뛰어난 선전물들이야말로 그람시가 이야기했던 헤게모니 – 즉 통치에 대한 피치자들의 "자발적" 합의 – 만들기의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선전물들의 직접 효과도 무시 못하겠지만 넓은 의미의 식민지 통치자에 의한 영화의 이용이란 스크린의 마술이 가져다주는 대중의 탈(脫)정치화 효과라고 하겠습니다. 1940년에 영화극장의 총관람객의 수가 1천2백만 명을 넘은 조선에서는, 영화의 대중적인 마력이란 이미 그때에도 무시못할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회주의적 지향의 지식인들이 "조선의 나 이어린 여자들이 하등의 민족적, 계급적 의식 없이 공상적 소부르조아 심리에서 스크린에서 나타나는 미모와 고운 목소리에 유혹된다" (김유영, "영화여우 희망하는 신여성군", - 〈삼천리〉, 1932년 10월호) 라고 지적할 정도이었지요. 더군다나 성이 대중에게 개방되지 않았던 그 시대에 키스신이라도 구경할 수 있었던 영화란 대중의 성적 욕구의 분출구이기도 했었겠지요. 즉, 대중의 적접적 동원과 함께 대중의 정치적인 우민(愚民)화도 스크린과 – 그때까지는 아주 제한적인 – 스크린에서의 선정적 요소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문화적 현상들이 다 그렇듯이 헤게모니 창출의 도구인 영화는 그 동시에 기존의 헤게모니와의 경쟁의 도구로도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었습니다. 나운규(1902-1937)의 "아리랑"(1926)과 같은 "민족영화"들은, 잠재적으로 일제와의 대결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민족"에의 소속의 정서를 대중화시키는 데에 어떤 신문이나 소설보다도 더 크게 공헌한 셈이지요.
그 당시의 한 비평가는 이 영화의 이와 같은 효과를 두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하얀 옷이 영화면에서 펄펄 날린다. 아! 얼마나 가슴이 저리고도 동포애 깊은 동경이냐? (…) 그 찌그러진 초가집, (…) 긴 두루마기 자락을 써늘한 바람에 나부끼면서 일하러 다니는 농촌의 인텔리겐차 박선생,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를 부르고 춤추는 신. 이것이 조선에서 조선의 모든 것을 배경으로 하고 우러난 영화이다" (승일, "라디오, 스포츠, 키네마", - 〈별건곤〉, 1926년1월호).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만들기는 20세기에 접어들어 영화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일제가 강요했던 식민지적 "동화주의"보다 조선의 주체적인 민족주의가 상대적인 진보라면 "조선 민족 만들기"에 동원된 영화는 상대적으로 진보의 도구가 됐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1926년 6월에 필름검열 부칙이 제정되고 본격적인 영상물 검열의 시대가 열린 관계로, 영화를 헤게모니 경쟁을 위해서 이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저항적 요소가 탄압을 받는 동시에, 조선의 스크린을 정복한 것은 서양의 영화였습니다. 서양의 유명 배우들이 조선 대중의 "스타"가 되고, 서구적인 미의 기준이 조선인의 미의식을 장악하고, 영화에 의해서 상상된 낭만적이고 극적인 "서양"이 대중의 상상 속으로 침투한 것은 바로 식민지 시대부터 아닙니까? 즉, 영화란 일본의 정치적 헤게모니 뿐만 아니고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 성립에도 크게 기여한 것인 셈이지요.
영화를 선전용으로 이용하는 것이나 영상물 검열, 그리고 스크린에 의한 우민화 정책은, 과연 식민지 시기의 종말과 함께 사라진 것입니까? 아닌 것 같습니다. "미제놈"들을 때려죽이는 신을 강조하는 북한의 "혁명 영화"나, 남한의 반공드리마와 스크린과 섹스에 의한 1980년대의 우민화 정책이, 총독부의 통치법을 계승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아직 영상에 의한 헤게모니의 시대를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국산 영화들이 거의 60%를 넘는 시장 점유율을 보이고 우리가 적어도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의 헤게모니적 마수(魔手)를 조금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상대적인 선(善)이라면 선입니다.
〈실미도〉 같은 영화에서는 비록 유용한 사회 의식이 기존틀에 의해 왜곡되기는 해도, 아직도 박정희 신드롬을 앓고 있는 사회에 적어도 일정한 수준에서 필요한 이야기를 해준 부분이 있는 것이지만, 미제 영화의 대다수는 우리에게 말 그대로 "안 보는 게 나은" 백해무익의 눈요기거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상업적 대중문화라는 범위 그 자체를 벗어나 높은 예술적 차원에서 가부장주의와 자본주의의 추태, 그리고 그 추태를 넘어서는 방법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비록 만들어진다 해도, 대개 저(低)예산의 독립영화라 대중으로서 접근이 힘듭니다. 저는 앞으로 〈오발탄〉과 〈바람 불어 좋은 날〉, 〈파업 전야〉의 전통이 계승ㆍ발전되어 한국 영화는 자본주의의 악몽에서 세상을 깨우도록 많이 주효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한국영화제가 진행 중인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참고 서적**
김진송,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현실문화연구실, 1999.
유민영, "연극, 영화", - 〈한국사 51: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국사편찬위원회, 2001, 364-378쪽.
김수남, "작가 연구: 나운규의 민족 영화 재고", - 〈한국 영화 학회 회보〉, 제7권, 1990, 38-58쪽.
권용선,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그린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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