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ㆍ미 법원의 판결문은 길다. 먼저 사실관계를 요약하고, 양측의 논거를 자세히 적은 다음, 그 중에 어느 쪽 논거를 무슨 이유로 채택해서 판결의 근거로 삼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느라고. 그러노라면 판결문이 100쪽이 넘어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 기다란 판결문을 판사들이 직접 작성한다.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판결문을 쓰는 가장 큰 목적은 판결 당사자들, 특히 패소한 측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패소한 측은 판사의 권위 때문에 그 판결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판결의 논리 때문에 그 판결을 받아들인다. 모든 당사자가 판결의 논리에 승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항소가 있고, 상고가 있다. 1심을 맡은 판사로서는 자신의 판결이 항소나 상고에서 번복되는 것만큼 기분나쁜 일이 없다. 그래서 당사자가 승복할 수 있도록 판결문 작성에 정성을 들인다.
로스쿨 도입안은 사법개혁위원회와 사법개혁추진위원회라는 두 단계를 거쳐서 법안으로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많은 회의들을 거쳤다. 그래서 외견상으로 보면 충분한 토론과 검토의 과정을 거친 것 같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전혀 아니다. 사법개혁 위원회나 사법개혁 추진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에는 지금까지 제기되었던 각종 의견들, 찬성과 반대 의견들과, 그 의견들이 어떻게 정리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반론은 어떤 것이 있었으며, 그 반론의 논거는 무엇이고, 그 반론에도 불구하고 '추진'으로 결정하게 된 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이다. 법률가들이 주축이 된 기구인데 말이다.
내가 지난 번 원고에서 제기한 문제와 그 다음에 대구의 정재형 변호사께서 제기한 문제, 그리고 그 원고들에 달린 독자들의 댓글에서 제기된 문제들 중 상당 부분이 심의위원회의 공청회나 그 이전 단계에서 제기되었던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문제제기를 기각하고 '추진'으로 결론을 내리는 이유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없는 것이다.
사법제도 개혁추진위원회에서 한번 개최했던 공청회 기록을 보면 도입을 지지하는 주장 중에는 '오랫동안 논의가 되어 왔으니까, 추진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자'는 의견도 있었다. 대한변호사회를 대표해서 참석한 분은 '우리는 원래 반대지만 국가에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까 할 수 없이 부작용을 줄이기라도 하자고 세부안에 대한 의견을 낸다'는 얘기였다.
그 공청회에서는 추진 반대 의견을 제시한 분들도 있었지만, 그 뒤의 어느 결정문이나 회의록에도 반대 의견에 대한 기각 사유 설명이 없었다. 그냥 무시된 것이다. 그러고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지난 번 내 원고 말미에 '공청회 단계에서 내 의견을 개진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썼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어수룩한 기대였던 것 같다. 외국에서, 그것도 미국도 아니고 영국도 아니고 뉴질랜드에서 일하는 변호사의 의견 따위는 제대로 토론도 없이 묵살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았을까 싶다.
한승헌 사법개혁추진위원장께서는 로스쿨 도입법의 이번 회기 국회 통과를 요청하러 국회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로스쿨 도입안은 지난 10년 동안 논의의 집대성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분을 존경하지만 그 말씀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본 자료에 의하면 로스쿨 도입 의견이 나온 것은 10년 전이 맞지만, 그동안 계속 논의되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1월에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처음 검토되었지만 같은 해 4월에 바로 기각되었고,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자문기구에서 건의했지만, 그 다음 해에 또 다른 대통령 자문기구에서 기각되었다. 역대 두 번의 정권에서 두 번이나 검토해서 두 번이나 기각시킨 것이다. 그러고는 한 5년간 이 이야기는 쑥 들어갔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새 대법원장께서 취임하면서 사법제도 개혁 검토과제로 내어놓은 안건 중의 하나가 '로스쿨 도입 여부' 검토였다. 이미 폐기되었던 안을 다시 검토할 필요를 왜 느끼셨는지는 모르지만, '도입 여부' 검토면 타당한지 부당한지 여부를 검토하라는 것이니까, 그 안을 낸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그 이후의 논의과정이 타당성 여부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도입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전문위원들이 조사한 자료의 수준도 빈약하고, 그 자료들조차 로스쿨을 우리나라에 도입해야 하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입을 제안하는 쪽으로 전문위원들의 의견은 만들어졌고, 추진위원들은 전문위원들이 내놓은 안을 거의 그대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공청회는 위에 설명한 방식으로 치러졌고. 그러므로 제안된 것은 10년 전이지만, 그 동안에 두 번은 도입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었고, 이번에 도입을 결정한 논의는 지난 2년 동안의 일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 논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실무자 몇 사람이 내놓은 아이디어에 그대로 고무도장을 찍어준 것일 뿐이다.
정부와 여당은 이번 2월 임시국회, 늦어도 4월 임시국회에서는 로스쿨 도입법을 통과시키기로 했다고 한다. 한나라당에서도 반대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한나라당이 반대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예전에 한나라당의 정부에서 그 안을 낼 때 제안을 했던 비서관께서 지금 한나라당 대표를 돕는 일을 하고 계시므로.
이런 여건이니 어쩌면 이번 국회에서 이 법이 그대로 통과될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법안 심의 과정도 생략하고. 그렇게 되면 로스쿨 도입안에 대한 반대 논거는 한번도 제대로 검토되지 않고, 법안이 통과되고 시행에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 모두들 다른 사람이 알아서 검토했겠지 생각하고. 사실은 아무도 제대로 검토를 하지 않았는데.
로스쿨 도입은 참여정부의 공약사항도 아니었다. 이렇게 서둘러서 추진할 이유가 없다. 2008년부터 로스쿨에서 신입생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고 하는데, 만약에 도입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왜 2008년부터 신입생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2010년이나 2015년부터 받아들이면 안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이 법이 통과되면 로스쿨 설치를 원하는 대학교들은(대부분의 대학교가 희망한다고 한다), 법에서 요구하는 시설을 확충하고, 인원을 뽑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그렇게 되기 전에 이 법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검토하고, 반대론자들도 승복할 수밖에 없는 도입 이유가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검토해보고 반대론이 옳으면 정부에서 철회하거나, 국회에서 부결시키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이제 대한민국 국회밖에 없다. 법안을 충분히 검토하고 심의하는 것은 국회의 고유권한이요, 국민이 맡겨준 책무다. 정부안을 빠른 속도로 통과시켜 주던 거수기 국회는 유신체제와 함께 예전에 끝났다고 믿고 싶다.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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