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미해방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 장군이 중남미 통합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지난 1825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개국한 남미의 대표적인 빈국 볼리비아가 역사상 처음으로 원주민인 잉카제국의 후예를 국가원수로 선택했다.
지난 18일 볼리비아 전역에서 실시된 총선 중간투표를 겸한 대선에서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당'의 에보 모랄레스 후보가 과반수인 50.9%를 득표해 사실상 1차 선거에서 대통령 당선을 확정지었다.
19일 오전(현지시간) 볼리비아의 개표결과는 지역선관위가 집계한 자료를 인용한 현지 언론사들의 보도에 의해 발표됐다. 현지언론들은 일제히 인디오출신 에보 모랄레스 후보가 2위 득표 후보인 호르헤 끼로가 후보를 20%포인트 이상 앞서 제65대 볼리비아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보도했다.
볼리비아 선거법원의 공식발표에 앞서 언론들이 개표자료를 발표하는 건 정부의 통신시설과 교통 등 정보통신 설비가 낙후하기 때문에 국가선거법원이 개표결과를 신속하게 집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랄레스 당선자는 대선과 함께 치러진 총선 중간투표(남미는 총선에서 국회의원 전체를 한꺼번에 뽑지 않고 2년마다 50%씩 나누어 뽑는다)에서 상원의 과반수 의석을 차지해 실질적으로 볼리비아 국정을 장악하게 됐다.
인디오 출신으로 태어나 바닥인생을 살다 일약 대통령에 당선된 모랄레스는 당선 소감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남미공동시장 국가들과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며 미국과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우리는 볼리비아의 이익을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말해 미국과의 관계도 일방적으로 반미기조만을 유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후보자시절 반미와 반부시를 외쳤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그의 집권 후 행보가 주목된다.
"볼리비아의 역사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모랄레스 당선자는 "정당하게 투자된 해외 투자자들의 재산을 강탈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혀 볼리비아의 극빈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자국 내 기업들의 전면국유화 요구는 일단 유보한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남미 현지언론들은 이번 볼리비아의 대선과 총선에서 천연자원이 풍부한 남부지역 주민들은 보수우파ㆍ친미파 정치인들을, 빈민들이 거주하는 북부의 고산지역은 좌파 사회주의정당을 밀어 극심한 지역주의 현상과 빈부의 국론분열 현상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구태의연한 공무원들의 기득권층을 위한 업무방식으로 투표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한 것도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됐다. 모랄레스 후보진영과 투표참관인들은 "일부 지역에서는 선거인명부가 송두리채 없어진 곳도 있어 수천의 유권자들이 국가선거법원 앞에 모여 투표권을 달라고 시위를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극빈서민층 지역에서의 선거인 명부관리는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이어서 역대 선거가 중산층 이상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고 공개했다.
따라서 만일 투표결과가 지난 2003년처럼 모랄레스가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는 결과가 나왔더라면 볼리비아 전역이 다시금 대규모 시위와 유혈사태로 얼룩질 뻔 했다고 밝혔다.
***'모랄레스 반미와 자원국유화 밀어붙일까'**
한편 지난 6월 천연자원의 전면 국유화를 부르짖으며 까를로스 메사 대통령의 하야를 불러왔던 극빈서민층들과 시위 주도세력들은 모랄레스 후보가 50% 이상을 득표해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자 수도 라파스에 모여 경적을 울리면서 "우리는 승리했다"고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지난 2003년 마약밀매 소탕작전 중에 애꿎게 사망한 코카농장 농부들과 천연자원 국유화 시위 중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시위대의 가해자 처벌을 주장하고 있어 모랄레스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지 과거청산을 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보수파 정치인들과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하고 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모랄레스는 중학교 중퇴라는 학력과 과격한 개혁파라는 것도 문제로 지적이 되고 있다. 중산층 이상의 유럽이민자 후손들인 상류층 국민들과 친미파 정당들의 집중적인 견제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볼리비아는 181년의 역사에서 64명의 대통령이 집권했는데, 이 가운데는 3~4선을 한 정권이 있는가 하면 1주일을 못 버틴 정권도 있을 정도로 정치가 불안정했던 나라다. 조기 퇴임한 정권들의 대다수는 군부 구데타로 밀려났으며 200회 가까이 군부 반란이 있기도 했다. 이런 정변과정에서 힘없는 원주민들만 희생되었으나 지금까지는 원주민들의 무고한 희생문제와 보상은커녕 억울한 죽음에 대한 재판조차 제대로 열리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 원주민 출신의 집권으로 상황이 바뀌어 어떤 식으로든 공권력이 개입된 원주민들의 희생에 대한 과거청산도 뜨거운 감자로 등장할 전망이다.
또한 모랄레스가 공약으로 내세운 코카재배 합법화도 미국 등 서방세계와 힘겨루기를 해야 할 과제다. 모랄레스는 마약제조를 금지하고 코카잎을 이용한 식품개발에 주력할 것이라며 코카재배는 합법화하되 코카잎을 정제하는 코카인 생산은 금지하겠다는 절충식 복안을 내놓았다.
현재 볼리비아가 안고 있는 각종 문제점을 의식한 모랄레스 당선자는 19일 "이제 우리는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기쁨보다는 어떻게 국정을 운영할 것인가와 볼리비아 극빈 서민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볼리비아가 당면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필자가'남미 리포트' 6월15일자와 11월30일자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남미 땅의 주인임을 내세우는 인디오출신 유권자들의 열화 같은 지지에 힘입어 850만 볼리비아호의 선장이 된 에보 모랄레스 당선자가 일자리와 빵을 달라고 외치는 원주민 극빈서민층과 기득권층인 유럽이민자 후예들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봉합할지가 집권 이후 최대의 당면과제로 보여진다.
또한 쿠바와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이어지는 좌파정권들과 자국기업 보호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미국 등 서방세계와의 관계설정도 모랄레스 정권의 향방과 성패를 결정지을 변수다.
이와 관련 남미통합위원회 차쵸 알바레스 신임의장은 "볼리비아의 정회원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히고 차베스와 룰라, 키르츠네르 대통령 등이 모랄레스의 집권을 염두에 두고 볼리비아의 정회원 가입을 심도 있게 논의한바 있다고 공개했다.
중미 쿠바에서 불기 시작해 베네수엘라를 거쳐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를 휩쓸고 있는 좌파정부 바람이 볼리비아를 거쳐 다시금 북상하고 있어 내년 초에 있을 칠레 대선의 결선에서 좌우대결 또한 남미 현지언론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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