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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와 그 후의 신여성, 또는 욕망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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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와 그 후의 신여성, 또는 욕망의 정치

박노자-허동현 서신논쟁 3부 〈7〉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보통 근대를 경제적인 차원에서 하나의 피라미드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자본의 집중이 고도화된 후기 자본주의 같으면 맨 위에 있는 극소수의 다국적 대기업 대주주들을, 밑에다가 대다수의 고용 근로자들이 피라미드형으로 받쳐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19세기 – 20세기초기의 근대 사회들을 보면 경제 뿐만 아니고 욕망의 충족이 허락되는 정도를 척도로 삼아도 피라미드형 사회의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예컨대 당대의 근대 사회의 준거틀로 인식됐던 빅토리안 시대(1837-1901)의 영국을 생각해보시지요. 귀족층이나 부유한 중산층의 성인 남성들은, 말로는 "자제의 도덕"을 들먹여도 고급 포르노그래피나 에로틱 문학을 열람한다든가, 고급 매춘부의 고가 "서비스"를 이용한다든가 등의 성적 욕망의 자극과 충족에 있어서는 별다른 제한을 느끼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류층의 매매춘 행위 같으면, "전염병 방지법" (1864, 1866, 1869)과 같은 국가적 위생기구의 통제와 교회, 자선가의 지탄을 늘 받아야 됐지요. 남성의 성욕 충족은 쉬워도 여성에게 "가정주부의 덕목"이 강요됐으며, 성인의 성생활이 다채로워도 청소년의 자위 행위마저도 "비도덕적이며 비위생적인", "힘과 담력의 함양을 방해하는" 요소로 규탄받았지요. 즉, 그 성적 욕망을 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충족시킬 수 있었던 부유한 성인 남성이 "욕망의 피라미드"의 상부를 이루었지만, 그 상부를 받쳐주는 것은 "자제"가 강요된 대다수의 빈민, 여성, 청소년들이었습니다.

다소의 차이도 있었지만 "욕망의 피라미드"의 기본틀이 초기 근대의 조선에도 그대로 이식된 것 같습니다. 중류 이상의 성인 남성이 요정에서 〈조선미인도감〉이나 권번의 "초일기(草日記)"의 유혹적인 사진으로 그 색욕을 자극하여 기생을 불러 노는 것은 어려운 일도 이상한 일도 별로 아니었습니다. 아니, 직업을 찾지 못한 대학 졸업생 - 소위 "고등 실업자" - 이라 해도, "중류" 남성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느꼈던 이상 유곽에 들락날락거리는 것을 다반사로 삼았습니다.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의 명작 〈레디 메이드 인생〉(1934)에서 법률 책을 잡혀 술집 갔다가 유곽에 가는 몇 명의 무직 인텔리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카폐 여성들을 희롱하는 것을 특기로 삼는 염상섭(廉想涉, 1897 ~1963)의 소설 〈만세전〉(1922)의 주인공 "이인화"의 표현대로 "여성의 뭉실뭉실한 살"을 걱정을 잊기 위한 도구로 삼는 것은, "중류"성인 남성의 일종의 계급적인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절지"(折枝 – "꽃 꺾기" – 기생 부르는 일의 별칭)가 "위"의 일상의 일부분이 된 개화기, 일제 시절의 사회에서는, 연령적, 사회경제적, 성별적 "하부"에 강요했던 것은 역시 맹목적인 "자제", "정숙", "정조"였습니다.

〈황성신문〉(1909년 9월3-4일, 논설 "조혼의 폐해")이 조혼 (早婚)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주된 원인 중의 하나는, "규문의 일"(즉, 10대 부부의 성관계)로 남성의 지기(志氣)가 박약해져 민족을 위한 영웅, 사업가나 학자로 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0대 중,후반의 청소년이 근대성 담론의 차원에서 사회적 "보호"의 대상물로 전락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개화기입니다.

"정결과 정조를 늘 지켜라", "훌륭한 아내와 어머니가 돼서 근대적 학식을 익혀 민족 영웅이 될 사내 아이를 어릴 때부터 잘 가르쳐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17일자, "여자 교육에 대한 의론")와 같은 요구는, 여성에게는 한층 더 강력했습니다. 한국 전통 에로스의 진수라 부를 만한 〈춘향전〉을 "음탕교과서"(이해조, 〈자유종〉, 1910)라고 매도할 만큼 빅토리안적인 "정숙"과 "자제"가 절대시됐던 것이지요.

우리는 대개 개화기 때 성취한 것 중의 하나로 여성을 위한 근대적인 교육을 꼽지 않습니까? 물론 1910년 이전에 근대 교육의 수혜자가 된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했지요. 1909년 같으면 공립, 사립 보통(즉, 초등) 학교에 재학 중인 여학생은 1,274명이었는데, 여성만이 다니는 이화, 정신(貞信), 배화, 숭의와 같은 사립 고등보통 여학교의 수는 말 그대로 열 손가락으로 셀 만했습니다. 수백 명에 불과했던 그 신식 학교 여학생들은 대개 개화 지향적인 신흥 지배계급에 속하거나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여, 나중에 선교사 밑에서 일하게 돼 있는 "주변 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여학교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습니까? 기독교 계통의 계몽주의자 노병희(盧炳喜)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1909년에 발간한 〈여자소학수신서〉라는 그 당시의 전형적인 여성 윤리 교과서를 한 번 펼쳐봅시다.

그 제일과는 – 예상대로 – "얌전"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고 그 내용인즉: "대저 여자의 행하는 것과 앉는 것과 눕는 것과 일어나는 것은 남자와 다름이 많으니 마땅히 얌전하고 씩씩하며 단정하게 하되 머리를 자주 빗으며 윗옷과 치마를 (…) 깨끗하게 하고 (…) 서기와 앉기를 기울게 말며 거만한 모양을 드러내지 말며 크게 웃지 말며 소리 지르지 말며 공연히 심술내며 성내지 말며 음식 먹을 때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말며 (…) 한 마디라도 헛되이 말며 (…) 경망하다는 책망을 없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마땅히 얌전해야 한다"… 말 그대로 노예 교육이라고 할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개화기 때 최초로 근대적으로 정형화된 뒤에 과연 한반도에서 그 족적을 감춘 적이 있었습니까? 물론 〈엽기적인 그녀〉와 같은 최근의 영화들을 보거나 엄정화와 같은 대중문화의 여성적인 우상들을 보면 요즘 "발랄한 여자"가 어느 정도 하나의 행동 패턴으로 그 위치를 획득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데, 그게 오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 속에서의 '발랄한 그녀"는, 일상 생활 속에서 개화기 식의 그 "얌전함"에 그대로 옭매여 있는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일종의 대리 만족을 제공하고, "얌전한 여성"을 "정상"으로 알고 있는 남성들에게 이질적인 여성상을 맛보게 하는 재미를 가능케 하는 것이지요. 영화는 아무리 "발랄"해도 회사 생활이나 가정 생활은 역시 "얌전한 행동", "단정한 외모와 의상", "누나나 어머니와 같은 인내심과 자상함" 등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독립적인 자아를 찾으려는 여성에게는 "얌전"은 저주와 같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여성에게 순종주의를 강요하려는 사회로서는 아주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지요.

그 교과서의 내용을 계속 말씀드려 볼까요? 물론 여성의 "일"로 방직과 음식 만들기, 집안일하기, 쓸기와 닦기를 제시하고 특히 음식 만들기를 어릴 때부터 배우기를 권하는 것이고, 여성의 본분으로서 특히 부모 섬기기와 시부모 섬기기를 강조하지요.

"시부모가 부르시거든 공순히 공경하며 대답하며, 먹을 음식이 있거든 먼저 드려 공경하고, 일이 있을 때 그 음성을 살피며 괴로움이 있을 때에도 성내지 말고 얼굴빛을 화평하게 하며 말을 공순히 하며 부드러운 기운과 참는 마음으로 그 당한 일을 참아 지내라"… 어떻습니까? 이 교과서가 나온 지 이미 거의 100년 가까이 됐지만 한국 남성이 하루에 집안 일을 하는 시간이 평균 30여 분 정도 되고 "음식 만들기" 정도는 아직까지 "당연히 여자가 해야 할 일"로 치부되지 않습니까?

이 교과서에서처럼 남편을 더 이상 "부녀자의 하늘"로 부르지 않으니까 정도의 차이야 당연히 있지만 지금도 술 먹은 남편이 밤 늦게 친구를 데리고 집에 오면 아내로서 화내지 말고 상을 차려주는 것이 "여성다운 인내심의 덕"으로 보지 않습니까? 즉, 개화기 때 정형화된 남성우월주의적 근대의 젠더 담론은 지금 비록 그대로 존속된 것은 아니지만 그 노예적

거짓 "도덕"의 골자인 순종주의의 강조는 계속 이 시대의 여성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성에게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제대로 나누어주지 않는, 남성이 실권을 잡은 사회인 만큼 여성에 대한 초기 근대의 극단적인 억압성이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한국 개화기의 근대는 남성의 욕망을 부추기면서도 여성의 욕망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억압하는 방향으로 그 틀이 잡힌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는 물론 이웃 나라에 비해서도 훨씬 심한 성리학적 사회의 반(反)여성적인 성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컨대 1850년대에 태평천국의 반청 (反淸) 봉기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혁혁한 공로를 세운 태평군의 여군 (女軍)과 같은 존재를, 조선말기의 어떤 민란에서도 아마도 찾기가 힘들 듯합니다. 민중 투쟁에서의 여성의 참여야 당연히 있어서도 수많은 여성이 무기를 든 투사가 된다는 것은 조선 사회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지요. 물론 태평천국 때의 여군의 성분을 보면 상당수가 광서성의 장족(壯族) 출신들이었는데, 모계 사회로서의 면모를 부분적으로 간직해온 장족의 젠더 질서의 구조가 조선은 물론, 가까이 사는 한족과도 많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한족이라 해도, 남성보다 더 적극적으로, 더 용감하게 폭력 투쟁에 앞장서는 여성 투사의 상을 꽤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감호여협(鑑湖女俠)"이라는 아호를 가질 만큼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검술 등을 즐겼던 청나라 말기의 혁명 투사 추근(秋瑾: 1875~1907)을 생각해보시지요.

아이를 가진 뒤의 남편과의 이혼과 일본 유학, 일본에서의 동맹회라는 공화주의 조직에서의 맹활약, 귀국 이후의 여성 신문 발간과 비밀리의 혁명군 조직, 그리고 굴복함이 없는 장렬한 죽음… 잔 다르크는 그 "애국 정신" 덕분에 개화기의 조선 신지식인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를 모은 인물이었는데, 살아 있는 잔 다르크, 즉 추근처럼 남편도 버릴 줄 알고 칼도 들 줄 아는 여성을 동지로 삼기에는 "자강회"나 "신민회"의 남성 계몽주의자들은 개방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남존여비 사상을 "양처현모"라는 방식으로 근대화시켜 새로운 젠더 이데올로기를 창출한 메이지 일본의 영향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구한말의 여성을 위한 수신 교과서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일본의 수신 책을 본딴 것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성의 목을 옥죄는 끈질긴 유교주의와 일본 영향에다가 여성을 "얌전" 등의 이름으로 압박한 것은 바로 그 당시의 조선 신지식인계의 젠더 담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기독교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조선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1886년에 바로 선교사들에 의해서 설립됐다는 것도, 황신덕(1898-1983)과 같은 "주류"의 신여성이 "조선 부인의 생활에 광명은 기독교이었다"라고 공언하는 등 일제시대 이후의 "개명한 여성"들이 대개 기독교와 인연이 두터웠다는 것도 다들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이화학당을 세운 선교사들이 기독교 전파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세워 그 학당에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심어줄 수 있는 미래의 주부들을 양성할 계획으로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는 것까지는 우리가 보통 잘 인식하지 않는 듯합니다. 구미 사회의 보수적인 종교계를 대표했던 그들이 "가정과 교회에 충실한 정숙한 부인" 만들기를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는데, 이와 같은 젠더의 논리는 아주 쉽게 조선의 성리학과 접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몽기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대개 기독교가 "우주와 사회의 절대적이며 전반적인 진리"로서 성리학을 그대로 대체하면서 상리학적 색채를 띠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성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는 그 접목의 과정은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개화기 때 조선에 이식되어 유교화된 기독교의 여성관을 살펴보기 위해서 초기 기독교 문학을 조금 흝어보는 게 어떨까요? 예컨대 기독교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전형적인 친일 언론인 이상협(1893-1957)의 소설 〈눈물〉(〈1913-1914년 〈매일신보〉 연재)을 보시지요.

거기에서 관료였다가 근대적 실업에 투신한 은행가 서협판의 딸 서씨부인은 바로 결함이 없는 모범적인 규수입니다. "남자의 안목이 황홀할 정도"로 용모가 뛰어나지, 엄격한 유교적인 가풍 속에서 자라와서 남편을 섬기는 정성과 예의가 대단하지, 부모들이 정해준 가정의 사업 계승자인 조필환과 "아무런 추잡함이 없는 순결하고 신성한 연애"를 잘하여 결혼하지 – 말 그대로 문제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조필환에게 한문까지 배웠으니 여중군자인 셈이지요. 부유한 집에서 순결하게 성장하고 "여자에게 필요한 만큼" 교육을 조금 받고, 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내조하는 "정숙한 규수"야말로 본인들도 대다수 상류층이나 중산층에 속했던 계몽주의자들의 긍정적인 여성상이었던 모양입니다.

서씨부인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주인공은, 그 남편 조필환을 유혹하여 일시적으로 현명한 부인을 버리게 만든 악한 기생 "평양집"입니다. 지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그 천한 "평양집"은 남자를 유혹하는 음탕함이 가득 찬데다가 성냄과 시기심이 많고 올바른 여덕(女德)이 뭔지도 모르는 부류지요. 그런데 이러한 부류도 결국 구세군의 설교로 그 악행을 깨닫고 뉘우치고 하나님을 믿게 되니 서씨부인과 조필환의 가정 평화가 결국 회복되고 맙니다.

"정숙한 숙녀"와 "음탕한 요부"라는 두 범주로 모든 여성들을 나누고 심판하는 남성중심주의적, 중산층 위주의 이분법, 그리고 "가정"과 "종교"의 결합… 개화기 때 처음으로 마시게 된 이 독약의 여독(餘毒)은 지금도 사회의 곳곳에서 남아 있어 우리 몸과 마음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한국 사회에서 지금이라도 자기 친구나 가정에게 자신과 동거하고 있는 여자 친구를 "나의 동거녀"라고 소개하려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습니까? 노르웨이 같으면 20대 중에서 결혼한 쌍들보다 동거하는 쌍이 더 많고 "동거녀"나 "동거남"은 "부부" 못지 않게 정상적인 명칭이 됐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신성한 가정"의 허상을 그대로 붙잡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공인(公人) 여성으로서 "나는 레즈비안"이라고 공언하기가 쉽겠습니까? 빅토리안 시대 가정 윤리주의의 철폐, 남들과의 다양한 형태들의 평등한 성적인 결합을 용인하는 개인 만들기 차원에서는 우리로서 아직 갈 길이 참 먼 것 같고, 대형 교회들이 지금처럼 막대한 영향력을 보유하는 이상 그 길로 가기가 그리 쉽지도 않을 듯합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이 만든 "양처현모"라는 표현을 개화기 때 "어머니"와 "후사(後嗣)"가 중시되는 조선 식으로 "현모양처"라고 바꾸었는데, 크게 봐서 이는 19세기 후반 구미 지역의 중산층 사회의 위선적이며 억압적인 성적 모럴을 기원으로 해서 그 내용이 유교화됐다 뿐이지, 이렇다 할 만한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던 듯합니다.

"현모양처"가 돼야 된다는 성차별적인 가치관을, 식민지 시대의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신여성"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보통 "신여성"들을 "사회 활동가"로 상상하지만, 실제로 공산당 지도자와 동지 결혼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거나 아예 독신으로 살면서 사회 활동을 하는 소수(박헌영의 부인 주세죽, 최창익의 처 허정숙, 독신녀 김활란 등)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신여성"들의 꿈은 남편을 보필하여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정도였습니다. 남성은 호탕해야 하지만 여성은 정조를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그들도 그대로 길들여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면, 유부남인 애인과의 동반자살(1926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프라노이자 여배우 윤심덕(尹心悳)과,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 과정을 그 유명한 "이혼 고백장"(〈삼천리〉, 1934년 8-9호)에서 솔직하게 서술하고 무책임한 애인 최린으로부터 당당히"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요구해 합의금을 받는 데에 성공한 화가이자 문필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진정한 영웅으로 보입니다.

왜 굳이 "영웅"이냐고요? 여성의 욕망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던 근대 초기의 사회에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이 2명의 조선 여인들은 개인적 불행을 끝까지 감수하면서 그 욕망을 솔직하게 실천할 권리를 위해서 싸우다 갔기 때문입니다. 윤심덕은 아까운 젊은 나이에 죽고 나혜석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무의탁 폐인의 생활을 몇 년 하다가 갔지만 둘 다 현모양처를 되라는 체제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한 셈이지요.

이와 같은 "반란자"들이 암울했던 그 시대에 여성 몸의 독립의 길을 텄기에 오늘날의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활발한 페미니즘 운동을 자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둘 다 자산 계급의 딸이었지만, 왠지 그 몸의 주권을 되찾은 그녀들을 "혁명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햇빛이 보이는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참고 문헌:**

신영숙, "일제하 신여성의 연애결혼 문제", - 〈한국학보〉, 45, 1986.
이배용, "개화기, 일제 시기 결혼관의 변화와 여성의 지위", -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0집, 1999.
고미숙,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 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 책세상, 2001.
이길연, 〈한국 근현대 기독교 문학 연구〉, 국학자료원, 2001.
Wells, Kenneth M. "The Price of Legitimacy: Women and the Kunuhoe Movement, 1927-1931." In Gi-Wook Shin and Michael Robinson, eds. Colonial Modernity in Korea.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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