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우리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지적 사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우리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지적 사기'

박노자-허동현 서신논쟁 3부 <3>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아무래도 저는 종교적인 방면으로 보나 학술적인 방면으로 보나 아직 훈련이 아주 덜 된 사람인 듯합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는 감정의 자제와 순화를 권하는 것이고, 학자로서의 자세라는 것도 역시 되도록이면 감정을 멀리하여 연구 대상과 연구 주체 사이의 거리를 두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 같으면 이미 80여 년 전인 1922년에 <개벽>지에 나온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읽으면 읽을수록 분노라는, 아주 좋지 않은 감정을 강하게 느낍니다.

물론 저만 <민족개조론>을 접하는 순간에 그러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민족개조론>이 나온 뒤 일제에의 이광수의 '항복'을 혐오했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에게서도, 또 <민족개조론>의 몰(沒)계급성과 '개조단체'라는 미명 하의 부르주아 헤게모니 주장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던 공산주의자들에게서도 강력한 반론 제기 등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저의 분노 같으면 후자의 경우, 즉 이광수의 계급론적 비판자들의 경우와 그 성질이 거의 같습니다.

이광수의 일제에의 '항복' 그 자체에 대해 저는 별 감정은 없습니다. 즉, 이광수가 잠깐 몸 담았던 독립운동을 등지고 식민지 권력에 '항복'하여 조선에 돌아와 예속부르주아의 기관이라 할 <동아일보>에 아주 좋은 조건으로 취직한 것(1921년)이야 제가 꼭 '훼절'이라고 하여 인신 공격의 표적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 겁니다. '훼절'하려면, 즉 '절개를 훼손하'려면 '훼손'할 그 '절개'라도 약간이나마 있어야 하는데, 일본 경찰의 도움으로 조선 노동자의 파업을 분쇄하는, 일본 상전들의 자기 민족 중심주의나 횡포에 분노하되 결코 그들과 투쟁할 위치에 있지 않는 조선의 예속 부르주아나 그 대변인 격인 이광수라는 사람에게는 계급으로서의 살아남기에 대한 '계산'은 있어도 과거 유교 사회에서와 같은 '절개'는 당연히 없었습니다. 자신을 팔고 외세에 빌붙는 것은 이광수가 속했던 계급의 태생적인 특질이었기에 총독부에 '항복'하여 <민족개조론>이라는 일종의 '반성문'을 제출한 데 대해 이광수 개인보다 그 계급 자체를 혐오 내지 경멸하는 것이 더 옳을 겁니다.

제 분노를 자극한 것은, <민족개조론>의 서두부터 무수히 쓰여 온 '민족'이라는 집단적 '우리'에 대한 수사(修辭)들입니다. '민족'과 그 역사, 그 '성격', 그 '장점'과 '결점', 그 '성격'의 '근본적인 부분'과 '가변적(可變的)인 부분'들은, 조선 민족이 그 '비사회적이고 이기적이고 나태하고 겁이 많고 진실성이 없는', 아주 '열등'한 '성격' 때문에 식민화 당했지만 '중심 인물'과 '개조단체'의 목적 의식이 뚜렷한 '개조 노력'이 있으면 그 아름다운 '근본적 성격'이 '회복'되어 '우등민족'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 이 논문의 주된 테마들입니다.

'민족'이라는 이광수의 주인공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한 개인이나 한 '집'과 같은 '유기적인 단체', 일종의 '한 몸'입니다. 한 개인의 '근본적인 성격'이 유년기에 형성된 뒤에 그 다음에 표피적으로 상황에 따라 약간 바뀌어도 그 근저를 유지하듯이 '영국인의 자유 사랑, 라틴 민족의 평등과 전제 정치 애호' 등의 한 민족의 '근본적인 성격'이란 불변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은 유한하되 단체의 생명은 무한하고, 단체 중에서도 '민족'이란 일종의 '근본 단체'가 되니 '영국인의 사회 봉사 정신과 같은' 그 '민족'에 대한 '멸사봉공, 자신을 버리고 단체를 섬기는 정신'은 이광수가 꿈꾸는 '개조'의 방법이자 목표가 되는 셈입니다.

'민족'–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 '중심'이 돼야 할 '개조 단체', 그리고 그 '개조 단체'의 '중심 인물', 즉 '민족 지도자'–에 대한 '봉사와 복종'이 없다면 그 '민족'의 '개조'가 불가능하고, 개조된 '민족'이라면 바로 그 위대하기 짝이 없는 영국인이나 일본인처럼 '봉사 정신에 충만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1900년대의 순박한 계몽주의, 그 '국가 유기체론'과 '국가, 민족 지도자인 영웅'에 대한 '숭배' 이야기와, 1930년대의 한국 예속 부르주아의 파시즘 사이의 중간 연결고리에 해당되는 1922년의 이 '민족' 서사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실, <민족개조론>을 읽을 때 기억난 것은, 한번 몇 년 전에 한국 매체에서 나왔던 한 네팔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주 일찍이 – 약 1990년대 초반에 – 한국에 와서 소위 '불법' 노동을 시작한 그는, 그를 '동생' 내지 '아들'로 대접한 한 '사장님'을 – 그 당시의 생각으로 – '잘' 만나서 다른 업체에 비해 월급을 덜 받았으면서도 '가족과 같은 보살핌'에 마음이 흡족했답니다. 문제는, 그 노동자가 떠나기 몇 개월 전부터 "자금이 부족하다"고 '인간적으로 접근'한 그 '아버지나 형과 같으신 사장님'이 월급을 체불했다가 결국 노동자를 네팔로 보내면서 수백만 원에 달하는 그 체불 임금을 "나중에 네팔로 보내겠다"고 한 데에 있었습니다. 그 네팔 노동자가 그 돈을 영원히 보지 못했다는 것을, 굳이 기사를 읽지 않아도 벌써 아실 수 있으시지요? 즉, 수완이 좋은 사기꾼 기업주가 '의사(擬似) 가족'과 같은 '분위기'를 잘 만들어 이역만리에서 '가족'을 그리워하는 한 젊은이의 심정을 적절히 이용해 본인의 유일한 진실된 목적인 '임금 착취와 금전 사기'를 훌륭하게 (?) 수행한 셈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이야 당연히 다르지만 그 본질로 따진다면 1920년대 초반의 예속 부르주아들의 '한 몸, 한 집과 같은 영원한 민족'에 대한 사이비 학술적인 궤변은 꼭 악덕 기업주의 "아들처럼 챙겨줄께, 돈 문제 좀 참아달라, 응?"과 같은 궤변을 아주 닮은 셈입니다. 과연 이광수가 '조선 민족'이라고 호명한 일본인 내지 중국인을 제외한 한반도의 '토착' 주민 집단은 그 당시에는 어떻게 구성됐습니까?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한 한반도에서 전(全) 농토의 65%가 소작지이지 않았습니까? 이광수가 '이상적인 인격자', '조선 민족 개조의 중심 인물'이라고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내내 찬양했던 그의 고용주, 즉 <동아일보>의 대주주 김성수의 경제적 기반이란 역시 소작인들에 대한 착취였는데, 소작료를 합방 이전의 30-50%에서 최고 거의 70%까지 올리고 소작 계약을 1년이나 3년 등 단기간으로 맺어 소작인을 늘 불안에 떨어야 하는 극빈 분자로 만드는 것은 그 당시에 일본 지주나 조선 지주나 한가지였습니다.

조금 더 늦은 시대의 통계지만 1929년에 일본인들이 구성한 '철도협회'는 조선에서 '노동자', 즉 '비(非)농민'으로 분류된 '조선인'들이 약 백십만 명으로 돼 있었는데, 그 중에서는 언제 쫓겨나서 굶어죽을지 모를 '막벌이꾼', '심부름꾼', '심부름꾼 아이'는 거의 절반을 차지했지요. 비교적으로 신분이 나은 공장, 광산 노동자는 6만 명뿐이었지만 그들도 역시 하루에 적으면 20-30전, 많아봐야 1원20전이라는 '기아 월급'에 시달리고 휴일 없는 하루 10-13시간 노동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즉, '민족 개조론'이 쓰여졌던 그 당시의 조선에서 이광수가 '조선 민족'이라고 부르는 사람 중에서는 대다수는 당장 내일이라도 굶어죽지 않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전개해야 했지요. 그런데 하루에 20전도 못받아 하얀 밥 한 번 먹는 것이 꿈이었던 10대 후반의 여공들이 한 신문 기자의 말처럼 "어둠컴컴한 공장에서 감독의 무서운 감시와 100도에 가까운 열도 속에서 뜨거운 공기를 마시며 골육이 쑤시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노동을 하는" (<조선중앙일보>, 1936년 7월2일자)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는, '민족개조'의 자칭 '선지자' 이광수는 과연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의 집을 방문한 잡지 기자는 " 유리창 안으로 대청에는 풍금(피아노), 축음기들의 악기며 文學, 醫學書類 들을 너흔 책장이 먼저 보이는" 안락한 '스위트 홈'을 발견했으며, 그의 부인으로부터 "8시반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 귀가하고 9시에 꼭 자고, 일본 반찬을 좋아해도 마늘을 아주 싫어하는", 즉 요즘 말로 '웰빙'에 신경을 충분히 쓸 수 있는 여유 있는 이광수 생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위트 호-ㅁ 李光洙氏 家庭訪問記", <별건곤>, 34호, 1930년11월).

허동현 교수님, 아니, 고된 일에 어린 나이에 죽기 전까지 하얀 밥을 제대로 한번 못먹은 여공과 '스위트 홈'에서 피아노 음악의 소리나 즐겨 들을 수 있었던 성공적인 매문업자 이광수가 정말 '한 몸'인 '한 민족'에 똑같이 속한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같은 언어를 쓰는지 모르지만 (실제 일본 유학을 갔다 온 엘리트들의 언어는 서민들의 언어와 꽤나 달랐지요) 그들의 이해 관계도, 그 이해 관계의 관철 방식도, 그 이해 관계 관철의 과정에서 단련되는 성격, 소속 의식, 역사의식도 퍽이나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족개조론>에서 '민족 개조의 역사', 즉 근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친일적 매문업자의 입장에서 본 한국 근대의 주된 사건으로 '갑신정변', '독립협회', 1900년대의 '계몽운동', '청년학우회 결성' 등이 부각되었는데, 이광수가 그렇게도 '개조'시키고 싶었던 그 '민족'의 9할 이상은 완전히 다른 역사를 갖고 있었지요.

독립협회가 서울에서 '충군애국, 국가를 위한 분골쇄신'의 '가치'(?)를 선양하고 항일 의병이나 동학들을 '도적', '비적'이라고 비난하고 기독교와 자유무역 중심의 '문명 진보'를 외쳤을 적, 즉 1898년에 목포에서 부둣가의 한국, 중국 짐꾼들이 한국역사상 최초의 동맹파업에 들어간 것이지요. '애국계몽운동'이 '부국강병'과 '후진적인 조선인의 폐습 개조'를 외쳤을 때, 즉 1905-1910년에 평남 지역에서 아직 소규모지만 최초의 노동조합들이 생기기 시작했지요.

1910년대에, 이광수가 일본 등지에서 '근대'를 신나게 배우고 "조선인들을 근대로 지도할" 꿈을 키우고 있었을 때, 조선 안에서 약 1만 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열기찬 쟁의에 참여한 것이었고, <민족개조론>이 나왔던 1920년대 초반에 공산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이데올로기가 도입돼서 노동자, 농민 투쟁의 이념성과 조직성 등이 한층 높아졌지요. 파업하는 노동자에게는, 그들의 피땀을 빨아먹는 고용주가 '조선인'이라고 해서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1926년에 이광수의 후견인 김성수도 그의 경성방직에서 노동자들을 함부로 해고하고 부당하게 대우했다가 대규모(360여 명)의 파업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일제에 의해 '조선인'이라고 멸시 당하고 민족적인 임금 착취를 당하고 조직이 늘 탄압 당하는 조선의 피착취 대중들이 민족적인 해방을 열망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런데 1920년대 초반부터 그들의 선봉이 된 공산주의자 등 사회주의 경향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민족 해방'을 민족적 배타성과 헷갈릴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들이 아니었지요.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창당 대회에서 "조선의 해방이 되면 조선에 이주 온 일본 빈농에게까지도 똑같이 땅을 나누어주고 그들과의 계급적 연대를 세계 혁명의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을 보면 진정한 의미의 민족과 세계의 개조를 계획했던 쪽에서는 민족해방과 세계혁명은 둘이 아닌 하나였습니다. 이는 민족들 사이의 영원한 우열의 차이, 그리고 영원한 패권 투쟁을 전제로 한 이광수의 사회진화론적 사고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고라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

일제가 만들어낸 민족 모순과 아주 급속한 자본화로 인한 계급 모순이 중첩적으로 결부됐기 때문인지, 유교적인 '민생', '애민', '상부상조' 이념에 가장 근접한 것이 바로 근대 사회주의라는 것을 발견하여 빠른 속도로 급진화된 수많은 주변적 지식인이라는 '전위 분자'들의 헌신적 노력 덕분인지 1920-30년대의 조선은 계급 운동이 가장 활발한 아시아 지역으로 꼽혔습니다. 일제 말기의 파쇼화와 이승만 시대의 학살, 박정희 시대의 병영화와 '2차적 파쇼화'의 무게가 이 전통을 한때 단절시켰다가 1980년대에 다시 '부활'이 이뤄진 것이지요.

그런데 외세와 늘 친외세적이지 않을 수 없는 예속 자본으로서는 단순히 탄압만으로 조선의 진정한 역사, 즉 계급적 해방운동의 역사의 전개를 차단시키기가 힘들었습니다. 굶어죽는 민중을 늘 가까이서 보는, 그리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피해자의 쪽으로 넘어가버릴 수 있는 지식인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김성수 등의 조선 사회의 '보스'들은 그람시가 이야기했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확보할 만한 어떤 대안적 프로젝트를 제안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적어도 '중급' 유식층 사회의 급진화를 '예방'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예방 주사'의 역할을 맡은 것은 바로 <민족개조론>과 같은 '온건한' 우익 민족주의적 유토피아들이었는데, 이건 지적 사기(詐欺) 치고도 좀 유치하고 저질의 사기라는 것은 문제였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미 계급투쟁이 활발히 진행되던 그 당시의 조선으로서는 '한 몸', '한 집'과 같은, 한 개인처럼 움직이는 유기적인 단체로서의 '민족' 이야기를 일소(一笑)에 부칠 사람은 꽤 있었습니다. '애족(愛族)', '단체에 대한 봉사', '성실함', '멸사봉공'이라는 '덕목'을 이광수가 조선 '민족'이 가져야 한다고 설교했지만, 그가 속하는 <동아일보>사가 '민족 물산 장려'를 외치면서 약 60%의 광고 지면을 일본 상품의 광고로 채우는 등 노골적인 상업주의는 그 '멸사봉공'의 참 보기 좋은(?) 모범이었지요?

이광수가 조선인들을 '겁쟁이'라고 모독하고 그들에게 '상무(尙武) 정신'과 '용기'를 가질 것을 요구했지만 바로 개인적인 '용기', 개인적 안락을 희생할 수 있는 의지력의 차원에서는 이광수와 그가 그렇게도 혐오했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었지요. 이광수가 대표했던 조선의 예속 부르주아들이 그들이 상상했던 '선진 문명 국민'(일본이나 영국)의 '덕목'을 조선인들이 길러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외세에 붙어서 살아야 했던 그들부터는 이 '덕목'은 가시적으로 태부족했지요. 민족주의적 수사가 따로 있고 매판적이며 부도덕한 생활 양식이 따로 있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조선 부르주아들의 맹점이 아닌가요?

그런데, 위의 이야기를 읽어보시는 분마다 아마도 의문이 생기실 겁니다. 이미 1920년대 초반의 조선 사회의 전위의 수준은 '개명한 개조단체'를 맹종하여 '중심 인물'을 섬기고 '열등한 민족성을 향상'시키려고 안간 힘을 쓰려는, 그러한 수준은 아니었는데, 이광수의 이 딱딱한 학술투의 글이 왜 이토록 유명해졌던가요?

'지도자 숭배'와 '단체 숭배'에 목 매달았던 파쇼적인 글꾼 이광수가, 1920-30년대의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최강의 영향력을 가진 제도권의 '사회 참여적 지식인'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었던가요? 그리고 최신판 '민족개조론'이라 할 보수 언론의 온갖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궤변들, 한국인들보고 서구인처럼 "친절하고 정확하고 일 처리에 빠르고 웰빙에 밝게 되라"고 외치는 온갖 '민족개조론적' 처세술 지침서들이 왜 이토록 계속 인기가 많은가요?

이건 탄압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두 가지 해답이 있는 것 같은데, 하나는 1920-30년대의 '원조' 이광수나 현대의 '이광수들'에게 보수 언론이라는 엄청난 매체력이 뒷받침된다는 것이지요. 이광수의 글 재주 –'세계'에 대한 번쩍이는 지식, 전통에 대한 깊은 듯한 이해, 그리고 개인의 내면을 향하는 강한 시선 –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별건곤>, <삼천리> 등을 팔아준 부분들도 있었지만 바로 <동아일보>가 이광수를 탄생시킨 모태이자 키워준 '어머니'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동아>나 <조선>은 특히 1920년대에 진보적인 기자도 키워주고 폐간까지 계속 홍명희나 한용운과 같은 비타협파 양심적 지식인들에게도 지면을 할애해줌으로써 중간 유식 계층의 신뢰를 구축했는데, 바로 그 기반 위에 이광수라는 '스타'가 탄생된 것이지 않습니까? 즉, 아무리 지적 사기의 성격이 강한 글이라 해도 매체가 만들어낸 스타가 치는 사기는 벌써 단순히 사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훨씬 더 심층적 원인인데, 그게 전환기의 주변적 분자들의 신분 상향 심리입니다. 한국사에서는 1990년대 후반까지의 20세기가 바로 새로운 자본주의적 사회의 지배계급이 아직 형성 중이었던 기나긴 '과도기'였는데, 그러한 상황에서는 기본적 학력이라는 '상부 계층 편입 조건'이 돼 있는 자에게 늘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 계단을 올라가려면 아무래도 '사회에서 쳐주는' 이광수 류의 '문화주의적', '인격주의적', '자기 계발주의적' 담론이 훨씬 유리하지 않습니까? 사실, 지금 같으면 이 계단 위쪽에 서 있는 누군가가 동아줄을 던져주고 당겨주지 않는다면, 즉 가정의 구성원 중에 이미 상층계급에 편입된 자가 없다면 더 이상 출입이 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중적으로 인식되고 남을 짓밟아 계단을 올라가는 그 에너지가 그 계단을 무너뜨리고 계단이 없는 – 아니면 적어도 계단 출입 규칙이 완화되고 합리화된 – 더 수평적 구조의 집 짓기로 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허동현 교수님,

저는 이광수의 '민족개조적인' 궤변에 분노를 느낀다고 해서 꼭 이광수와 반대쪽에 서 있었던 사람들을 천사로 보려 하지 않습니다. 계급사회의 모든 왜곡들과 모순들이 계급사회를 타도하려는 반체제세력에게도 곧 그대로 옮겨진다는 건 역사의 철칙이지요.

몇 년 전인가 한총련 학생들이 안기부 직원이 부러워할 솜씨(?)로 프락치로 의심된 한 젊은 사람을 때려 죽였을 적에 제가 그 법칙의 존재를 깨달아 길게 운 적이 있었지요. 사실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에서 프랑스의 극우 사회학자 르봉을 인용한 태도는, 192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이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를 인용한 태도와 놀랍도록 비슷하더랍니다.

세상의 모든 과정들이 다 반전 (反轉), 반동, 변질, 시행착오를 겪는 것인데, 조선 혁명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혁명가들에게 좋은 특징이 있는 것 하나는, 그들이 자타의 경험에서 잘 배운다는 겁니다. 이광수가 노골적인 파시즘으로 '발전'(?)해 나간 1930년대의 이재유 등의 '밑으로부터의 공산당 재건'이라는 접근 방법이, 예컨대 1920년대의 '중앙당 창당, 코민테른 승인'에 목 매달았던 그 유치한 접근법보다 훨씬 대중적이었지요. 더 크게 봐서는, 지금도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변질과 패배, 북한의 '현대형 왕조국가'로의 퇴행 등도 우리에게는 일찍이 없었던 '교재'입니다. 혁명을 어떻게 하면 안 되는가를, 이제 잘 알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좌절과 패배를 넘어서 혁명은 계속 진행됩니다.

어두워지는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참고 문헌**

김현주, "논쟁의 정치와 '민족개조론'의 글쓰기", - <역사와 현실>, 제57집, 2005년9월
김용달. "춘원의 민족개조론의 비판적 고찰", - <도산사상연구>,제 4집. 서울: 도산사상연구회, 1997.
박성진. "1920년대 전반기 사회진화론의 변형과 민족개조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7집,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7.
김형국. "1920년대 초 민족개조론 검토", - <한국근현대사연구>, 제 19집. 서울: 한국근현대사학회, 2001.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