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간송미술관의 69번째 전시회가 2005년 10월 중순에 있었다. 해마다 봄 가을 열리는 전시회다. 잊지 않고 있으면 들어가 유명 미술품의 진본을 보는 기쁨도 누리고 인쇄본 그림을 사서 카드처럼 부담없이 들여다 보기도 한다.
간송미술관의 창립자 전형필 선생처럼 진본을 사모으는 열정은 개인적인 기호도 넘어선 것이고 돈만 있다고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니 그만큼 귀하게 보인다. 전시회가 열릴 때 성북동의 오래된 양옥 보화각을 들어가 보는 기분은 마치 맛있는 잔치음식이 차려진 할아버지 댁에 가는 것 같다. 물론 그 가치는 음식 이상, 다이아먼드같은 보화보다 더 값진 것들이기도 하다.
도자기, 산수화, 서예, 시대와 인물 등등 매번 전시주제가 달라지는데 이번에는 난초와 대나무그림만 모은 전시회였다. 똑같은 대나무를 두고 심사정은 신사년 겨울 '바위 틈에 얼어있는 대나무'를 그렸고 김홍도의 대나무는'새 대가 아침 이슬을 머금다''안개에 묻힌 새 대'였다. 그렇게 그린 대나무는 진짜 그런 것 같았다.
'바람타는 대' 그림은 여러 화가들이 즐겨 그려서 여러 가지 모습의 바람과 잎새가 흔들리는 대나무를 볼 수 있었다. 검은 비단 바탕에 금분으로 그린 이 정의 그림도 있었다. 금분을 그렇게 많이 쓸 수 있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인가?
식물학자 최병철 박사는'흥선대원군의 난은 살아있는 난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의 솜씨'라고 했다. 그것은 예쁘게 교태부려 그린 난과는 다르다고 한다. 최교수에게서 난의 잎새가 어떻게 미학적인지 식물학적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이슬이 난잎에서 구르다가 잎새의 힘에 멈추는 지점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생기는 곡선과 힘의 역학관계였다.
민영익의 난은 대작이었다. 북촌을 취재하면서 조금 더 알게 된 그의 일생에 난을 한옆에 두고 보는 아취가 있었다. 한말 격변기 국가 대사에 깊이 관여해 죽음과 일생을 걸었던 풍운아들이 어떻게 그런 섬세한 난, 대를 칠 수 있었을까? 당시에 골프가 있었다면 난, 죽 대신 골프를 했을까? 더 욕심을 부린다면 일본 등지에 나가있는 조상의 좋은 그림까지 한자리에서 보고 싶었다.
보화각 건물이 현대의 미술관으론 부족한 데가 있다고 해도 간송미술관의 물리적 인상은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근거지라는 움직일 수 없는 원천에다 야산처럼 보이는 1만여평 땅의 나무들 때문에 호사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어떤 정해진 정원형식을 따른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오래된 소나무, 고목, 잡목숲, 군데군데 있는 석물 그런 것들은 자연스럽고도 거친 듯한 야생의 맛이 있었다. 예술사에 깊이 빌디딘 집주인들이 아무렇게나 두어둔 나무들은 아닐 것이다. 건물은 모두 양식이다. 1938년에 건축된 보화각 주변에는 전시회를 축하하는 화분과 꽃이 모여있고 땅에 심어진 큰 파초, 오래된 골담초 그런것들이 세월의 테를 말해 주었다.
성북동 언덕 깊숙이 꿩의 바다 동네에는 조선 순조 이래의 별장터 성락원이 있다. 이곳을 처음 보았을때 4,358평 정원에 흐르는 계류와 연못, 돌기둥을 받친 웅장한 누각, 나무숲, 그리고 이런 것들이 지형을 따라 높낮이를 이루며 가려지고 펼쳐지는 경관이 별천지같았다.
북한산 암벽에서 흐르는 물이 계류를 이루고 도토리나무 등이 바위틈에 우거졌다. 솟아난 물은 넓은 바위위로 비단헝겊 미끄러지듯 흘러 연못으로 들어왔다. 누각이 비추는 큰 연못이 운치를 한껏 돋우었다. 멋진 한옥 네 채가 한옆에 살림집으로 쓰이고 숲의 나무도 외래종이 없어 이질감이 전혀 없는 순수한 한국적 숨결이 살아있었다.
바위, 흐르는 물, 그런 것들이 정원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은 지형이 그만큼 경관을 이룬 터에서 가능하다. 이 주변은 좋은 건축이 들어선 최고의 주택가이다. 상업적으로 성락원도 일반 주택지가 된다면 현금이 더 많이 쌓일지도 모른다. 그런 이해관계를 떠나 한국의 정원으로 버티기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애초에는 산을 보는 방향으로 집이 있었다는데 순조때 황지사, 철종때 심상응판서, 의왕 이강 등 집주인이 여럿 바뀌다가 일제말 타버렸다. 1953년 사업가 심상준이 이 집을 사들여 8개의 돌기둥으로 받친 누각 송석정을 지었다. 이때 방향을 바꿔 산을 등지게 해 송석정은 발치의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있다.
국빈들이 자주 이곳을 방문했었다. 외교무대에서 한국적 정원의 아름다움을 과시할 의전장소로 서울에 여기만한 곳이 없어 역할이 컸다. 현재 한 기업의 소유로 문화재청과 소유자가 이곳을 완벽한 한국정원으로 복원하기 위해 송석정을 전통을 다한 건물로 다시 짓고 정원도 공사를 하는 중이다. 강남의 아파트가 아무리 호화롭다 해도 정원이 있는 집의 건축적 아름다움은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서울시내에서 한국식 전통정원으로 큰 규모를 유지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광주의 소쇄원은 계곡과 정자, 돌, 대나무 숲 등이 절묘하게 설계된 훌륭한 정원이지만 1500평으로 약간 좁다는 느낌이 났다. 소쇄원은 아주 개인적인, 선비 양산보의 사색공간으로 보였다.
소유자의 역사가 있는 별장으로, 흥선대원군이 살던 세검정의 석파정도 인왕산의 바위와 계류, 숲을 끼고 있으나 웅장하던 바위는 절반 이상이 파괴되어 맨땅이 드러나고 특별한 쓰임새도 없는 듯 늘 잠겨있고 어둡다. 이곳도 성락원처럼 의전을 위한 외교장소나 기업의 영빈관처럼 용도를 갖는다면 인문적 상황이 깃든 한국문화의 장으로 되살아나지 않을까.
대원군이 살던 운현궁도 후대에 그렇게 된 것인지 정원은 없다시피한게 특별히 인상에 남지 않는다. 가구도 대원군이 쓰던 것 아닌 기성상품이고 그래서 전체적으로 호사한 박제품같다. 불과 1백년 전의 인물인데 그가 남긴 집터 몇군데는 남아 있으면서도 역사의 향기가 배어나오지 않아 허망하다.
성북동에는 살림집을 넘어서 규모가 크고 드라마를 담은 역사적인 한식 건물군이 많다. 여기서는 개인 규모를 넘어선 어떤 조직적인 부의 운용이 보인다. 성북동의 오래된 대원각이라는 요정겸 음식점이다가 지금은 절이 된 길상사는 시민선방이 되면서 사람들이 모이는 성북동의 중심이라고 부를 만하다.
1996년 7천평의 대지와 40동의 건물이 있는 엄청난 재물을 절에 시주하고 그후 자신은 한줌의 재로 돌아간 대원각 주인은 그의 인생에서 한때 시인 백석의 연인이기도 했었음을 로맨틱하게 털어놓았었다. 요정 주인이라는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거만의 부를 누린 김영한 여사(1916-1999)의 삶을 들어볼 수 있었으면 했는데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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