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7일 최근의 6자회담 공동성명과 관련해 "아직은 공동성명을 토대로 상황을 판단하고 민족의 행동을 결정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동성명 이전·이후 위기는 상존"**
리 교수는 이날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평화통일연구소 창립 1주년 기념 토론회의 강연에서 "상황을 총제적으로 전망하고, 우리의 경계를 든든히 하고, 남북화해를 통해 미국에 전쟁의 빌미를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리 교수가 말하는 '총체적인 상황 전망'이란 한반도를 두고 벌어질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각축을 뜻하는 것으로, 미일 군사동맹과 중국 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등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지도 모르는 20~30년 후의 상황에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동북아 위기와 관련해 리 교수는 "대만과 한반도 문제가 패권주의적 동북아 국제관계에 평화적으로 기여할 것인가, 아니면 전쟁위기로까지 악화될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며 "중국의 성장이 지속되면 미국이 대만의 독립을 부추겨 중국과의 위기상황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해본다"고 말했다.
리 교수는 자위대 총사령관이 최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철수를 위해 일본 군대를 한반도에 출동시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한 사실을 거론하며 "한반도를 무대로 한 미국과 중국의 전쟁위기는 이처럼 공동성명 이전이나 이후나 상존한다"고 지적했다.
***"우리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의의"**
리 교수는 그러나 남한과 북한의 대표들이 6자회담에 참여해 공동성명을 이끌어낸 데 대해 "110년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강대국들과 자리를 함께 해 논의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리 교수는 "우리 땅에서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보더라도 우리는 이민족에게 피동적인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 1900년대 들어 러시아와 일본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등 이민족들은 아무런 협의도 없이 우리 운명을 결정해 왔다.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 미국 제안에 의한 38선 분할점령도 마찬가지였다"며 강대국들에 농단당한 100여 년의 역사를 회고했다.
리 교수는 이어 "6자회담에서 최소한 발언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것, 말이나마 성명을 도출해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리 교수는 그러나 6자회담 1주일 전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만났던 일을 소개하며 정부의 지나친 낙관론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리 교수는 정 장관의 요청에 의해 그를 만났다면서 "정 장관은 대북송전이 이뤄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양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며 "그것은 북한의 결의와 자존심을 잘못 보는 것이다. 북한이 전기를 받았다고 해서 회담에서 물러설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이라고 말했다.
***15년간의 3단계 평화정착안 제기**
한반도 평화정착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 리 교수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열흘 전에 청와대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 자신이 제안했던 방안을 소개했다.
리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한미동맹을 해소하고, 미군기지를 해체한 뒤 미국과의 관계를 예속적인 동맹에서 일반적인 우호관계로 대체한 후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그 변화만큼 중국·러시아 쪽으로 이동해 북한의 호응을 얻도록 하자"는 자신의 평화정착 방안을 개진했다고 소개했다.
'15년간의 3단계 평화정착안'으로 일컬을 수 있는 이 프로세스의 1단계(5년간)는 남북이 군사적 문제를 제외한 민간 전 분야에 걸쳐 적극적으로 교류협력을 펼쳐 북한이 남한의 군사력에 대해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시기다. 리 교수는 "이렇게 평화적인 토대를 구축하면 미국에게 주둔군의 상당수를 축소하자고 제의할 수 있고 휴전선에 배치된 외국군을 중립국 군대로 바꾸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5~10년간의 2단계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준비하는 단계로 북한과 군축을 논의하면서 남북간의 군사적 충돌이나 전쟁위기를 막는 감시제도를 만들고 미국이 군사기지와 무기·병력의 대부분을 철수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하는 시기다.
이어 10~15년간의 3단계는 북미간의 정상적인 관계 구축의 단계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군 주둔을 해소하며, 한미 동맹관계를 평화적인 우호관계로 대체하는 시기다.
리 교수는 "이렇게 되면 미국도 세계여론에 떠밀려 거부하기 어려운 상태까지 한반도 정세를 끌고갈 수 있다고 본다"며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런 방안을 '당돌하게' 말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 교수는 그러나 "나는 지금도 가능하다고 본다"며 자신의 평화정착안이 여전히 유효함을 주장했다.
이날 토론에는 200여 명의 청중이 모여 리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강연 후에는 이철기 동국대 교수와 이삼성 한림대 교수가 한반도 평화체제와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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