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체제 문제가 9.19 공동성명에 언급되면서 '평화포럼' 참가국과 평화협정 당사자 논란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그간 사회에서 평화협정 체결의 지배적인 논리가 돼 왔던 '남북 당사자주의'와 '2+2 논리'를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을 끌고 있다.
이 두 가지 논리는 우리 사회의 보수 진영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기본틀로 설정되어 온 것들이어서 관심을 끈다.
이삼성 한림대 교수는 7일 오후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개최된 평화통일연구소(www.spark946.org) 창립 1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정전협정의 당사자였던 미국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데에 당사자가 되는 것이 왜 바람직하지 않은지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며 남, 북, 미, 중이 직접 당사자로 참여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고집이 평화협정 체결의 걸림돌?**
토론회에 앞서 공개된 발표문에 따르면 이 교수는 남북한이 미국과 중국을 배제하고 평화협정 체결의 당사자가 돼야 한다는 주장은 '자주성'을 가장한 채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간과하는 '위험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금까지 남북이 평화협정 체결의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미국과만 협정을 체결하려고 하는 북한의 태도가 한반도 평화체제 성립에 근본적 걸림돌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 교수는 그러나 "과거 북한이 요구해 온 평화협정 체제에 미국이 응하지 않은 것은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북한과 협상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미국 책임론을 제기하며 "평화협정 체제가 정전협정에서 다뤄진 핵심 사안들(외국군대의 철수 등)의 더 한층의 진전된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주한미군의 완전철수가 아니더라도 그 문제에 관해 일정한 정치적 타협점을 찾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북한이 정전협정 비서명을 이유로 한국에 대해 협정당사자 지위를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협정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거듭 강조하고 "평화협정이 주한미군 문제를 비롯해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오는 한 북한에게 당사자 문제는 근본적인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2+2 논리'는 과연 '자주적'인가**
이 교수는 학계, 언론계, 시민사회 등 한국 사회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는 '2+2' 형식의 평화협정, 즉 남북이 체결 당사자가 되고 중국과 미국이 보장하는 평화협정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을 들이댔다.
이 교수는 북한이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을 시도하는 것은 남한이 아닌 미국의 대북한 적대정책 때문이기에 "(평화협정은) 남북한 상호간의 의무와 미국에 대한 북한의 의무 이행을 규정할 뿐 아니라 미국이 한반도에서 북한에 대해 이행해야 할 의무들 역시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협정"이 돼야 한다며 미국의 책임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평화협정은 '공허하고 실효성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미국과 중국을 '보장자'로 삼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미국과 중국을 남북한에 대한 합법적 감독자의 위치에 올려놓음으로써 '자주'의 원칙에 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개념과도 근원적으로 배치된다"며 이는 '19세기적 불평등 조약의 성격을 내포한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또 남북 당사자론이 내세우는 '자주성'의 논리가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를 결정할 수 있고 그 긴장구조의 당사자 위치에 있는 미국을 그런 위치에서 비켜설 수 있게 만드는 담론적 효과를 낳는다"며 "이 논리에 따르면 미국은 한반도 긴장구조의 밖에 위치해 있는 것이 돼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위기의 본질에 관한 진실의 절반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도 낳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교수는 한반도 질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관련 당사국을 평화협정 체제에 참여시키는 것은 한반도에 대한 '개입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평화촉진의 행동을 이행하는 세력'으로 전환시키는 노력이고, 이것이 바로 "자주외교의 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정면응시를 피해온 '정관언학(政官言學)**
이 교수는 미국을 '보장자'로만 참여시키려는 '2+2 논리'가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집요하게 정당화돼 온 이유를 세 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현상을 침범해서는 안 될 성역으로 간주해 왔기 때문으로 "미국이 직접 당사자가 되는 협정은 어떤 형태로든 주한미군의 지위와 한미동맹 체제에 불가피하게 중요한 변화를 수반할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미국을 평화협정의 직접적인 당사자로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비현실적이라는 '체념' 때문으로, 특히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직접적인 협상을 철저하게 거부하면서 그같은 체념이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고착됐다는 것이다.
셋째는 미국 당사자론을 주장하는 것은 북한의 주장과 같다는 논리에 대한 원천적인 회피의식 때문으로, 이런 의식이 "우리 지식인사회 역시 북한과의 '거리 좁히기'의 결정체일 수밖에 없는 평화협정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그 본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왔다"고 진단했다.
***미국은 왜 평화체제에 동의했나**
한편 이 교수는 미국이 9.19 공동성명에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약속한 것은 '커다란 정책전환'이라고 평가하며 그 이유를 분석했다.
부시 행정부가 그간 취해 온 일방주의적 대북정책이 북핵을 폐기하는 데 오히려 장애였음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이 교수는 "9.11 이후 미국이 벌인 대테러 전쟁으로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유럽, 러시아, 중국의 경계가 강화됐다"며 "중동에서와 달리 북한 문제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려는 시도는 한국, 중국, 러시아 등 강력한 국제적 저항세력이 존재하기에 미국의 행동을 제약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미국은 상호주의적 협상을 통한 외교적 해결책만이 대안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해 온 북한이 그 핵심 내용으로 거론해 온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 북미간에 타협점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미국이) 동아시아 군사전략에서 한반도를 전진기지로서보다는 완충지역으로서, 그리고 주한미군은 그 완충지역의 관리자 역할로 조정함으로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해 북한과 일정한 타협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공동성명의 취지와 2004년 2월 제2차 6자회담에서 미국이 북한에 시사하기 시작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의 틀은 미국이 직접적인 당사자로 참여하는 형태를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며 "한반도 평화협정 당사자 자격을 둘러싼 논란이 진행될 수 있으나, 미국이 남북한 및 중국과 더불어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용의를 밝힌 것 자체가 한국 정부와 그 주변에서 제시해온 "2+2"의 논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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