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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의 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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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의 세 집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18>

혜화동에서 성북동 올라가는 길목에 기념물 또는 민속자료로 지정된 예쁜 한옥 세 채가 있다. 모두 성북동 200번 대의 주소로 지금은 복개된 성북천 개울을 사이에 두고 삼각형의 세 정점처럼 모여 있다. 한용운의 심우장, 이태준의 집, 이재준 혹은 이종상의 별장이 그 집들이다. 집주인 세 사람은 1930년대부터 해방 전후까지 동시대를 살았지만 서로 교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세 사람은 각각의 경력을 지녔다. 한용운은 3.1 만세때 불교대표로 나선 33인 중의 한 분이고 끝까지 일제에 타협하지 않은 생애를 살았다. 그러면서 '님의 침묵' 같은 열정적인 시를 썼고 불교개혁을 주장했다. 그의 인생, 불교, 시인으로 상징되는 열정과 시대적 절망, 승속을 넘나들며 산 뛰어난 인물의 자취는 그가 옥중생활을 하고 나와 1933년부터 해방 얼마전까지 살았던 심우장이란 집으로 남았다.

심우장은 산비탈로 난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 있다. 작은 방 두개, 부엌, 좁은 마루와 광으로 이루어진 ㄴ자 팔작지붕(지붕에 세모꼴 옆면이 생기는 형태)의 단정한 한옥이다. 그의 따님이 살다가 떠나고 지금은 한용운 자료 전시관으로 쓰인다.

개인적인 생활을 전해줌직한 자료나 화려한 문물은 거의 없고 논문, 옥중기록, 글씨같은 자료들이다. 사진조차도 얼굴모습만 나온 증명사진 같은 것을 간신히 구해들였다고 들었었다. 하마터면 한용운의 얼굴도 알려지지 않을 뻔했다.

한옥에선 아주 드문 북향에다 꼭 닫힌 분합문은 일제를 향해 닫았던 그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 대문가에 커다란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는데 너무 손을 안 대서 거친 모습이 떠난 자취를 말해주는 듯도 하다. 주변엔 오래된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거목들이 과거 이곳이 외진 산 속이었음을 알려준다. 심우장이란 불교적 당호의 현판이 걸려있다.

소설가 이태준이 1933년에 지어 살았던 집은 밖에서부터 콩돌을 박은 화장담과 일각대문, 담 넘어로 쏟아진 나뭇가지가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한눈으로도 그가 사랑한 정다운 생활터전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작품을 쓰며 살다가 해방 후 가족전체가 월북했다.

그의 작품에는 일제시대에도 정치사상에 직접적으로 천착한 흔적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 많은데, 월북하여서는 '소련기행'을 썼다. 이후 그의 존재는 한국문단에서는 금기시 되고 북에서는 '퇴폐적 부르주아 문학가'로 몰렸다고 들었다.

그의 글 중에 1930년대 성북동을 묘사한 글귀가 있다.'불빛이 없는 성북동, 달빛이 깁을 깔아놓은 듯 했다' 고. 당시 이 근방은 포도원이고 사람들이 포도밭에 가는 이효석의 글을 읽은 적도 있다. 그의 글에도 포도밭이 있는 지역으로 나온다. 성북동은 그때도 시정의 번잡에서 떨어진 한적함을 찾아 살기도 하고 한용운처럼 은거하기 좋은 곳이었던 듯하다. 1960년 전후에도 여기는 버스 종점이 있고 길은 포장도 안돼 있었다.

수연산방이란 찻집이 된 그의 집을 보았다. 남아있는 한옥은 터를 잡은 것부터 누각을 두어 멋 부린 구조, 세겹으로 된 창문, 담 밖으로 누가 오는지 내려다보이는 전망, 아기자기한 꽃밭에 이르기까지 주인이 아주 신경쓰고 정성들여 지은 거처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루에 30대 후반 나이 이태준의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웃고 있는 소녀 뒤로 화단에 코스모스가 피어있었다. 그의 단편 '코스모스가 있는 정원', '청춘예찬'이 떠올랐다. 코스모스 많이 있는, 실연한 장 박사 집이 나오는 작품이다. 지금은 길가의 야생화처럼 생각되는 코스모스지만 그의 글에 코스모스가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한 사람은'1910년대 서울 동소문밖에서 처음 코스모스라는 꽃을 보았는데, 참 좋더군' 이라고 말했었다. 선교사들이 들여왔다고 알려진 귀화한 꽃, 이태준도 이국적인 그 꽃이 좋아보였기에 정원에 심어서 보고 글에다 썼던가. 지금 마당에는 코스모스는 없고 꽤 큰 사철나무, 패랭이꽃 그런 것들이 눈에 띈다.

집에는 壽硯山房, 竹澗書屋, 耆英世家, 聞香樓, 山水有淸音 같은 오래돼 보이는 한문현판과 주련이 걸렸다. 막상 가족사진의 배경이 된 방문 위의 상심루(嘗心樓)란 현판은 보이지 않는다. 이태준의 일가로 수연산방을 지키는 조상명 사장의 말로는 지금 남아있는 건물말고 다른 채가 또 있었는데 헐렸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 차를 마실 수 있다. 그의 생전에 문인 9명이 모인 구인회에 참여했다는데 정지용 이효석 등 당대의 작가들이 이 집에 와서 함께 이야기하곤 했겠지. 작가들이라고 글 이야기만 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직업인 집단의 전문적 세계가 구현되었을 것이다. 이태준은 이 집에 사람이 찾아오는 걸 즐겼는지도 모른다. 이 집은 살림집 같기도 하고 사랑채 같기도 하고 부르주아적 취향이 드러나 보였다. 여기서는 비 오는 날, 눈 내리는 날의 풍경이 더 그윽해 보였다.

한여름 더운 날씨인데도 옛 구조 그대로인 방에 사람들이 들어와 앉아있었다. 차보다는 얘기 나누는 좋은 장소로 찾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잡다한 장식품으로 집 안팎을 가득 꾸미느니 간결하고 고급한 분위기라면 정신을 더 고양시키는 장소가 될 것 같았다. 메뉴에 '상허차'라는 것이 보여 '이태준(그의 호가 상허이다)의 차인가?'하고 마셔보니 자스민을 꽃봉오리처럼 뭉친 중국 상해 차였다.

'이재준의 집'으로 민속자료가 된 일관정(一觀亭)은 이태준네 맞은편 개울 건너 한 교회 안에 있었다. 이 집은 이태준네 집과 비슷한, 누각있는 ㄴ자 구조지만 그보다 두배쯤 크게 지은 화려한 한옥으로 일관정이란 당호를 지녔다.

원래는 조선말 마포에서 젓갈장사로 큰 부자가 된 이종상의 별장이었다. 당시 부유한 상인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건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후일 대림산업 이재준 회장이 별장으로 썼고 뒤이어 교회가 사들여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부속 건물로 쓰고 있다. 대지 183평에 건평 30평 건물로 크도 작도 않은 안채와 행랑채가 있다. 새 목재와 옛 자재가 뒤섞여 있다. 집을 지은 첫 주인 이종상의 별장으로 부르는 게 더 정확한 것 아닐까 한다.

이종상 별장은 1900년대의 건축으로 알려져 있다. 돌을 깎아 받친 누각의 기둥, 높은 돌계단과 기단, 장식용 돌기둥 등이 호사하면서도 중후한 분위기를 낸다. 이태준의 집이 집주인의 성향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 집은 건축가 혹은 대목의 손길이 느껴지는 집이다. 어떠면 1900년대의 이 집을 본 따, 또는 동일한 대목건축가가 1933년에 이태준의 집을 지은 것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규모만 다를 뿐 구조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집을 보는 흥미가 더했다. 그 위에 일관정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조용하고 요런조런 장식이 거의 없어 보기에 시원했다. 마당에는 큰 소나무, 감나무, 그리고 꽃담 아래 봉숭아와 채송화 옥잠화 같은 것이 여름 오후에 보석처럼 피어있었다.

누군가 정교한 손길로 가꾸고 있는 듯하고 그 때문에 사람이 없어도 살아있는 집처럼 보였다. 교회는 한국적인 것이라면 기피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데도 있나보다. 영적 교육을 위한 장소이자 대외적인 행사장으로 쓰인다고 했다.

언덕을 약간 올라 자리잡은 이 별장은 지어질 당시 산속 개울가의 별장이었을 것이다. 부유한 거상의 살림규모는 어땠을까, 대문밖에 커다란 우물이 있고 행랑채와 통하는 일각문이 별도로 있어 여기서 북적였을 사람들이 그림그려진다.

넓은 마루와 누각에 모여든 사람들, 생일 결혼 등 무슨 잔치, 공들인 음식준비, 또는 주인이 사업차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는 장소였을 수도 있겠다. 큰 나무가 많아 산책하기도 좋았을 것이다. 공기가 상쾌하고 물소리 맑고 조용한 곳이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대적 상황을 떠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종상이란 거상의 일생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면 흥미로울 것 같았다.

성북동이 개발되면서 산의 비둘기가 번지수를 잃었다고 시인은 썼다. 큰길에서 돌아앉은 골목길의 커다란 기와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 대문이 꽉 닫혔다. 누가 살았는지, 민속자료로도 정해지지 못하고 그냥 두어두다 운명따라 갈 집, 이곳은 1950년대에 이 일대에 많이 들어선 ㄷ자형에 방 5개있고 한 가운데 마당이 있는 중산층 한옥중의 하나다.

여기 마당에서 새로 나온 장미품종을 가꾸던 집주인이 있었다. 아직도 위풍당당한 대문과 가뿐하게 하늘로 쳐들린 기와지붕 처마 곡선이 담 안으로 보인다. 이제 헐리고 만다면 더 이상 한옥 살림집이 지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슷하게 생긴 옆집은 음식점, 앞집은 빌딩이 됐다.

성북동 초입에서 왔다 갔다 하며 본 몇 채의 한옥은 다시 꺼내 보는 오래전의 앨범이기도 했다.

이상

사진 하지권
1.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 공식적인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 하지권
2.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이란 찻집이 되어 공개된다. 사진 하지권
3. 이종상의 별장(이재준의 집). 누각과 정원이 아름답고 우물 등 예스러운 분위기가 부유한 거상의 자취를 전한다. 사진 성북구

4. 주인 없는 빈집. 마당의 장미가 향기롭던 삶은 빛바랜 세월이 됐다. 사진 하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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