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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모트가 설계한 집 '관경재(觀敬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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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빌모트가 설계한 집 '관경재(觀敬齋)'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16>

북한산 보현봉 아래 동네 평창동에는 여러 개의 미술관이 있다. 작정을 하고 나서면, 언덕 위 주택가 골목의 여러 미술관에서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 오래전 조각가 문신의 미술관에서 현대 디자이너들의 유명한 의자를 망라한 굉장한 수집품을 본 기억이 강렬하다. 미술관들도 부침을 겪어 생겨나고 소멸하고 한다.

평창동에서는 평범하게 미술관의 그림을 보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 모으는 사람, 작가, 예술가들이 많이 살고 산언덕에 지어진 현대건축물을 접한다. 오래된 집부터 최신 양식 건물들이 가득하고 틈틈이 산신각, 절 같은 터주대감들이 보현봉 산신령의 굽어봄 아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약식 공연장도 있어 바그너 음악이 어떻고 하는 사람들 얘기도 귓결에 들었다. 예술의 안쪽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화려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곳이지만 큰 나무가 휘어진 가지를 드리운 길은 고요하게 햇빛을 받고 있다.

1979년경 여기 산동네에 주택단지가 처음 마련됐다. 처음엔 집들이 아주 드문 드문 했다. 평지 찻길에서 언덕 꼭대기까지는 1.5km 남짓, 주택만 들어서 있기에 이정표는 '무슨 산신각, 절까지 오면 다 온거다' 하는 걸로 안내된다.

언덕 높이 위치한 집에서는 보현봉의 웅장한 모습이 이마 위에 닿고 북악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의 거친 바위와 흙이 집 마당에 들어와 있다. 남쪽으로는 북악산을 가로 지르는 스카이웨이의 긴 불줄기가 가득 들어오는 도시적인 야경이 있다. 북악산 위로 달이 뜨면 시적 분위기가 도도하다. 사업가 K씨가 여기서 25년을 살았던 것은 보현봉 경관의 멋을 담은 산언덕의 거처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주변을 구름이 온통 에워싸고 있어 아래 동네가 안 보였어요. 그러더니 1985년 이후로는 공해가 쌓였는지 다시는 그런 장관이 만들어지지 않더군요. 바람 소리가 그렇게 좋고 눈 올 때, 비 올 때, 햇빛 가득 비치는 아침 다 그대로 좋아요. 언덕길이 대단하지만 눈 때문에 차가 못 다녀 걸어 올라가 본 적은 그동안 딱 2번뿐이었습니다.'

그는 이 집의 서재에 관경재(觀敬齋)라고 쓴 골동 현판을 놔두었다.'내가 관심있는 율곡의 경사상(敬思想)과도 연결되는 듯해서 갖다놨죠.'

평창동에서 제일 흥미롭게 본 것은 개인과 예술사이의 연결이었다. K씨의 집을 알게 됐을 때, 공간구성이 여느 집에서 보던 것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라는 것을 느꼈다. 천장이 높고 한 가운데 중정이 있는, 3세대가 동거하는 건평 286평에 500여평의 넓은 마당이 있는 3층 주택이었다.

방과 거실이 여러 개이고 방마다 목욕탕이 딸리고 여느 살림살이나 공통적으로 갖는 기능이 있었다. 그런데 벽면이나 천장, 문 등 구조들이 아무 장식없이 처리돼 있었다. 계단 난간이나 창문도 직선 외에는 장식이 없이 순했다. 조명도 늘어진 샹들리에가 아니고 일괄하여 천장에 파묻힌 등이고 색조는 흰벽과 갈색 마루, 흑회색 창호로 일관됐다. 테라스는 나무 덱크였다.

현대적이고 간결한 배경이었다. 과시적인 장식은 하나도 없었다. 그 대신 공간처리가 거침없고 넓은 실내 곳곳에 골목같은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계단과 현관, 창문 등은 기능적인 것을 넘어서 아름다운 설치물 같았다. 집을 세로로 관통하는 중정에는 키 큰 대나무가 심겨 있었다. 주인은 집 안팎에 그림과 조각을 많이 걸어 놓았다.

이 집 관경재는 인천공항 실내건축을 담당했던 프랑스인 미셀 빌모트가 2003년 설계했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나도 아는 이름난 건축가가 지은 서울의 개인주택은 처음 보았다. K씨에게서 빌모트가 이 집을 설계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이 완성된 과정이 진진하고 세련된 단순함의 구조를 이해하게 되는 한편의 이야기책이었다.

'빌모트가 서울에 가나 아트센터 지은 건 알고 있었지요. 어느 날 아침 누가 대문을 두드려 나가 보니 가나아트의 이호재 사장이 웬 외국인하고 같이 서있는 거예요. 우리 집에 석물이 꽤 많은데 빌모트가 한국 석물을 아주 좋아해서 그것 구경 좀 하자고 지나가다 같이 들렸대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지요. 빌모트는 시내에서 15분 거리에 평창동같은 경관이 있다는 데 감동하더군요. 이런 데다 집을 한번 지어봤으면 좋겠다 하고. 마침 내가 집을 새로 지을려고 설계를 구할까 하댔어요. 설계비 걱정 말고 한번 해보자해서 일이 시작됐지요.'

그후 빌모트가 서울에 올 때면 같이 만났다. 그는 소나무와 화강암, 물 같은 요소를 한국적 특색으로 이해하고 한국을 아주 좋아했다. '뭘 먹을래?' 하면 늘 한식을 찾았다. 건축주는 방이 몇 개 필요하다는 말만 하고 설계는 100% 그에게 일임했다. 3대를 위한 집이 됐다.

건축주와 설계자가 공동으로 의견을 맞춘 것들이 있었다. 집은 단순하게 간다. 평당 건축비는 일정 한도 내에서 한다. 빌모트는 집은 평당 어느 한도 이상 들여서는 안 된다는 지론을 펴는 사람이었다.

옛집을 허무는데 현장에서 연락이 왔다.'웬 외국인 두명이 와서 자꾸 본다' 하여 올라가 보니 빌모트가 이태리의 돌(石材)회사 사장을 대동하고 와서 터를 보여주며 어떤 자재를 써야 좋을까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 정성이 좋아보였다. 산의 화강암과도 맞는 것으로 회색 라임스톤과 검은색 슬레이트를 외벽자재로 쓰게 되었다.

천장 높이 3m는 빌모트가 고수했다. 중정은 그의 건축에선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것, 관경재에도 어김없이 들어섰다. 실내장식을 전문으로 했던 빌모트가 조명까지 다 설계했는데 식당의 등 하나가 특별나고 다른 것은 다 천장에 함몰되는 것으로 했다. 한국인은 밝은 실내를 좋아하니 건축주가 밝기를 조절했다.

부엌, 식당 등은 안주인의 의견을 따랐다. 방마다 딸린 목욕탕은 새삼스러운 것도 없었지만, 목욕탕은 장식적이기보다는 한국식으로 물을 많이 다루는데 강한 자재로 바꿨다. 부엌은 처음엔 문 없이 설계했다가 '생선 구어 먹는데 냄새가 집안 전체에 퍼지지 않게 ' 요구해 문을 작게 만들어 달았다.

집안이 극도의 간결함으로 조화된 데는 빌모트의 실내장식 효과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모든 창호를 기성품이 아닌 흑회색 샷시의 창틀로 제작했다. 창호 색과 같이 소파도 단순한 모양의 흑회색으로 된 것을 골라다 놓았다. 그런 손질이 이 넓은 공간을 세련되게 하는 듯 했다. 빌모트가 직접 설계한 실내용품이 몇가지 있었다. 식탁위의 직사각형 회화풍의 등, 서재의 정사각형 나무 책상이다. 창고가 많았고 가구는 조선 목가구가 많았다.

이 집에서 재미있는 구석 하나는 빌모트의 건축특징이기도 한 직사각형의 긴 네모 창문이었다. 서재에서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눈높이에 맞춰, 북악산 스카이웨이의 길게 불 켜진 야경이 창문에 그대로 담겨 들어왔다. 대문으로 나가는 길 담장에도 눈높이에 맞춰 이런 창이 나있어서 북악산 야경이 그림처럼 걸렸다. '빌모트 건축엔 이런 얄궂은 창문이 많아요.'

집 안팎에서 민균홍의 금속조각, 김환기의 항아리와 그림, 최종태의 인물상, 중광, 이우환등의 그림, 칼더 등 외국 작가, 그리고 조선 목가구와 정원 구석구석 놓인 석물을 알아볼 수 있었다. 현대적인 것과 고전이 자유자재로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안주인은 '한 살림 한다'는 감탄을 받을 만큼, 집 안팍의 환경을 완벽하게 정돈해 놓고 있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무엇보다 청결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굳이 이 크고 화려한 집에서 살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루에 한 두시간은 사업 아닌 다른 것에 정신을 쏟으면서 머리를 쉬곤 했어요. 사무실이 광화문에 있어 한가한 시간이면 인사동이나 화랑에 들렀지요. 그렇게 해서 차츰 예술가들을 알게 되고 감동도 받고.'

1970년대에 K씨는 중광의 후원자여서 둘은 친구처럼 지냈다. 그 괴팍하기로 이름난 승려출신 화가와의 어울림은 또 다른 긴 이야기다.

'30여년 간 사업차 사람들을 만났는데 문화적 자극을 받았어요. 스위스 친구들이 귀한 손님을 맞으면 집에 둔 귀한 술 한병을 꺼내 맛있는 음식하고 대접하며 음악 미술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는 것 많고 서울의 룸살롱접대와는 달랐습니다. 그림 하나 집에 거는 날 친구들 불러 그런 잔치로 자축하는 거예요. 일찌감치 은퇴한 뒤에는 자기가 하고 싶었던 소박한 일들을 하며 지역문화를 위해 기부도 많이 하고. 내가 서울서 그림 걸면서 친구들을 불러 놀자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궁금했습니다.'

반응이 어떠했는지 매우 궁금했는데, '후유증이 남기도 하고 좋은 모임도 있었다.'고 했다.

관경재는 빌모트의 현대적 설계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주 한국적인 배경 하나가 있었다. 이 집에 처음 살 때 한 스님이 '집터는 좋은데 마당의 석등을 정남향에서 약간 돌려 놓으라'고 했다. 집주인은 경주 괘능의 석상(石床)이나 석굴암의 본존불이 동쪽으로 15° 틀어져 앉아 있고, 태평양 건너 멕시코에도 아즈텍 시대의 치첸이차(Chichen Itcha) 피라미드가 15° 동향해 건조되었음을 알았다. 그 연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평창동이 기가 센 곳이라는 말도 듣던 터라 스님의 조언을 따랐다. K씨가 평창동에서 산 25년은 사업 등 모든 것이 순조로왔고 자녀들 결혼식도 집에서 했다.

그런데 무협소설 주인공도 아닌 K씨에게 2004년부터 'K야! 이제 그만 하산하거라' 하는 보현봉 산신령의 말씀이 들리는 듯하여 '그만 평창동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고 우스갯 소리를 했다. 사실은 한군데 고착됨 없이 유목민처럼 여기 저기 거처를 옮겨 다니며 인생의 후반전을 치르고 싶어졌다. 유목민이 남긴 강력한 문화에 끌린 탓도 있었다. 즉 서울에 베이스 캠프를 조그맣게 두고 풍광과 음식이 좋은 담양이나 통영, 그리고 외국에 여행하며 살기로 했다.

현실적인 이유는 넓은 집을 가꾸고 관리하느라 안주인이 골병들다시피 되어 '엄마 힘들다'고 식구들이 전부 K씨를 원망하고 집을 떠나있는 일년중 몇 달을 빈집으로 두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아들네도 사업차 상당기간 국내에 정착하지 못하게 되니 그 넓은 집에서 두부부만 사는게 휑뎅그렁하고 편치가 않았다.

올봄 K씨는 평창동을 떠나 동서남북 거처를 넘나들며 유목민 생활을 골똘히 실행하고 있다. 그래도 일생 일대의 집 호사였던 평창동 관경재의 기억을 잊을 수 없는데, 2006년 3월 미국서 발행되는 '아시아의 집 25채' 라는 책에 한국을 대표하는 집으로 소개되리라고 한다.

사진
1. 산과 조화되는 회색돌을 외벽으로 한 관경재 전경. 왼쪽 서재의 긴 직사각형 창문은 북악산 야경을 담아 들인다. 마당에는 석물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진 박보하

2. 중정이 있는 거실과 민균홍의 금속조각이 걸린 마루 사진 박보하

3. 거실의 창호와 소파는 같은 색깔이다. 평범해 보이는 구석에 상당한 주의가 기울여졌음을 알게 한다. 사진 박보하
4. 계단아래 거실. 그림과 미술품이 많이 걸렸다 사진 박보하
5. 보름달 뜬 밤 북악산의 야경 사진 성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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