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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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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14>

세검정을 지나다 1 - 서울 북쪽 산 속의 정자들

서울 북쪽 창의문 밖 세검정 일대는 북한산과 인왕산, 북악의 산세가 겹칠 듯 맞대고 있는 정점이다. 수많은 건물과 6차선 도로가 관통하는 도심이지만 삼면을 둘러싼 산자락이 이마 위로 수려하게 눈에 들어온다.

부암동 청운동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일대 주택가를 한발자국만 뒷길로 들어가 보면, 거친 바위와 나무 많은 언덕, 옛사람들의 정자, 성벽, 물이 흐르는 계곡같은 평범하지 않은 환경이 남아있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창의문(자하문) 언덕길은 버스가 못 다니고 여름에 큰비가 오면 인왕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세찬 물길이 쏜살같이 길로 흘러내려간다. 홍지문옆 홍제천의 물이 넘치기도 한다. 청운동과 부암동을 평지에서 잇는 자하문 터널 생긴 것이 불과 1986년이다. 청와대 뒷길에 난 도로에서 보면 한쪽 벼랑에는 4층집 지붕이 발아래 있다.

서울은 그 옛날 심심산골이었다는 말이 실감나고 서울성의 북쪽 성문이 이곳에 세워졌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주말이면 북한산 가는 산행인파가 많이 지나는, 현대 도시인의 일상이 담긴 길가에는 5층 정도의 평범한 건물들이 포진해 있다. 이 틈새로 창의문이나 홍지문, 성벽, 다리, 왕과 사대부들의 옛 정자 등 조선시대 건축 유적들은 실용을 떠난 조각품처럼 곳곳에 남아있고 종이 제작의 현장이자 반란군의 말굽소리가 배어있는 사적이 서울 특유의 정취를 불러 일으킨다.

조선 최대의 예술애호가 안평대군이 1447년 음력 4월 꿈에 본 무릉도원을 안견이 그림 그린 곳이 바로 이 동네라고도 한다. 30대 나이의 도도한 왕자이던 그가 활을 쏘고 군사를 키우며 풍류를 위해 머물던 무계정사는 바로 부암동 동회 뒷길 주택가에 그 터만 남았다. 세조는 동생 안평을 죽이면서 그의 세력권이던 이곳도 파괴했다.

지난 세대에는 능금나무가 많던 이 자리엔 무계동이라고 새긴 검은 바위 하나와 오래된 샘물, 아름드리 나무 몇그루가 안평이 꿈꾸던 시적 세계의 숨소리를 전한다.

이곳의 봄 경치가 특히 아름다워 임금이던 연산군이 봄의 정취를 즐기러 나온 탕춘대가 바로 세검정 정자 있는 언덕이었다. 서울성과 북한산성 두개를 안경의 콧대처럼 잇고 있는 탕춘대성, 숙종의 달필로 쓴 현판을 인 홍지문과 홍제천의 넓은 개울이 흐르며 그 위로 다섯칸의 수구를 낸 오간수다리, 날아갈 듯 너른 바위 위에 올라앉은 세검정이 어우러진 이곳이 왕의 풍류자리가 펼쳐진 곳이었다.

20대 청년왕 연산군이 베푸는 봄날의 소풍잔치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언덕에 흐드러진 살구꽃과 바위 많은 산중 풍경, 유교적 교양으로 무장한 신하들과 아름다움을 다해 치장한 여성들, 군사, 음악, 음식, 멀리서 숨듯이 구경하는 일반 백성들, 그런 그림이지 않았을까. 창의문의 다른 이름이 개성의 경치좋다는 곳 자하동을 본딴 자하문인 것도 경치가 좋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 세검정은 지금 찻길에 치여버릴 듯 바짝 붙여진 채 아래로는 시멘트덩이가 엉긴 구조물 사이로 생활 하수가 흐르는 곳이 되었다. 사초를 적은 종이의 먹글씨를 흐르는 물에 씻어보내던 역사같은 것은 한낱 휴지조각이 되었다. 도시계획도 중요하지만 미학적 보존을 그렇게 무시할 만큼 우리가 각박한가 하는 생각도 든다. 몇몇 건축가들은 부암동 일대를 명승으로 지정할 것을 건의해놓고 있다.

인왕의 거친 바위는 예술의 대상이었다. 조선조 내내 여러 사대부가 이곳에 지녀온 별장, 끝내는 흥선대원군이 빼앗아 가진 석파정은 부암동 인왕산턱 바위가 흐르는 폭포수처럼 보이는 장소에 있다. 소나무가 울창하게 둘러싼 틈으로 기와지붕을 한 몇 채의 한옥이 보인다. 멀리서 이곳을 내려다보면 그대로 그림 한폭의 산수화가 된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까!'하는 감탄은 화가 정선이 인왕산 풍경을 그림 그린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석파정은 지금 개인소유지만 수많은 제3자가 공유하는 인문적 가치는 지극히 한국적인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 낸다는 것만으로도 이 집의 존재이유가 충분하다. 달리 설치미술을 봐야할 것 없는 것이다.

경제성을 따져 이곳에 빌딩같은 게 들어선다면, 사진 속 이 아름다운 풍경은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이미 중문 아래 바위는 파헤쳐졌다. 석파정은 그 깎은 언덕 위에서 언제라도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 위에 발딛고 있다.

세검정 로터리엔 서예가 손재형이 살던 한옥이 있어 1950년대에 대원군 별장 아소정(충정로에 있다)의 건물 한 채를 옆에다 옮겨 놓았다. 이 건물은 지금 석파랑이라는 한정식집의 일부로 쓰이는데 애초에 옮겨지으면서 졸아든 것 같은 옹색한 느낌이 난다. 그래도 여러채의 한옥이 모여있는 이곳, 대문옆에 능소화가 수백송이 피어나는 이 집은 실제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살아있는 한옥이다.

나란히 있는 손재형기념관은 소나무옆에 진달래 곱게 핀 산언덕 아래서 문을 굳게 닫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사뭇 먹향기가 배어있을 것 같은 집, 지금은 누가 여기서 살까? 대문 앞은 바로 상명대 앞 버스 정거장이어서 젊은 학생들이 무심한 얼굴로 오르내린다.

지난 늦봄 무계정사 뒤 한적한 부암동 주택가에는 집집마다 황매화 백매화가 만발해 담장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예쁜 주부가 열어주는 이층 양옥 안마당에는 모란이 백송이는 피어있는 듯 붉은 꽃덩어리들이 만개해 있었다. 꽃나무 많은 동네 길을 걷는 기분은 비싼 아파트촌을 지나는 것과도 느낌이 달랐다.

이 동네에서 30년 이상 살아온 이는'사람들이 시내에서 이리로 큰집을 짓고 자꾸 들어온다' 고 했다. 평창동 고급 주택가가 포화상태가 되면서 그린벨트로 묶여있던 부암동이 새롭게 전원 주택지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야심가의 건축으로 고래등같은 집들도 있고 오래돼 납작해진 집까지 여기는 조용한 주택가이면서 한발 비켜난 곳은 산으로 이어진 개발 제한 구역이기도 했다.

초파일을 며칠 앞두고 골목길에는 오색 연등이 지그재그 줄을 긋듯 걸려 절에 가는 길을 밝히고 있다. 웬 절이 그렇게 많은지 허름한 양옥집에도 절 간판이 붙어있고 호랑이 머리를 처마에 받친 산령각도 있다. 한 절에는 부처님 앞에 1주일에 한번씩 대단한 꽃공양을 올리는데 그 꽃을 보러오는 신도들이 많다고 했다. 교회도 질세라 많이 보였다.

그전에 유명하던 자하문밖 능금나무나 자두나무는 다 사라져 버린 듯했지만 사람 손이 안가는 빈터마다 저절로 자라는 앵두나무가 지천이고 다닥다닥 앵두가 맺혔다. 이북출신의 나이많은 할머니 한분이 기어다니다시피 하면서 밭을 일구며 혼자 산다.

앵두 따서 얼마, 상추 호박 가꾸어 동네사람한테 팔아 벌어 쓰는데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몸에 밴 바지런한 살림꾼 같았다. 동네 아주머니가 넓은 터를 가로질러 다가가서 엿기름 싹 내는 법을 묻고 비법을 전수받는다.'웰빙'시대에 유행하는 어린 채소싹 키우기를 시도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 내려다 보이는 찻길은 년년이 복잡해져 간다.

조선시대 이 동네 토박이들은 산중이라 농토가 척박해 농사 대신 종이를 만들고 메주를 쑤어 팔면서 살았다. 그래서 길 이름에 메주가마길도 있다. 자연히 콩밭이 많아서 이곳에 와 돈 내고 콩을 사 밭머리에서 구워먹는 콩청대가 야외나들이의 하나였다. 1960년대까지도 세검정으로 학교에서 소풍을 나왔다. 돌을 던지면 붙는다고 부암이란 이름이 붙었던 큰 바위는 도로확장으로 없어졌다. 그러나 언덕바지에 있는 주택가 길모퉁이에 구멍이 움푹패인 검은 바위가 더러 눈에 띈다. 안평대군 별장터의 무계동이라고 새긴 바위와 같은 질감이다. 사진에서 보던 부암과 거의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이런 돌이 바로 부암이었던가 보다.

선조때 정치가 이항복의 별장은 백석동천의 이름을 달고 부암동 백사골의 거칠어진 빈터 가운데 초석만 서있다. 조선시대 별서의 상당수가 이 지역에 몰려있었나 보다. 세검정에서 평창동에 걸쳐 이 지역은 군사가 주둔하고 비상시를 위한 창고를 두었던 곳이다. 시를 짓고 술마시는 단순한 풍류말고도 군사와 정치문제가 개입된 권력자들간의 막후움직임이 역사기록으로 남았다.

생활에서 풍류를 빠뜨릴 수 없던 조상들이면서 서울을 도시계획 할 때 극장같은 시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게 이상했는데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은 정자가 서울에만도 120여 군데였다는 글을 보면서 정자가 바로 서양식 극장 같은 역할을 해낸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사랑과 정자에 앉아 즐기는 음악, 시, 서, 화, 토론, 활쏘기무술 등이 극장개념의 한국적 풍류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런 풍류는 지금 현대화된 양상으로 이 동네에서 되살아나는 듯하다. 평창동에는 프랑스 건축가 빌모트가 설계한 개인주택 觀敬齋 등 건축가들의 재주를 다한 멋진 건축이 많다. 크고 작은 화랑, 멋부린 음식점도 있다.

부암동에는 오보이스트 성필관, 플루티스트 용미중씨가 '삶을 축제로!' 하는 메시지를 전하며 음악과 한옥에 심취해 사는 삶을 보여준다. 이런 집들은 옛날 이 동네에 풍류를 위한 별서를 두었던 일들과 다를 것 없어 보인다.

자본의 형태는 바뀌어도 경치 좋은 데를 보면 진부한 일상을 초월하여 배어나오는 예술이 있게 마련인 듯하다. 꽃나무 많은 동네를 지났을 때처럼, 이들 집에 들어가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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