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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肅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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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肅愼)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0>

『고려사』에 보면 건녕 3년 왕융(王隆)이 군(郡)을 들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왕융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ㆍ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 무엇보다도 송악에 먼저 성을 쌓으시고 저의 맏이(고려 태조 왕건)를 그 주인으로 삼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궁예가 이를 따라 왕건을 그 성주로 삼았다고 합니다[여기서 왕융은 고려 태조의 부친으로 후일 추존하여 고려의 세조(世祖)가 되는 분입니다].

[原文] 乾寧三年 丙辰 以郡歸于裔裔大喜以爲金城太守 世祖說之曰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使太祖築勃禦塹城仍爲城主 時太祖年二十(『高麗史』太祖紀).

그런데 이상하죠? 왕융이 궁예에게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ㆍ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이라는 구절이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변한은 대체로 한반도의 중남부를 말하는 듯하고 조선은 고조선을 말하는 것으로 북경을 비롯한 북중국과 요동 땅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왕조가 성립되기 무려 4백여 년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숙신이라는 곳은 어디를 말할까요? 제가 보기엔 일단 과거 고조선 지역을 제외한 만주 전체 지역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죠. 왕융이 궁예에게 한 말은 조선ㆍ숙신ㆍ변한을 하나의 범주로 두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이러한 생각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서두에 나올 뿐만 아니라 다른 사서(史書)에서도 많이 확인이 된다는 것이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지역적인 범주를 일반적으로 현재의 한국(韓國 : Korea)을 의미하는 ‘삼한(三韓)’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머리글에는 금사세기(金史世紀)를 인용하면서 숙신(肅愼)에 대하여 “한나라 때는 삼한(三韓)이라고 하고, 위진시대(魏晋代)에는 읍루(挹樓)라고 하였으며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權兌遠,「濊․貊文化圈과 肅愼문제」,『論文集』43,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4).

어떤가요? 지금까지 배우고 가르쳐온 관점으로 이해가 잘 되십니까? 그러면 다시 좀 더 깊이 들어갑시다.

고구려 때 요동의 북쪽에 막힐부(鄚頡府 [마오제부(?)])가 있었는데 이곳은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창유현(昌圖縣)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막힐부에 대한 기록들이 매우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이 됩니다.

『신당서(新唐書)』에 이 막힐부는 부여의 옛 땅(扶餘之故地)이라고 합니다(『新唐書』「渤海傳」). 그런데 『요사(遼史)』에 따르면 이 막힐부라는 행정구역은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가 이를 계승한 곳이라고 합니다만, 이상한 것은 요나라 때는 한주(韓州)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죠(韓州…高(句).麗置 鄚頡府 都督鄚․高二州 渤海因之 : 󰡔遼史󰡕「地理志」).

이상하죠? 요하(遼河)의 북쪽을 두고 한주(韓州)라고 하다니오? 우리는 대부분 한(韓)이니 삼한(三韓)이니 하면 으레 한반도 남쪽을 이야기하는데 요하의 북쪽을 두고서 한주(韓州) 라고 했다니 말입니다. 더구나 송(宋)나라 때의 기록을 보면 이 한주가 삼한의 땅(三韓之地)라고 합니다(曾公亮,『武經總要』卷16,「北蕃地理」).

사실 쥬신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등의 이상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쥬신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새끼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한없이 이상해지는 것일 뿐이죠. 즉 이 기록 때문에 일부에서는 숙신은 읍루(挹樓)와는 달리 한(漢)나라 때 예맥문화권(쥬신문화권)에 흡수 동화한 종족으로 볼 수가 있다고도 합니다만, 그것은 잘못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보시면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 것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뿐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거란ㆍ금ㆍ고려를 아예 삼한(三韓)이라고 불렀다는 것이죠[허흥식編,『韓國全石全文』中世上, (亞細亞文化社 : 1984) 崔思全 墓誌]. 그리고 명ㆍ청 시대 사람들은 요동 지역을 아예 삼한(三韓)으로 불렀다는 것이 고증에 철저한 대학자의 저서에 나오고 있습니다[顧炎武撰,『日知綠』卷31, 地理 三韓條(四庫提要, 子, 雜家類]

그뿐이 아니죠. 『요사(遼史)』에서는 아예 이 한주(韓州)가 바로 그 의문의 고리국(藁離國)이라는 것이죠( 󰡔遼史󰡕「地理志」).

고리국이 어디입니까? 바로 부여와 고구려의 시원(始原)이 된 나라가 아닙니까? 그것이 요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결국 예맥족(숙신ㆍ동호 포함)의 이동 경로는 허베이(河北) - 요동(遼東) - 요하 북쪽(遼北) - 부여지역 - 고구려ㆍ몽골이라는 저의 주장이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되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1) 숙신, 안개속의 그 이름**

숙신이라는 명칭은 고대ㆍ중세 할 것 없이 중국의 사서(史書)에 자주 나타납니다. 앞서 본대로 숙신은 B. C. 5세기 경 『상서(尙書)』에 나타나고[武王旣伐東夷 肅愼來賀(「書序」)], 『죽서기년(竹書紀年)』에도 “순임금 25년 식신(숙신)이 와서 활과 화살을 바쳤다(帝舜二十五年息愼來朝貢弓矢)”라는 말이 있죠.

숙신은 그 후 물길(勿吉), 말갈(靺鞨), 읍루(挹婁) 등과 같은 의미도 쓰이는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종족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종족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숙신에서 물길이, 물길에서 말갈이, 말갈에서 여진족이 나타나기도 하고 일부는 숙신 - 물길 - 말갈 - 여진 등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숙신이란 같은 종족에 대하여 한족(漢族)의 사가(史家)들이 시대에 따라 읍루·물길·말갈·여진 등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죠.

숙신의 명칭이 달라진다고 해서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아시아에 있어서 하나의 민족에 대한 명칭이 달라지는 것은 이들 종족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 종족에 대한 한족(漢族) 사가(史家)들의 기록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애당초 한족(漢族)들은 이들에 대해 편한 대로 부르거나 동물 이름을 섞어서 비칭화(卑稱化 : 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명과 그 지역에 사는 민족명을 혼동하여 부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이 숙신이라는 민족이 어떤 지역에 있었는지를 살펴봅시다.

사마천의『사기(史記)』의 자료로 알려져 있는『국어(國語)』에 “공자가 진나라(현재의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 부근) 머물러 있을 때 싸리나무 화살이 꽂힌 매 한 마리가 떨어져 죽자, 공자가 ‘이 화살은 숙신의 것’이라고 했다.”는 말이 있죠. 이 사건의 사실 여부보다도 ① 상당히 오래 전에 숙신의 존재가 알려져 있다는 점, ② 죽은 새가 발견된 위치가 카이펑 부근이라는 점이 중요하죠. 이것을 지도로 살펴봅시다. [그림 ①] 중국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 부근

현재의 개념으로 보면 이 매가 화살을 맞은 상태에서 비행 거리가 길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면 멀리 잡아도 숙신은 현재의 산시(山西)지방이나 허베이(河北)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겠죠? 이 기록은 『사기(史記)』(권47 「공자세가」)를 포함하여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설원(說苑)』(권18 「辨物篇」), 『전한서(前漢書)』(권27 「五行志」) 등에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기』에 “동방의 이족(夷族)과 함께 북방에는 식신(息愼)”을 들고 있는데[『사기』권1 「五帝本紀」舜],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은 이에 대하여 “식신(息愼)은 또는 숙신(肅愼)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동북방에 거주하는 오랑캐이다.”라고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신(稷愼)은 숙신(肅愼)이다(『일주서』「왕회해」).”라는 말도 보이고 한 무제(漢武帝) 때의 조서에 숙신(肅愼)이라는 말이 보이는데 실제로 씌어진 조서에서는 肅□(□은 愼의 古語)로 되어있습니다.

그 후 이 숙신이라는 말은 236년경부터 554년까지 다시 등장합니다. 이 부분의 연구자들은 숙신을 굳이 나눠 어떤 시대에 사용된 숙신이라는 명칭은 읍루이고 어떤 것은 물길이고 하는 식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보기에 이것은 잘못입니다. 이 숙신이라는 명칭은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한족(漢族)들이 편리한 대로 부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정리 좀 하고 넘어가죠. 우리는 지난 장에서 ‘조선 = 숙신’임을 보았으므로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동북방 오랑캐 = 조선(朝鮮) = 숙신(肅愼) = 식신(息愼) = 직신(稷愼)

그 동안 숙신을 포함하여 만주 지역의 민족들에 대한 연구는 일본, 북한이나 러시아를 중심으로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북한 학자들은 중국인들이 아무렇게나 부른 말[汎稱]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여 특정 종족으로 인식하고 분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唐)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을 당인(唐人)으로 불렀고 베트남인들은 중국을 오(吳)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에도 민족적으로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을 정하기란 쉽지 않지요. 지금은 한족(漢族)으로 부르지만 일본의 경우 에도(江戶)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중국인들을 당인(唐人)으로 불렀습니다[시바 료타로, 『몽골의 초원』(고려원 : 1992) 117쪽].

재미있는 것은 몽골어에서는 지금도 중국을 거란(契丹)이라고 부릅니다. 이상하죠? 이 몽골이나 거란은 둘 다 과거 동호(東胡)로 몽골쥬신에 해당되는 완전히 같은 민족인데도 서로 다르게 부르고 있죠.

거란은 8세기경에 일어나 10세기경에 요(遼)나라를 건국한 민족인데 이들은 몽골과 별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몽골이 이들을 중국인들과 동일시하여 경멸하는 말투로 불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요나라가 지나치게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초기에는 같은 민족으로 살다가 요나라가 한화(漢化)하면서 스스로를 한족(漢族 : 중국인)들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몽골인들이 이를 거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 ②] 요(遼) 나라

참고로 고구려가 반도부여(백제)를 경멸하여‘잔당(殘黨)’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철저히 응징하려했던 것도 반도부여(백제)가 지나치게 친중국정책(親中國政策)을 추진, 한족(漢族)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끝없이 대항했기 때문입니다. 후일 이 같은 전통은 열도부여(일본)에 그대로 전승되어 열도부여의 지명(地名)들도 마치 중국의 지명처럼 부릅니다. 모방이 지나쳐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입니다.

***(2) 숙신, 카멜레온의 빛깔**

숙신이라는 명칭은 554년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었고 물길(勿吉)이라는 명칭은 572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563년부터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말갈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기도 전인 5대10국 시대에도 여진(女眞)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다시 말해서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 등의 명칭이 하나씩 나타났다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쓰이기도 하고 점차 사용되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명칭들이라는 것이죠. 마치 한국에서 중국인·한족(漢族)·되놈·짱골라·짱께·솰라솰라(殺了殺了) 등이 동시에 사용되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숙신이 물길이라는 명칭을 거치지 않고 바로 말갈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보기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족(漢族)의 사가(史家) 입장에서 보면 정확한 정보원(情報源)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이들 종족들이 유목민들이기 때문에 정확한 이동경로를 파악하기 어려우며 독립적으로 생활을 영위하면서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유목민들이라도 발전 수준이 모두 다 조금씩은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차이들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겠죠.

특히 소규모의 독립적인 비정착민(非定着民)들은 국가를 구성하기도 어려운 환경에서 주변의 종족들과 극심한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에 동일한 민족이라도 상당한 적대적인 관계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부여와 고구려는 물론이고 몽골인들이 요나라에 대해 가졌던 적개심이 대표적인 경우지요.

숙신은 시대에 따라서 읍루(挹婁[이루우]), 물길(勿吉[우지, 또는 와지]), 말갈(靺鞨[모허])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서(晋書)』에 보면,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고 하기도 한다.(肅愼氏一名挹婁也)”라고 하고(『晋書』「肅愼傳」) 『후한서(後漢書)』에도 “위략에서 말하기를 읍루는 일명 숙신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後漢書』「孔融傳」의 주석).

읍루·물길·말갈 등의 발음들이 고대에서는 정확히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숙신이나 조선 등의 말과는 분명히 다르게 들립니다. 즉 숙신과 조선은 비슷한 소리로 파악이 되는데 읍루·말갈·물길은 상당히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이것이 왜 그런 지 분명히 알아낸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할 점은 한자(漢字)의 표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숙신·식신·조선 이라는 말과는 달리 읍루·물길·말갈 등은 발음도 차이가 나지만 상당히 비하적인 요소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욕에 가깝지요. 읍루는 두레박과 유사한 의미를 보이고 ‘물길’은 ‘기분 나쁜 놈’이라는 의미, ‘말갈’은 버선과 가죽신 또는 ‘두건을 쓴 놈’ 이라는 의미로 하나의 민족 이름으로 사용하기 힘든 욕설(비칭) 들이죠. 그저 되놈·짱꼴라 수준의 말로 이해하시면 가장 적절할 겁니다.

***(3) 숙신, 읍루와 결별하다**

아가, 아가 언제나 우리에게 풍요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 아가는 물의 신(神) - 나나이족 -

『삼국지』에는 “한나라 이래로 읍루는 부여에 속해 있었고 부여는 조세와 부역 부담을 가중하게 하여 황초연간(220~226)에 반란을 일으켰다.(『三國志』「魏書」東夷傳)”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읍루는 부여의 정치권 내에 속하고 있죠.

숙신의 위치는 대체로 보면 백두산 북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에 면해 있다는 것으로 봐서 그 위치가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이나 우수리스크ㆍ하바로프스크 등지로 추정됩니다. [『진서(晋書)』에는 “숙신씨는 일명 읍루로 불함산 북쪽에 있다. 만약 부여에서 그 곳까지 가려면 60일 정도가 걸린다. 동쪽은 큰 바다에 면하여 있고 서쪽은 구만한국에 접해있고 북쪽은 약수에 이른다. 그 영역은 수 천리이다(肅愼一名挹婁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日行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北極弱水 其土界廣袤數千里)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숙신은 과거 숙신으로 기록된 백성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기록들에 의한 부분은 “한족(漢族)이 황하 중류 유역의 좁은 지역을 근거로 할 당시에 이에 인접하여 있는 종족이 숙신”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죠[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98쪽]. 또한 숙신을 대신하는 물길이라는 이름은 요하 지역(요동ㆍ요서ㆍ요북)에서 나타난 말이기 때문에 읍루가 대신하고 있는 숙신(블라디보스토크 - 하바로프스크 - 아무르강 하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죠.

따라서 숙신을 대신하는 읍루라는 것은 숙신인(쥬신인) 가운데서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나 우수리스크 등지로 이동한 사람들을 말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현재의 지리 개념으로 보면 황하 → 요서 → 요동 → 북만주 → 연해주 등으로 숙신의 일부가 이동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이들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다른 민족이라기보다는 개발 정도의 차이에 따라서 안정된 국가 권력을 형성하지 못한 숙신계의 극소수의 비정착민들이 끊임없이 정치경제적 탄압으로부터 탈출해간 경로라고 봐야합니다.

[그림 ③]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의 위치

여기서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의 하나인 숙신과 읍루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읍루는 그 민족적 계열이 가장 혼란하여 동북아시아 전체사를 혼란에 빠뜨린 민족입니다. 이 부분을 해명해야만 쥬신의 비밀이 풀립니다. 이 읍루 부분이야말로 한족사가(漢族史家)들이 가장 큰 실수를 했으며 그로 인해서 쥬신의 역사가 안개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의 사가들도 이 읍루의 함정에 걸려들어서 천년 이상을 헤매고 있는 것이죠.

먼저 선사시대 동아시아의 인종분포를 살펴봅시다. [그림 ④]은 현재의 고교 역사부도에 있는 지도입니다.

[그림 ④] 선사시대 동아시아의 인종분포(역사부도 : 천재교육 2004)

[그림 ④]에서 보면 읍루와 아이누의 지역이 일치한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① 읍루와 아이누의 발음이 거의 일치하고, ② 읍루와 아이누가 살고 있는 지리적인 영역이 일치하며, ③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이누의 생활(일본 지역은 제외)과 각종 사서들에 묘사된 읍루의 문화와 습속, 그리고 그 생활상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째, 읍루(挹婁)는 현대 음은 이루[yìlóu]인데 이 말은 아이누 말인 ‘이르’, 또는 아이누라는 말과 거의 일치합니다. 아이누의 말로 ‘이르[ir]’라는 말은 가족(家族), 또는 그 보다 큰 범위의 친족을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이누’란 그들의 말로 사람이란 뜻이고 이들을 부르는 일본말인 ‘에조, 에미시’도 아이누말로 사람이란 뜻이라고 합니다[일본인들은 아이누를 ‘하이(蝦夷)’, ‘이(夷 : 중국말로 동쪽 오랑캐)’, ‘적(狄 : 중국말로 북쪽 오랑캐)’으로 적고 ‘에조’, ‘에미시’라고 읽습니다. 열도부여인(일본인)들이 지나치게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주변민족을 부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죠].

둘째, 지리적 영역으로 앞서 본 대로 읍루는 “동쪽은 큰 바다에 면하여 있고 서쪽은 구만한국에 접해있고 북쪽은 약수에 이른다. 그 영역은 수 천리이다.” 라는 표현과 [그림 ④]의 영역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후한서』에서는 “읍루의 거주영역의 북쪽 끝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다(不知其北所極 :『後漢書』東夷傳).”고 합니다.

셋째,『후한서』에 “읍루는 항상 혈거생활(穴居生活)을 하는데 그것이 깊을수록 귀하며 큰집의 경우에는 무려 9층(아홉 개 계단)에 이르기도 한다(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接九梯 :『後漢書』東夷傳).”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 즉 연해주에서 아무르 강 하류 일대에 이르는 주민들은 정착생활을 하면서 야산이나 삼림에서 수렵을 했습니다. 이들 정착민의 주거(住居)는 원칙적으로 반지하식이며 흙을 씌운 혈거(穴居)입니다. 이것은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베링해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대부분 순록을 기르는 유목민인 것과는 약간은 대조가 됩니다.

생물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아이누족은 예맥이나 숙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길랴크나 아이누의 언어는 고아시아 제어(諸語)에 속합니다. 그래서 알타이어계통과는 다르지요. 언어적으로 보면 아이누 말은 문장 성분이 서로 뒤섞여 한 낱말처럼 보이는 집합어(polysynthetic language)에 속한다고 합니다(즉 동사는 각종 의미를 갖는 일종의 접사와 낱말들이 융합되어 구성이 복잡해져 매우 어렵게 됩니다). 유럽의 바스크 언어도 이와 유사한데, 스페인 속담에 “하나님이 악마를 징벌하기 위해 내리는 가장 큰 벌은 그 악마에게 7년 동안 바스크 말을 공부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집합어는 말이 어렵다고 합니다.

아이누족은 눈이 쌍꺼풀이고 귀는 큰 편이며 광대뼈는 크지 않습니다. 아이누는 머리 길이도 세계의 인종들 가운데서 아주 큰 편(198.36㎜)이지만 머리의 폭은 아주 작은 반면, 한국ㆍ몽골ㆍ만주 인종은 짧은 머리형에 속합니다. 알타이 계통이 아니지요. 뿐만 아니라 아이누에게서는 몽골 반점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시베리아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의 수는 매우 적습니다. 오늘날에도 시베리아 소수민족의 비율은 채 10%가 되지 않으며 시베리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민족은 부랴트족(몽골의 칭기즈칸족의 기원)ㆍ사하(야쿠트)족 등인데도 1990년대를 기준으로 봐도 40여만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퉁구스인들은 십만이 안 된다고 합니다(물론 스스로를 퉁구스라고 부르는 민족은 없지요).

이 종족들을 살펴보면 에벤·에벤크·네기달·나나이·울차·우데헤(러시아)·오로촌(중국)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길랴크로 알려진 니브히·에스키모·코략·유카기르 등의 소위 고아시아족이 있으며 과거 사서에서 읍루라고 부르던 종족은 아무르강 하류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곳에 살던 길랴크나 아이누 같은 고아시아족들에 대해 읍루, 즉 아이누라고 불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시베리아의 종족들의 인구는 하나의 종족이나 민족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적습니다. 대개의 경우 1만 명도 안 되고 있습니다(민족으로 분류하기도 어렵죠). [그림 ④]에서 일본은 북몽골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반도부여(백제)의 영향이 미치기 이전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숙신과 아이누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숙신을 읍루, 즉 아이누라고 불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쥬신의 비밀을 찾아가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글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바로 1920년대의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는 길랴크 족의 모습을 묘사한 글입니다(이 글에서는 길랴크라고 하고 있는데 큰 범주에서 보면 아이누, 즉 과거의 읍루라고 보시면 됩니다).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일대에 사는 소수민족인 퉁구스 고리드족과 길랴크족에게는 곰한테 죽은 사람의 시체는 그 곰을 잡을 때까지 그대로 둔다는 관습이 있었는데 … 곰을 유인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 북만주 일대의 삼림이나 황무지에는 길랴크나 고리드, 한민족(韓民族) 등 나라 없는 약소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만주족은 그들을 박해하고 착취했다. … 길랴크족은 늘 당하기만 했다(김왕석, 『수렵야화』 「중국인과 길랴크족」).”

대체로 이들의 거주지는 아이누 - 길랴크의 거주영역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만주족(만주 쥬신)과는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속 보시죠.

“그 일대는 나무들이 울창한 원시림이었으며 그런 곳에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길랴크족뿐이었다. 만주 땅에서는 어디를 가도 나타나는 마적들도 그곳엔 들어가지 않았다. … 만주인들은 그들을 짐승 같은 야만인이라고 말했다(김왕석, 『수렵야화』 「중국인과 길랴크족」).”

이 부분의 묘사는 『삼국지』와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삼국지』에서는 “그들은 사람의 수는 적었지만 험한 산속에 살고 있었고, 이웃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끝까지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어려웠다(『三國志』魏書「東夷傳」).”는 기록이 있죠. 이 기록은 『후한서(後漢書)』『진서(晋書)』에도 그대로 있죠.

“길랴크족은 사냥만으로 생활을 했다. 몽고족처럼 그들도 농업이나 상업을 경멸했으며 아무리 생활이 궁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몽고족은 그래도 목축을 했으나 길랴크족은 그것도 하지 않고 오직 사냥만을 했다. … 그들은 많은 짐승들을 잡았으나 수입은 좋지 않았다. 만주인 상인들에게 착취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값비싼 짐승 털과 녹용·웅담 등 약재를 헐값으로 만주인 상인들에게 팔아 상인들만 배부르게 만들어주었다. 길랴크족은 돈이라는 걸 잘 몰랐고 저축이니 이자니 하는 것도 잘 몰랐다. … 그들은 짐승을 많이 잡아도 훈제로 만들어 저장을 할 줄 몰랐다. 많이 잡히면 이웃마을 사람들이나 나그네들까지 불러 잔치를 벌여 다 먹어치웠다. 그래서 그들은 사냥이 잘 되지 않으면 굶주렸다. 만주인들은 그럴 때는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거기엔 터무니없는 이자가 붙어있었다. 한 달에 2할, 심지어는 3할까지 이자가 붙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만주인들이 돈을 꾸어줄 때는 땅이나 집, 또는 처자식을 담보로 잡았으며 돈을 갚지 않으면 강제로 담보물을 빼앗아갔다(김왕석, 『수렵야화』「중국인과 길랴크족」).”

이 부분에서 아이누 - 만주족(만주쥬신) - 한족(漢族)의 비즈니스적 네트워크의 연계관계(supply chain in business)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주족(과거의 숙신 : 만주 쥬신) 중의 일부는 이들과 깊은 거래관계가 있어왔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족(漢族)들이 쥬신의 일부를 두고 읍루(아이누)라고 부른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위에서 인용된 『수렵야화』는 신문에 연재 되었던 글인데 저자는 한국인 사냥꾼 박상훈(朴尙勳, 함경도 출신, 1879 ∼ 1945년 소식불명)이라는 사람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고 합니다. 이 글로 보면 당시의 읍루의 생활이 어떤 상태였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이들과 만주인과의 관계를 알 수가 있지요. 이들의 수렵생활은 그 특성상 긴 세월 동안 상당한 원형을 유지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자는 이들이 만주나 한족들과는 달리 이기심이나 교활성 위선 등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수렵야화』에서는 만주족과 읍루(아이누, 또는 길랴크)와는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지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만주족의 조상이라고 보는 숙신과 읍루(아이누)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이 점을 분명히 아셔야 쥬신의 뿌리가 해명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사서의 기록들로 돌아가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봅시다. 제가 보기에 한족(漢族)의 사가들은 숙신(肅愼)의 일부가 동부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해가면서 아이누족(길랴크족)과 (『수렵야화』에서 보듯이) 상업적 거래를 위해 어울리는 것을 보고 아예 읍루(아이누)라고 불렀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 숙신의 일부가 아이누 지역까지 흘러 들어간 것을 마치 이들이 읍루로 합쳐진 양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숙신이 연해주 쪽으로 흘러들어가니 아이누는 다시 동북으로 올라갔겠고 후일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만주 쥬신이 대거 중국 땅으로 들어가자 다시 이들은 남하하였을 것입니다. 이 같은 요동이나 만주ㆍ연해주 일대의 사정을 한족 사가들이 제대로 알 리가 없지요.

따라서 숙신이 아이누가 아니듯이 아이누는 예맥이 아니고 또한 쥬신도 아닌 것이지요. 숙신 대신에 사용한 읍루가 아닌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는 읍루는 예맥계열이 아니죠. 앞으로 읍루는 아이누로 보고 분석을 해야 합니다.

유전학적으로 보면 아이누에 특유하게 나타나는 유전자인 DE-YAP(Y 염색체 변이의 하나)는 한국이나 몽골 등 범쥬신에게는 1~2%도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Han Jun Jin & Wook Kim, “Genetic Relationship Between Korean and Mongolian Population Based on the Y Chromosome DNA” 『Korean J Biol Sci 7 』139 ~144, 2003) 다만 DE-YAP은 일본의 경우에는 꽤 많이 나타나는데(『Human genetics』2003, Vol 114, 27~35쪽), 이것은 아이누가 일본열도에 이미 많이 살고 있었고, 쥬신족이 일본 열도에서 아이누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가 섞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동안 읍루족의 기원은 ① 퉁구스족의 일파설(위치가 현재의 길랴크족의 분포와 가까우므로 길랴크[니브히(Niebuhr)]족의 선조로 보는 견해) ② 여진족의 선조설(각종 중국측 사서에는 숙신의 별칭이자 후예로 여진족의 선조로 보는 견해) 등이 있지만 이제 읍루가 여진족의 선조라는 설은 확실히 틀렸다는 것을 아시겠죠?

읍루족이 아이누족이라고 볼 때 숙신의 이동으로 인하여 다시 사할린 북쪽 아무르강 하류 입구쪽으로 다시 밀려올라갔을 가능성이 크므로 ①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 점을 좀 봅시다. 킬랴크는 연해주에서 북극해에 이르는 동시베리아 지역에 광대하게 분포하는 아이누의 영역 가운데서 아무르강 하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죠. [그림 ⑤] 시베리아 일대의 종족 분포도(지명은 현재지명)

일부에서는 한국어가 길랴크족의 언어와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한국인과 길랴크족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민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본 대로 유전자적인 분석에서 범쥬신에게 있어서 아이누의 특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죠). 1955년 러시아의 끄레이노비치는 길랴크족(Gilyak)이 아무르강과 사할린보다 남부 지방에 거주했으며, 한국인 및 만주인들과 긴밀했다고 보고 한국어 및 만주어와 길랴크어의 유사성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두 언어에 보이는 유사한 낱말은 차용에 의한 것이지, 결코 동일 계통에 속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김방한,『한국어의 계통』(민음사 : 1983) / 장길운,『국어사정설』(형설출판사 : 1993) / 이기문,『국어사개설』(탑출판사 : 1972)].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아이누말의 계통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이 언어와 우리 말과는 직접적인 연계를 밝히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에 따르면, 아이누 계의 언어를 일본어·한국어·알타이어, 심지어 인도 유럽어와의 비교를 해보았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이 언어를 현재까지는 다른 언어와는 상관이 없는 ‘고립어(isolated language)’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한국어가 길랴크말과 비슷한 어휘들이 많다는 것은 숙신과 길랴크(또는 아이누족) 사이에 상당한 교류가 있었거나 정치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길랴크족의 주요 거주지는 아무르강 하류 유역이고 아이누의 주요 영역은 아무르강 하류에서부터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 지역입니다. 그래서 아이누나 길랴크는 각각 숙신(만주쥬신)과 한반도(반도쥬신)에 경제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읍루, 즉 아이누는 비슷한 시기에 동쪽으로 이동해가는 숙신인들과 교류를 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것이 숙신의 후예들인 만주족(만주쥬신)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숙신 - 여진 - 만주는 쥬신으로서의 일관된 계보를 가지고 있는데 왜 갑자기 아이누와 하나의 종족이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숙신의 일부 즉 한반도 및 연해주 동북부의 사람들과 교류가 있을 수가 있겠지만 그것은 숙신의 큰 흐름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지요.

숙신을 읍루와 혼동한 것은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한 실수 중 가장 큰 실수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읍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의 “읍루는 과거 숙신의 나라이다(古之肅愼氏之國也).”라는 기록으로 말미암아 사가들이 숙신 - 읍루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대로 숙신은 예맥의 주요 흐름과 일치하는 민족이므로 읍루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사가들이 읍루의 함정에 빠진 것은 읍루, 즉 아이누가 아무르강 상류에서부터 연해주까지 이동해왔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아이누들의 남진(南進)은 정확한 원인을 알기는 어렵지만, 아무르강 유역의 문화를 뽈체 문화라고 하고 아이누의 문화를 올가 문화라고 하는데 이 두 문화는 토기ㆍ철기ㆍ석기 등에 나타나는 유사성(토기의 형식, 문양구성,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같은 문화로 보고 있습니다[강인욱, 『極東考古學要綱』(2002) 53쪽].

아이누는 문화적으로는 많이 뒤떨어져 있지만 수렵을 하는 민족이므로 그 특성상 대단한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 “아이누(읍루) 사람들은 배를 타고 노략질하는 것을 즐겼는데, 북옥저는 이들의 노략질을 두려워하여 매년 여름이 되면 번번이 바위굴에 숨었다가 겨울에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읍락에 거처하였다(挹婁人憙乘船寇抄, 北沃沮畏之, 每夏輒臧於巖穴, 至冬船道不通, 乃下居邑落 :『後漢書』「東沃沮」).”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이누는 전문 수렵인이라 대부분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던 모양입니다. 『삼국지』에서는 읍루인들은 사람의 눈을 쏘아 맞힐 정도로 활쏘기에 능하여(善射) “일단 활을 쏘면 모두 맞았다. 화살에 독을 발라서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射人皆入. 矢施毒, 人中皆死 : 『三國志』「魏書」東夷傳)”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여는 여러 번 이들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지만 산세도 험하고(所在山險) 사람들이 그들의 화살을 두려워해서 끝내 정복할 수 없었다(卒不能服也)고 합니다(『三國志』「魏書」東夷傳).

그러면 여기서 읍루, 즉 아이누와 교류를 가진 숙신의 일부 집단의 성격에 대해 알아봅시다. 범쥬신은 한족의 압박으로 인하여 허베이 - 요동 - 만주 - 연해주 등지로 지속적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연해주로 이동해 간 쥬신의 일부는 아이누와의 교류를 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여기에는 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요동과 만주의 범쥬신 가운데 일부는 고래로부터 문피(호랑이 가죽)가 가장 주요한 특산물의 하나였습니다(‘숙신이 조선에서 나온 아홉 가지 이유’ 참고). 이 같은 고급 특산물의 가장 중요한 공급자가 바로 아이누로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읍루의 문화수준은 매우 열악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서는“동쪽 오랑캐들은 대부분 예기(禮器)를 사용하는데 동쪽 오랑캐들 가운데 (유독) 읍루는 음식예절이 없고 풍속이 엉망이었다.(東夷飮食類 皆用俎豆 唯挹婁不法 俗最無綱紀)”(『三國志』「魏書」東夷傳)라고 하여 문화적으로 가장 미개할 뿐만 아니라 장례법 또한 매우 미개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읍루는 자연환경이 열악한 까닭으로 다른 종족들과 문화적으로 격차가 심하여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숙신과 읍루가 제대로 융합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쥬신과 한족(漢族)이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읍루(挹婁)는 쥬신이 아니며 연해주에서 아무르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아이누ㆍ길랴크(니브히) 같은 고아시아족을 이르는 명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쥬신(숙신)이 이 지역과 연계하여 비즈니스 활동(Business Activities)을 함으로써 한족 사가들이 이들을 읍루라고 혼동했거나 아니면 숙신인지를 알면서도 비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4) 기분 나쁜 놈**

숙신을 의미하는 말 가운데 물길(勿吉)이라는 이름을 한번 봅시다. 중국인들이 한자어로 표현한 것을 보면 한마디로‘기분 나쁜 놈’이라는 뜻이군요. 정말 듣기에 기분 나쁘군요.

물길은 발해 때 숙신의 한 갈래가 막힐부(鄚頡部)를 중심으로 먼저 물길을 칭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 다시 막힐부가 나오네요. 막힐부는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창유현(昌圖縣)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막힐부는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가 이를 계승한 곳이고, 요나라 때는 한주(韓州)로 이름이 바뀐 곳이죠. 이 한주(韓州)란 ‘한국인(韓國人)들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이죠? 이것만 보아도 물길을 쥬신에서 빼어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사서들의 기록을 보면 숙신의 이름이 매우 다양하게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물길·말갈로 주로 나타나지만(읍루도 나타나지만 이제는 제외시켜야겠지요), 숙신이 어느 날 동시에 물길로 불린 것도 아니고 그들의 일부에 대하여 물길로 부르거나 끝까지 물길로 부르지 않은 숙신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숙신은 카멜레온처럼 변화가 무쌍합니다.

숙신이라는 민족 이름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① 숙신 - 숙신 - 숙신 (일부의 숙신족은 그대로 숙신으로 부름)
② 숙신 - 읍루 - 읍루 (일부의 숙신은 읍루로)
③ 숙신 - 읍루 - 물길 (일부의 숙신은 읍루 - 물길)
④ 숙신 - 숙신 - 말갈
⑤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일부의 숙신은 읍루 - 물길 - 말갈)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숙신이라는 종족이 물길·말갈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읍루는 이제 제외합시다).

위의 경우 가운데 일반적으로는 ⑤의 경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④의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있습니다. 즉 흑수말갈은 물길로 불린 적이 없다는 말이죠[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08쪽]. 참고로 흑수(黑水)란 현재의 흑룡강(또는 송화강)을 말합니다.

[그림 ⑥] 흑수(흑룡강 : 헤이룽강)의 위치

숙신이라는 종족의 명칭이 이렇게 다양하게 된 또 다른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하나의 원집단(原集團)에서 그 집단의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 그 통치권 하에 있던 다른 부족 가운데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갈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견해들을 다 소개할 순 없는 일이고 주요한 것만 소개해 봅시다. 예를 들면 흑룡강(黑龍江)을 현지인들이 만구[Mangu] 라고 했는데 이 말을 따서 했다는 견해도 있고 물길, 또는 말갈은 만주어로 밀림, 또는 삼림의 뜻인 ‘웨지’[窩集 (Weji)], 또는 ‘와지’에서 나왔다는 견해도 있죠.

제가 보기에는 이 ‘와지’라는 말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즉 ‘산골 사람’, 또는 ‘숲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와지’라는 말을 사용해왔는데 그것을 중국인들이 한자로 받아 적을 때 같은 발음으로 ‘기분 나쁜 놈(勿吉)’이라는 욕설로 쓴 것이죠. 정말 기분 나쁘군요. 그런데 이 ‘와지’라는 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합니다.

‘와지’라는 말은 삼림이라는 의미 외에도 동쪽, 즉 ‘해 뜨는 곳(日本)’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죠. 생각해보세요. 숲이 우거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숲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동쪽인 한자말의 동(東 : 木 + 日)도 사실은 나무(木) 위로 떠오르는 태양[日]을 묘사한 말이죠. 평생을 알타이 연구에 몸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前 서울대 교수)은 이 말을 옥저(沃沮)나 왜(倭)의 어원(語源)이라고 분석합니다. 앞으로 다른 장(일본편)에서도 보시겠지만 이 왜라는 말이 시작된 것은 요동ㆍ만주 지역입니다. 놀랐죠? 여러분은 그 동안 왜(倭)라는 말은 일본 열도에서 시작된 말로만 아셨죠? 이 부분은 일본편에서 다시 분석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이 물길·말갈이 결국은 옥저나 동예 나아가 일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다시 말하면 숙신이 부여ㆍ고구려 지역은 물론이고 옥저ㆍ동예ㆍ한반도ㆍ일본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된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따라서 숙신이나 물길은 동아시아의 쥬신족들에 대한 일종의 범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국학자들이나 대부분 한국의 사학자들은 물길은 확실히 오랑캐 종족으로 보고 있으며 물길을 이은 말갈(靺鞨[모허])도 일반적으로 돼지·개가죽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석학으로 추앙받는 정약용 선생조차도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갈이라는 말은 그들이 돼지와 개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었기 때문에 그들을 말갈로 부른 것일 것이다.”라고 합니다(정약용,『아방강역고』권2 ).

이외에도 말갈이라는 말은 붉은 색의 무릎 가리개를 의미한다는 설도 있긴 합니다. 즉 말갈을 부르는 다른 말로 매갑(韎韐[모거])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지요. 매갑이란 선비(鮮卑)의 세르비와 유사하게 붉은색의 무릎 가리개를 의미합니다. 매갑은 말갈이라는 말과 발음이 매우 유사하죠.

말갈은 그 이전의 앙갈(鞅羯)의 후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앙(鞅)이란 고삐를 말하고 갈(羯)이란 거세한 양을 의미하는 말로 양을 거세하여 고삐로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게 한 것이라는 의미죠. 이 갈족은 중국의 산서성을 중심으로 석륵(石勒)이라는 영걸이 나타나 후조(後趙)를 세워 중원을 지배한 적이 있는 민족입니다. 『동문선』에 실린 최치원의 견해에 따르면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 (고구려의 변방에) 혹처럼 붙어있던 부락인 앙갈의 족속이다(渤海源流 句麗末滅之時 本爲疣贅部落鞅羯之屬)”라고 합니다. 최치원은 이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지요.

[그림 ⑦] 후조(後趙) A. D. 300년대 초ㆍ중반

그러나저러나 분명한 것은 말갈이라는 말이 비록 음을 빌려서 사용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예맥(濊貊)이라는 말과 같이 욕설(비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숙신은 만리장성 이북의 지역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쳐서 거주했던 민족들을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숙신은 카멜레온의 몸 색깔처럼 물길(勿吉)·말갈(靺鞨)·읍루(挹婁) 등으로 불리었으며, 후일에는 여진·만주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름들이 거의 욕설로 바뀌어졌습니다. 스스로 글이 없다 보니 한족(漢族)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재단된 것이죠. 그러나 이 숙신이야말로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였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숙신이 현실적으로는 어떤 국가에서 어떻게 변모되어가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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