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자료에는 덕수궁의 정문이 인화문(仁化門)이던 때의 사진도 있다. 덕수궁 대궐에 무슨 일이 있던 날인 듯하다. 사람키의 두길 넘어 세길이 되는, 지금보다 훨씬 높은 대궐 담장과 인화문 앞에 관리들이 타고 온 가마, 초교, 말이 기다리고 있고 신식 병대의 모습, 외국인 외교관들 모습도 보인다. 가마에는 호화롭게 호랑이 가죽이 덮여있는 것도 있다.
비서관, 보좌관처럼 보이는 전복 차림의 관리들이 문을 향해 바라보며 기다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오늘날 내각회의의 장관과 그들의 비서관을 보는 것 같다. 이어진 사진에는 완벽한 조복 차림의 관리들이 문을 나서 가마를 향해 걷고 있다. 사진 속의 관리 몇사람은 40대쯤의 건장한 대감들이다.
외국인 외교관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조례는 아니고 정치적으로 특별한 일을 위한 행차인 듯하다. 사진으로 몇 개 과정과 주변풍경이 찍힌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인 무슨 날의 장면이기라도 한 것인가? 인화문의 이름이 대한문으로 바뀌기 전이니 1905년 이전의 어느 날 대궐 앞에서 있었던 광경임에는 틀림없다.
‘조선왕실 내부에서 서구문물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었다’고 한말 대궐에서 서양 사무관으로 일했던 독일 여성 엠마 크뢰벨은 기록해 놓고 있다. 1880년대부터 대궐 사람들, 관리들 사진 기록이 나오기 시작한다. 40세의 고종은 너무나 잘생긴 얼굴이다. 명성황후(1851-1895)는 사진을 남기지 않았지만 영왕의 생모 엄비는 대궐 여인들 중 유일하게 양장차림을 남겼다.
덕수궁의 덕혜옹주도 1920년대 들어 10대 소녀가 되며 양장차림을 보인다. ‘풀각시같다’는 말을 들었던 그녀의 청초한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점령군 손에 넘어가 미쳐버린 일생이 되리라곤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창덕궁은 스팀시설이 된 채로 남았다.
그런가 하면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목씨 성을 받은 참판이 되어 조선식 조복을 입고 대궐에 들어갔다. 선교사들은 조선사람처럼 두루마기에 갓 쓴 차림으로 선교하기도 했는데, 이는 포교가 금지된 이른 시기에 조선에 몰래 잠입한 천주교신부들이 신분을 가리느라고 상복에 삿갓으로 덮어쓰고 다닌 차림새와 비교된다.
외국인의 얼굴을 숨기는 데는 사람들이 거리를 두던 상복 차림에 삿갓이 아주 적당했다. 뮈텔신부나 모린신부 모두 이런 죽장에 삿갓 쓰고 도포 입은 김삿갓같은 사진을 남겼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변장을 해도 개들은 외국인의 이상한 냄새를 알아보고 달려들어 물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조선의 개를 매우 무서워했다고 했다.
1890년경 영국공사관을 방문한 5인의 판서대감들 사진이 있다. 갓을 쓰고 꼿꼿이 앞을 응시하는 포즈로 다섯 사람이 테라스에서 의자에 같이 앉아 찍었다. 여름날인 듯, 흰 모시 도포차림인 것으로 보아 공식업무는 아닌 듯하다. 여기서 보는 인물 중에는 1894년 프랑스 신문에 탁지부대신, 외무대신, 공무대신으로 소개된 세명 중의 한 사람도 있다.
의자에 앉은 전신 독사진으로 소개된 세명의 판서는 갑오경장이 단행된 1894년 8월 13일 이후 김홍집내각 장관들이라면 어윤중(탁지부대신), 김윤식(외무대신), 서정순(공무대신)이다.
갑오경장 이전의 사진이라면 민영달(호조판서), 조병직(외교감변), 민영소(공조판서)일 수도 있다. 이들은 한여름에도 흐트러진 기색이 전혀 없이 술띠를 드리운 모시도포나 학창의를 위의있게 입었다. 머리엔 투명한 말총 정자관, 혹은 방건, 유건을 쓰고 손에는 부채를 쥐었다. 8월 13일의 갑오경장때 조직된 내각인물로 뉴스가 되었던 것이기 쉽다. 고종이 신하들하고 같이 찍은 사진과 기술적으로 비교해 본다면 이들이 누군지 밝혀낼 수 있을것 같다.
세 판서는 40대 - 60대로 보이며 이국 문물에 도취되거나 웃음 띤 표정같은 것 없이 엄정한 표정에 품위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얼마후 자기네 동료인 다른 대신들 손에서 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을사 5조약이 맺어진 중명전**
이 거리에서 대한제국의 운명을 떠안고 있는 상징적 건물은 이들 서양 영사관과 덕수궁 사이에 가려져있는 중명전(重明殿)이다. 이 건물은 경운궁(덕수궁)에 딸린 접견소겸 고종의 도서실이었다. 안내판은 1900년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소개하고 있는데 석조전이 준공된 것과 같은 해이다. 워낙은 덕수궁 안 평성문(平成門) 밖에 있다가 대궐 안에 도로가 나면서 궁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단순한 2층 벽돌집이지만 1층에 아치형 창과 2층 서쪽에 베란다(지금은 없다), 지붕밑방과 지하실이 있다. 광무 10년 1906년 황태자 순종의 두 번째 비 윤비와의 혼례때 외국사신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이 연회가 어떠했을지를 상상해 본다. 조대비 생신연회 기록에서 보듯 한사람 앞에 한상씩 독상을 차려주는 꽃장식된 잔치상이 차려졌을 것도 같고 테이블에 앉아 먹는 서양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앞서 1905년에는 이곳에서 을사조약이 조인됐다. 그때 미국의 부영사로 중명전과 담 하나 사이의 영사관에 있던 월라드 스트레이트라는 사람이 그 장면을 보는 광경이 그레고리 헨더슨 지음 ‘정동 소사’에 인용되어 있다.
‘새벽 한시반쯤, 나는 영사관 마당으로 바람을 쏘이러 나왔다. 인력거를 왈캉덜컹 챙기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내려가서 담 너머로 일본인들이 떠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하세가와의 인력거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때 울타리너머 달빛을 받고 서있는 내게서 불과 오십자도 안 떨어진 곳에서 일국의 운명이 결딴났다는 것은 거의 믿을 수 없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인구 1천2백만 명의 독립국가가 단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나라의 주권을 그렇게 날강도들 좋으라고 내주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조선 조정의 대신들은(고종이 그렇게 반대했음에도 조약을 체결시킨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 말한다) 조약에 서명하고 만 것이다’
1905년 미국과 일본이 비밀리에 가쓰라 - 태프트조약을 맺어 미국은 일본이 한국을 강탈하는 것을 묵인하고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을 묵인한 직후였다. 을사오조약의 체결을 말한 이 사람은 막상 조선을 보기좋게 배신한 자국 정부의 정책을 언제 알았을까. 그는 미국에 대해서는 무슨 비판을 했을까. 이 글은 조약이 체결된 뒤 한참 지나 쓰여진 것 같다. 영사관 직원이니 그도 가쓰라 태프트조약을 알았을 것이다.
이완용이 을사 ‘보호’라는 이름을 붙인 이 매국조약 직후 미국은 조선내에서 더 체제를 공고히 하여 일본과 어울렸다. 고종은 미국-일본간 이런 밀약이 있는 줄도 모르고 친서를 비밀리에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에게 전했었다. 어쩌면 미국의 도움이 가장 절실했던 시기에 도움 대신 등에다 비수를 꽂은 미국을 두고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헐버트가 뒤늦게 통렬한 비판을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가쓰라 태프트 조약이 알려진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다음인 듯하다. 미국 정치인의 한국인식이 어떤지를 알게 해주는 역사였다.
일제때 덕수궁이 축소되면서 중명전은 1915년부터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1960년대까지 외국인들의 사교장 '서울클럽'으로 이용되었다. 영국식으로 운영된 1층 클럽에는 탁구실과 도서실이 있었고 2층엔 식당이 있었는데 여자들은 도서실 말고는 출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1925년 화재로 벽면만 남았다가 복구하여 애초의 원형과는 다르다. 6.25때 이 건물은 ‘빨갱이 잡는’ 오제도 검사의 활동본부였다. 이후 영왕비 이방자 명의로 되었다가 개인 사업가에게 팔려 많은 사무실이 입주한 건물로 쓰였다. 최근 서울시가 사들여 앞으로 박물관으로 꾸민다고 한다. 현관 부분의 청색 바닥타일만이 옛 분위기를 전한다.
각국 영사관 다음으로 정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조선에서 기독교전도가 허락되지 않자 푸트공사가 편법을 써서 미국영사관 소속 의사로 데려온 사람이 선교사 알렌이었다. 그는 갑신정변때 개화파로부터 칼을 맞은 민영익을 살려내고 대궐과 실력자들 사이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동에는 선교사들 집, 교회, 이들이 설립한 학교가 자리 잡았다. 경신, 이화, 배재, 정신학교가 모두 정동에서 비롯되면서 지금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근대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집안에 갇혀있던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거리를 나다니는 여학생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 전문직장여성의 선배는 고아, 기생이기도 했다.
그밖에도 외국인학교가 지금 프란치스코회 자리에, 선교사들 회합장소인 유니온 클럽은 1920년대 말까지 미 대사관저 옆에 있었고, 일반 외국인들 사교장 서울클럽은 중명전에 있어서 서울에 와 있는 서양인들의 사교장구실을 했다. 서울클럽은 현재 장충동에서 값비싼 회원권으로 통하는 사교장으로 유명하다. 외국인 학교 2층 강당은 외국인 지역사회의 구심점이어서 일요일이면 무성영화를 돌리기도 하고 각종 모임이 열렸다.
1917년 서울에서 태어난 원일한(호레이스 언더우드; 전 연세대 이사) 씨는 1920년대의 이 거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성 밖 서대문에서 정동으로 오는 길에 유니온 클럽에 가서 정구 치는 것을 구경했다. 정확한 이름은 숙녀정구협회였다. 영국영사관은 지금은 태평로거리에 면해 있지만 당시엔 분명한 정동권역이었다. 외국인학교 2층 강당은 온갖 회합, 놀이, 음악회 등의 개최장소였다. 미국인인 우리는 러시아 공사관에는 출입하지 않았고 프랑스영사관은 이미 성밖으로 이사나간 뒤라 접촉없이 주로 영국 - 미국 영사관을 왔다갔다 하며 지냈다.’
‘큰 장을 보려면 소공동 화교상점에 갔다. 여기서는 보통 시장에서는 전혀 살 수 없는 것들도 팔았다. 생일날 같은 때 여기서 스위스 초컬릿이나 네델란드 치즈, 미국 베이컨 등을 사다 먹는 호사를 부렸다. 상사로는 싱거미싱이 지금의 신아일보빌딩에 있어서 일층은 사무실이고 이층 삼층은 상사원들 숙소로 이용됐다. 쉘 앤드 스탠다드 석유회사도 들어와 있었다. 백러시아사람이 몇 명, 바이얼린을 가르치던 체코사람도 한명 있었다.’
‘양장점과 양복점도 있었다. 벨기에사람인 마담 부팡이 이화학당 옆에 양장점을 내서 장안 신여성의 양장모드를 만들어냈고 양복점은 정동 제일교회옆 모퉁이의 이층집에서 중국인이 경영했다.’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로 1980년대까지 유명한 중국음식점, 음식재료상등 화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인 양복점은 연미복같은 예복도 만들었는데 1920년대에도 월부로 장사를 했다. 대학 졸업 가운, 박사가운은 YWCA 에서 지었다.
시인 노천명은, 정동 이화학당 있는 골목은 수목치마 저고리와 구두 등 당시 유행의 본산지였다고 썼다. 이화여대는 신촌으로 옮겨간 뒤에도 유행에 민감한 젊은 여성이 모이는 대표적 장소로 꼽혔고 지금도 신상품 옷의 일차 시장으로 여기서 반응이 좋으면 일단 성공을 예감한다는 의류회사도 있다. 그 뿌리는 꽤 오래된 것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로맨틱하게 말하기도 하지만 30여년 이 길을 보아오면서는 현실적인 출입이 더 절실해 보이던 곳이었다. 진짜 돌담길은 감시당하니 지나다니기 싫고 법원이 정동에 있던 시절 소년범을 실은 호송차가 지나는 길에 어머니인 듯한 여성이 힘없이 가로수 밑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것도 보았다. 건물모양조차 괴괴하던 법원은 시립미술관이 되었다. 난타공연을 보러오는 외국인들이 택시에서 내린다. 야트막한 학교담을 귀여운 여학생들이 용감히 뛰어내리기도 한다.
오래된 언론사들도 이 부근에 밀집돼 있었다. 20세기 초, 근대화와 맞물린 격동의 시기에 정동은 그 중심축이었다. 지금은 그 옛날의 정치적 긴장감이나 첨단 시류가 썰물 빠져나간 듯 잦아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 하려는 용틀임이 시작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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