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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 아닌 '흥(興)'으로 '21세기 한국'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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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 아닌 '흥(興)'으로 '21세기 한국' 봐야"

[인터뷰]<흥한민국><프랙탈> 펴낸 심광현 교수

"1990년대에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문화적 사건이었죠. 그후 우리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커졌지만, 발굴과 보존을 넘어선 현대적 해석은 전무한 편이었죠.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현재 우리는 붉은 악마와 촛불시위, 인터넷과 휴대폰가입률 1위, 한류열풍 현상을 목도하고 있지만, 이는 기존의 문화 해석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흥'에서 찾았습니다. 2000년대 들어 우리 사회에 새롭게 생성되고 있는 힘과 우리 전통문화의 원동력인 '흥'이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최근 '우리 문화의 정체성 찾기'와 '생태적 문화사회'를 지향하는 새로운 시각을 담은 <흥한민국>, <프랙탈>을 한꺼번에 펴낸 심광현(49)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심 교수는 "그간 우리의 자연과 전통문화를 발굴 보존하려는 노력은 많았지만, 현대적 해석은 '소박' '자연미' 정도로 헐렁했다"며 "서구의 근대미학으로 재단하지 않고 우리의 자연과 전통, 생활문화를 '흥'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은 지난 3일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흥의 미학이 위기의 지구화 시대에 새로운 민주적 생태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그를 인터뷰했다. 인터뷰어로는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가 나섰으며, 김 교수는 시종일관 날카로운 '질문'으로, 심 교수의 '낙관'을 의문시하며 두 시간의 인터뷰를 팽팽하게 진행했다.

김봉렬: 우선 <흥한민국>과 <프랙털> 저서 출간에 축하드립니다. 이번 저서는 그간 심 선생님의 작업이 문화사회와 문화정치, 문화교육, 스크린쿼터 등 문화운동의 현안에 관련되었던 것과는 상당히 달라 보입니다.

심광현: 예, 지난 20여년간 문화운동을 한답시고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지난 가을 연구학기를 얻어 그간의 활동을 되짚고 미래를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문화운동과 관련된 그동안의 제 행적이 문화운동단체에서의 조직적인 활동과 미학, 미술평론, 문화·영화연구등 연구 활동으로 나뉘더라구요.

전자는 85년 설립된 민족미술협의회, 88년 설립된 민족예술인총연합, 92년 설립된 문화정책연구소와 문예아카데미, 99년 설립된 문화연대와 영화인회의 등에서 주로 기획 및 정책책임자로 일했던 일들입니다. 후자는 연구회 형태의 동인활동인데, 83년 헤겔학회 참여, 85년 한국철학연구회 설립, 88년 미술비평연구회 설립, 92년 문화이론전문지 <문화과학> 창간 등에 참여한 일이 그것입니다. 80년대는 정말 바빴지만 90년대 중반에는 다소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가 90년대 후반부터 다시 바빠졌고, 여러 일들이 한번 하고 지나가기보다는 점점 누적되는 형태로 쌓이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일들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쓰는 일이므로, 생계는 대학 강사, 전시 큐레이터, 평론, 환경조형물 제작, 미술감독, 시나리오 및 전시 컨설팅 등의 일로 때워야 했기에 남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일을 접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문화운동과 NGO 활동, 문화운동정책 수립, 정부 문화정책 비판과 개혁, 창작과 비평, 철학과 문화연구 등의 연구 활동 등, 문자 그대로 여러 장르와 분야를 가로질러 이론과 실천의 두 축을 왕복운동 한 셈입니다. 그 와중에서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문화와 정치경제와 사회 각 분야의 상관관계에 대해 풍부한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경험들을 반추하여 하나로 꿸 수 있다면 복잡다단한 우리 사회와 문화의 역사와 미래에 대해 뭔가 심층적 연구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가 지난 가을 시간이 나서 두 권의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는 게 가능한가?**

김봉렬 : 효과적인 대담을 위해 주로 논쟁점을 제기하는 형태로 질문하겠습니다. 우선 이번 저서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과거나 현재 그 어느 한쪽에도 국한되지 않고 과거로부터 추적해 현재 문제에 시사점을 던지려는 통시적인 노력이고, 또 하나는 모든 분야를 가로질러, 정치, 경제적인 분석까지 포함해서 문화의 각 영역을 망라하여 다루고 있는 것인데요.

그런데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는 것 자체가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버럴하게 각 분야를 섭렵한다는 게 분과학문에 물들어 있는 현대 지식인으로서 과연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보면 각 분야별 지식을 차용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분야별 비(非)전문성이 이 책의 전문성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웃음)... 책의 시작이 어디인지, 동양적 전통에 따르면 한 분야에 집중해서 보편성을 얻을 수도 있는데, 모든 것을 축출해서 압축하는 건, 오히려 서양적인 귀납적 방식이 아닌가요?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도전을 하게 됐나요?

심광현: 정곡을 찌르는 지적인데, 비전문적인 여러 영역을 가로지르는 게 나의 전문성이 아닌가라는 역설에 대해 오랜 동안 고민을 해왔어요. 특히 92년 영문학자 강내희 교수와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을 창간하면서부터 시작된 고민이지요. 그 계간지 자체가 각 분야를 가로지르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잡지니까요. 나름대로 힘든 도전이라 생각하며 그걸 하다보니깐, 나 나름의 비결이랄까, 탈분과학문적 연구를 가능하게 할 어떤 방법을 발견한 것 같아요.

각 분과마다 큰 차이가 있는데 단지 차이만 있는 게 아니라 공통점도 꽤 많이 보이기 시작했지요.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 영화연구 등 각 학문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 중에는 겉보기와는 달리 상당한 공통점이 발견되기 시작했어요. 산술적인 의미에서의 공통분모가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얘기하는 일종의 "가족적 유사성" 같은 것 말이죠. 가족 구성원 모두가 공통분모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딸하고 엄마는 코가 닮았고 아빠하고 아들은 귀가 닮는 식으로 분절적인 유사성들의 연결망이 '가족적 유사성'입니다. 여러 분과학문들 사이에서 그런 "가족적 유사성"을 발견하는 재미로 <문화과학>을 계속 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서구이론을 수용하면서 우리 역사에서도 이런 점들이 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바탕으로 우리 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연구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제 전공이 미학인데, 매일 서구 미학을 소개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학생들의 '한국 미학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늘 답답"**

대학 교재는 대개 서구 미학만 소개하고, 정작 한국 미학을 다루는 책은 없습니다. 미학수업 후반부에 가면 학생들이 '우리 미학이나 동양 미학은 뭐냐'고 묻는데 할 말이 부족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래서 늘 답답하다가 2001년 문화관광정책연구원에서 한국의 문화정체성을 주제로 하는 정책보고서를 함께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와서 <한국의 미와 예술>이라는 장을 맡아 집필하면서 <흥한민국>의 골격을 잡게 되었지요.

생활문화부터 예술, 과학기술, 종교, 철학 등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작업이었는데 1년 동안 열 분 정도가 함께 연구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좀 튀는 글을 썼습니다. "가족적 유사성"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문화사를 분석하려고 했지요. 건축, 미술, 오락, 영화, 공연예술 등을 조선시대에서 현대까지 추적해 "풍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연결고리들을 찾았고, 근대화 과정에서 그것이 깨지면서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대중문화와 일상 속에서 오히려 과거의 전통적인 풍류와 흥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지난 1백여년간 우리 사회가 개방인가 폐쇄인가라는 비생산적인 이분법에 여전히 갇혀 있었다는 점도 부각되더군요. 또 민족문화의 정체성이 과연 존재하는가 아닌가라는 문제는 마치 개인을 두고 개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는 것처럼 허망한 얘깁니다. 누구든 각자 자신의 개성을 확인하면서 자신감을 가질 때 비로소 타자를 존중하고 교류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민족문화와 세계화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아직 전통과 역사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지만 이런 내용을 밝히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썼습니다.

김봉렬: 세미나, 포럼 등의 공동연구를 거쳐 나온 결론과 혼자 직접 뛰어들어 나온 결론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현대 학문의 철학적 전제, 여전히 근대사상의 지평속에 머물러 있어"**

심광현 : 대부분 공동연구를 해도 각자의 기본 전제와 방법론은 미세하게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양적으로는 합해질 수 있지만 질적으로는 모아지기 힘듭니다. 최근 들어 전통문화와 예술, 현대예술 등에 대한 연구가 수적으로 많아지기는 했지만, 각기 고립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족적 유사성과 같은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단독 연구를 해봤습니다.

미술사, 수학사, 문학사, 정치사, 경제사 등 대개 연구의 철학적 전제가 대부분 지난 150년 동안 수입해온 환원주의적인 근대철학과 사상의 지평 안에 머물러 있는데 그게 답답했습니다. 그런 점은 초기에는 우리 전통과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질곡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이미 서구의 현대 학문 자체가 20세기 후반에 들면, 탈근대 복잡성의 과학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하고 있고 철학 역시 그에 맞춰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탈근대 과학과 철학이 무조건 좋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근대철학의 배타적 이분법이 안고 있는 제한적으로는 생산적이지만 전반적으로는 독선적인 문제점을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전통 연구와 탈근대 과학의 접속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김봉렬 : "프랙털"(fractal)이라는 신과학의 개념이 <흥한민국>과 <프랙털> 두 권의 저서를 관통하는 중심 개념이고, 특히 <흥한민국>은 그 개념을 가지고 한국의 미와 예술 등 문화의 제반 문제를 분석하는데 응용한 책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프랙털"이란 개념이 생소해 잘 와닿지 않습니다.

심광현 : "프랙털"은 1975년 수학자 만델브로트가 발견하여 이후 카오스 이론 발전의 원동력이 된 새로운 기하학의 원리를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중등학교 시절에 배운 유클리드 기하학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하학입니다. 유클리드기하학은 삼각형, 사각형, 육면체 같이 쭉뻗은 직선으로 된 공간을 다루는 기하학입니다. 원이나 원뿔 같은 곡선이나 곡면의 경우에도 뒤틀리거나 휘지 않은 것만을 다룹니다. 꾸불꾸불한 선이나 면, 불규칙하게 휘어지고 주름잡힌 선이나 공간은 배제되지요. 그런데 정작 자연에서는 모든 선이나 면이 구불텅하고 접혀져 있습니다. 다도해의 해안선, 계곡이나 소나무, 난류, 구름 등이 그렇습니다. 프랙털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다룰 수 없거나 배제했던 바로 이런 불규칙한 선과 공간을 분석하기 위한 새로운 수학입니다.

***"잘 닦인 강남길이 '유클리드'이라면, 구불구불한 강북의 미로길은 '프랙털'"**

쉽게 비유하자면 유클리드 기하학은 잘 설계된 도시공간이나 고속도로를 다루는 기하학이라면, 프랙털 기하학은 도시 밖의 실제 자연,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다루는 기하학인 셈이지요. 도시 공간 중에서도 서울의 강남이나 일산 같은 신도시는 유클리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서울의 강북 같이 미로처럼 복잡한 구도시 공간은 프랙털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적으로 근대화 과정은 비정형적으로 보이는 자연의 프랙털 공간을 밀어내고 질서정연한 유클리드 공간을 건설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을 통해서 신작로를 내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과정, 논밭과 마을을 불도저를 밀고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과정이 바로 그렇습니다. 미로같이 복잡하던 강북의 공간들도 요즘은 그렇게 변하고 있지요.

질서정연하게 설계된 도시공간에 익숙해지면 미로 같은 복잡하고 불규칙해 보이는 공간을 싫어하게 되지요. 근대화과정에서 우리가 전통문화를 싫어하고 배척하게 된 것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프랙털 기하학을 전통문화를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도입하게 된 것은 바로 근대화과정에 내포된 이와 같은 배제의 과정을 되짚어 보기 위한 것입니다. 프랙털 기하학의 관점에서 보면 언뜻 보기에는 촌스럽고 무질서해 보이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자연경관에 어떤 "복잡한 질서"가 내재해 있다는 점을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치 만델브로트가 프랙털 기하학을 통해 다도해의 해안선과 난류에 내재한 복잡한 질서를 새롭게 찾아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김봉렬 : 그런데 프랙털 기하학 같은 신과학도 탈근대적인 학문이고, 그 배경이 됐던 리오따르 같은 철학자는 <차이>를 강조하는 데 반해, 생태학과 같은 신과학은 전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선생께서는 이렇게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원리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계신데, 대체 어떤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까?

심광현 : 철학에서 탈근대 사상을 말하자면 리오따르보다는 푸코, 들뢰즈, 데리다가 더 중심적인 이론가이지요. 이 사람들이 60-70년대에 했던 작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철학과 과학, 수학의 적극적인 조우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들뢰즈의 경우는 60-70년대 과학혁명의 성과를 철학사와 철저히 접목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위상수학 같은 새로운 수학, 새로운 생물학, 일리야 프리고진의 카오스 이론 등을 수용하여 근대철학을 해체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거죠.

뉴턴-데카르트에 기초한 선형적 인과론, 원인의 원인을 밝히면 세계 전체를 알 수 있다는 환원주의에 기초했던 근대과학을 깨면서 그 과정에서 근대철학을 동시에 해체하려는 것이었지요.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복잡성의 과학. 자기-조직하는 자연에 관한 이론은 만물을 고정된 실체로 보는 대신 역동적인 과정과 연결망으로 보게 해주는 눈을 제공합니다. 들뢰즈는 누구보다도 그와 같은 탈근대 과학이론을 가지고 철학사를 철저히 재구성하려 했습니다. 그런 눈으로 들뢰즈는 근대철학이 "죽은 개" 취급을 했던 스피노자를 새롭게 살려낼 수 있었지요.

한편 그 후배라고 할 리오따르가 "차이"를 강조했던 것은 차이 자체를 고립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정된 동일성 대신에 다양한 차이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분산되고 또는 적대를 이루는가 하는 구체적 프로세스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라는 책 역시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생태학적인 시스템적 전체성은 그 하위 부분들의 사이의 차이, 각 차이들의 복잡한 연결망, 연결망의 순환이라는 개념이 없이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생태학적 전체성은 그냥 뭉뚱그려진 총체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차이들의 연결망이 어우러진 전체성입니다. 또 부분들과 전체는 서로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프랙털, 차이의 철학, 생태학적 연결망의 개념은 서로 결합될 수 있고, 또 결합되어야만 각기 제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전통을 보니. 근대 철학이나 유클리드 기하학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보석처럼 빛나는 점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구불구불한 우리나라 산하와 자연풍경이 프랙털 기하학의 관점에서 보니, 마치 구름 사이로 해가 비치듯, 빛나는 풍경이 되고, 유클리드적인 서구의 멋진 들판이 오히려 황량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김봉렬 : 개념적 틀의 변화에 의한 건지, 나이를 드심에 따라 애국심이 발로해서 그런 것인지 또는 세상의 복잡성을 알게 되면서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인지?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웃음)

심광현: 저는 어린 시절에 그림을 그렸고, 청년 시절에는 미술평론을 했기 때문에 항상 풍경을 좋아했고 관찰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 풍경들이 매우 매력적인데 그간 배워온 서구의 근대미학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서 항상 궁금증이 있었어요. 갑갑해하다가 90년대에 들어 문화연구를 하면서 새로운 이론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서구의 탈근대 과학에서 우리 경관의 미학적 특성을 밝혀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과거의 개인적 경험과 최근의 이론적 탐구가 일정하게 수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하필 '프랙털'인가**

김봉렬: 프랙털, 퍼지(fuzzy) 이론이 등장하던데, 그러나 이것도 역시 20세기에 우리가 서양의 근대적 개념으로 전통을 해부하려고 했던 문제점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 아닌가 싶군요. 서양의 도구로서 동양의 도를 분해해 보려고 하는 것은 견강부회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또 복합성이나, 비정형성이라는 말도 있는데 왜 굳이 프랙털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흥한민국>에서 방법으로 내세운 <동서도기>의 취지와도 상반되게 비춰질 수도 있다고 보는데요, 프랙털 이론이 정말 동양사회를 연구하는 데 적합한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심광현: <동서도기>라는 제 관점은 <동도서기>나 <서도동기>와는 달리 서양의 도로 동양을 해석하거나 그 반대의 방법을 취하자는 것이 아니라, 동서문명의 철학과 과학을 함께 마주쳐보자는 겁니다. 서양이 넘치는 부분도 모자란 부분도 있고, 동양이 모자란 부분도 넘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한 건 나누어주고 모자라는 것은 취하자는 겁니다. 프랙털 이론은 단지 복잡하고 비정형적으로 보이는 외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수사학"이 아니라 복잡성과 비정형성 속에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과학입니다. 울퉁불퉁한 소나무가 왜 아름다운지, 구부러진 시골길과 산하가 왜 아름다운지를 그전에는 설명할 수가 없었고 다만 소박하게 느끼라는 식으로만 말했지요. 그러나 구체적인 분석을 못하면 경관과 전통의 현대적 의의를 짚어내지 못하고 잘 보존하기도 어렵지요. 촌스럽다고 무시하게 되니까요. 물론 프랙털 이론이 모든 걸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동양의 기학과 풍수지리가 결합되어야만 프랙털 이론도 힘을 받습니다.

들뢰즈와 가따리 같은 경우는 10여년간 함께 연구해서 <천개의 고원>(1980)을 집대성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양에는 그 이론으로 분석할 문화적, 예술적 실천의 사례가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서양문화는 근대과학과 유클리드적인 공간문화에 기초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분석 사례로 지목한 것은 징기스칸과 인디언의 문화였습니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은 알았지만 한국을 몰랐습니다. 들뢰즈가 프랙털한 한국문화의 사례를 알았다면 70세에 자살(1995년)하지 않고 틀림없이 새 책을 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웃음).

서양은 20세기 후반에 들어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발견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문화적 실천은 별로 없습니다. 한국의 경관과 전통에서는 프랙털한 문화적 실천이 풍부했지만 그것을 과학적으로 규명할 이론을 구비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지요. 물론 프랙털한 이론은 분석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뿐이지요. 우리나라 경관의 특성과 한의학, 음식문화 등을 모두 설명하려면 서양과학을 모두 동원해도 모자란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 실천한 것"**

김봉렬: 설명을 들어도 아쉬운 것은, <심광현 체계>의 독자성이라는 게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독창성이라는 것만이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독자적인 이름을 붙이긴 힘들었습니까?

심광현 : 물론 오직 저만이 창안한 이론이 있었다면 좋았겠지요. 비유하자면 들뢰즈의 경우는 자기 철학의 고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굳이 <리좀>(rhizome)이라는 새 용어를 고안했습니다. 그런데 <리좀>은 프랙털 원리에 대한 수사학적 비유이지 그 자체가 과학적인 원리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많은 혼란을 야기했다고 봅니다. 그가 <천개의 고원>의 핵심 방법으로 사용했던 프랙털 과학, 자기-조직화의 과학을 좀더 전면에 부각시켰다면 그의 주장이 더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제가 한 일은 풍류의 미학, 생태학, 프랙털 과학처럼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던 원리들을 하나로 결합시킨 데 있기 때문에 이를 <프랙털 흥의 미학>, <프랙털 생태학>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자칫 고유의 브랜드를 내세우려다 보면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혼동시킬 우려가 있다고 봅니다. 들뢰즈 역시 서로 무관하게 버려진 여러 철학과 원리들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지, 그가 새롭게 창안해낸 것은 별로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 이번 작업이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을 우리 문화의 해석에서 실천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봉렬: <흥한민국>에서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연구를 상당히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결국 많은 사람의 연구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대체로 각 장르별로 한 두 사람이 거론됐고, 선택은 저자의 생각과 유사성이 있는 것을 선택했는데, 각 분야에서 심 선생이 선택한 해석들이 어느 정도의 신뢰와 권위를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건축분야에서는 최근 한신대 철학과의 김상일 교수 논문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건축적 전문성이 부족한 부분을 천착하기보다는 그것을 철학적 분석 도구를 끌어다 메꾸려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음악, 미술 등 다른 분야도 사정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개별연구들을 선택하고 판단하신 기준은 무엇이고, 응용된 연구 성과라는 것이 각 전문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신뢰를 받고 있는지요?

심광현 : 사실 이 책은 세 권 분량이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두 권만 출간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각 분야의 연구 성과를 분석하고 기준을 추출하는 작업이 500매 정도 있었습니다. 구한말 외국인들의 연구에서부터 최근의 연구까지를 비판적으로 선별하는 작업에 <우리 문화의 여러 해석들>이라는 별도의 제목을 붙여 <흥한민국>에 수록하려 했다가 분량이 너무 두꺼워지고 앞 부분과 난이도가 맞지 않게 어려운 부분도 많아 삭제했습니다. 금년 내에 별도 책을 출간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사실 이 작업을 통해서 국내의 미학과 예술사를 연구하는 모든 분들과 논쟁해보고 싶었습니다(웃음) 조만간 그럴 기회가 주어지길 바랍니다.

***"미학은 너무 감상자의 태도에 집착하는 것 아닌가?"**

거기서 중심 범주는 한국 미학의 정체성 문제입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나 고유섭 등에 대해 시비를 걸고 우리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대다수의 편견과 오해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지요. 저는 우리나라에서 미학이 대학에서는 상당한 대접을 받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아무 역할도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철학과 예술사, 예술비평, 문화사에 대해 간섭하고 개입하고 비판하는 것이 미학의 역할인데 그러질 않고 점잖게 상아탑에 고립되어 있는 게 우리 미학계의 현실입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거지요.

김봉렬 : 평소 미학에 대해 불만이 있었습니다. 미학은 너무 감상자의 태도에만 집착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건축 예를 들면, 건축의 논리는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아야만 옳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건축은 그 당시의 환경 조건과 집지으려는 사람의 여러 생각들을 가지고 만들어내고 한건데, 나중에 감상자의 논리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어요. 부석사의 대석단 예를 들어보지요. 웅장하고 정교하여 대단한 감동을 주는데, 이런 기법이 조선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노예들을 동원하여 집을 지을 수 있는 사회와 임금 노동자를 고용해서 집을 짓는 사회의 차이이지요. 그런데 이 차이를 보지 않고 부석사에서는 흥이 보이고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생산적 논리로 보면 조선시대 것이 더 생산적입니다.

그런데 당시 집을 만든 자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천년 후의 감상자가 보는 시각이 과연 당대의 건축을 해석하는 데 옳은 입장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학도 개별 예술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거대담론인데, 거대담론의 문제는 대개 실제와 유리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술사의 경우 거대담론의 전형은 시대 양식에 관한 규정에서 나타납니다. <고딕> 양식만 해도 유럽에 2만개 정도의 고딕교회가 남아있는데 과연 만든 사람들이 그 양식을 충족키 위해 만든 건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추상적 개념이 실제에 딱 들어맞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실체를 설명하지 못하고 과거에 대해 거대담론을 시도할 경우 실제와의 괴리나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심광현: 그동안 거시담론이 문제가 많았기에 불신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어느 분야에서든지 미시담론과 거시담론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저는 오히려 그 충돌이 생산적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팽배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개별 장르별 예술사 연구는 엄청난 분량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반해 <한국미학>이라는 거시담론은 고유섭이 책 한 권을 저술한 이후 완전히 공백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심화된 세계화, 다시금 거시담론 활성화 필요"**

20세기 중반까지 거시담론이 너무 지배하다 보니 60년대 이후에 프랑스 중심으로 미시담론에 대한 연구가 확산되었지요.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 미시담론만 횡행하는 상황입니다. 지나치게 한쪽이 모든 걸 지배하는 건 편향된 시각을 야기합니다. 더구나 지구화 과정이 심화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다시금 거시담론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까 말했듯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아니겠습니까? 미시담론은 거시담론을, 거시담론은 미시담론을 자극합니다. 그래야 학문 전체의 발전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미학은 아무래도 개별 작품의 분석보다는 보편적이고 일반화가 가능한 어떤 원리를 찾기 때문에 개별 생산자의 논리보다는 일반 수용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예술계는 지나치게 전문가와 생산자 중심으로 협애화되어 있다는 겁니다. 또 식민사관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고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기도 하고요. 때문에 각 장르간의 소통은 물론, 전문가-대중과의 소통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잇지요. 우리문화의 정체성 문제가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이처럼 각 예술장르-미학, 전문가-대중의 소통이 부재한 탓이라고 봅니다. 때문에 지금은 미학적 거시담론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봉렬 : 일제 이후로 한국학의 초점이 한국의 미가 뭐냐. 간략하고 포괄적인 거대한 개념을 찾아내려는 데 집중되어 온 듯 합니다. 이화여대의 최준식 교수도. 프랙털이라는 용어는 안 썼지만, 비정형적인 즉흥성을 우리 미학의 핵심이라고 설명하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정식을 만드는데 한정식은 이런 것이다 라고 규정을 한다면, 거의 모든 음식점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규정에 따라 똑같은 메뉴, 똑같은 맛을 내야 하니까요. 하지만 한정식은 시대적, 계층적, 지역적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근본을 추출할 수 있겠지만, 결국 음식문화 발달은 보편적인 맛이 아니라 미세한 맛의 다양한 제공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요? 학자들의 역할이라는 것이 동일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의 예들을 찾아주는 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흥과 한이 샤머니즘적이고 민중적인 것이라면 무심은 어떻습니까? 프랙털이라는 걸 말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흥이라는 걸로 포장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게 정당하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전통에서는 '한'보다 '흥'"**

심광현: 흥으로 모든 것을 도배하려 한다면 비판받아 마땅하겠지요. 제가 말하려는 것은 흥-한-무심의 미적 범주가 동북아 삼국의 풍류미학의 기본 범주라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우리 전통에서는 흥의 범주가 더 주조를 이룬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그동안 많은 이들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한의 범주를 중심으로 이해해 왔던 관행을 비판하려 한 것입니다. 흥-한-무심의 범주는 국문학자 신은경씨의 <풍류미>(99년)라는 박사학위논문을 통해 수용한 것입니다. 당시 그 책을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전통을 서구미학의 잣대로만 분석해온 과거의 태도를 과감히 버리고 동북아 삼국문화의 공통점을 유불선 3교의 역사적 변화에서 찾아내어 <풍류>라는 개념을 전경으로 이끌어낸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신은경씨는 우리 전통문화의 미학적 기본 범주가 흥과 한의 교차에 있다고 보았는데, 저는 그 중에서 흥이 상대적으로 주조를 이룬다고 본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일본의 미학은 한과 비애에 가깝고, 중국은 무심 쪽에 상대적으로 더 기울어 있다고 보았지요.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그동안 한의 미학이 우리 전통의 중심축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냐는 의문이었습니다. 조선 중기까지는 흥이 주조였고, 무심과 한이 그 위에 결합되어 있었다면, 임진왜란 전후부터 숙종 때까지 사회가 피폐해지면서 한이 중심 범주로 떠올랐다가, 영정조 때 다시 흥의 문화가 발흥했다가, 이후 200년 동안 다시 사회적 붕괴와 더불어 한의 문화가 지배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흥의 문화의 르네상스가 일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프랙털 흥의 미학>은 철저하게 역사-지리적인 시각을 유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동북아 삼국의 미학의 차이는 음식 문화의 차이와도 간접적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한 "요리 삼각형"의 틀로 비추어 보면, 날 것-구운 것-삭힌 것으로 구성된 요리 삼각형의 전체를 다 채울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양과 중국은 불로 구운 것 중심이고, 일본은 날것 중심이지만 우리는 그 모두를 채우고 있고, 특히 그중에서도 삭힌 것이 우리음식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자연환경의 차이와도 연결됩니다. 사계절의 변화-주름진 산하와 물길-프랙털-삭힘-흥의 문화생태학적 연결망이 포착되어야 합니다. 근대과학은 공간을 무시하고 시간을 강조해왔지만, 이제는 시간-공간 복합체를 주시해야 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역사적 관점만이 아니라 역사-지리적 차이들의 궤적을 탐색해야 합니다. 일제시대의 유명한 미술평론가 윤희순은 <풍토-양식>이라는 문제틀을 이용하여 한반도의 사계절 변화와 청명한 날씨가 생태학적 다양성, 주거지역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의 원천임을 강조한 바 있지요. 제식으로 말하자면 <역사지리적 문화생태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김봉렬: 흥과 한의 차이는 계층적인 문제와도 연관이 있지 않았나 싶군요. 양자는 거의 공존해온 정서일거라는 생각인데요. 그런데 그게 현대 한국에서도 적용이 될 수 있습니까? <붉은 악마>와 같은 경우는 가능하겠지만요. 그러나 요즘의 아파트 날림 공사, 스피드한 건설, 유행 따라잡기...이런 것들도 다 흥으로 본다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요. 오히려 흥이 없어야 잘되는 것이 아닐지?(웃음)

심광현: 재미있는 지적입니다. 신은경씨도 잘 분석했듯이 한이 소외계층, 억압받는 민중의 문화에서 더 많이 발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흥한민국>의 2,3장에서 집중 분석했듯이 저는 우리 민중문화의 기저에는 흥이 중심범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봅니다. 상갓집에서 웃고 떠들고 노는 생활문화가 그러합니다. 한은 흥이 억압되는 역사적, 사회적(계급적) 조건의 산물이지 한이 우리 경관과 문화의 기본 축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또 미학이 세상만사를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요. 가치론적으로 보면 진선미의 결합방식이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프랙털-흥>, <흥의 생태미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도 바로 흥과 생태윤리적인 것의 결합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자율적이면서도 생태학적 연결망을 존중하지 않는 흥은 프랙털 흥이 아니라, 광기에 사로잡힌 흥분상태일 뿐입니다. 오늘날 도처에서 난장을 치는, 개발지상주의-천민자본주의적인 소비문화의 광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문화의 긴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미학은 신라 시대 최치원이 말한 풍류적인 생태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선 선(仙)자는 실제로 "산사람"이라는 뜻인데 한반도가 대부분 산이라 산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이 때문에 풍류도를 선도(仙道), 또는 국선도(國仙道)라고도 합니다. 험준하지 않으면서 주름져 양분이 많고 물이 많아 생태학적 다양성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기에 거기서 살아온 산사람들이 산, 물, 식물, 동물, 바람과 비와 함께 순환하는 가운데 경험한 생태학적 윤리와 미적 경험이 우리 조상들의 몸에 배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미적 경험에서 프랙털 흥의 미감이 고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지적하신 개발지상주의적인 광기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우리 전통문화와 경관에 내재되었던 프랙털 흥의 생태미학을 하루 속히 재활성화해야 합니다.

***"'한국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우스운 결론 초래할 수도"**

김봉렬 : 한국적 정체성을 거론할 때 항상 문제되는 게, 오리지낼리티 , 유닉크니스를 자꾸 찾으려고 하는데 저는 그게 바로 불만입니다. 예를 들면 건축 경우, 오리지낼리티를 찾다보면 우스운 결론이 나오는 게, 조선시대 건축은 유교라고 우리 것이 아니고, 고려 건축은 불교라 우리 것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거슬러 가다 보면 결국 청동기 시대의 성황당과 고인돌만 남는데, 이 고인돌은 또 세계적인 것이라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또 정체성을 찾을 때는 동북아 삼국을 항상 비교하는데, 과연 우리나라가 중국과 비교대상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분명히 다르지만, 우리가 중국과 어느 정도 차별화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우리 전통문화가 중국문화라는 거대한 세계의 한 부분으로 인정될 수는 있지만 문화적 양의 문제로 보면 그 전체와 대등하게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로마제국과 잉글랜드를 대등하게 비교하는 무리와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한국의 정체성이 굳이 고유함에 있는 것이냐는 것은 의문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인류가 모두 다 사랑을 하고 있는데, 한국인의 특성이 굳이 사랑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강박관념이 아닐지? 혹 문화적 상품성을 찾기 위해 고유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지?

심광현: 한국의 정체성 문제는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것입니다. 80년대에 미술평론을 할 때 외국 미술가들과 많이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한국을 찾았던 프랑스, 미국, 일본 미술가들 얘기가 한국은 뭔가 다르다. 경관도 틀리고 음식도 특이하다고 하면서 감탄을 연발했었습니다. 퐁피두센터 창립자였던 퐁튀스 훌텐은 <비원>을 가보고 나서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심취했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을 가졌고 90년대에 들어 문화연구를 하면서 이 문제를 규명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저도 80년대에는 국제주의자라고 자부했었는데, 그 사이에 외국을 다녀 보니 점점 더 다른 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개성과 자존심 있는 민족이 타민족의 개성과 인격 존중할 수 있어"**

99년인가 철학하는 탁석산씨가 <한국문화의 정체성>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적이 있고 지금도 그 책은 스테디셀러가 되어 있습니다. 반가워서 책을 사 봤는데, 한국문화의 정체성이라는 게 따로 없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게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결론이었는데, 일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 문화와 다른 문화의 차이를 무시하고 그저 편하게 살자는 식의 내용이어서 좀 허망하더군요. 제가 50년 산 경험으로는 한국문화, 중국문화, 일본문화가 서로 다르고, 같은 유럽문화라 해도 영국, 독일, 프랑스가 문화적으로 너무나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개인의 경우에도 각 개인은 각기 개성이 있고 그에 따른 자신감을 가지면서도 충분히 다른 사람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개성과 자존심이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타인을 무시하거나 억압하지요. 인종이나 민족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책에 자세히 썼지만 민족문화의 역사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관습은 아직도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식민지 시대와 냉전적 종속의 근대적 관행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폐쇄적이고 복고적인, 또는 패권적인 민족주의에도 반대하지만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탈민족주의와 국제주의에도 반대합니다. 우리 민족, 민족문화,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 개념이 반드시 절대적 실체의 동일성, 영원불멸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민족이나 정체성 개념은 실체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아예 없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가족적 유사성"의 개념처럼 차이들의 연결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럴 경우 비생산적인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 차이들의 연결망 자체가 역사-지리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분법적으로 실체가 있다 없다가 아니라 차이들의 역사-지리적 궤적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유럽문화를 말할 때는 모두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문화의 역사-지리적 차이들을 강조하면서 동북아시아 문화를 말할 때는 왜 중국, 한국, 일본문화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매번 여러 요인들이 외부로부터 들어와 차이들을 다양하게 만들지만, 차이들의 일정한 연결망의 역사적 흐름 자체는 버릴 수가 없이 각 민족의 현재 시점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마치 유전자의 히스토리가 있듯이 문화적 차이들의 역사적 궤적은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어떤 문화를 영위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궤적들과 현재 외부로부터 오는 요인들, 그리고 우리가 새롭게 창안한 것들의 역사적 네트워크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한국문화의 정체성 자체를 부인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런 위험성은 폐쇄적 민족주의자들의 어리석음만큼이나 위험합니다. 개항 이래 130여 년 간 우리 사회는 두 가지 위험을 충분히 경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부분 이분법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이런 이분법이 우리의 외교정책을 어렵게 만드는 근본 요인이고, 과거사청산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분법을 버리지 않으면 중국이나 일본이 고구려사 문제나 독도 문제를 야기하는 배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대처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문화의 역사-지리적 궤적을 매번 새롭게 해석하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동안, 우리는 실체론/해체론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손을 놓고 있었던 거지요. 통일문제나 지역주의의 문제도 이런 문화적 차이들의 역사-지리적 궤적과 접합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하루 속히 한국사 연구의 방법론 자체를 쇄신해야 합니다.

김봉렬 : <흥한민국>을 보면서 애초에 인터내셔널 소셜리스트로 출발했던 심선생께서 민족주의자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몇 개의 검증되지 않은 자생성 이론, 특히 풍수지리이론을 굉장히 옹호하는 듯한 데에서 우려가 들기도 합니다. 보스니아 쪽에도 풍수지리와 너무 똑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떻게 보면 풍수지리적 개념과 실천이 다른 나라에도 많이 있을 수 있는데, 풍수지리가 한국적인 것이라고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중국 양자강 유역에도, 우리나라랑 비슷한 구역 있어 풍수지리가 발전했다고 보는데요. 흥이라는 것도 우리만이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당연히 어느 나라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나치게 자생론을 강조하시는 것이 아닌지?

***"한국의 역사-지리적 궤적, 중국과 일본과는 확실히 달라"**

심광현 : <흥한민국>이라는 책 제목만 보고도 그동안 알고 지낸 주변의 동료들이 깜짝 놀라는 것 같습니다...(웃음). 저의 최근의 연구는 지난 세기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공부했던 진보적 이론들의 한계를 역사-지리적 차이들의 궤적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고, 그로부터 생태학적 지혜를 끌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실체론적인 민족주의에 빠지기 않도록 국제적이고 지구적인 관점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책에서도 밝혔듯이 프랙털이나 흥은 보편적인 개념입니다. 비슷한 역사-지리적 조건을 갖춘다면 어느 민족이나 집단도 프랙털 흥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우리 문화의 정체성으로 프랙털-흥을 부각시킨 것은 우리의 역사-지리적 조건이 중국이나 일본, 다른 나라들과는 상이한 궤적을 가져왔다는 점 때문입니다.

역사-지리적 궤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문자로 표기된 서구 모더니티가 있고 나머지는 이식-변주된 것들이라는 시각을 벗어나 여러 가지 근대성들의 역사-지리적 궤적들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근대와 중국의 근대, 한국의 근대는 그런 점에서 공통점도 있지만 명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대문자 자본주의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유형의 자본주의가 있듯이 말입니다.

풍수지리적 실천이 중국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발원한 것이라는 자생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저는 다시 한번 문화적 실천의 역사-지리적 차이들의 궤적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경관학적 관점으로 봐서도 중국과 한국은 분명히 다릅니다. 중국에도 산이 많지만 뾰죽하고 괴기한 기암절벽이 많은데 반해 중국 땅의 중심은 아무래도 넓은 중원 평야지대입니다. 인구의 대다수가 평지에 살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산이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고 있고 산도 중국처럼 험준하지 않고 사람 살기 좋고 물이 많아 생태학적 다양성이 풍부합니다. 따라서 이론으로는 몰라도 실천 면에서는 분명히 한반도에서 풍수지리가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탁 트인 중원 평야에서는 풍수지리적 실천방법이 별로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자를 누가 쥐고 있느냐가 문제인데, 우리의 실천을 중국사람들이 이론화시킨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징기스칸 유목제국의 특성을 철학적으로 이론화시킨 것이 유목민의 경험과 무관한 현대 프랑스의 들뢰즈였듯이 말입니다.

***"정부, 기업, 지식인들이 풍부한 전통을 체계적으로 깔아뭉개고 있어"**

지금 문제는 서구식 근대화 150년 동안 정부나 기업, 지식인들이 이런 풍부한 전통을 체계적으로 밀어버려 왔다는 겁니다. 유홍준씨 말처럼 전 국토가 박물관인데 이를 깔아뭉개고 있다는 것이지요. 정말 유네스코가 나서서 제동을 걸어야할 사안이라고 봅니다.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어떤 미래인가가 문제이지요. 이런 식의 개발주의를 밀고 나가면 지구의 미래를 단축하는 데 우리나라가 가장 크게 기여하게 될 겁니다. 지난 100년 동안 세계 평균온도가 0.75도 올랐는데 우리는 1.5도가 올랐다고 하지요. 개발주의적 소비문화 대신에 생태학적인 풍류적인 태도, 프랙털 흥의 태도를 가지면 첨단 웰빙 기계 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지표면의 4/5가 웰빙의 조건 갖추고 있습니다. 생태학적 방식으로 문화를 즐기면 지구재앙의 위기를 막는데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김봉렬: 결국 심선생의 목적은 21세기 한국에서 프랙털 흥을 통한 문화적 르네상스를 추구하시는 거라고 볼 수 있는데, 생태계 파괴와 지구공멸도 문제지만, 듣고 보니 한국문화 정체성을 차이들의 역사-지리적 궤적에서 찾아내는 게 더 시급한 과제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현재 우리 사회는 농촌을 완전히 버리면서 과격한 도시화를 집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농촌이야말로 역사-지리적 보물창고인데 말이지요. 우리 지식인들은 너무나 세계화가 돼서 다들 유학 갖다 와서 전통하면 촌스러워하고 외면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고 속에는 탈코리아라는 태도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개발주의에 파괴된 환경과 지식층의 몰지각한 자세는 심선생이 제시하려는 <흥한민국>과는 상반된 현실입니다. 과연 이런 현실 조건 속에서 흥이든 한이든 무심이든 어떻게 생태학적 풍류가 실천될 수 있을까요?

심광현: 바로 그런 열악한 현실 때문에 제가 <프랙털> 이론을 전경으로 부각시킨 겁니다. 우리 지식인이나 정부, 기업 모두가 탈코리아화, 도시화에 매몰되는 이유가 그동안 무조건적인 빠른 서구화, 첨단 서구화를 지향해 왔기 때문이지요. 저는 오히려 바로 그 세계화의 논리라는 입장에서 논쟁해 보자는 것이지요. 유학파, 관료, 기업들 모두가 세계화되려면 이미 서구가 버리고 있는 폐기품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세계화를 하려면 서구의 첨단과학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적 궤적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접목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전통과 자연을 버리는 태도야말로 세계화에 반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2만불 시대로 가고 싶으면 이제까지의 서구식 근대화라는 낡은 태도를 버리고 탈근대적인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복잡성, 카오스의 과학과 전통의 만남은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를 질적으로 성장하게 하는데 윤활유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 이와 같은 점에서 대중적인 문화생태학적 캠페인이 필요합니다. <문화연대>와 같은 시민단체가 매체, 공간환경, 문화교육, 문화유산의 영역에서 이런 문제들을 계속 제기하고 있습니다. <흥한민국>은 이런 작업들을 좀더 발본적인 의미에서 철학적으로 되새겨보고, 새로운 각도에서 대중적인 문화적 실천을 일깨우고 싶은 마음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김봉렬 : 설명 잘 들었고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실천을 통해 21세기 한국문화의 르네상스를 앞당기는 데 기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심광현 : 날카롭고 논쟁적인 질문을 많이 제기해 주셔서 제 취지를 좀 더 선명하게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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