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12>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 <12>

정동 산책 1 - 정동에서 공사관 거리로

덕수궁 옆 정동은 조선왕조말의 정치사적 긴장과 숨가쁜 근대화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1884년 이래 여러 외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덕수궁을 정점으로 주변에 각국 공사관이 들어서고 석조전, 중명전 같은 서구식 대궐건축이 시작됐다. 선교사들이 앞장서 들어온 정동일대에 신식 학교, 예배당, 집과 클럽, 상사 등이 생기고 여기서 발원된 역사는 20세기의 문턱을 넘으며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근대사의 장을 이뤘다.

그새 많은 세월이 흘렀다. 모든 변화의 핵심이던 고종임금의 덕수궁은 빈집이 되고 원위치에서 16미터나 뒤로 물러나 면적도 줄었다. 덕수궁을 에워싸고 충돌하던 외국 세력은 러시아와 영국, 옛 미국대사관 정도가 남았다. 학교와 교회도 오래된 일부가 남아 있긴 하지만 새로운 건물들 틈에 가려 잊혀질 정도다.

전에 없던 극장과 미술관이 생기고 은행나무 가로수로 넓혀진 길, 하지만 한발자국만 뒷골목으로 들어가 보면 곳곳에 그 당시의 낌새가 숨죽이고 있는 듯한 오랜 자취들을 보게 된다. 그것은 정확하게 조선개국 직후부터 대한제국까지, 일제의 손길이 본격화 되기 이전 한국의 의지로 된 근대화의 장이라는 기념비적 의미를 지녔다.

***정동 또는 황화방**

정동의 이름이 조선을 개국한 이태조의 서울왕비 신덕왕후 강(康)씨의 무덤이 있던 데서 온 것임은 잘 알려져 있다. 1397년 강비가 죽자 태조는 규범을 넘어서까지 성안인 이곳에 강비를 장사지내 정릉을 만들고 흥천사라는 170칸 규모의 큰 절도 세웠다.

왕권계승을 두고 강비의 아들들과 피비린내 나는 일전을 벌였던 함경도 왕비의 아들 태종은 1409년 이태조가 죽자마자 정릉을 파괴하고 성밖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장했다. 이때 정릉에 장식됐던 돌조각은 청계천 다리 석재가 되고 하수도 속에 파묻혔다가 2004년 청계천 복원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이 드러났다.

왕실의 원찰 흥천사는 그 뒤 역대 임금들에 의해 보살펴져서 부처사리를 봉안한 오층탑과 범종이 있는 조계종 본사가 되어 대사찰로서 위용을 지녀왔다. 그러다가 유교가 극성한 지배이념이던 중종 때인 1510년에는 불교세력을 질시한 유생들이 불 질러 없애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또 400년이 지난 19세기 말에는 미국 개신교 세력이 이 일대를 불 지른것 보다 더하게 완전히 다른 기독교 세력권 일색으로 변화시켰다. 선교사의 활동중심지이던 이 일대에는 지금도 정동교회를 위시해 새문안교회, 프란치스코회, 수녀원, 구세군, 중국인 기독교회, 영국성공회 등 온갖 기독교회가 들어서 있다. 역설적이게도 유교의 흔적은 빈 대궐로 남고 불교의 자취는 흥천사 종 하나가 문화재로 덕수궁에 가 있을 뿐이고, 건물은 문화재 대궐 말고는 모두 서구식 빌딩이 들어차 있다. 무당집 정도는 어디 한구석에 있을지 모른다.

정동 일대를 지칭하는 또 하나의 이름은 황화방이다. 조선조 내내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은 무악재를 거쳐 서울에 들어와 이곳 서대문일대에 숙소를 마련하고 머물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사신을 맞고 보내던 자리의 영은문을 헐고 지은 1897년의 독립문은 가장 최초의 서양식 건축이었다. 독립문을 시공한 건축가 심의석(沈宜錫)이란 이름이 떠오른다. ‘1902년 광화문 비각(고종의 황제즉위를 기념한 비각)을 지었고 한말에 건축으로 서울을 변화시키려 했다’는 것밖에 아는 게 없지만 고종황제가 천제를 행한 덕수궁 앞 원구단(1897년)의 용을 새긴 세개의 돌북(1902)도 같은 시기에 광화문 비각과 함께 그가 지었을지 모른다.

정동에 각국 영사관이 들어서기 전 외국인은 성안에 거주할 수 없다는 조선법에 따라 일본은 남산아래, 중국은 명동에 영사관을 세웠는데 1880년부터 고종이 외국인의 성안 거주를 허락하면서 이곳이 외국인, 특히 서양인 집단 거주지가 됐다.

***일만 몇천량에 산 미국, 영국영사관 터**

1883년 서울에 영국영사관 터를 물색하러 온 주일본 영국영사관 직원 애스턴이 쓴 편지 귀절은 서양외교관들이 서울에 와서 자리잡는 데 어떤 조건을 바랐던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서울 성안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쯤에 자리잡을 것, 덕수궁과 외무부, 그리고 일본 영사관과 가까운 곳이어야 할것.’(J.E 호어 지음 ‘영국대사관 소사’)

애스턴은 마땅한 집을 판다는 사람이 없어 애를 먹다가 덕수궁 옆 자신이 묵고있던 집을 신석휘 또는 신협희라는 사람으로부터 안채 사랑채 별채 해서 6동의 기와집을 1만 5백량에 사들였다. 애스턴에 따르면 ‘그만한 값도 거의 헐값에 사들인 셈’으로 그 당시 서울 집값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고 적혀있다.

‘이미 미국은 정동에 대지를 사들였고, 계속해서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영사관이 서울에 생길 예정이라 그들이 도착하기 전 빨리 서울의 영사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동 덕수궁 주변은 원래 왕실소유 땅인데 재산권이 왕실 여러 측근들 손에 넘어가 있는 것들이 많았다. 이곳은 가파르지만 아주 상쾌한 언덕을 끼고 있는데 서울이 한 눈에 들어오며 옛 영화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이때 그는 김옥균의 힘을 빌려 그 집을 살지 말지 영국 쪽에서 최종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내놓지 말 것을 집주인에게 다짐받았다고 한다. 영국보다 한발 앞서 미국의 초대공사 푸트는 덕수궁 내 125간의 기와집과 대지 300간을 민계호로부터, 145간의 기와집과 150간의 대지를 민영교라는 민씨 집안 사람으로 부터 1만량에 사들였다.

민씨 일족은 명성황후의 인척으로 세도를 부리고 있어 이러한 대궐내 건축물의 재산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미국영사관 초기 사진에는 실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한옥저택의 줄행랑채, 사랑채들이 겹겹이 들어선 풍경이 보인다. 초가집이 그 앞에 같이 있다.

영국영사관은 한옥을 사들인 뒤 곧바로 이를 헐고 영국식 건물을 신축한 것과는 달리 미국은 1974년 현재의 새 한옥관저를 지을 때까지 1884년에 사들인 기와집을 대사관과 거처로 사용했다. 그러나 1920년대의 이 거리를 기억하는 원일한(언더우드) 연세대 이사의 말로는 사진의 웅장한 바깥 사랑채는 그때 이미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정동일대에서 미 대사관저의 고풍스런 기와집과 담장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한국적이며 동시에 지나다니는 이를 통제하는 위압적 모습으로 가장 미국적인 정동풍경의 핵심을 이룬다. 1974년 조자용씨의 설계로 한옥 관저를 지을 때는 스님들이 와서 제를 지내주었다. 안마당에는 포석정을 본뜬 물길이 있다.

그런가 하면 풍수지리하는 사람의 말로는 정동언덕이 용의 머리 부분이라는데 그래서 각종 고사를 지낼 때 돼지머리를 놓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는 알 수 없다.

***공사관 거리의 풍경**

덕수궁과 잇대어 있던 정동언덕의 러시아 공사관은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온 1896-1897년간 이미 건축되어 있었으니까 독립문과 함께 최초의 서양건축물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탑의 설명문에는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해 1890년 지어졌다고 하니 알 수 없다. 탑 말고 본관 건물은 6.25때 파괴되었는데 덕수궁과 연결되는 비밀 지하 통로가 탑의 동북쪽으로 나있었음이 후일 확인됐다.

옛 소련과 외교관계가 없어진 세월동안 정동에서 제일 높은 언덕 위의 이 하얀 탑은 마치 달리의 그림에 나오는 초현실적 존재같아 보였다. 탑 주변은 6.25이후 생겨난 민가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정동에 있는 학교학생들은 미술시간에 이 탑을 그림그리기도 하고 탑을 지나 광화문으로 가는 샛길을 지나기도 했다. 이 탑을 배경으로 정동언덕을 그린 유화 한점이 과천 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1990년 러시아는 한국과 재수교하면서 미 대사관저와 담이 붙어있는 이 옛 터에 돌아오려다 실패, 옛 배재고 자리에 거대한 최신식 빌딩을 짓고 입주했다. 의도하던 자리는 얻지 못했지만 이 빌딩에서는 라이벌 간인 미 대사관저가 다 들여다보일 것도 같아 양국간의 보이지 않는 눈길이 느껴진다.

경향신문에 있을 때 러시아 사람들, 군인들이 이 탑을 보러와 열심히 사진 찍던 것을 보았다. 그 터 아래쪽에 최근 캐나다 대사관이 신축중이다. 정동은 여전히 외국 대사관들이 선호하는 지역인 것이 틀림없다. 이따금 좋은 자동차가 줄줄이 지나는 것도 보이고 미 대사관저가 있는 덕수궁 뒷길은 심하게 통제되고 있어 지나다니려면 감시받는다.

영국공사관 붉은 벽돌건물은 극동의 영국 외교대표부 건축을 총괄하던 상해사무소에서 와서 중국인 노동자 쿨리들을 동원해 1900년 완공됐다. 대사관저 거실에 준공년도가 새겨진 건물 초석을 떼어다 모셔놓고 주한 영국대사가 자기네 대사관이‘거의 한국최초의 서양건물‘ 이라며 자랑삼아 소개하곤 했었다. 이 건물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인 고종에 의해 1910년 덕수궁 석조전도 영국인 설계로 짓게 되었다. 또 다른 영국식 건축 성공회건물은 1920년대에 영국 공사관 바로 옆에 붙어 지어졌다.

이어서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의 외교대표부가 들어왔다. 프랑스공사관은 처음엔 정동에 있다가 1926년 고종의 사냥터 정자가 있던 충정로로 이사해 나갔다. 독일공사관은 옛 대법원건물이 있던 언덕, 지금의 시립미술관 자리에 있었다. 벨기에 공사관은 1970년대까지도 회현동에 있었다.

언더우드, 마펫,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도 정동에 자리 잡으면서 정동은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라고 불리게 되었다. 1890년 이 지역의 외국인은 모두 80명에 이르렀다.

외국 공사관이나 클럽은 그때 국제 사교계에서 중요한 라이프 스타일이던 테니스 코트나 당구장을 필수적으로 운영했다. 테니스 하는 서양인들을 보고 조선 양반이 ‘하인 시켜서 하지 않고 왜 손수 공을 주우러 다니지?’ 하고 평했다는 매혹적인 이야기는 ‘이때 지어낸 말일 수 있다’고 영국대사관 소사에는 기록하고 있다.

이들 영사관에서 열리는 테니스운동, 정원에서의 파티, 허리를 잘룩 죄인 옷차림의 서양여성들 모습 등은 겉보기로도 그때 한국인들에게 이국적인 정서를 불러 일으켰음이 틀림없다.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처제였던 손탁이란 여성이 바로 이 공사관 맞은편에 서양건축 게스트 하우스를 내고 사교장을 만들어 커피 등을 팔았다. 이준이 헤이그로 떠나기 전 여기서 헐버트와 만나 상의하는 장면이 그의 평전에 나온다. 이 건물은 이후 이화학당이 되었는데 1974년 화재로 타버리고 2005년 그 자리에 이화 1백주년 기념관이 섰다.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지녔던 이화학교의 예스러움을 보여주는 오래된 한식 교문이 백주년 건물앞 은행나무 고목 옆에 표석처럼 서있다. 근대적 건물만 들어선 정동일대에서 단 두 집, 영국대사관 기와대문과 함께 한식 대문으로 남은 유물이다.

이 거리에는 또 5백년 넘은 회화나무가 두 그루 우람한 자태로 서있어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돌담 또한 정동을 특징적으로 만들어 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덕수궁의 사괴석 돌담과 미 대사관저의 콩담, 이화여고의 흙돌담은(새로 쌓아 시멘트벽이 반 넘어 되었지만) 오래전부터 이 지역의 징표였다. 그중 덕수궁 뒷길 미 대사관저와 영국대사관 뒷문이 마주보는 구간 양쪽의 돌담길이 가장 아름답고 모양도 원형 그대로 남았다. 영국대사관 입구와 성공회를 싸고 있던 돌담은 1979년대 들어 없어졌다.

최악의 훼손은 1913년, 지어진 지 15년 만에 헐린 원구단이다. 이곳이 축소되지 않고 그대로 덕수궁과 연결돼 남아있었다면, 이 일대를 포함해 광화문 경복궁까지는 동서양 건축물이 어울린 정말로 아름다운 건축물의 경관지대가 됐을 것이고 조선왕조의 품격도 격상되었을 것이다. 지금 원구단은 거대한 빌딩들로 포위된 채 조선호텔의 뒤뜰 정도로 남았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